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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07. 2022

차별과 불평등이 가득하던 시대를 살아내다 암살당했어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를 실천으로 증명하다.

1947년, 독일 바이에른의 귄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저버리고 그녀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집을 나가버렸고, 이후에 이혼절차를 밟았다. 어머니는 당장 생계를 위해 하루 종일 생활전선에 내몰려야 했기 때문에 그녀를 돌보고 키워준 사람은 바로 할머니였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자기 소신이 확실했던 할머니는 손녀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훗날 그녀가 녹색당 활동을 할 때 ‘녹색 할머니’를 자처하며 직접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1957년 어머니가 독일에 파병되어 있던 미군 중령 존 에드워드 켈리와 재혼하면서 그녀도 예전의 이름 ‘레만’을 버리고 미국식 이름 ‘켈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959년 의붓동생 그레이스가 태어나고, 페트라의 가족은 그 해 11월 의붓아버지의 귀국 명령으로 인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독일의 정치가이자 유럽 녹색운동의 상징이었던 시민운동가. ‘녹색여신’, ‘불꽃 여인’으로 불리며 독일 녹색당 창당을 이끌었던 페트라 켈리(Petra Kelly)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늘 수면부족으로 눈가에 짙은 다크서클을 드리우며 다닌 것으로 유명한데, 독일의 사회운동과 녹색당의 창립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당시 남성 위주의 독일 사회, 독일 관료사회에 대한 저항감을 녹색당에 그대로 투영해 녹색당의 성평등 정강 수립이나 기조 수립을 이끌었고 그 정신은 지금의 유럽 전역은 물론 세계에 성평등과 녹색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12살에 가정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가 엄마와 이혼한 아버지를 가진 독일 소녀가 미국 새아버지를 만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미국으로 건너와 영어로 학교에 들어가서 적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려운 것을 해낸다.


그녀는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업 성적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학생회 활동과 사회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교내 신문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글을 발표했고, 만화가로서 재능을 뽐냈으며, 학교 미식축구 팀 치어리더로도 활동했고, 탁월한 웅변 실력으로 ‘올해 최고의 웅변가’ 상을 거머쥐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설가로서의 자질과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아니러니 하게도 모국어로서가 아닌 영어로 구축하게 되었고 이 시절 그녀는 그 기본을 넘어 자신의 천성에 눈을 뜨게 된다. 물론 이것은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외국인 소녀가 몇 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웅변과 글짓기 분야에서 모국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상까지 휩쓸 경지에 오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지에 대해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실 그녀가 원래부터 이렇게 적극적이고 노력을 쏟아붓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원래 숫기가 없고 소심하던 성격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자신을 바꾸기 위해 활기차고 강인한 성격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대단한 계기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 그 모든 것은 생존의 일환이었다. 양아버지는 미국인이었고, 미국의 당시 문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의기양양한 승자를 찬양하던 능력주의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게다가 그녀의 양아버지는 해외에 파병되었던 미군이었다. 의붓 동생이 이제 막 태어나 자신이 주목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학교를 다니며 자신이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이상 소심하고 나약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그녀의 본능이 분연히 일어난 결과였다. 그렇게 그녀는 중고등학교 시기를 평생의 자신이 갖춘 자산을 가다듬는 단련의 시간으로 사용했다.

1966년 페트라는 워싱턴 D.C의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한다. 미국의 수도이자 세계 정치의 중심지였던 워싱턴 D.C 만큼 그녀의 꿈을 실현하기 좋은 무대는 없었다. 입학 전 그녀는 ‘우리 세대는 달라’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세기 숱한 전쟁을 일으킨 모든 세력들
그러나 아무리 극성스러운 악의 세력도
사랑의 힘만은 꺾을 수 없어
그 놀라운 힘 우리 안에서
66학번 우리 친구들의 힘이 되어
세상 밝히는 빛이 되리라.

대학도 입학하기 전에 발표했던 그녀의 시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지금의 그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의 미국 사회는 자신들의 삶에 집중하며 지극히 안일한 일상을 꾸미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시대로, 인권이나 반전 같은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시기였던 것이다. 특히, 그녀가 살던 지역은 인종차별도 굉장히 심각했다. 그러한 환경과 시대 분위기 속에서 페트라는 침묵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자신의 세대를 행동하는 세대로 자각했고, 참여와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꿈을 키웠다.

