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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7. 2022

당신은 어제에 사는가? 내일에 사는가?

오늘을 제대로 살아내지도 못하는 우매한 자들에게.

互鄕難與言, 童子見, 門人惑, 子曰: “人潔己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
호향(互鄕) 사람과는 더불어 말하기 어려웠는데, 호향(互鄕)의 童子가 찾아와 공자를 뵈니, 문인들이 의혹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몸을 가다듬어 깨끗이 하고서 찾아 나오거든 그 몸을 깨끗이 한 것을 허여 할 뿐이요, 지난날의 잘잘못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찾아옴을 허여 할 뿐이요, 물러간 뒤에 잘못하는 것을 허여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심하게 할 것이 있겠는가?”

이 장은 <논어>의 원문에 착간(錯簡;글의 순서가 교착되는 것)이 있는데, 어차피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서지학(書誌學)이나 고문을 전공으로 공부하는 이들이 아니니, 착간(錯簡)을 교정한 어순으로 다시 원문을 재배치하고 매끄럽게 해석하였으니 원문이, 자신이 읽고 있는 다른 <논어> 어순이 바뀐 것을 참고하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참고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정확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주자의 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互鄕은 鄕의 이름이다. 그 사람은 선하지 못한 것에 익숙하여 더불어 선을 말하기 어려웠다. 惑은 공자께서 그를 만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음을 의심한 것이다.

 

원문에서는 설명하지 않은 ‘호향(互鄕) 사람과는 더불어 말하기 어려웠던 이유’에 대해 해설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 그쪽 사람들이 질이 안 좋다는 소문이 있어 교류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는데 그곳에서 자신을 찾아온 동자(童子)를 만나주었다는 것 때문에 제자들이 스승의 행동을 마땅치 않게 의심했다는 것이다.


굳이 찝어서 찾아온 대상을 '동자(童子)'라고 표현한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대상을 지칭한 것은 그가 무엇을 위해 온 것인지를 명확히 하고자 함이다. 그는 공자와 대화를 나누러 온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배움을 청하러 온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그가 배우고자 그에 상응하는 자세를 갖추고 자신을 찾아왔는데, 그것 외의 다른 어떤 것을 봐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반문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자가 이 부분에 대해 해설한 주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이 몸을 깨끗하게 하고 오는 것을 단지 그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있음을 허락할 뿐이요 진실로 그가 지난날 선악을 한 바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나아가 와서 뵙는 것을 허락할 뿐이지 그가 이미 물러가서 불선(不善)을 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가 기왕에 한 것을 추론하지 않고 그가 장래에 할 것을 미리 예측하지 않아 이 마음으로 이르면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혹 몇몇 해설서에서 어쭙잖게 개과천선(改過遷善)을 언급하며, 이미 과거에 잘못했던 이가 새 출발을 하겠다고 하는데 왜 전과자를 만나냐는 식의 의혹의 시선을 보낸 것이라고 소설을 쓰는 식으로 해석한 이들이 있는데, 제발 있는 그대로 좀 보자. 있는 그대로도 보지 못하면서 소설까지 쓰는 건 너무 많이 나가는 것이다.


원문에는 그 마을이 그렇다고 되어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동자(童子)가 전과자라거나 나쁜 짓을 했던 자라는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깨끗이 하고 왔다는 것은 이전에 지저분한 과거를 정리하고 새 출발 하겠다고 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배움을 청하는 자로서 예의를 갖추고 찾아왔음을 설명한 것이다.

기가 막힌 <논어> 해설서를 냈다며 거들먹거리는 자는, 동자(童子)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춰 너무 어린아이라서 그 말도 안 통하는 어린아이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에 제자들이 어이없어했다는 오역을 아주 자랑스럽게 자신의 책에 담고 있었다.


이런 이들은 대개 스스로 고문을 읽을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예 없어 선대 학자들의 주석을 통해 검증하는 것은 고사하고 원문을 있는 그대로도 해석할 수 없는 수준이라 이런 코미디 소설을 쓰는 것이다. 이런 땔감으로도 못 쓸 것들을 책이라고 출간한 자들이 있어 내가 무서워 이 <논어> 시리즈를 출간하자는 제의를 매주 거절하는 것이다.


