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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07. 2022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공부한단 말인가?

주객이 전도되어 공부를 출세의 발판으로 삼은 자들에게

子曰: “文, 莫吾猶人也. 躬行君子, 則吾未之有得.”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文은 내 남과 같지 않겠는가마는, 군자의 도를 몸소 행함은 내 아직 얻은 것이 있지 못하다.”

이 장은 논란의 여지가 좀 많은 해석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莫吾猶人’이라는 네 글자의 해석인데, 중국 본토에서는 이 네 글자의 해석을 가지고 쓴 논문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논란이 있었다. 먼저 주자가 이 네 글자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살펴보자.

 

莫은 의문사이다. 남과 같다는 것은 남보다 낫지는 못하나 그래도 남에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이요, 얻은 것이 있지 못하다 함은 전혀 얻음이 없다는 말씀이다. 모두 스스로 겸양하신 말씀이나 言行의 難易와 緩急을 족히 볼 수 있으니, 사람들이 그 실행을 힘쓰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주자는 원문에 내가 해석한 바와 같이 ‘莫’을 의문사로 보아, ‘내 남과 같지 않겠는가마는’이라고 네 글자를 해석하였다. 뒷문장에서 군자의 도를 직접 실천하고서도 얻은 것이 없다고 말한 겸사에 대조가 된다고 파악한 것이다. 즉, 文에 있어서는 일반인과 똑같아서 성인이라고 칭송받을만한 특별한 것이 없음을 강조한 다른 형태의 겸사인 셈이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해놓고 다른 이견을 설명하지 않으면 왜 이것이 논란이 되었는지 알 수 없을 테니 몇 가지 소개하기로 한다.

 

일부에서는, 莫을 부정의 의미로 보아, ‘내가 남만 못할 것이 없다’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청(淸) 나라의 유보남(劉寶楠)은 『논어정의(論語正義)』에서 ‘연(燕) 나라와 제(齊) 나라에서 면(勉)을 문막(文莫)이라고 한다’고 주장한 진(晋) 나라 학자 난조(欒肇)의 『논어박(論語駁)』에 있는 말을 인용해서 문막(文莫)을 ‘민모(忞慔)’와 같다고 보고, 민면(黽勉; 부지런히 힘씀, 노력하고 힘씀)의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물론 늘 그렇듯이 나는 주자의 해석을 따랐다.

다양한 해석을 보았으니 그럼 다시 전체의 의미를 새겨보도록 하자.


학문으로 해석할 수 있는 ‘文’은 학문(學問 혹은 學文 두 가지 각각)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예의범절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다른 사람을 따라서 학습하는 것만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습성을 강조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개념에 대해서는 굳이 상술하지 않겠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자신이 일반인들과 똑같아서 그것을 노력해서 성취해낼 수 있긴 하였으나, 군자의 도를 몸소 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아직 얻은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내용은 역시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어법인데 크게 두 가지 대표되는 의미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문은 얼마든지 노력해서 성과를 거둘 수 있지만, 그것을 궁행 실천하는 것은 학문에서 성과를 이룬 성인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작 노력해야 하는 방점이 학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출세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것으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군자의 도를 실행하기 위함임을 잊지 말라는 일깨움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인 첫 번째 의미에 비해 숨겨져 있는 듯 걸쳐서 삐죽 나온 두 번째의 의미가 무게를 갖는 것은, 역시 당시에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소리 없는 일갈을 던지는 비판의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알량한 지식을 채워 그것으로 곡학아세(曲學阿世)하여 자신의 부와 명예를 챙기기에 허덕이는 삐뚤어진 자들에게 내려친 죽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단순히 공부하고 배우는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따라 하기만 하면 쉽지만 군자의 도를 직접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는 말에 대해 그저 고개를 끄덕일 것이 아니라 왜 그것이 어렵다고 하는지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는가?

고전을 공부함에 있어 다 맞는 말이고 다 좋은 말이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 긍정하는 방식의 공부는 진정한 공부가 될 수 없다. 성현의 말에 틀린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체득이라고 체화라고 한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인간의 본능이나 세상의 현실과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도덕책처럼 사는 사람은 없다.’라는 역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당신이 지금 아침마다 <논어>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주는 이의 강독을 그저 듣기만 하면서 끄덕이는 일은 지극히 수동적인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 똑같은 수업을 듣는데, 멀쩡히 눈뜨고 자리에 앉아만 있는다고 해서 성적이 똑같이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란 말이다.