 

그녀는 마틴 루터 킹을 지지하고,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로버트 케네디와 휴버트 험프리의 선거운동을 하며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가졌었다. 그녀는 당시 자신의 평생 기반이 되었던 ‘비폭력의 정신’을 갖춰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여기에는 간디나 헨리 소로우 같은 이들의 영향이 컸지만, 케네디 형제와 킹 목사의 암살 사건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다. 생각이 다르고, 자신의 이익과 배치된다고 해서 정치 지도자와 인권 운동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되는 것을 보면서, 또 킹 목사의 죽음에 분개한 흑인들이 또 다른 폭력으로 저항하는 악순환을 경험하게 되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폭력으로는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으며, 어떤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을 직접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즈음에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킹 목사의 암살이 일어나고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그녀는 혹시 그 와중에 불상사를 당할지 몰라 평소 친분이 있던 엘리자베스 로스토의 집으로 피신한다.


엘리자베스의 남편은 당시 존슨 대통령의 안보 담당 정책보좌관이었는데, 그날 밤 페트라는 서재에서 그가 백악관과 통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된다. 베트남전과 관련해서 몇 군데 목표를 정해 새로운 공격을 감행하자는 내용이었다. 수만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을 두고 그들은 사무적인 태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망설임은 고사하고 죄책감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전화를 끊고 식탁으로 돌아와 손님들과 태연하게 전쟁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전율을 경험했다고 그녀는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처음 의도대로 1학년 때부터 빼어난 성적으로 그 해의 뛰어난 외국인 학생으로도 선정되면서 정치권 인사들과의 교류를 넓혀나갔다. 자신의 활동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설득하고 단체를 조직하는 일에 이미 착수했던 것이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데 탁월했던 것은 웅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편지를 통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뻔한 미사여구만 잔뜩 늘어놓는 편지가 아니라 진심이 느껴지는 유려한 문체로 자신의 의도가 확실하게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때까지 계속해서 편지를 썼다. 존 케네디가 죽었을 때는 유족에게 감동적인 위로의 편지를 보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존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에서 외국인에게는 주지 않는 특별장학금 제도의 맹점을 뒤늦게 알고는 당시 뉴욕 주 상원의원이던 로버트에게 편지를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하여 장학금 수혜를 받아낸 것이다. 또한 암으로 투병하던 동생 그레이스의 꿈이 교황을 만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편지를 써서 교황청을 움직여 교황 바오로 6세의 축복 기도를 직접 받기도 했다.


그녀가 단독으로 주최한 ‘국제주간행사’에서도 편지 외교는 빛을 발했다. 세계 곳곳의 사정과 현안을 공부하고 국제적 교류를 확대할 목적으로 각국 외교관을 초청하는 행사였는데, 첫해의 행사가 초라하게 끝나버리자, 이듬해에는 도저히 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서 각국 외교관들에게 돌려 언론까지 깜짝 놀랄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 페트라는 유럽의 동서문제를 다룬 탁월한 논문으로 대학을 졸업하면서 앨런 보너 기념상과 브루스 휴즈상을 받았다. 그리고 아메리칸 대학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프린스턴 대학에서 선발하는 우드로우 윌슨 장학생에 뽑혔다.

