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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08. 2022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모두에게 이용만 당하고서도

모든 이들을 위한 삶을 사는 요정으로 거듭나다.

1961년, 챠우세스코라는 독재자에 의해 개개인의 자유가 철저히 억압받고 있던 루마니아 오네슈티라는 작은 마을에서 금속 노동자인 아버지와 노동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노동자 출신이라 워낙 활동적이던 다섯 살 꼬마를 지치게 만들어 피곤하게 해서 곯아떨어지게 만들려는 생각에 체조교실에 보낸 것이 그녀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4000여 명의 아이들을 테스트하여 체조선수를 선발하던 벨라 카롤리(Béla Károlyi)에게 발탁되면서 그녀는 어린 소녀의 삶을 반납하고 체조선수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벨라 카롤리는 훌륭한 체조선수를 키워내는 불세출의 코치였지만, 그의 훈련 스타일은 훗날 아동학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 하루 평균 8시간 이상의 훈련을 요구하였으며 체조에 적합한 작고 귀여우며 유연한 몸을 만들기 위해 식사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생활은 규칙에 의해 통제되어 시간별로 짜여져 있었고, 이를 어기면 실력의 고하를 떠나 체조학교에서 퇴출되었다. 

그녀와 어린 소녀 동료들은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벨라 카롤리의 지도 아래 마치 체조 하나만을 위해 태어난 인간처럼 변모해갔다.

 

그녀의 선수 생활은 8살이 되던 해인 1969년, 루마니아 전국 청소년 체조 선수권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참가한 대회에서 그녀는 실수를 거듭한 끝에 전국 13위를 기록한다. 


이 대회는 그녀가 경험했던 최초의 실패였으며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하였음에도 긴장한 탓에 벌어진 실수들로 인해 그녀는 눈물을 삼킨다. 이때의 뼈아픈 경험으로 그녀는 스스로 더욱 훈련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 결과 이듬해 같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그녀의 신화가 시작된다.

루마니아계 미국인으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 역사상 세계 최초로 10점 만점을 기록한 체조계의 전설, 살아있는 체조계의 요정이라고 불리는 나디아 엘레나 코마네치(Nadia Elena Comăneci)의 이야기이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에 루마니아 체조 국가대표로 출전하였는데 당시 코마네치는 14세였다. 코마네치는 여자 체조 사상 처음으로 7차례의 만점(10점)을 기록했고, 3관왕에 올랐다. 미국의 <타임> 지는 코마네치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다. 그로부터 4년 뒤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추가하는 등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에서 2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1984년 은퇴했다.

코마네치는 1972년 공산주의 국가연합 청소년 체조 선수권대회에 참가하며 국제무대에 데뷔하였는데, 이 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따냈고 이후 1973년, 1974년 대회에서는 전 부문에서 우승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 열 살이 갓 넘은 나이로 주니어가 아닌 일반 선수 자격으로 참가한 1975년 세계 대회에서는 당시 가장 촉망받는 체조선수였던 소련의 투르시체바를 제치고 1위에 올라 체조계의 주목을 일찌감치 받게 된다. 


체조계가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때 그녀가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체조 기술인 ‘코마네치 내리기’를 완성하여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기술은 반 바퀴를 비틀어 뒤로 공중돌기를 하며 착지하는 고난이도의 기술로 그녀밖에 구사할 수 없었기에 그녀의 이름이 붙은 기술이었다. 

체조계에 이미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그녀는 몬트리올 올림픽이 있기 바로 직전 뉴욕에서 개최된 아메리카컵 대회에서도 우승했으며 여자 체조 선수로서는 최초로 2단 평행봉에서 2회전 뒤로 공중 돌기를 하면서 착지하는 고난도의 기술을 성공시켰다. 당시 남자부 우승을 차지한 것은 현재의 남편 바트 코너였다.

