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Feb 04. 2022

배우는 자의 모습은 어떠해야만 하는가?

성인이 보여주는 배움의 올바른 자세

子與人歌而善, 必使反之, 而後和之.
공자께서 남과 함께 노래를 불러 상대방이 노래를 잘하면, 반드시 다시 부르게 하시고 그 뒤에 따라 부르셨다.

이 장은 공자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생뚱맞을 수도 있어 보이는 노래에 대한 에피소드이다. 다소 생뚱맞다는 표현을 쓴 것은 그것이 현대적인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공자의 시대에 노래를 부른다는 행위는 현대의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노래는 개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서정적인 행위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었다. 노래 가사인 시의 표현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담고 있는 의미를 상당히 중시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맹자의 시대만 가더라도 사라져 버리며 노래를 부른다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퇴색되어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보면, 이 장에서 공자가 노래를 잘 부르는 이에 대해 다시 부르게 하고 따라 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술 마시고 흥에 겨워 희희낙락 즐기는 노래 부르기가 아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이미 공자가 보인 음악에 대한 사랑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앞서 공부한 바 있다.

제(齊) 나라에 갔다가 순(舜) 임금의 음악인 소악(韶樂)을 듣고는 석 달이나 고기 맛을 잊고서 했던 그 한 마디.

“이 음악이 이렇게까지 좋은지 미처 몰랐다(不圖爲樂之至於斯也).”


앞서 공부했던 바대로, 소악(韶樂)은 비속한 유행가가 아니라 진선진미(盡善盡美)의 음악이었고, 그 음악을 만들어낸 사람의 의도와 그것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느껴내는 경지까지 오르려고 부단히 노력하느라 그 맛있는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열중했다는 것에서 호학(好學)의 정신을 함께 배운 바 있다.


이 장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사소한 듯 하지만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 잘하는 이가 있을 경우, 그게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잘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따라 했다는 행위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노래를 부르고 즐기는 사람이 공자보다 신분이 낮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원문의 한자를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을 권한다.

노래를 ‘시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使’라는 글자는 본래 동등한 위치에서 권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하도록 시킨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글자이다.

그럼,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반드시 반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은, 그 상세함을 알아 그 좋은 점을 취하려는 것이요, 뒤에 따라 부른 것은 자세한 것을 앎을 기뻐하고, 그의 좋은 점을 허여 해준 것이다. 이는 聖人의 氣象이 종용(從容)하고 성실한 뜻이 지극히 간절하며, 또 겸손하고 자상하여 남의 좋은 점을 가리우지 않음이 이와 같음을 볼 수 있으니, 한 가지 일의 사소한 것에 온갖 선이 모인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읽는 자는 마땅히 자세히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

 

이 장에 대해 자세히 주석을 단 현대 해설서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큰 의미를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학자들 역시 이 장(章)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다산(정약용)은, ‘말을 길게 늘여서 시를 외는 것이 가(歌)’라고 하는 의미 없는 주석으로 이 장의 의미를 축소하고 간과하였다.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이미 조선 시대는 공자의 시대와 달리 시가 악곡과 분리되어, 음률에 맞춰 노래 부르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주자의 주석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노래 부르는 행위만으로 논어의 한 장을 차지하지 않았음은 분명히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노래 부르는 행위가 의미를 갖는다고는 하지만, 공자의 춘추시대에도 그것이 대단한 의미까지 부여된 행위라고 확대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주자도 사소한 일임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 사소한 행위에서조차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고 있다. 노래를 잘하는 이에게 다시 해보라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 따라 부르는 것은 서툴지만 그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고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눔에 있다.