그 뒤 페트라는 유럽의 통합 문제를 연구하기로 진로를 정하고 암스테르담 대학의 유럽학과에 진학하기로 한다. 특이할 점은 그때까지도 그녀는 양아버지의 성을 따르면서도 독일(서독)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복안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1971년, 페트라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유럽연구소에서 연구조교로 일하면서 유럽 통합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10월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에 취직해서 6개월간 수습을 받는다. 그런데 유럽공동체의 심장부에 들어가 그녀가 경험한 것은 온 세상을 장악한 남성들만의 권력 요새였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생존이 걸린 문제를 남성들 몇만이 모여 앉아 점심 메뉴 정하듯 별 고민 없이 태연히 결정하는 것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당시 이런 남성 중심의 문화는 정치계에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교회와 국가기관, 회사, 노조, 심지어 그녀가 몸담은 운동단체에서조차 남성 우위의 분위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자신이 이후 발기한 녹색당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페트라는 여성과 관련된 일은 여자들끼리 알아서 처리하라는 남성 동료들의 태도를 보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남성들의 질서 속에 성공적으로 편입한 여성도 결국 구색 갖추기 용일뿐 실질적인 양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이른바 꼴페미와 구분되는 그녀의 인식이 정립된다. 페트라는 여성운동에서 남성들을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문제를 여성만의 문제로 보지 않고, 남성과 연계해서 해결해야 할 사회 전체의 문제로 여겼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성과 남성 사이에 또 다른 담을 쌓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궁극적 목표는 남성들의 땅으로 들어가 그들과 마주 서고, 정치 현장으로 진출해 그들과 동반자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 진정으로 새로운 여성이 탄생하려면 그에 어울리는 새로운 남성이 탄생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그녀의 주장은 남성들의 시스템에 내재한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까지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2년 수습이 끝난 뒤 ‘경제사회위원회’ 행정사무관으로 발령받은 페트라는 유럽공동체에서 근무하던 중에도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당시 급증하듯 번져나가던 지역 풀뿌리 시민운동이었다.

평범한 이들이 정치가만의 ‘정치’라는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면서 주변의 일상적 문제로 단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단체의 수는 1972년에 무려 1천여 개에 이르렀고, 이것들이 모여 ‘시민주도 환경보호 전국연합(BBU)’이 결성되었다. 시작은 자기 동네의 핵발전소 건설이나 환경오염, 숲 황폐화 같은 문제를 다루는 단체였다.


페트라가 이 단체에 가담한 것은 ‘뵐’이라는 마을에 핵발전소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지역 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부터였다. 훗날 뵐에서의 이 운동은 주민 합의와 비폭력, 외부 정당 개입 반대 원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뜻을 관철한 반핵운동의 모범 사례로 간주되었다.

 

1977년 BBU 상임위원으로 선출된 페트라는, 환경파괴가 경제적 불평등이나 사회정의, 국가권력의 남용 같은 정치 문제와 깊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여성운동과 환경운동, 평화운동, 반전운동이 별개가 아닌 하나로 묶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기고 그것을 통합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시민운동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지각하고, 전국 규모의 정당을 만들어 제도권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 해결이라는 인식에 이른다. 물론 정치판에 들어서는 순간 그곳의 논리와 행동방식에 물들 것이기 때문에 정치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지만, 페트라는 정계에 뛰어든다고 해서 반드시 정치권력의 음습한 악습에 빠지지는 않고, 새로운 정당 활동으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대안 정치를 꿈꾸는 여러 사람들(요제프 보이스, 헬무트 골비처, 루디 두치케, 하인리히 뵐등)과 함께 ‘여타 정치연합-녹색당’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유럽의회 선거에 나갈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정당 투표로 5% 이상 득표해야만 의석이 배정되는데, 3.2퍼센트밖에 안되며 실패하게 된 것이다. 당시 조직도 자금도 없는 햇병아리는 그 작은 성과를 토대로 ‘정치연합’의 껍질을 뚫고 공식 정당으로 거듭날 준비에 돌입했고, 이름도 ‘녹색당’이라고 정했다.


그렇게 1980년 1월 생태주의와 사회적 책임, 풀뿌리 민주주의와 비폭력을 표방하는 독일 녹색당은 탄생한다. 그녀는 녹색당 의장으로서 40만 명이 참가하는 반핵 평화 시위를 주도하고 광범한 국제적 동참을 이끌었다. 1982년부터 페트라의 신당은 날로 인기가 높아졌다.

 

드디어 1983년 총선, 녹색당은 5.6%의 지지율로 비례대표를 배정받았고, 페트라는 26명의 다른 녹색당 의원들과 함께 처음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모든 정당에 반대하는 정당이 역사에 첫 신고식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페트라는 의정 생활 중에 일중독에 빠진 사람처럼 일했다. 그녀는 독일 연방의회 국회의원으로 선출돼 생계가 보장되기 전까지 직장과 정치, 두 가지 일을 함께 처리하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몸이 약했던 그녀가 직장인 브뤼셀과 정치무대인 본을 오가며 활동을 벌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도 잦았다. 그녀의 허약한 몸은 그녀 자신이 자초한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의 일이라면, 스쳐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스스로 일거리를 만드는 지독한 일벌레였다.


