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un 20. 2021

011을 떠나보내며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유감

언제나 그렇듯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당혹스럽다.

서글픈 마음이 든다.

오랫동안 원고지에 내 생각을 풀어주던

만년필이 고장 나서

도저히 회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러하였고

처음 샀던 자동차를

구구만 년 곁에 두고 있을 수 없이

폐차를 결정하고

떠나보내야 했을 때도

그러했다.


지난달부터 위와 같은 문자 메시지가 수시로 오더니 이제 일주일에 두어 번씩 계속해서

내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다.

작년 6월 과기정통부의 결정을 확인하고 나서 통신사에서 보상이랍시고 내놓은 정책에

마지못해 수긍하며 2G 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2000년 3월 처음 받았던 그 번호는

중간에 번호를 바꾼 것외에

'011'이라는 번호로

20년이 넘게 사용한 것이었다.

1996년 해당 회사에서 '011'이라는 번호를

출시한 이후 고민 고민하다가

내 이름 다음으로 중요시되었던

나를 대표하는 전화번호는 '011'이었다.

스마트폰이 러시를 이루기 시작하고 스마트한 삶을 위해 2G 폰을 벗어나야 한다고 했지만,

태블릿과 아이패드, 그리고 와이파이용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도

전화기는 그대로 011 2G 폰을 고수했다.

아이들이 식탁에서 멍하니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좋을 것이 없다고 여겨

엄마와 아빠의 전화기는 '011' 2G 폰이었다.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수년 전부터 명함이나 전화번호를 불러달라는 상대방이 '011'이라는 말을 듣고는 흠칫 놀라며

"네?"라고 되묻는 일이 많아지긴 했지만

오히려 "011입니다, 010 아니고!"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그다지 귀찮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각으로 직접 번호를 파서 핸들 앞에 두던

전화번호도 지나던 사람들이 보며

신기해했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누구나 다 쓰는 번호이지 않아서 좋았고

20여 년을 함께 해서 익숙해져서 좋았으며

전화기가 오롯이 전화기의 기능만에

충실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작년 딱 이맘때 위의 그림처럼 통신사의 보상이랍시고 나왔던 것을 보면서도, 나는 원래 내가 사용하던 와이파이용 스마트폰으로(a.k.a. 자급제폰) 2년간 최상위 요금을 무상으로 지원받는 형태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변경하고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약속대로' '011'의 최후의 숨통을 끊겠다고 통지해온 것이다.

2G 폰은 필요 없다고, '011' 번호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투쟁하는 이들의 모임(010 통합반대운동본부)에도 카페였긴 했지만 가입해서 힘을 더하겠다고 했었다.

위 사진처럼 이런저런 소송이니 투쟁이니 다 해보던 이들은 마지막 선택으로 헌법재판소의 문을 두드렸다.

그들의 손을 들어줄 수 있는 양심이 관공서에, 정부에 남아 있는지는 의문이다.


철저한 시장논리에 의해 없어지기로 한 사실에 대해 부정하는 이들은 없다.

1년 전, 기나긴 통신사의 구애활동에 손을 들어주던 과기정통부는 현황조사를 통해 어렵게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2G 운영 현황 파악을 위해 기술전문가 그룹, 장비 제조사 등과 함께 전국의 교환국사 및 기지국사·광중계기 운영 상황에 대한 4차례 현장점검을 수행했다며 기레기들을 통해 보도자료를 뿌려댔다.

그들의 확인(?) 결과 망 노후화에 따른 고장 급증(최근 3년간 교환기 고장 132%, 기지국·중계기 고장 139% 증가), 예비 부품 부족에 따른 수리 불가 품목 존재, 장비별 이중화 저조(20% 미만) 등에 따라 2G 망을 계속 운영시 장애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과기정통부는 "2G 망 노후화와 장애 위험 등으로 망 복구가 일부 불가하거나 서비스 품질이 떨어지고 있어 이용자 안전 등을 고려할 때 더 이상 2G 망을 운영하는 것이 이용자 보호 차원에서 적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개소리다.

그 속의 이야기를 좀 들여다보자면, 기존 2G 폰 사용자들의 요금제가 스마트하게 고가를 받을 수 없으며, 그들은 한번 요금을 내면 그저 계속 그 요금을 내는 스마트하지 않은 나이의 사용자들이었으며, 낡은 2G 장비들을 유지하는 비용보다 계속 늘어가는 최신 장비들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얻는 통신사의 이득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 6월에 내가 사용하던 기기로

5G를 개통하였다.

나는 강남 한복판 아파트 숲에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G는 제대로 터지지 않아 중간중간 끊기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엄청난 광고비와 설비비를 쏟아부었다고 하면서 정작 출시된 최신폰은 LTE(4G) 요금제도 사용할 수 없게 해 놓고선 5G가 제대로 터지지 않아 LTE로 전환해야 끊김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잦다.

통신사가 재계의 상위권 기업임은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들이 돈을 버는 방식이 아무리 양아치스럽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2G를 없애서 얻는 이득이

그들이 관련 공무원들에게 룸살롱에서 뿌리는 돈보다 어마 훨씬 크다고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번호에서 '011'만 '010'으로 변경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은 위의 설명을 듣고 다시 한번 뒤통수를 잡아야 했다.

중간 번호도 통신사의 편의 때문에 저런 규칙에 의해 변경이 된단다.

시대의 조류에 동참하지 못한 지질한 이라고 유치한 비난을 받을지라도,

내가 뭔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시비를 걸기 마련이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자본논리에 휘둘린 결정에

어떤 사람들은 기분만 나쁘겠지만

조금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 거대한 사회학적 담론을 이 화창한 일요일 정오에 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나는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고

그것은 늘 반복된다 하더라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이고

이제 없어질 내 번호에게

20여 년 넘게 나를 대표해준

내 번호에게

'안녕, 그동안 너무 고마웠고, 고생했어.'라는

말을 '꼬옥'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잊지 않을게.

사랑해.

매거진의 이전글 몇 개 국어나 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