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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08. 2022

‘이미’와 ‘아직’의 차이는 성현(聖賢)도 만들어낸다.

자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子曰: “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公西華曰: “正唯弟子不能學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聖과 仁으로 말하면 내 어찌 감히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仁과 聖의 도를) 행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하셨다. 공서화(公西華)가 말하였다. “바로 이것이 저희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점입니다.”

이 장은 술이(述而)편의 2장에서 보았던 공자가 ‘배우면서 싫증 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면서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다시 중간에 언급되고 있다. 어떤 <논어> 해설서를 보니 버젓이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면서 ‘반복’이라는 표현을 써서 같은 뜻이라고 설명하더라.


그런가? 당신은, <논어>에서 동일 구절이 착각으로 들어가는 경우 말고, 동일어를 그저 반복하는 것이 실린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왜 이 질문을 던지는지 눈치챘다면 그 해설서를 내놓고 작가라는 소리를 듣고 거들먹거리는 <논어> 전문가를 자처하는 그의 책을 난로의 장작을 땔 때 불소시개로 사용하면 된다.

 

고전을 공부하고 고문을 읽는 이는 한 글자도 허투루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앞서 공부했던 2장에서는 그 행위를 언급하며, 자신이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하였다고 자평(自評)한 것이다. 그 2장에 대해 주자는 주석을 하면서 그것이 성인의 행위에 해당하는 경지도 아닌데 그것조차도 자부하지 않는 겸사를 보였다고 하였다. 그 의미는 그것이 성인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노력의 일환임을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그 비슷한 언급을 하면서 그 노력에 대해서는 자신이 하고 있다고 자처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전과 다르게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배경과 행간을 읽으면 된다. 문장을 여는 ‘聖과 仁을 감히 자처할 수 없다’는 말이 그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푸는 열쇠가 된다. 공자의 이 말은, 누군가 공자를 성인(聖人)이고 인자(仁者)라며 칭송한 것에 대한 겸사(謙辭) 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감히 스스로 성인과 인자인 것을 자처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어떤 노력의 단계에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仁과 聖의 道에 대해 행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으며, 바로 그 仁과 聖의 道를 가지고 남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정도라고 겸손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과찬에 대한 겸사라고만 이해하면 역시 초급에 머물러 이해의 폭을 넓힐 수가 없다. 공자가 자신에 대한 제자와 뭇사람들의 성인이라는 칭송에 대해 부정을 통한 겸사를 보인 것은 단순한 겸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한 겸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공자가 ‘仁과 聖의 道를 가지고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스승인 것을 누가 모르냐며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고 의문이 생기는가? 공자가 공부하는 제자들과 뭇사람들에게 지향해야 할 목표점으로 삼은 것은 당연히 성인의 경지였다. 그 자신부터 그 공부와 수양을 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가르치는 이들에게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수양해야 한다고 강조한 스승이었다.

4대 성인

그런데, ‘성인(聖人)’이라는 목표점을 먼저 공부하는 이들의 눈앞에 턱 하니 내놓게 되면 당연히 그들은 이르지 못할 현실의 벽을 느끼고서는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것을 대하듯 거리감을 둔다. 공자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현장의 스승이었다. 성인의 경지와 그것을 공부하는 이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하는 스승은 무엇보다 배우는 자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격려하고 일깨워줘야 하는 자리에 있는 자이다.


그런 사람이 성인이라는 칭찬에 마지못한 척하며 그 자리에 올라앉는 순간, 제자들을 비롯한 배우는 자들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라고 선을 긋고 노력해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며 포기하게 된다. 그런 일을 공자가 자처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근거로 굳이 달지 않아도 될 공서화의 감탄이 이 장의 가르침 말미에 붙어 있게 된 것이다.


공서화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주자가 이 장에 대해 붙인 해설을 통해 그 의미에 대해 조금 찬찬히 뜯어보기로 하자.

 

이것도 공자의 겸사이다. 聖은 대인으로서 化한 것이요, 仁은 마음의 덕이 온전히 보전되고 사람의 도리가 갖추어진 것이다. 爲之는 仁과 聖의 도를 행하는 것이고 誨人은 이것으로 사람을 가르침을 말한다. 그러나 싫어하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仁과 聖의 도를 지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것이다.

