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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03. 2022

군주의 잘못을 드러내진 못해도 변명하진 않는다.

편당(偏黨)은 결국 이익을 같이 도모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陳司敗問: “昭公知禮乎?” 孔子曰: “知禮.” 孔子退, 揖巫馬期而進之, 曰: “吾聞君子不黨, 君子亦黨乎? 君取於吳, 爲同姓, 謂之吳孟子. 君而知禮, 孰不知禮?” 巫馬期以告, 子曰: “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陳나라 사패(司敗)가 “소공(昭公)이 禮를 알았습니까?”하고 묻자, 공자께서 “禮를 아셨다.”하고 대답하셨다. 공자께서 물러가시자, 무마기(巫馬期)에게 읍하고 나와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군자는 편당(偏黨)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군자도 편당(偏黨)을 하는가? 임금께서는 吳나라에서 장가드셨으니 같은 성이 된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吳孟子라고 불렀으니, 임금께서 예를 알았다면 누가 예를 알지 못하겠는가?” 巫馬期가 이것을 아뢰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다행이다. 만약 잘못이 있으면 남들이 반드시 아는구나.”

이 장은 이 대화가 이루어진 상황과 인물들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필수적으로 필요한 장이다. 먼저 이 대화가 이루어진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자.


노애공(魯哀公) 3년(B.C. 492년), 환갑을 맞은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여러 나라를 주유하다가, 진(陳)나라 사성(司城) 정자(貞子)의 집에 몸을 기탁하고 있었다.

 

진의 군주는 공자를 접견하고, 숙신씨(肅愼氏;고대 만주지방에 살았던 퉁그스계 민족)의 화살에 대한 일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공자는 진정(陳庭)의 화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진후(陳侯)의 정원에 적의 화살을 맞은 새매가 죽어 있는 것을 숙신씨의 화살이라고 설명하는데, 배경이 되는 역사를 설명하여, 그 박학함에 조정의 문무백관에게 갈채를 받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직후, 진나라의 사구(司寇; 옛날의 초나라의 관직명으로 주대의 육경(六卿)의 하나로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벼슬)가 공자의 거처로 찾아왔다. 당시, 공자는 제자 무마시(巫馬施)와 객실에서 예(禮)에 관하여 토론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손님이 방문하자 제자 무마시는 안채로 자리를 피했다.

 

진사구는 스승과 제자들의 진나라에서 생활과 학습의 전황에 대하여 간단한 인사말을 나눈 후에, 공자에게 돌직구를 던진다.

 

“노소공은 예를 아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도발이었다. 그가 찾아온 본래의 목적이자 그가 작정하고 공자와 맞짱을 뜨겠다고 온 이유에 다름 아니었다. 왜냐하면 노소공은 일단 공자가 사는 나라의 군주였고, 질문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부정을 깔고서 도발한 것이다. 고수들의 대화에서 공자가 그의 의도를 읽지 못했을 리 없다. 공자는 당황하지 않고, 노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옹호해야 할 국가의 존엄한 군주에 대해 외교적인 각도에서 정중하게 대답한다.

 

“노소공은 예를 아십니다.”

 

진사구는 감히 그다음에 공자에게 직접적으로 논쟁을 제기하지 않는다. 고수가 고수를 대우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가 온 목적이 분명할진대 그가 그대로 돌직구를 날리고서 물러날 리 없었다. 공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진사구는 자리를 잠시 피해있던 무마시를 자기의 면전으로 불러서 공손히 읍하면서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군자는 남의 과실에 대하여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공자께서는 노나라의 가장 저명한 군자이신데 역성을 드시는군요. 노나라 군주가 오나라에서 부인을 맞이하여, 동성인 것을 감추고 ‘오맹자’라 부르지 않았습니까? 노나라 군주가 그렇게 했음에도 그것을 두고 만약에 예를 안다고 한다면, 누군들 예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돌아온 공자와 같이 손님을 배웅한 무마시는 진사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전부 스승에게 고했다. 그러자 공자는 불쾌해하지 않으면 제자에게 이렇게 답해준다.

 

“나 공구(孔丘)는 정말로 행운이로구나, 가령 잘못을 해도, 남들이 반드시 나에게 알게 해 주는구나!”

 

스승의 이 황당한 태도에 무마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묻는다.

 

“선생님, 진나라 사구는 명백하게 소공이 예를 모르고, 또 선생님께서 역성을 들었다고 풍자하듯 찔러 지적까지 하였는데, 도리어 선생님은 행운이라 하시고 기뻐하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러자 공자가 엄숙하게 말했다.

 

“누구라도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나에게는 친구인 것이다. 너희들은 항상 ‘안회는 자기의 잘못에 대해 남의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로는 자기의 잘못에 대해 남의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라며 칭찬하였는데, 너희의 스승인 나는 더욱더 내 잘못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이에 무마시가 감탄하여 말했다.

 

“선생님은 정말로 학식과 덕성과 수양이 가장 높으신 성현이십니다!”


노나라의 소공(昭公)

이것이 이 장에 나오는 대화에 대한 전말이다.

