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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an 28. 2022

간절히 원한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입으로 원한다면서 정작 그리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仁이 멀리 있는가? 내가 仁을 하고자 하면 仁이 당장 이르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오랜만에 仁이 다시 등장했다. 다소 선문답과 같은 이 장의 공자의 언급은 다른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의미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장에서는 ‘술이(述而)편’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의 맥락에서 다시 한번 막연해 보이는 仁에 대해서 파악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혹시 착각할까 봐 밝혀두지만, 내가 부러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장의 가르침이 그러한 환기의 역할을 하고 있음이다. 어떤 근거에서 그리 이야기하느냐고?


이 짧은 한 마디의 가르침에 ‘仁’이라는 글자가 총 몇 번 들어갔는가? 물론 세 가지가 서로 다른 의미의 뜻을 가질 수 없는 仁이지만,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프리즘 같은 구조로 仁을 자유자재로 이 짧은 한 마디에 넣어 알아들을 수 있는 자만이 깨달음을 얻으라고 또 화두처럼 던져주셨다.

이 짧은 한 마디를, 仁이 들어간 글자마다 세 층위로 나누어 분석을 할 텐데, 그전에 배우는 자들에게 확인을 한 가지만 하고 시작하자. 이 문장에서의 눈깔자는 무엇인가? ‘눈깔자’가 뭐냐고 황당해한다면 8개월간의 <논어> 공부를 헛 한 것인지 다시 첫 장에서부터 다시 달릴 것을 권한다.


혼자서 씨익 웃으면서, ‘이미 앞에서 仁을 그렇게 강조하셔놓고서 눈깔자를 물으시다니’라고 착각한 사람은 ‘술이(述而)편’부터 다시 필사하며 외우는 것으로 분량을 줄여주마.


이 장의 눈깔자는 중급자들의 눈에만 보이는 글자이다.(정답은 후술하기로 한다. 정답이 나오기 전까지 눈깔자를 알아차린다면 이제까지 아침 공부를 헛한 것은 아님에 칭찬한다.)

 

먼저 첫 번째 화두는, ‘仁이 멀리 있는가?’라고 묻는다. 물론 질문이 아니다. 왜 멀리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꾸짖는 것이다. 단순히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이라며 근본으로 돌아가라고 다시 첫 장부터 공부하라고 죽비를 내려치는 것이다.


멀리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이해를 못 하고 있는 이들이다. 멀리 있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이 장이 단순하고 짧기만 한 간단한 내용이 아님을 시사한다. 멀리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것을 멀리 두고 온 것이다. 자신에게는 당연히 없다. 그것을 현대어로 환치하면 ‘어렵다’ 혹은 ‘어렵게 여기다’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 수중에 있으니 어려울 것이 없다. 언제든 꺼내 쓰면 된다.

내게 없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멀리 있다고 여기는 것은 실제로 내가 그것을 찾으러 가려면 한참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논어>를 제법 봤다고 하는 이들조차도 감이 안 잡힌다는 바로 그 ‘仁’이다.


그래서 두 번째 화두에서는 ‘내가 仁을 하고자 하면’이라고 조건을 단다. 왜 한 문장임에도 조건절로 나눴는지 눈치채기 바란다. ‘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것이 아니며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를 강조함과 동시에 이 문장에서 눈깔짜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맞다. 이 문장의 ‘欲’이라는 자가 바로 눈깔자이다.


왜 개념어가 아닌 이 간단한 글자가 뜬금없이 눈깔자가 되었을까? 해답의 실마리는 앞에서 내려치던 죽비와 그에 대한 해답으로 던져주기 위함이라는 의미에 담겨 있다. 공자는 결코 해답이 없는 것을 머리 안 좋은 제자에게 무조건 추궁하지 않는다. 예컨대, 뜬금없이 대명사를 쓰며 ‘그걸 정말 몰라?’하면서 알려주지 않고 사라지는 얄미운 짓을 하는 얄팍한 스승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누차 강조한 바와 같이 공자는 모든 것을 오픈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고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 것뿐이다. ‘欲’은 ‘하고 싶어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능동성을 대표하는 영어의 ‘WANT’에 해당하는 동사이다. 이것도 머리 나쁜 이들이 알아듣지 못할까 봐 앞에 ‘내가(我)’라는 것을 넣어주었다.


어떤 언어에서도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그 주어가 자신일 경우에는 자신이 그것을 정말로 원할 경우를 말한다. ‘정말로 원한다면’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화두로 ‘仁이 당장 이를 것이다.’라고 설명한 것이다. 당장 이르른다는 것은 멀리 있던 것이 요술처럼 짠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그 사실은 안다. 그렇다면 당장 이른다는 것은 한 가지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몰랐을 뿐이라는 설명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이 세 가지 화두는 한 가지 사실로 귀결된다.