그런 오역을 내놓고 불안해서 잠이 오긴 하나? 정말로 자신이 해석한 게 맞다고 착각하고 있나? 최근 이 시리즈를 매일 함께 공부하는 학도들 중에서 허접한 책을 보다가 덮고서 다시 찾는다고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공부는 그래서 여러 가지 책을 보며 비교하고 자신이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공자는 지금 자신을 찾아와 배움을 청하는 그 사람의 공손함을 보고 그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지, 그 이전에 그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설사 그랬다 손 치더라도 그것에 대해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그가 나쁜 짓을 할 것에 대해 그래도 된다고 허락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이렇게 듣고 보면 너무도 당연한 행동을 한 것 같은데, 왜 공자의 문인들은 스승에게 마뜩지 못한 시선을 보냈던 것일까?

 

'호향'이라는 마을의 사람들이 도둑들로 가득 찬 안 좋은 사람들이라는 소문이 도는 곳이라 있는 그대로 믿더라도 그곳의 사람들이 실제로 도둑이고 나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배우겠다고 예의를 갖추어 스승을 찾아왔는데, ‘너희는 이전에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한 자들이니 내가 가르침을 줄 생각이 없다.’라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실제로 그가 나쁜 짓을 했다고 볼 근거나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미 확인할 수 있는 과거의 일도 그러할진대 앞으로 그가 나쁜 짓을 할 사람이라거나 그가 안 좋은 사람들 무리에 속해 있으니 언제고 나쁜 짓을 할 것이라고 선을 긋는 것도 어떤 논리적인 근거도 없는 편견이고 선입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문인들은 왜 그렇게 스승을 마뜩잖은 얼굴로 보았을까?

예상컨대 체면이었을 것이다. ‘우리 스승님은 춘추전국시대 전체의 위정자들도 이름만 대면 아실만한 분인데 안 좋은 소문이 흉흉한 그런 자와 상대를 해주다니...’라는 마음이 동했던 것이라 짐작해본다.


그들은 고만한 그릇밖에 안 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이라는 것들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그래서 정자(程子)는 이 장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인(聖人)은 남을 대함에 넓음이 이와 같다.”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허여 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와서 예를 갖춰 배움을 청했고 그 배움에 응했을 뿐이다. 그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 외의 것들을 만들어내고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훌륭하다며 스승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냈던 그 제자들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면 어이가 없다고 하면 당신들이 그렇지 않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의 현재는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자들끼리 반목이 심해져만 가고 있다. 원래 그러한 행태는 정치인들의 몫이었고, 나라 같지 않은 저 동남아의 미개한 타이완 같은 곳이 그러했었다.


내가 대놓고 두 집단의 이들을 예시하며 혹독한 비평의 칼을 들이대는 것은 그들이 모든 생활에서 사람을 정치색을 가지고 구분하는 것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람 된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람 된 도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을 때, 지하철역 앞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선거운동원으로 하는 일들은 돈을 받고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들 사이에는 감정이 개입된다. 자신이 지지하고 밀고 있는 국회의원으로 빙의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촉즉발 싸움의 직전까지 가거나 실제로 개싸움을 시전해보이기도 한다.

주유소간의 싸움도 만만치 않다. 목이 좋은 자리를 선정하는 것에서부터 자신들의 주유소로 사람들을 끌어오기 위한 싸움은 주유소 사장을 시작으로 하여 그곳에서 총을 잡는 알바들 사이에서도 미묘한 전운이 감돌기도 한다. 맛집 골목을 가면 그 전쟁은 길가에 뛰어나오기까지 한다. 모두 똑같은 조개구이집인 것 같은데 길가까지 나온 호객꾼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홍보하는 가게가 원조이며 더 많이 주며 제대로 된 가게임을 강조한다. 그러다가 차가 다른 쪽으로 갈 것 같거나 다른 호객꾼이 끼어들며 그쪽으로 사람들이 간다 싶으면 욱하는 감정에 또 언제든지 날아 차기라도 할 기세로 씩씩거리며 싸울 태세를 잡는다.

 

다양한 예를 들었지만, 하나같이 공통점이 하나 엿보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익을 위해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른다. 우리 편은 좋은 편이고 남의 편은 나쁜 편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이게 누가 하는 짓이던가? 맞다. 아이들이 하는 짓이다.


아이들이라고 하니 방금 위에서 읽은 <논어> 저자께서 삽질했던 그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가? 맞다. 그 동자(童子). 이 장에서 ‘동자(童子)’라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이유가 여기 숨어있다. 이것이 이 장에 숨겨진 고급자용 행간이다.


