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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1. 2021

외장하드가 사망하셨습니다.

원인을 알면 별 것 아닌, 원인을 알아도 어쩔 수 없는?

얼리어댑터를 하던 시기, 다양한 프로젝트 실험을 위한 장비로 외장하드는 필수적인 장비였다.

세계적인 한 외장하드 업체에 이야기를 했더니, 작은 사이즈에서 큰 사이즈, 유선에서 무선까지

다양한 형태의 외장하드를 테스트용으로 흔쾌히 제공해주었다.

다양한 테스트가 끝나고 그 유류 부품 중에 한 녀석을 유용하게 쓰던 중, 한 달 전쯤 문제가 생겼다.

영화나 쉽게 보기 어려운 해외 드라마를 저장해 두고 대형 TV에 연결해서 보게 해 주던 녀석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물론 컴알못이 아니었기에 미리 준비해둔 데이터 복구 프로그램을 다각도로 돌리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DOS용 프로그램까지 시전하여 어찌어찌 생명을 연장시켜 복구를 하여 사용하였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녀석은 이제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자신이 담고 있는 데이터를 얼른 안전하게 여러 곳에 분할 저장하라고 알려주었던 것이었다.

녀석의 싸인을 무시하고 나는 그저 다시 부활했다고 여기며 조금은 더 조심스럽게 사용한다고 했다.

지난 주말 'LUCA'를 보고 나서 가족들에게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를 소개해주겠다고 녀석을 TV에 꽂는데, 녀석에게서 불이 깜박하고 켜지는가 싶더니 이내 인식하지 못하고 푹 꺼져버렸다.

A.K.A 스핀다운 현상.

인식이 되면서 불량 메시지가 나오면 어찌어찌 인공호흡이라고 해보련만, 인식 자체가 되지 않고 헤드가 나가버리면 이젠 답이 없는 셈이 된다.

물론 매우 중요한 데이터를 그곳 하나에만 놔두지는 않았고, 아쉽긴 하지만 거액의 비용을 들여 데이터 복구 업체를 찾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게 미연에 방지해두기는 하였으나 그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맘이 안 좋았다.

 

CPR이라도 해보겠다고 이것저것 해볼 여지가 없어 불편한 마음을 안고 불편한 잠자리에 들었다.

'조침문'같은 것이라고 작성해야 하는가 하는 미안함이 잠자리를 계속 건드리고 불편하게 했다.

오래 함께 했던 물건에게 보이는 의인화 현상에 대해, 함께 침대를 쓰는 사람이 핀잔을 주었다.

"그냥 새 거 사면되는 거 아니에요? 많이 썼으니까 그렇게 됐겠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을 위해, 나를 위해 그렇게 온몸을 희생한 녀석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 싶어 맘이 더 안 좋아졌다.

본사 A/S팀에 전화를 걸었지만 당연히 휴일이라 연결이 어려웠다.


그렇게 최대한 녀석을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눕혀두고 월요일을 맞았다.

본사 A/S팀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를 찾아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A/S가 안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조금 부연된 내 설명을 듣고나서 그렇다면 해외 본사에 특별요청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해주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3년간 법적 워런티나 복구 및 교환 A/S에 해당이 되지 않으나,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용자이시니 이번에 한해, 데이터를 무상으로 복구해드리는 서비스를 해외 본사에서 해 드리라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외장하드에 담긴 데이터의 양이 얼마냐고 그의 질문에 거의 95% 꽉 차 있다는 대답을 하여 그가 잠시 움찔한 것 외에, 다른 과정들은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새로운 외장하드에 데이터를 옮겨 보내준다고 친절히 말하는 그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면서도

지금 이 녀석을 되살리는 방법은 없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다시 한번 던졌다.


"사실 외장하드의 워런티 기간이 3년인 것은 대략적으로 3~5년이면 고장이 나서 수명이 다한다는 일반적인 데이터에 의거해서 책정된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2중 3중으로 데이터를 저장해 두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안다.

왜 그것을 내가 모르겠나?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장하드라는 특성상 다양하고 오래도록 누적된 데이터가 쌓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USB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요즘 부쩍 데이터 복구 업체가 많아진 것도,

그것이 고급 기술을 요하지 않으면서도 컴알못들이 사용하는 외장하드와 USB가 불량이 나거나 하는 일이 많아졌기에 그 수요가 시장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수리 혹은 복구라는 것은 원인을 알고 나면 참 별것 아닌 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사람의 질병도 그러하고 바이러스도 그러하지 않냐고 하겠으나

실제 그렇다.

사람의 삶에서 벌어지는 잘못 자체도

질병, 컴퓨터 고장, 하수도 막힘, 보일러 고장, 지붕 수리 등등

원인을 모를 때는 발을 동동 구르고

데이터 복구 업체에서 요구하는 외장하드의 7,8배의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눈물을 머금고 복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원인을 모두 알면서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뻔히 알면서도

바꾸지 않고 버티는 이들때문에 고쳐지지 않는

사회 부조리들에 대해서는

왜 그런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까?


외장하드나 USB가 고장 나면 발을 동동 구르는

당신이, 혹은 당신의 옆에 있는 사람의 아집이

혹은 적당히 편하려는 안일함이

아니면 별 거 아니라며 그가 받아먹은 푼돈이

그 일을 바로잡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오랜 시간 나와 내 가족에게

즐거움을 주고

행복한 영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녀석을 뽁뽁이 포장해서

A/S센터로 보내면서

나는 마음 한켠 행복했다.


다른 몸이긴 하지만

네가 담고 있는 것들이,

그것이 네 영혼이라고 한다면

그것들이 다른 몸에 담겨 다시 내게 돌아올 것이니

나는 그때 다시 너를 안아볼 수 있겠구나.


잠시만 이별하자,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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