“너만 모르지. 원래 니 안에 있는 걸 없다고 하고 모른다고 하지? 결국 니가 원하지 않으니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니가 원하면 그 안에 있다.”

 

아! 이 많은 이야기를 저 짧은 한 마디의 말에 담아내기도 어려웠을 텐데, 그걸 또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이들을 위한 안배로 남겨둘 정도의 여유를 공자의 어법을 보여준다.

일단 여기에서 주자가 이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짝 살펴보도록 하자.

 

仁이란 마음의 德이니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놓아두고 찾지 않으므로 멀다고 여기는 자가 있으나, 돌이켜 찾는다면 곧 여기 있는 것이니, 어찌 멀리 있겠는가.

 

앞서 설명한 것을 주자는 아주 명확하게 이해하고 배우는 자들을 위해 해설하고 있다. 어려운 내용일 것도 없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새로운 개념어가 하나 더 나왔다. 바로 덕(德)이 그것이다. 仁을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여기서는 ‘마음의 德’이라고 하였다. 앞서 우리는 仁이 道를 이루는 바탕이자, 본질이라고 공부한 바 있다.


그런데, 그 仁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德이라 하였다. 德을 이루는데 仁이 필요한 요소가 된다고 설명함에 다름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다는 설명은 이 주석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이, ‘사람이 본래 갖춰야만 할 도리’라는 개념인 ‘善’으로 환치되었던 것을 앞서 술이(述而)편을 거쳐오며 공부한 바 있다. 본래 인간은 선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니 그 떳떳함을 ‘항심(恒心)’이라는 이름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배웠단 말이다.

 

‘欲’이라는 글자가 눈깔자가 된 고급자용 프리즘으로 보이는 행간을 살펴보자. 앞서 중급자용 설명에서 말했었다. 그것을 ‘하고자 한다면’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넣은 것이라고. 고급자의 프리즘에서 보면 그것은 역설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역시 꾸짖는 것이다.

앞서 첫 화두에서 그것을 왜 멀리 있다고 여기느냐고 때렸던 것이 출발점에도 설 생각을 하지도 않으면서 달리기는 너무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게으른 학도를 꾸짖은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대강 알면서도 그저 어렵고 힘들다고 ‘핑계’ 대면서 그것을 행하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치는 죽비가 ‘欲’이라는 글자에는 담겨 있다.


너희가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멀리 있다는 지적이다. 단순히 원하면 바로 얻을 수 있다는 것과 있어도 너희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멀리 있다고 느끼는 것이라는 표현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굉장히 차이가 큰 말이다.

 

이것은 존재론적 실천을 마치 마법과 같이 구사하는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원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지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누구나 선이라는 사람 된 도리가 있고, 그것을 타고나지만 그것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존재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원래부터 나에게 없는 것이고 그걸 갖추려면 너무나 힘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있는 줄 모르는 것보다 한층 더 사악한 것이다.


내가 그것을 행하는 순간, 그것은 실재한다. 마치 마법과도 같이 돈이 없다고 여기면 안주머니의 지갑에 가득 있는 돈도 없어져버리고, 내가 그 돈으로 불쌍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돈이 나오는 것과 같은 마법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정자(伊川)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仁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있어서 仁을 하고자 하면 이른다. 어찌 멂이 있겠는가?”

 

같은 말인데, 원문과 얼마나 다른지 알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면 일반인들은 ‘아!’하면서 단순히 알아듣는다. 이 설명은 프리즘으로 봐야 할 다각적인 구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매거진에 썼던 여러 가지 일들을 읽은 이들도 있겠으나, 나는 요즘에도 매일같이 세상을 좀먹는 것들과 마주친다. 다른 나라에 와 있지만 언어와 문화와 생김새만 다를 뿐 그것들을 하는 행동이 똑같다. 그나마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 때문이거나 자신이 일이 많아지는 것이 귀찮아서 그러는 말단 공무원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들의 관리자라고 하는 이들, 그들의 상관이라고 하는 이들, 그들은 자신이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잘못된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매번 보고 매번 경험하지만 너무 신기하고 답답하고 어이가 없었다.

 

우리는 도덕 시간(그나마 정규과정에서 없어졌다고 들었다.)에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왜 배운 대로 행하지 않을까? 건설업자에게 향응을 제공받고 검사의 신분으로 공생하고자 하는 무리들과 어울려 여자들을 불러 노래를 부르며 차마 자기 자식이 보면 평생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지저분한 짓을 한 이가 자신의 얼굴이 또렷이 찍힌 영상이 나왔음에도 자신이 아니라고 우기는 일을 우리는 보고 들었다.