 

고급 수준에 이른 주자는 이미 공자가 말한 의미를 파악해내고 그 행간의 의미를 상세히 풀어준다. 앞 문장에서 仁과 聖의 道를 행하는 것은 감히 자처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행위의 방식이 빠져있음을 채워줌으로써 공자의 의도를 읽어낸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어떻게’ ‘무엇으로서’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의미가 바로 ‘仁과 聖의 道’ 임을 생각한다면 생략된 그것을 고급이 된 자들만 읽어낼 수 있도록 한 어법을 구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仁과 聖의 道를 싫어하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으려면 정작 仁과 聖의 道가 갖춰지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것임을 파악하고 읽어낸 것이다. 주자보다 먼저 이 의미를 파악한 자, 공서화가 그래서 등장한 것이다. 공서화는 그 행간의 의미를 스승의 말을 듣는 순간 파악하고, 그 의미를 읽어낸 자만이 할 수 있는 대답으로 ‘그래서 저희가 그 경지를 감히 따라잡지 못하고 스승님만이 가능하신 겁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아부나 칭송이 아닌 것은 두 사람의 대화가 갖는 행간의 깊이에 담긴 의미를 모두 길어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배우는 자들이 혹시라도 제대로 이해를 못 했을까 싶어 晁氏(晁說之)가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정리해준다.

 

“당시에 부자를 성인(聖人)이고 또 인자(仁者)라고 일컫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夫子께서 사양하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양만 할 뿐이라면, 천하의 인재를 진취시키고 천하의 善을 솔선수범하게 할 수가 없어서, 장차 聖과 仁으로 하여금 빈자리가 되게 하여, 마침내 사람들이 이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夫子께서 비록 仁과 聖을 자처하지 않으셨으나, 반드시 행하기를 싫어하지 않고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으로 자처한 것이다. ‘可謂云爾已矣’라는 것은 한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공서화(公西華)가 이를 우러러 탄식하였으니, 그도 夫子의 뜻을 깊이 안 것이다.”


자아, 이제 이 말이 단순히 겸손을 표현한 겸사가 아닌 것이 보이는가? 일상적인 겸사를 구사하고 있는 듯 하지만, 이것은 겸손한 말이 아니란 말이다. 어떻게 그 경지까지 오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을 아주 상세하게 가르쳐주는 단계식 지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술이(述而) 편’ 2장의 의미를 반복한 것이라고 당당히 오독할 수 있는가 말이다.

 

공자는 당신이 성인이라 감히 자처하지도 않았지만,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그 과정 중에 있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음은 자부하였다. 이유는 한 가지, 그렇게 되고자 하는 배우는 자들의 스승으로서 몸소 그것을 실천해서 보이는 위치에 있는 것이 공자 평생의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이 직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삶 자체를 증명하는 길이고, 자신이 걷고자 했던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자의 자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仁과 聖의 道를 행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그 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제대로 된 배움과 공부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를 수 없는 경지이다. 그것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된 뒤, 다른 이들에게 그 도를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가르칠 수도 없거니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는데 끊임없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매일같이 그것을 가르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매일같이 단련하고 수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임을 공서화와 주자는 이미 읽어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겸사로 보이는 이 장의 한 마디는, 무시무시한 가르침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공자는 자기 스스로도 아직 진화 중인 단계에 있다고 여겼기에 실제로 이런 표현을 쓴 것이지, 자신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고 결코 자부하거나 자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처하고 자부하는 순간, 공부에 나태가 끼어들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그 단원에 대한 공부를 모두 끝냈다는 말을 입에 담은 자는 결코 그 책을 바로 다시 열고 끊임없이 읽고 공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자가 공부해야 하는 것은 읽고 쓰고 외워서 끝나는 공부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스스로 그 경지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자는 그 공부가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인데 말이다.