앞의 선생님은 여러 가지를 말하고 설명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수준이 다르고, 그것을 예습하고 와서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한 것을 끊임없이 머리에서 떠올리며 하나하나 곱씹는 사람과 올림픽 정신으로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고서 ‘음, 참 좋은 말씀이구만.’라고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일어서면서 다 떨구고 텅 빈 머리로 교실을 떠나는 사람의 수준이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바대로, 예의범절이든 학문은 앞에서 보여주는 대로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고 반복하여 익히면 그뿐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라던가 그것을 보지 않고 내 몸에 배이게 하여 평상시에도 그 가르침대로 행한다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나 사회적 현실과 다르기 때문에 부단히 스스로를 수양하고 또 단련해야만 한다.


정의는 지켜야 하는 것이고, 약자를 괴롭혀 그의 것을 빼앗으면 안 되고, 그릇된 방법으로 위로 올라가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머리로 익히는 것과 내가 그 상황에 처했을 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씨(謝良佐)는 이 장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文은 비록 聖人이라 할지라도 일반인과 같지 않음이 없으므로 겸손해하지 않은 것이요, 군자의 도를 몸소 실행하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자처하지 않으신 것이다. (‘헌문(憲文)편’ 30장에서 말한) ‘군자의 도가 셋인데 나는 이중에 하나도 능한 것이 없다.’는 내용과 같은 것이다.”

 

뒤에 공부할 ‘헌문(憲文)편’ 30장의 내용이라는 군자의 도 세 가지는 ‘仁者는 不憂하고 知者는 不惑하고 勇者는 不懼니라.(인자(仁者)는 근심하지 않고, 지자(智者)는 미혹되지 않고, 용자(勇者)는 두려워하지 않는다.)인데, 이 글에서도 공자는 자신은 어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다는 겸사로 제자들을 일깨워주고 있다.


위 주석에서는 두 장의 내용이 일맥상통한 점을 들어 군자의 도를 이룰 수만 있다면 성인의 경지에 들 수 있는데, 정작 성인이면서도 아직 그것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여였다고 하였으니 그 제자들일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겠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공부만 잘하면 이 세상은 아주 편하기 그지없다. 내가 공부하는 만큼 올라갈 수 있고, 가질 수 있다. 좋은 대학을 가고 여러 나라의 말을 할 수 있으며,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해내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사업을 하는 것 따위가 모두 공부와 연관된 것들이다. 선도하는 것까지도 필요 없다. 그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가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서 연이은 시험에 좋은 성적만 내놓으면 여기저기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며 가져다가 쓰기 마련이다.

 

다 아는 뻔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은가?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인 아니니 내 이야기를 다 듣고서도 이해가 안 되면 그때 질문을 듣도록 하자.


자아, 당신이 기억에 어떤 자들이 공부를 잘하던가?

머리가 좋은 자들, 가난에 뼈가 사무쳐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런데 그 방법이 공부라는 것밖에 없다고 현실에 절망한 자들, 이른바 개천용의 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그와는 다른 의미로 돈 많고 배경이 든든하며 족집게 과외선생에 부모가 전문직이라서 부의 진정한 대물림은 학습을 통한 학벌에서 나온다며 강남 신흥 세력들이 개천 용의 비율을 게눈 감추듯 급감시켜 씨알을 말리는 시대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당신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그래서 그렇게 공부한 이들이 공부를 해서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좋은 대학을 나와서 사시를 합격해서 법조인이 되어 전관을 운운하며 옷을 벗자마자 1년 내에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이익을 수임료로 챙기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전통을 자랑스럽게 지켜갔고, 행시에 합격해서 공무원 아파트를 받아 돈을 불리는 것은 기본이고 나랏돈과 자리를 이용하여 티 나지 않게 웃돈까지 욹어먹는 고위 공무원이 되었고, 젊은 시절 불의에 항거한다면서 화염병을 던지다가 감옥을 다녀온 훈장을 달고 386이라는 이름으로 여의도에 입성하여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서 국민의 세금을 삥땅 치며 자식들 스펙을 쌓아줬으며, 외시를 보고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외교관이 되어 해외에 나가 추잡한 짓을 하여 한국의 이름에 똥칠을 하는 이들이 되었다.

아, 물론 다른 동기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최루탄을 뒤집어쓸 때 도서관에서 딴 세상을 쳐다보듯 대학원을 가고 유학을 다녀와 대학교수라고 자리를 잡은 자들은 동기들과 결탁하여 그 끈을 잡고 장관이나 기관장, 혹은 비례대표로 여의도에 갈 기회가 없는지 호시탐탐 고개를 들이밀며 연구비를 삥땅 치고 지지리도 공부 못하는 자식들의 스펙을 쌓고자 서로 품앗이라는 것까지 해대다가 걸리며 ‘관행’이라는 추잡한 변명을 입에서 뱉어냈다.