때문에 그녀의 사무실은 전 세계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팩스와 우편물로 늘 비좁았고, 그녀는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며 수많은 문서들을 읽고 이에 답장을 보내는 일을 했다. 페트라가 티베트 독립운동과 제3세계 원주민 여성들의 모임을 지원했던 것도 달라이 라마와의 인연, 미국에서 접해야 했던 영어를 못하는 외국인 소녀에 대한 차별의 경험 때문이었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페트라가 녹색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데에는 이런 성실성과 진정성이 크게 작용했다. 그녀는 지치지 않는 열정과 해박한 지식, 솔직하고 생기발랄한 성격, 국제적 감각과 빼어난 외모, 해맑은 미소, 정곡을 찌르는 말과 상대를 사로잡는 연설로 대중의 호감을 샀고, 대외적으로 녹색당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녹색당의 앞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87년 총선에서 더 많은 의원을 배출하기는 했지만, 당내 노선 갈등과 미숙한 당 운영으로 여러 차례 시련을 겪었고, 그 와중에서 페트라도 원칙주의적 태도로 동료들과 소원해졌다. 결국 녹색당은 원내 진출 8년 만에 다시 원외로 내쫓겼고, 페트라 역시 의원직을 포함해서 당내 모든 직위를 잃게 된다.


이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아메리카 인디언, 티베트 문제 등에 집중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일에 시달리다 보니 급격히 약해지게 되면서 많은 부분에서 남자 친구인 게르트 바스티안에 의존할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24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던 두 연인은 1992년 10월 19일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여러 증거와 정황을 종합해서 동반자살로 발표했다. 바스티안이 잠든 켈리를 먼저 쏘고 자신도 그 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들이 속속 드러났다. 유서는 물론이고 자살의 사유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자살에서 보이는 그 어떤 과정도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반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켈리는 잠들기 전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팩스를 확인하고 원고를 점검했으며, 바스티안은 죽기 직전에 켈리의 친구 일로 자신의 변호사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타자기에 꽂힌 종이에는 ‘müssen’(영어의 must)이라는 동사가 ‘müs-’까지만 타이핑되어 있었다.


즉, 어지간히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단어를 마쳐 치지 못할 만한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증빙하는 증거가 나온 것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이고 자살까지 감행할 사람이 그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이러한 수많은 의문점들로 인해 자연스레 암살설이 대두되었다. 반핵이나 녹색운동, 빈민구제, 티베트 지원 같은 활동을 하다 보면 당연히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세력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용의자는 너무 많았다.


소련의 KGB나 중국 정부, 혹은 네오나치나 동독 슈타지가 용의자로 등장했지만, 이상하게도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고 진실은 덮였다. 살해 당시 그녀의 나이 불과 44살이었다.

지금은 ‘녹색’이니 ‘환경’이라는 운동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처럼 들리지만, 3,40년 전에만 그런 단어는 생경하기 이를 데 없는 신조어에 불과했다. 그런 개념을 전 세계에 퍼뜨리고, 현실 정치 무대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페트라 켈리였다. 그러한 이유로 페트라 켈리는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열정을 불사른 ‘녹색의 잔다르크’로 추앙받는다.

 


그런데 내가 오늘 그녀의 불꽃같았던 삶을 소개한 가장 큰 이유는, 인종차별, 성평등, 녹색환경운동 등의 선구자로서 그녀가 갖는 역할도 역할이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의식의 변화와 그녀가 이미 그 시기에 진정한 정치의 의미를 깨닫고 움직였다는 점을 당신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녹색’ 이념은 단순히 환경보호 같은 소극적 의미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거시적 질문과 연결되어 있으며, 환경과 인권, 평화의 기치 아래 함께 모인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거창하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녀는 이러한 것들이 각기 분리된 사회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자신이 운동을 진행하면서 깨닫게 된다.