 

1976년 7월, 제21회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캐나다 몬트리올의 체조경기장. 루마니아 대표로 참가한 14세의 소녀 나디아 코마네치가 2단 평행봉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관중들은 키 153cm, 몸무게 39kg의 작은 소녀가 2단 평행봉 위에서 한 마리 나비처럼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소녀가 자신만의 특별한 기술인 코마네치 내리기로 완벽하게 땅에 착지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요정과 같은 소녀의 마법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마법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경기 점수가 전광판에 표시되자 장내는 순간 술렁였다. 

그토록 완벽한 경기를 펼친 소녀의 점수는 고작 1.00이라고 표기된 것이다. 관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루마니아의 체조 코치 벨라 카롤리가 어이없는 점수에 항의를 하기 위해 거칠게 일어섰다. 그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열 손가락을 펴 보이며 일어나 외쳤다.

 

“1점이 아니라 10점! 10점 만점에 10점이오!’”

 

그녀의 명연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코마네치는 그 후 그 대회에서만 10점 만점을 여섯 차례나 더 기록하며 결국 금메달 셋(개인종합, 평균대, 이단 평행봉), 은메달 하나(단체종합), 동메달 하나(마루운동)을 획득해낸다. 

사실 당시까지 체조는 종목의 특성상 기록경기가 아닌 인간의 눈으로 선수들의 플레이(또는 연기)를 보고 10점을 만점으로 해서 점수를 매기는 경기라는 점 때문에 10점 만점을 주기가 어려운 종목이었다. 신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게 당시 체조계의 불문율이었던 것이다. 그런 당시 관점에서 보자면, 그녀의 만점은 그녀의 연기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즉 심판들이 앞으로 ‘이보다 더 뛰어난 플레이는 없다’는 뜻에서 만장일치의 만점을 준 것이었다.

 

그렇게 여자 체조는 코마네치를 기점으로 여성미를 보여주는 눈요깃거리 스포츠에서 기술이 가미된 ‘예술’로 승화했다. 1976년의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 이후 그녀는 당시 공산국가였던 루마니아의 국민적 ‘영웅’(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늦추어진 산업화를 격려하기 위해 생산성이 높은 노동자들을 생산 영웅, 노력 영웅이라고 칭하며, 노동자들을 격려했다.)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코마네치는 뛰어난 체조 실력만큼이나 별명도 많았다. 체조경기장에서는 웃음 짓는 일이 거의 없어서 ‘작은 바위 덩어리’로 불렸고, 가로 10cm의 평균대를 훨훨 날고 이단평행봉에서 공중을 헤집듯이 절묘한 묘기를 연출할 때는 ‘냉정한 작은 벼룩’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타임》지에서는 그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까지 극찬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되는 아디다스의 ‘Impossible, is nothing(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광고는 실제 올림픽에서의 경기가 아니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코마네치가 연기한 평행봉 체조에, 광고가 방영 중이었던 2005년 당시 미국의 최고 유망주였던 나스티아 리우킨(Anastasia Valeryevna Nasta Liukin)의 경기를 합성한 영상이다.


코마네치의 회고에 의하면 피나는 연습만으로 점철되었을 그 소녀시절이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고 하였지만,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그녀가 서방언론과 한 인터뷰에 보면, 경기가 끝나면 실컷 먹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싶다고 한 소박하지만 가장 절실한 소망이 여실히 드러나있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의 성공 이후 코마네치는 당시 공산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에서 젊은이로 성장하면서 자유가 없는 사회에 대한 어려움과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는 것도 많아졌고, 마침내 삶도, 경기도 결코 공정하지 않으며, 복종은 선택이지 주어진 숙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평범한 10대를 누리고픈 욕망과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고픈 욕망은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1977년 그녀는 주로 앞으로 뭘 하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만 골몰했다. 체조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나간다고 느꼈고, 여느 십 대처럼 혼란스러웠고 불안했으며, 자신의 삶의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당시 루마니아 체조연맹은 벨라 카롤리 코치와 코마네치를 당분간 떼어놓은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그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벨라 카롤리 코치를 떠나 루마니아의 수도 부크레슈티로 간다. 루마니아 정부는 그녀를 좀 더 효과적으로 정치 선전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코마네치의 세계적인 인기를 이용해 미국 투어를 개최했던 루마니아 공산당 당국은 당시 무려 250,000 달러를 벌어들이고서는 그녀에게는 1000달러만 지급하는 뻔뻔함을 보이며 그녀를 돈을 벌어오는 도구로만 사용한다.