부연하자면 위 대화에 등장하는 노나라의 소공(昭公)은 이름은 주(裯) 또는 조(稠), 소(袑)라 하였는데, 양공(襄公)의 서자(庶子)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놀이를 좋아하는 것이 지나쳤다고 한다. 양공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세 번이나 자최(齊衰)를 갈아입었다.


5년 중군(中軍)을 없앴고, 노나라의 공족(公族) 삼환(三桓)과 공실(公室)을 사분한 인물이다. 후에, 삼환이 함께 공격하자 제(齊) 나라로 달아나버렸고, 나중에는 진(晉)나라까지 옮겨갔다. 진나라가 건후(乾侯)에서 살게 했는데, 8년을 그곳에서 살다 죽었다. 총 32년 동안 재위한 군주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노소공은 예를 잘 아는 임금이라는 포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아내를 吳(오) 나라의 희(姬)씨로 맞아들이면서 그 허명이 무너져버린다. 왜냐하면 吳(오) 나라는 주나라의 선조인 태왕(太王)의 아들 태백(太伯)이 세운 나라로, 주나라 무왕의 동생 주공(文王, 姬昌)이 세운 노나라와 같은 성인 ‘희(姬)씨’였기 때문이다.


당시 주나라의 예법에는 엄격히 동성끼리의 혼인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부인으로 들인다는 것 자체가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소공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예를 어긴 것이 발각될까 두려워 아내를 ‘吳孟子(오맹자)’라고 칭하도록 한다. 본래, 임금 부인의 호칭은 출신국의 이름 뒤에 자신의 성을 덧붙여 쓰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희(吳姬)’라고 불렀어야 맞다.


그런데 동성임을 숨기기 위해 편법으로 바꿔 부른 것이다. 孟子(맹자)는 ‘장녀’라는 뜻인데 다른 기록에는 이 여자의 자(字)라는 설명도 보이긴 한다.

 

『좌전』 애공 12년조 기록에 따르면 그녀가 죽었을 때 노나라는 동성이라는 예를 어긴 창피함을 이유로 제후국들에 부고조차 보내지 않았다. <춘추>의 기록에는, 희(姬)성을 밝히지도 않았고, 소공의 부인임을 밝히지도 않았다.


장사를 지내고 행하는 반곡례(反哭禮)도 지내지 않았다. 당시 공자도 오맹자의 조상(弔喪)에는 참석하였으나 계강자(季康子)를 만나러 갔더니 권도 쓰지 않고 있어서 공자도 상복을 벗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에 설명에서 '무마시'라고 언급했던 제자가 위 원문에서는 ‘巫馬期(무마기)’라고 나오는데, 그는 성이 巫馬(무마)고, 이름이 시(施)이며, 자(字)가 기(期)였기 때문에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공자보다는 30살 아래였다고 전한다.

이제 상황을 모두 파악하였으니 고수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칼싸움에 대해서 논해보자.


진나라의 사패가 공자에게 작정하고 찾아와 돌직구를 던진 것은 그야말로 일도양단(一刀兩斷)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예에 대해 박식한 선생님이시라면 당신 나라의 군주가 예를 어긴 행동에 대해 어찌 생각하냐고 정공법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름은 나오지 않고 벼슬이름으로 대신 언급되고 있으나, <논어>에서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인물은 그가 상당한 수준의 은자(隱者)일 경우 그렇게 처리하곤 한다. 즉, 그가 상당한 수준의 고수였음을 의미한다. 이 돌직구는 정식한 정공법으로 보이지만 단 한 번의 깔끔한 베기로 여러 가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고수만의 공격법을 보여준다.

그의 논리는 명쾌하다.

당신은 당신 나라 군주가 예가 아닌 행동을 했는데 왜 그 나라 백성이자 신하 된 자로서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면서 예에 대해 잘 안답시고 스승을 자처하는가, 라는 도발이다. 이것은 팩트를 근거로 노소공을 후려치는 것은 기본이고,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당신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비난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공격을 받은 공자가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데 ‘노소공은 예를 아셨다’라는 답을 한 것이다. 질문을 던진 진사구 입장에서는 잠시 주춤하게 된다. 공자의 의도를 읽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호흡을 가다듬는 것이다.


공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노타임으로 대답했을 때는 역시 의도가 있는 것이다. 앞서 상황에 대해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노소공은 이미 오맹자를 부인으로 들였다. 당시 공자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노소공의 측근이거나 고위 관리 벼슬을 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외국에 와서 자기 나라 군주에 대해 아무리 팩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돌직구를 맞고서 우리나라 군주가 개차반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은가?