 

사실 그녀가 정치에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전인 1972년, 그녀는 먼저 사회민주당에 가입한다. 전후 최초의 사민당 출신 총리인 빌리 브란트에 감명받았고, 그의 정당을 통해서라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리 브란트 이후의 사민당이 주류 정당이라는 한계로 시민사회의 열망을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고 느낀 켈리는 1979년 사민당 당적을 버리고 여러 단체들과 대안정치연대인 '모든 정당을 반대하는 정당' 녹색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녀가 보인 일련의 과정이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합리와 바로잡아야 할 문제에서 시작한 그녀가 정치로 그것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었고, 처음 풀뿌리 시민운동을 시작으로 움직여보지만 결국 총체적인 문제이고 전국구의 정치로서 사회를 움직이지 않고서는 그것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을 직접 깨닫게 되는 것도 그녀가 직접 온몸으로 부딪히며 얻어낸 결론이기에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앞서 그녀가 지금의 꼴페미처럼 여자를 우대해야 하고 유리천장을 깨뜨리려면 남성 우위의 사회를 혁파해야 한다는 징징거리는 미성숙한 페미니스트들보다 훨씬 우위의 진화된 주장을 이미 당시에 했던 것도 그런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비폭력을 전제로 했던 그녀의 모토는 ‘부드럽게 세상을 뒤집자!’였다.

 

잔다르크가 한 민족을 위해 폭력적으로 싸웠다면 페트라는 세계를 위해 비폭력적으로 싸웠다. 그녀는 죽고 없었지만, 1998년 독일 녹색당은 드디어 사민당과의 연정으로 정권을 잡게 된다. 불가능처럼 보였던 페트라의 꿈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1992년 이후 하인리히 뵐 재단은 인권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세계의 활동가들에게 ‘페트라 켈리 평화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그녀가 인류에게 사랑과 평화, 희망의 녹색 신화로 남아 있음을 상징적으로 선포하였다.

 

당신에게 정치가, 혹은 시민운동이 어떤 의미로 인식되었는지 잘 안다. 내가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브런치를 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맞다. 내 글쓰기를 통해 공감을 구축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글을 쓴다. 이것은 바로 페트라의 정신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녀는, ‘가장 개인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문제가 시작된다.’는 것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 깨달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다. 비록 그녀가 막 꿈을 펼치려던 나이에 암살당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정신은 지금 수많은 환경운동가들과 시민운동가들의 초석이 되었다.

 

당신이 사회에 실망하고 현실에 실망하고는, ‘원래 세상이 다 그렇지, 뭐.’라고 포기했던 일을 40여 년 전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끌어다가 불태우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뭐 그렇게 죽고 살 일이 아니면 일일이 불합리에 분노하고 바로잡으려고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페트라의 의붓동생 그레이스는 소아암으로 죽었다.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한 그녀는 방사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재단을 세워 그런 문제를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도움을 주는 일을 벌였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자신을 ‘직관적이고 집요하고 위험한 인물’이라고 말하며 ‘시비꾼’이라는 표현을 썼다. 다분히 중의적이고 자조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녀가 말한 의미의 속뜻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내가 늘 듣는 소리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녀가 왜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시민운동을 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는지를 아주 잘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면 좋은 소리를 듣기보다는, 매번 시비 거는 싸움꾼으로 비난받기 일쑤이고, 일을 바로잡게 되더라도 공치사 한번 제대로 듣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그 작은 일들이 결국 우리의 발목을 잡고 우리 사회를 좀먹으며 결국 썩은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큰 비리와 사회를 썩어 문드러지게 한다는 것을 페트라는 자신이 직접 현장에서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경험하고 깨닫게 된다.


그것은 환경운동이 따로 있고, 여성 불평등이 따로 있으며, 인종차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임을 깨닫고 전체적인 움직임을 바로 우리가 뛰어들어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목소리를 사람들의 양심에 대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녀가 살해된 지 이미 30년이 다 되었다.


당신은 30년 전의 그녀의 목소리에 양심의 울림이 느껴지지 않는가?


당신이 바뀌지 않는다면, 당신의 자녀에게 돌아갈 시대는 지금의 불합리와 부정부패보다 더 악화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개선되지 못할 것이다.

페트라가 했던 녹색 환경운동은 우리 자손들에게 썩은 지구를 남겨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그녀는 단순한 녹색 환경 운동가가 아니었음은 당신이 오늘 살펴본 바와 같다.


당신은 썩은 사회를 그대로 당신의 자녀에게 던져줄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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