 

세상 모두가 존경에 마지않은 성인이 자신이 능숙하지 않은 어떤 기예를 보았을 때, 스스럼없이 그것을 다시 한번 보여달라고 하면서 서툴지만 그것을 따라 하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그 기예를 보여준 이를 존중하고 돋보이게 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노래가 참 좋다고 칭찬하는 것에서 지나치지 않고 그것을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겸손하게 낮추고 다른 이의 좋은 점을 더 돋보이도록 하는 행동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서툴지만 그를 따라 노래를 잘 부르려고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그 배움의 과정을 보면서 곁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어떻게 배움을 대해야 할지 그리고 자신들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이가 보이는 그 행동과 마음자세를 통해 겸허함을 다시 한번 가다듬게 되었을 것이다.

 

노래 부르는 일 역시 엄연한 자기 함양(涵養)이고 공부라는 가르침은 이렇게 공자의 실천으로 완성된다.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이의 노래를 서툴지만 따라 부르는 행위는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무는 공부가 되는 것 또한 주자의 해설처럼 복합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그 사소한 행위 하나에 모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장을 두고, 그저 노래에 대한 구절 하나가 나왔다고 공자가 음악을 워낙 좋아했다던가 하는 견강부회식의 활용을 하려는 자들의 글을 가끔 접하고는 하는데, 검색어로 비슷한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논어>의 문구를 가져다가 쓰려는 것처럼 얄팍하기 그지없는 지식활용이 없다.


이제까지의 공부를 통해서 확인했겠지만, <논어>는 그렇게 현대 사전처럼 껍데기에 내놓은 용어만으로 그대로 가져다가 쓸 수 있는 차원의 피상적인 지식이 점철된 책이 아니다. 스스로는 얄팍한 지식활용 수준을 드러내는 것은 자유이겠으나 <논어>를 끌어안고 자폭하는 짓은 삼가 주길 바란다.

 

한국은 유독 아이들의 음악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의도만 봐서는 나쁜 경향이라고 탓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피아노 학원에 다닌다던가 제대로 음악교육을 하지 않은 동네 아줌마들이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은 좀 많이 엇나간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전공자로 나갈 것도 아닌데, 피아노를 전공한 선생님에게 배울 필요까지 있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피아노는 물론이고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을 전공으로 배운 사람에게 배우는 것과 그거 밥벌이로 삼는 부전공자에게 배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당신이 한국에서 그리 노래하는 제1외국어인 영어를 배우고자 할 때, 미국 마트에서 캐셔를 하던 아줌마가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당신의 영어 강사가 된다면 어쩔 것인가? 실제로 영어유치원이라는 것이 유행의 정점을 달리던 즈음, 영어유치원에서 고용했던 대개의 강사들이 제대로 된 영어교육 전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분개하며 그 대학 등록금 수준의 돈은 누가 다 챙긴 것이냐며 분개하던 학부모의 인터뷰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뉴스의 여파는 지방대학들의 영어강사에서부터 유명 영어학원에 이르기까지 사회 곳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었다.

성인을 가르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의사소통이 성인에 비해 능숙하지 않은, 게다가 이해력이 성인에 비해 떨어지는 아이들에게 ‘첫’ 교육은 아주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그 ‘첫’ 교육에 해당하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원 등에 무자격에 돈 때문에 별의별 짓을 다하는 이들이 잔뜩 포진해있음에도 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장에서 공자가 노래를 잘 부르는 이를 허여 했다는 것은, 지금처럼 술 먹고 노래방에 가서 부르는 노래 수준을 말한 것이 아님을 글의 시작에서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그 노래라는 것이 단순한 기예가 아니었음도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주자의 설명대로 그 노래를 부르는 자는 상당한 연습을 통해 그 경지에 이르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공자는 전공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를 높이고 배우겠다는 자세를 보임으로서 그의 경지를 허여 하는 방식을 취하여 그를 높여주었다.