아까 왜 원문에서 ‘동자(童子)’라는 대상을 명확하게 했는지 중급자의 눈높이에 맞게 해설해준 내용은 배우는 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했는데, 고급자의 이해도로 레벨이 올라가면 이 의미는, 어차피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스승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제자들을 후려쳤던 스승의 의도를 배우는 자들이 알아먹으라는 <논어> 편집자의 숨겨진 펀치에 다름 아닌 표현이다.


성인도 아니고 이제 배워나가려는 동자(童子)가 와서 예를 갖추고 배움을 청하고 있는데 나잇살이나 먹고 공자의 문하에서 공부한다는 것들이 그따위 행태로 감히 스승에게 의심이 눈초리로 마뜩잖음을 표현한 것이다.

당신이 처음 읽었을 때 이런 부분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당신의 공부가 짧아서이고, 당신이 이제까지 읽었던 그 수많은 <논어> 해설서에 이런 행간을 읽어주는 이가 없었던 것은 그들이 당신과 그다지 수준 차이가 없는 자들이라 그렇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서고 한 칸을 가득 채울 정도의 <논어> 임에도 제대로 읽는 자가 얼마 없다고 내가 누차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결국 그 자기 수준의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아이들이나 하는 유치한 짓을 했던 이유가 고작 이익 때문이라니,라고 생각하며 지금 웃고 있나? 앞서 예시로 들었던 그 생활현장의 어디에도 당신은 있고, 당신의 가족이 있다.


당신은 지금 객관적으로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평온하게 글을 읽으며 어떻게 그런 유치한 짓을 하냐고 하지만, 정작 당신의 생활 속에서 그런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개의 편 가르기 싸움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유치하다고 말리던 자들이 말려들면 그 유치함은 끝장을 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상대편이라고 하는 쪽에서 예의를 갖추고 아주 점잖게 배움을 청하고 이야기를 청한다면 당신이라면 어떻게 응대하는가? 그것을 가지고 고민할 일이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당신의 유치함이 아직 덜 성장한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뭘 고민할 것이 있는가? 있는 그대로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청하는 가르침이나 의견을 건네주면 그뿐인 것이다.


당신이 주저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깔려 있다. 왜 저쪽 사람이 나에게 찾아오지? 무슨 꿍꿍이지? 뭘 어떻게 하려는 음모나 함정 같은 게 있나? 어떻게 하려고 나에게 이러는 거지? 등등의 아주 조잡하고 저급하며 당신의 그 얄팍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정도의 공상 수준의 것들이다.

 

이전에 공부하기도 했지만, 당신이 당신의 기준에 맞게 당당하고 떳떳하다면 있는 그대로 예의를 갖춰 배움을 청하는 이를 못 만날 이유도 없고,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그 사람을 굳이 삐딱하게 볼 이유도 없고, 당신이 무당도 아닌데 그 사람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를 예상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당신이 그 사람을 허여 할 위치에 있지도 않으니 어쭙잖게 평가할 것도 아니고 그저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만 할 뿐이다. 그것이 뭐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인가 말이다. 공자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대선은 원래 정치판의 꽃이다. 그래서 국민들을 편 가르기로 만든다고 한다. 민주주의의 꽃인 투표가 원래 편을 가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를 만들고 이제까지 이끌고 왔던 선현들이 땅속에서 울 것이다.


그러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누가 가장 적합한 지를 생각하고 그에게 나를 대신할 권리를 주는 것이 투표이다. 반대편에 나온 자나 그를 지지하는 자를 욕하고 비난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민주주의의 과정상 투표 직전까지도 건전한 토론을 통해 상대방을 끊임없이 설득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내가 확인하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카더라’를 듣고서 편견을 만들고, 그쪽의 이야기라면 들어볼 필요도 없다며 폄하하고, 우리 편이 하는 말만 옳고 저쪽은 존재 자체가 악당이라고 여기는 것은 요즘은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는다. 이미 콘텐츠 스토리텔링계에서도 악당으로 등장하는 이들에게도 그럴만한 사연이 없으면 이야기가 먹히지 않는다고 하는 세상이란 말이다.

 

모르면 알려고 하고, 알지 못하면 함부로 단정 짓지 말 것이며, 늘 삼가는 것.


쉬워 보이지만 공자가 평생에 걸쳐 솔선수범하여 보여주고 가르쳐줬어도 저리 눈을 흘기는 것들 투성이었다.


당신이 매일 공부하며 되새기고 또 되새겨도 몸에 배이게 하기 어려운 수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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