사실 코치의 워낙 억압이 강했던 훈련 방식도 세계 최고라고 인정받은 소녀에게는 불만의 폭발을 가져왔고, 10대 후반 사춘기를 맞고 있던 코마네치는 그동안의 절제를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폭식을 거듭하는 방만한 생활로 살이 쪘고 선수로서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거기에 부모마저 이혼을 하고 코치와의 결별로 훈련을 제대로 할 리도 없었다.

 

2년 뒤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벨라 카롤리가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훈련이 시작되었다. 누구의 강요가 아닌 그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자발적인 훈련이었다. 1978년 카롤리는 정부로부터 전국 청소년 체조대회 팀을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 데리고 나가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정부는 거기에 덧붙여 새로운 선수들과 함께 과거 팀원들도 반드시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카롤리는 코마네치를 다시 복귀시키기로 마음먹고, 그 해 그녀는 그와 함께 데바로 돌아갔다. 하지만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위에 그치는 부진함을 보였고, 언론은 그녀가 끝장났으며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혹평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혹평에 더욱 분발했고, 훈련을 계속해 불과 다섯 달 뒤에, 시련을 극복하고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렇게 그녀는 누구도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는 상황에서 재기에 성공한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4년 전 등장한 체조요정 코마네치가 다시 나타났다. 4년 전보다 몸이 조금 더 불고 귀여운 자태는 사라졌지만 이제는 요정이 아닌 한 사람의 체조선수로서 그녀는 훌륭히 경기를 치러냈다. 

결과도 좋았다. 그녀는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했고, 개인 종합 2위로 은메달도 땄다. 이 경기에서 코마네치는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과감하면서도 우아하게 인간 육체가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전설로 등극하고 나서 1977년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만났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코마네치는 루마니아의 영웅으로 극진 대우를 받았다. 당연히 루마니아 정부에서도 처음에는 그녀를 영웅 대접해주었다. 

몬트리올과 모스크바 두 올림픽에서 코마네치는 세계인들에게 너무나 큰 인상을 남겼지만, 그녀 자신은 스스로 이루어낸 엄청난 성공을 감당할 수도, 실감할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그녀는 금메달리스트 체조선수이기 전에 10대의 어린 소녀에 불과했을 뿐이고, 그녀의 조국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치하에서 세계 어디에도 유래가 없는 완벽한 통제사회였기 때문이었다. 


코마네치는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우위를 선전하는 훌륭한 선전도구로 충분히, 그리고 매우 자주 이용되었지만 실제로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접은 형편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스승인 벨라 카롤리가 차우셰스쿠 정권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미국으로 망명해버린다. 이 망명의 여파는 코마네치에게도 여지없이 미쳤다. 벨라 카롤리의 망명 이후 코마네치는 다시는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핍박과 감시도 더욱 강도가 심해졌다. 정부는 그녀를 연금하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고, 국제대회 출전도 불허하였다. 심지어 생필품을 잘 공급하지 않아 가족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녀에게는 하루하루가 감옥이고 지옥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차우셰스쿠 정권에 소모만 당하고 사는 자신의 삶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스물여덟 나이에 그녀는 망명을 결심한다.


1989년 11월 추운 겨울밤 코마네치는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 시민권자였던 콘스탄틴 패니의 도움으로 얼어붙은 벌판을 몇 날 며칠을 헤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국경 수비병의 총알을 맞을 수도 있고 겨울 들판에서 얼어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을 건 위험한 망명길이었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이 혁명으로 무너지기 불과 20여 일 전의 일이었다.

 

여권도 없이 루마니아를 탈출했지만 ‘나디아 코마네치’라는 이름은 그 어떤 여권이나 비자보다 강력했다. 그녀의 망명 수속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미국 대사관은 그녀가 망명의사를 밝히자마자 두 시간 만에 미국으로 가는 팬 항공의 1등석을 마련해주었다. 