그가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몰래 해외로 나가려다가 공항에서 붙잡혀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그나마 국민적인 여론에 밀려서이긴 하지만 수년간의 지겹고도 뻔한 진실게임을 통해 그를 처벌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들은 시간을 끌고 자신들이 공부한 법적인 내용을 가지고 이리저리 말을 끼워 맞추고 그 틈새를 벌리고 벌려 그곳에 머리를 끼워 넣고 점차 찢어 벌리며 몸통을 통과해서는 기어코 그 법망마저 찢어버리며 빠져나왔다.


뇌물을 줬다는 사람이 검찰에 의해 회유가 되었다는 둥 뇌물을 줬다는 자의 증언이 신뢰할 수 없다면서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취지도 아닌, 검찰에서 그 증인들이 정말로 명확하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지를 검찰이 제대로 제시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고법으로 내려보냈다. 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을 때 그들은 법을 그리 적용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법비들에 의해 돌아가는 나라가 된 지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일제 식민지 시대 때부터 법 공부를 한 친일파 때부터 공고히 다져온 그들만의 리그가 있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벌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법이며 어찌 그들이 법을 집행하며 정의로운 자들이라며 판사님과 검사님이라는 ‘님’이라는 호칭을 참람되이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처음부터 영상이 다 나왔고 너무도 화질이 뚜렷해서 경찰과 검찰에서도 차마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데만 해도 질질 시간을 끌고 또 끌며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했고, 법비들은 차관까지 하려다가 미끄러지고 얼굴에 똥칠한 선배의 체면은 어쩔 수 없더라도 서류상으로 빨간 줄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며 이 어처구니없는 블랙코미디를 찍어냈다.

사실관계가 명확함에도 법비들의 그 강력한 힘으로 찍어 눌러 과거사위원회까지 끌고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개탄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음에도 9년이나 끌고 심지어 모욕을 준 이들에게 반격까지 가해, 불법적으로 출국금지를 했다며 역공까지 펴서 판세를 뒤집겠단다.


자기 돈 하나도 안 들이고 돈을 받아서 뒷구녕으로 상장되지도 않은 주식을 내부 거래하여 수백 배의 이익을 내도 대가성이 없네, 지음(知音)이 어떻네 하고 넘어가고, 버젓이 건설업자와 형 동생 하면서 궁궐 같은 별장에 들어가서 지저분한 짓을 했다고 다 찍힌 동영상이 있어도 그게 그 사람인지 어떻게 아냐며 법비들을 그것을 눈 가리고 아웅했다.


부부간에도 원치 않은 성관계는 강간에 해당한다는 판례가 나온 지 오래인 판에, 아무리 여성의 진실성이 그렇다손치더라도 영상에 이미 그 불편한 얼굴들이 다 드러났는데, 특수강간으로 고소한 사실에 대해 중앙지검의 강력부에서 버젓이 무혐의라며 면죄부를 주며 기소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덕 시간에 배운 내용을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라면을 훔친 70대 할아버지에게 징역 8개월형 판결

배가 고파 가게에 들어가 몰래 라면을 훔친 자에게 돈이 없어 변호사를 사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지 않는다며 ‘법대로’ 기소하고 실형을 버젓이 ‘법에서 배운 대로’ 판결하는 그들에게 당신은 당신을 대신해서 나라를 이끌어달라고 표를 주고 싶은가?


그들이 내세운 대통령이 아니라 브레이크를 거는 사람이 청와대에 5년이나 있었는데도 이 정도로 참람된 짓을 서슴지 않는 법비들인데 그들이 내세운 꼭두각시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어찌 될지 정말로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당신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천천히 끓어오르는 물속에 들어앉아 있는 개구리일 수밖에 없다. 당신이 놀라서 뛰어나오게 뜨거운 물에 당신을 담글 어리석은 법비는 없다. 법비들이 이제까지 저렇게 버젓이 제멋대로 횡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잘못이 제대로 처벌받지 못한 데 있다.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평생을 감옥에서 썩고 그들이 해쳐먹은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자기 처자식이나 형제에게 간 돈까지 몇 배를 붙여 다 빼앗기는 형벌을 받게 되면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호형호제하며 이익을 나누겠다고 한 것들도 다시는 그런 짓을 꿈꾸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은가?

그들에게 붙어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받아먹겠다고 붙은 똥파리에서부터 그들을 부러워하는 그 주변의 찌질한 이들이 모두 당신의 친구이고, 가족이며, 바로 당신 아닌가?

그것이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도덕 시간에 배웠음에도 당신은 왜 그들을 부러워하는가?

그것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증거, 아닌가?


이 장에서 공자는 아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너희들이 바꾸고자 한다면 바꿀 수 있다. 너희가 바꾸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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