그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우리 군주는 는 잘 알았다.’라고 한다. 여기서 공자의 대답을 면밀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장난 같을 수도 있으나, 예를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지 못한 것은 다르다. 누차 강조했지만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은 것은 더 나쁜 것이다. 그런데 질문의 요지는 알았는가?라고 물었지, 예에 맞게 행동하는 군주냐고 묻지 않았다. 공자는 고도의 언어술사이다. 외교는 ‘아’ 다르고 ‘어’다른 것이다. 공자는 그의 공격이 보인 아주 약간의 틈새를 비집고 공격을 흘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진사구는 바로 공자에게 연이은 공격을 하지 못하고 호흡을 조절한 후,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는 없고, 자신의 의도를 다시 부연하는 차원에서 공자의 제자 무마시를 들여 자신의 말을 남기고 떠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가 주석을 단 내용 중에 위 본문에서 ‘편당(偏黨)’이라 쓰고, ‘자기편을 옹호하다’라고 해석한 부분에서 ‘당(黨)’을 ‘서로 도와 나쁜 짓을 숨겨주는 것’이라 해설하였다.

여기서, 당(黨)은 주구장창 정치합네 떠드는 빨간 당, 파란당을 말할 때 쓰는 바로 그 당이다. 주자의 현명한 주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제자에게 진사구가 했다는 아픈 지적에 대해 듣고 난 공자는 쿨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한다. 노소공이 예를 알았다고 답하긴 하였지만 제대로 행하지 못한 예에 어긋난 행동을 벌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꼬집은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일절 변명을 달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지적해준 이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공자는 임금의 불미스러운 일을 숨긴 것이라고 스스로 말할 수도 없고, 또 동성(同姓)에게 장가든 것을 예를 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받아들여 허물로 삼고 사양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 미묘한 방식에 대해 배우는 자들이 혼란스러워할까 싶어 오씨(吳氏)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상세하게 해 주어 이해에 도움을 준다.

 

“魯나라는 공자의 부모 나라이고, 昭公은 魯나라의 先君(선대 임금)이다. 司敗는 또 그 일을 드러내어 말하지 않고, 갑자기 예를 아는가 하고 질문을 하였으니, 그에 대한 답변은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하는 것이다. 司敗가 편당을 한다고 말함에 미쳐서는 夫子께서 그대로 받아들여 허물로 삼으셨으니, 夫子의 성대한 덕은 불가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받아들여 허물로 삼을 때에도 허물을 짓게 된 까닭을 바로 말씀하지 않아, 애당초 오맹자의 일을 알지 못한 것처럼 하셨으니, 만세의 법이 될 만하다.”

 

오씨(吳氏)의 이해가 당신에게도 가 닿았는가?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간단히 정리해보자. 자기 나라 군주가 잘못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는 맞다. 고수였던 상대가 시시콜콜하게 꼬집고 묻지 않고 대맥을 짚어주자 그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였으나 받는 방식을 잘못이라고 함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알았다고 받는다.


다시 제자를 통해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던져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는 듯하면서도 꼭 꼬집으며, 잘못된 군주를 감싸느냐는 뼈 때리는 지적에 왜 그렇게 하였는지 설명할 수 있었으나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잘못이라는 것을 이미 서로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허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구구절절이 변명이나 사족을 달지 않는다. 오씨(吳氏)는 마지막 구절에 아예 오맹자의 일조차도 모르는 것처럼 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모른 것이 아니라 모른 ‘척’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그 내자와 가족을 모두 터는 전면전이 계속되고 있다. 법비의 당찬 아내가 녹취에서의 본모습과 기자회견에서의 연기를 모두 보여주었다. 팩트에 근거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이 나왔던 것에 대해 그녀의 어설픈 발연기식 사과는 사과라는 말을 모욕했다. 그리고 구구절절이 말도 안 되는 변명과 사족을 달았다.

 

그 빨간당에서 그렇게 나대길 좋아하는 인물들 중에서 어느 한 명도 공자처럼 쿨하게 나서서 잘못이라고 잘못된 것은 사실이라고 잘못을 인정하지도 사죄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 며칠 전 빨간당과 사활을 함께 하겠다는 기레기 언론사 몇몇 곳에서 특종이랍시고 도지사 출신의 후보 아내가 갑질을 했다며 똑같이 부풀리기를 시도했다. 이전에 그의 아들 문제가 나왔을 때도 그렇고 이번 의전 문제의 공격에 대해 두 부부는 정공법을 택했다.


죄송하다고. 모든 것이 다 자신의 불찰이라고 잘못된 일이고 그런 일이 다신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구구절절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아내 역할만 한다는 둥, 무서워서 거짓말을 했다는 둥, 지저분 너저분한 변명이나 사족 따위는 없었다.

세상을 좀 먹는 것들을 보게 되면,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것들을 바로잡겠다고 검을 빼들곤 한다. 그런데 원칙주의자이다 보니 내가 칼을 뽑지 않는 유일한 경우가 있다.


바로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구하는 경우이다.


잘못했다고 하는데 그의 목을 따겠다고 검을 뽑을 정도로 마음이 모질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그때의 위기만 넘기겠다고 발연기를 시연하는 것이라면 가차 없이 베어버린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곰팡이를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늘 사정이 있었다고 하고 자기 말을 오해했다고 하고, 할 수 있으면 끝장을 보자고까지 턱을 들고 버틴다. 그리고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구차한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은 과연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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