뒤의 콧수염이 콘스탄틴 패니

코마네치가 미국의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는 죽음을 불사하고 독재 정권을 뛰쳐나온 왕년의 체조요정을 보기 위한 인파로 붐볐다. 그러나 그녀가 카메라 앞에 나타나자 코마네치에 대한 동정과 호의는 차가운 경멸로 뒤바뀌고 말았다. 카메라 앞에 나선 그녀의 복장과 화장은 촌스럽고 천박했으며,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탓에 인터뷰는 무성의하기 그지없어 보였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망명을 도와준 콘스탄틴 패니가 아이 넷을 둔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 약점 잡기 좋아하는 옐로 저널리즘의 훌륭한 먹잇감이 되었다. 실제로 그의 아내는 당시 미디어에 울며불며 자신의 남편이 자신과 가정을 내팽개치고 코마네치와 붙어 다닌다며 막장 스캔들에 불을 지폈다.

 

사실 처음부터 코마네치의 망명을 도운 콘스탄틴 패니의 의도는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의도는 코마네치를 미국으로 빼내 와 돈벌이로 삼을 계획이었다. 콘스탄틴 패니는 실제로 코마네치를 독점하기 위해 그녀가 선수 시절 알던 미국 지인들의 연락처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억압과 가난에서 자유를 찾아 이것저것 따질 새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콘스탄틴 패니의 도움을 받은 코마네치의 명성은 치명적 스캔들 앞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콘스탄틴 패니가 잡아오는 싸구려 행사에 천박한 화장을 하고 나가야 했으며 그때마다 서툰 영어 때문에 면박을 당하고 오해를 샀다. 


그녀에게 동정적이었던 일부 언론도 그녀를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격한 통제사회에 살던 코마네치에게 갑자기 찾아온 자유는 새로운 고통으로 변해서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콘스탄틴 패니와도 결별을 선언하고 캐나다에서 칩거하게 된다. 그때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무려 20년 전 몬트리올 올림픽의 전설이 탄생하기 직전 뉴욕 대회에서 남녀 챔피언으로 인연을 맺었던 올림픽 금메달 3관왕의 버트 코너였다. 


버트 코너는 은퇴 후 자신이 하고 있는 스포츠 관련 사업에 코마네치가 동참해줄 것을 제안했다. 체조에 관한 모든 것과는 연을 끊고 살겠다고 다짐하던 코마네치에게 코너가 말하길, 스포츠에는 명예와 영광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고 설득했고, 코마네치는 이 말을 듣고 예전의 경험을 살려 체조 지도자로 재기했다. 

미국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녀를 이용해왔던 사람들과 달리 버트 코너는 동등하고 정당한 사업 파트너로 그녀를 존중했다. 둘 사이에 애정도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망명 후 사람들로 인해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은 코마네치는 자신의 사랑에 조심스러웠고 버트 코너는 그녀의 그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4년간의 기다림 끝에 1996년, 마침내 나디아 코마네치는 버트 코너와 루마니아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 코마네치는 버트 코너와 함께 오클라호마에서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스포츠 언론계와 모델계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08년 6월에는 우리나라에서 체조 갈라쇼를 총연출 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다양한 세계적인 자선사업을 통해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삶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

 


 

시작 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시작되자마자 또 다른 의미에서 중국의 후안무치한 행위들로 점철되어 올림픽의 의미가 퇴색될 지경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그래서 요정이 탄생했던 1976년 그 전설의 탄생을 회상하게 되었다.

 

당신이라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배급을 받아 생활하는 지경의 노동자 집안에서 운동을 통해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서도 변함이 없는 생활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사실 처음 그녀가 실패하고 루마니아에서 13위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을 때부터 그녀의 실패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성공의 정점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올라가는 일만 있을 시기였기에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으로 전 세계적인 전설로 인정을 받았음에도 그것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도 못하고, 더 무언가 이뤄야 할 목표를 잃고 방황했을 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모가 불화로 이혼까지 했을 때, 그녀는 불과 열다섯의 나이였다. 