 

공부를 잘하는 이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맞다. 이 장에서 방점에 방점을 찍어가며 강조하는 것은 앞 문장이 아니라 뒷 문장이다. 공부를 잘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이 뒷 문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의 본성과 사회적 현실은 그 목적에서 뒷 문장을 지우고, 그들의 부와 명예, 그리고 그것의 대물림이라고 몸과 뼈와 그들의 영혼에 새겨 넣은 것이다.


그래서 정작 공부를 못했지만, 그들의 곁에서 보좌관, 비서관, 검찰 수사관, 계장, 영사, 사무관, 9급 주사, 인턴사원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그대로 보고 부러워하고 ‘학습’하면서 각자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층에서 해 먹기에 급급한 쓰레기 지옥을 함께 만들어나가고 있다.

 

대학원생들에게 통장을 만들라고 하고 연구비를 지급한 것처럼 꾸며놓고 그 돈을 일괄 인출하여 다시 교수의 개인 통장으로 송금하는 짓은 그것이 불법이고 해서는 안될 것을 알기에 법망을 피해하기 위해 공부를 잘했던 그 머리를 굴려 꼼수로 만들어 낸 것이다.


외교관의 신분이라는 특수한 혜택 덕분에 컨테이너 외국 이사를 해도 관세가 붙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외에 나갈 때마다 그곳의 돈 될만한 아이템들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거나 현지에서 사서 국내에 들여오면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을 아내와 딸이 정신없이 사제끼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서류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꾸미라고 밑의 영사들 조인트를 까는 놈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자기가 영사 때부터 그런 일을 해왔기 때문에 ‘관행’이고 이제 자기 순번이 왔으니 누릴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인다. 회의를 매번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회의마다 식대를 머릿수를 늘려 작성하게 하고 그 법인카드로 고급 식당에 한꺼번에 일괄 결제를 해놓고 가족들과 함께 가서 그 돈을 차감하는 방식으로 외식을 즐기는 그 쓰레기 고위 공직자는 그 좋은 머리로 기발한 횡령 방식을 실행함에 큰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서울의 한 구청 직원이 버젓이 115억 원의 거액을 횡령하여 77억에 달하는 거액을 주식투자로 날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48살의 7급 공무원이다. 그것은 그가 9급 공무원에서부터 평생 일해서 7급을 달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가 주사에 해당하는 말단 공무원이 되었을 그 시점에는 지지리 공부를 못해서 ‘공무원이나 하자’라고 하던 시기에 공무원의 길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원래는 그가 엄청나게 공부를 잘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면 그는 여느 법비가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주식투자가 아니라 뒷문을 열어 가족들을 이끌고 해외로 도피하여 신분을 지우고 살려는 계획을 세웠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가 그저 그런 머리와 공부 수준에도 그런 가공할만한 범죄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 일했던 세월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을 통한 학습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50억이나 받아먹은 법비들에 대한 수사는 진행되지 않고, 11월에 그 난리가 터졌을 때, 이미 구속되었어야 할 자에 대해 그들을 보호해야 자신들의 미래도 그 꼴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한 머리로 알고 있는 예비 법비들은 그들에게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주며 구속영장을 기각했고, 그닥 달라진 상황과 새로운 증거가 제출되지 않았음에도 100여 일이 지나서야 그 구속영장을 집행하라고 뒤늦은 헛발질을 차는 시늉을 보였다.

 

법을 공부한 법조인이라면 누구나가 다 아는 일이다.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100일이면 증거인멸은 물론이고 증거 조작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게다가 상대는 법으로 평생을 먹고살았던 검사장 출신의 법비이고 여의도에서 권력자들과 형님 동생으로 결탁되어 있는 전 국회의원이었다.


그런데 이번 구속영장이 집행된 결정적인 이유가 ‘혐의가 소명되었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였다. 인터넷으로 검색이 쉬운 세상이니 당신이 다시 검색해보라. 100여 일 전에 그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될 때, ‘혐의가 제대로 소명되지 않았고, 법리적으로 다툼의 여지가 크다.’라는 사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한 이들이 과연 똑같은 사실을 근거로 100일 전후로 천지가 개벽하여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문제라서 그렇게 했을까?

 

머리 좋은 자들이 공부하여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용도로 삼아 군자의 도를 이루려는 것에 적용하여 실천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조만간 복마전(伏魔殿)에서 튀어나온 요괴들과 공존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그저 그렇게 살던 50을 바라보는 7급 공무원이, 일반 회사원이 그들의 어깨너머로 배운 도둑질을 버젓이 하면서 ‘왜 나는?’이라며 항변하는 시기까지 왔다.


당신이 그저 그들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고 손가락질할 수 있는 입장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바로 당신부터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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