 

처음 배우는 것, 더군다나 음악처럼 정서적인 감성적인 부분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은, 섬세하고 민감하기 때문에 그 접근부터 굉장히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처음 그렇게 배운 교육이 평생의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가, 아니면 불편하고 피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는가를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규 교육과정에도 속해있는 미술과 음악은, 예술임에도 정규과목에 밀려 그저 적당히 점수만 채우면 되는 잡기(雜技) 정도로 취급받고 있다. 모두가 훌륭한 천재적인 음악가가 되기 위해 가난한 동네에까지 피아노 학원이 자리 잡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서 바이엘 흉내라고 내보라고 하는 의도는 음악교육이 갖는, 평생 그 교육에서 얻을 수 있는 기본소양을 즐기라는 의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원인지 가정집인지 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수박 겉핥기 식의 교육도 그렇고, 그 과정을 통해 음악을 즐기고 알게 되는 아이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을 넘어 걱정스럽다.

 

무엇이든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왜 배우는지 배워서 무엇을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행위인지를 가르쳐주지 않고서 남들이 하니까, 유행이니까 라는 식으로 아이들의 등을 떠밀게 되면 그것은 서로 곤욕스러운 일이 된다.


정말로 마음이 편해지고 싶을 때 가만히 피아노 위에 올라 내 마음을 달래주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 그리고 그 연주를 하면서 내 마음의 평온을 담는 것, 더 나아가 공자가 했던 것처럼 그 음악을 작곡한 이의 당시 마음과 그 곡이 어떤 기분을 담는지 이해하는 것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 처음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담당해야 할 몫이다.

 

이 말은,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그가 전공자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구분될 것도 아니다. 전공자가 아니었지만 뒤늦게 그 음악의 즐거움을 깨닫고 아이들이 음악을 즐기도록 이끌어주는 선생이 있는 반면에 자신이 전투적으로 피아노를 전공하여, 무조건 전공자 교육방식으로 아이를 다잡아서 피아노라면 넌더리가 나게 눈물 콧물을 쏙 빼놓게 만드는 ‘괴팍한’ 스타일도 있을 수 있다.

설명해주지 않으면 또 오독할까 싶어 사족을 달자면, 전공인가 비전공인가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쳐줄 만한 소양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지 그것이 선생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다만,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정작 비싼 돈을 주고 영어유치원을 보내면서 혹은 피아노 학원을 보내면서 내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교육을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이지, 아이가 그 교육을 받으면서 어떻게 변화해나가는지를 체크해야 하는 몫은 온전히 부모의 몫이다.

 

직업상 해외의 여러 대학을 두루 살펴보다 보면, 최근 트렌드에 힘입어 한국학 열풍과 한국어 교육의 수요가 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참 서글픈 점은, 영미권을 중심으로 1세대 한국학자들은 한국에서 영미권으로 유학을 왔던 한국어 비전공자인 경우가 많다. 대개는 다른 전공으로 큰 나라에 유학 왔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그곳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강의하게 되면서 그냥 눌러앉은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학문적인 기반이 굉장히 취약함을 확인하고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운 경우를 느끼는 때가 많았다. 심지어 미국인 교수 남편과 결혼한 제대로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여자가, 자신이 한국인이니 전문가라며 정부의 지원금까지 받아내며 한국학을 망치다가 교육 수준 저하로 인해 그 나라에서 한국학 교육센터 자체를 폐쇄해버리는 파국까지 치닫는 상황을 목도한 바가 있었다.

 

당신이라면 한국의 영문과에서 영문학과 영어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영미권에서 한국어를 배우러 왔던 전혀 다른 전공자가 네이티브 스피커라서 모국어를 그냥 가르친다고 하면 좋아하겠는가? 우리는 공자의 가르침을 배워서 알고 있다.

굳이 공자의 호학이 음악으로 확장되고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그것이 적용된다는 이 장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논의를 이렇게 다양한 교육의 현장까지 확대한 것은, 모든 우리 가르침과 배움의 일상에서 이 장의 가르침이 적용된다는 것을 환기시키고자 함이다.


무엇하나 가볍게 대강 아무렇게나 넘어가도 된다는 생각은 결국 당신을 그리고 우리 사회를 좀먹고 만다. 그것이 배움과 가르침에 있어서라면 더더욱 그 파급은 크기 마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군주의 잘못을 드러내진 못해도 변명하진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