공서화(公西華)

무언가를 노력하여 목표한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이가 ‘이미’ 그 경지에 올랐다고 여기는 것과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든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오르지 못해 본 그 경지에 올랐는지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성인이 되어보지 못한 이들이 자신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한들 그것이 성인의 경지에 올랐는지 안 올랐는지 어디까지 해야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성인의 경지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부족하다고 여겨 ‘아직’ 멀었다며 노력을 더 경주하고 성인의 경지는 자신이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짓는 이들일수록 아주 조금 뭔가를 하기 시작해서 성과 보인다 싶으면 ‘이미’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인 양 거들먹거리기 마련이다.

 

잘 생긴 것에 대한 기준이 상대적인 것이듯 부자라는 속세의 기준이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든 공부와 수양을 통해 이르려는 성현의 경지 역시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돈은 가져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는 자들이 공부를 통해 올라가야 할 수양의 단계는 욕심은커녕 노력조차 하지 않고서 <논어>니 공자니 하는 말만 나오면 ‘어휴 나는 그런 성인군자가 아니니까요.’라며 웃으며 슬쩍 발을 빼려 든다.


그들은 결코 수백억 수천억을 가진 자들을 보며, ‘어휴! 그냥 돈 안 벌고 빌어먹고 살래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 선에서 벌 수 있는 최대한 노력으로 돈을 벌려고 들고, 틈만 나면 주식이든 코인이든 영끌을 해서 아파트를 사든 해서라도 악착같이 돈을 불리고 부자가 되고자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공부하고 단련하고 수양하는 인간의 도리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등한시하다 못해 성인의 가르침이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고 하면서 억만장자들을 보고서는 그들처럼 돈을 벌지 못해 안달을 하느냔 말이다.

참 신기한 것이, 돈이 어마어마 많은 사람은 결코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가진 놈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그들은 그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 경험이 있기에 돈의 소중함에 더 벌벌 떤다. 적당히 돈을 좀 벌었거나 주식으로 어쩌다가 생각지도 못한 돈이 좀 벌리거나 영끌해서 산 부동산이 시류에 편승하여 몇 배 올랐다며 거들먹거리는 자들이 이른 은퇴를 말하며 인생을 즐기며 살겠다고 떠들어댄다.


우리는 실제로 살면서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대별로 확인한 바 있다. 십수 년간 바퀴 달린 모든 차량을 운전해본 베테랑 드라이버는 어디에 가서 자신이 운전을 잘한다며 나대지 않는다. 그저 일반 차량으로 서킷에 몇 번 나가본 자들이 엑셀을 좀 밟아봤다며 나대다가 사고를 내곤 한다.


세계 챔피언까지 오르고 평생을 복싱으로 보낸 코치는 어디 가서 함부로 자신의 주먹자랑을 하지 않는다. 하늘밖에 하늘이 있음을 알고, 무엇보다 자신이 그러려고 운동을 한 것이 아님을 안다. 이제 줄넘기 연습 마치고 손목 꺾이지 않으며 샌드백을 치기 시작한 녀석이 늘 주먹이 먼저 튀어나와 사고를 친단 말이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결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다. 내 스스로 부족함을 아는데 어찌 감히 당당할 수 있겠으며 그것을 채워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다른 것에 고개를 돌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족함을 아는 이는 계속해서 더 노력하게 되고,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르고 하나를 갖추고 다 가진 것으로 착각하는 이는 이미 모든 것이 채워졌다고, 자신은 ‘이미’ 그 경지에 올랐다고 ‘혼자서만’ 그리 여기는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할 직업적 소명이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었음에도, 다른 이들에게 윽박지르고 자신에게 쥐어준 칼자루가 칼춤을 추라고 쥐어준 것이 아님을 어느 사이엔가 잊어버리고 법비가 되어버린 자가 이젠 권력의 정점에 올라 이 나라를 대표하는 자가 되겠다고 한다.


물론 그는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를뿐더러 그 부족이 뭐가 그리 문제가 되냐고 후안무치하게 고개를 까딱까딱 돌려가며 비실비실 웃는다. 어차피 그의 뒤에서 그를 허수아비로 내세운 수많은 법비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것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일조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기에 그들은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는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들은 그런 꿈을 꿀 수조차 없다. 당신의 의중과 상관없이 김칫국을 원샷하며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방약무인(傍若無人)한 태도를 보이는 저들을 지지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그런 이들이 정말로 있다는 것이 나는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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