다섯 살에 시작해서 체조 말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먹는 것을 제한받고 끊임없는 체벌과 압박 분위기에서 체조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 같았던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폭식으로 몸이 망가지고 모두가 그녀는 한물갔다고 했을 때, 그녀는 다시 자신을 몰아붙였던 코치를 다시 찾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그래 봐야 그녀의 나이 17살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끝나 철이 들었다고 볼 나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녀는 다시 시작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원래의 요정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국내 대회부터 다시 시작하여 한물갔다는 멸시와 비난을 받으며 이를 더 악물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에서 몬트리올 올림픽보다 모스크바 올림픽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깜찍한 14살의 소녀가 아닌 숙녀로 변해있었지만, 그에 걸맞은 완숙하고도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전설의 부활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모두는 4년 전의 올림픽에서의 전설만을 기억했기에 4년간 그녀가 겪었을 그 고통스러운 부활의 과정을 기억하지 못한다. 


맞다. 사람들은 모두 성공하여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금메달을 목에 거는 그 장면을 기억할 뿐, 그것을 얻어내기까지 피와 땀으로 젖었을 그들의 영혼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저 막연하게 ‘열심히 노력했겠지’ 정도로만 생각할 뿐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하였기에 감히 가늠할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녀는 루마니아 독재자에게 선전도구로 이용당해야만 했고, 망명을 하면서도 서커스에서 돈벌이의 대상으로 이용만 당해야만 했다. 그녀가 최근의 활동에 자선활동과 세계적인 기부에 힘을 쏟는 것도 모두 자신의 그 어려웠던 시기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찾은 사람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조숙아로 태어나 사선을 넘나드는 고난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삶 어느 한순간 평탄하게 그냥 넘어가는 순간이라고는 없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실패와 고난이 당신의 것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마음, 잘 안다. 왜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는지 화가 나고 당신이 무슨 잘못을 그렇게 많이 했다고 그런 고난을 하늘이 내리는지 원망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잘 안다.


하지만, 하늘은 그가 이기지 못할 고난을 결코 그에게 던져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때 그가 가질 더 큰 행복과 성취를 알고 있는 자에게만 그런 고난을 던진다. 그것을 이겨내기까지가 힘들 뿐, 그것을 이겨내고 나면 웃으며 추억거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별것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세기의 전설이던 코마네치도 죽음을 생각할 정도의 고통이 연이어 그녀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그 고난의 파고를 모두 넘은 그녀는 지금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더 큰 고난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사랑을 나눠주는 입장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당신이 언젠가 이 글을 떠올리며 그리고 코마네치의 삶을 떠올리며 당신에게도 그런 고난이 있었다며 웃으며 지금의 고난과 실패를 추억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당신은 지금 이 악물고 그 고난의 시험에서 통과해야만 한다. 그것을 통과한 자만이 온전한 자신의 인생을 누릴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언제 그 고통이 끝날지 모르고 과연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지 막연해져 힘이 빠지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지금이라도 당장 그 끈을 놓아버리고 싶어지는 마음, 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그대로 스러지는 것을 나는 용납하지 못하겠다.

 

당신의 삶이, 당신의 희망이 이미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부모님과 이미 당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당신에게는 너무나 많지 않은가?


당신을 위해서만이 이유가 되기 어렵다면, 당신이 지켜야만 할, 당신을 믿고 기다려주는 그 사랑들을 위해 버티고 이겨내라.


당신이 반드시 그럴 수 있는 사람임을 믿고 또 믿어주는 사랑하는 당신의 가족을 떠올리며 이겨내라. 당신이 겪는 그 모든 고난은 그 산을 넘고 나면 당신에게 모두 자산으로 돌아온다.


조금 먼저 그 길을 걸어온 이들의 삶을 그 증거로 매일같이 당신에게 들려주는 이유이다.


일어나라, 분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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