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Feb 09. 2022

고등학교 중퇴 학력에 창업할만한 창의성도 없었지만

50이 넘어 세계 최초 프랜차이즈 사업의 대부로 우뚝 서다.

1902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의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사업적 감각과 재주가 있어 소다수며 악기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늘 뭔가 이루어지지도 않는 일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해 ‘대니 드리머(Danny Dreamer)’라는 별명이 붙었다. 레모네이드 가판대를 차리는 상상을 한 뒤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그렇게 했다. 


기회만 생기면 어딘가에서 일을 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진정으로 즐겼던 것은 토론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고 청중을 설득하는 것을 좋아했다. 고교 중퇴 후 세일즈맨, 피아노 연주자 등으로 활동하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지원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나이를 속이고 일종의 편법으로 적십자 구급차 운전병으로 입대했다.

 

그곳에서 자신과 똑같이 나이를 속이고 입대한 병사 한 명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막사 안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던 월트 디즈니였다. 

 

이후, 그는 어느 작은 주방용품 회사의 영업사원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하던 일은 시카고 인근의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당시 그의 회사에서는 한꺼번에 다섯 잔의 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는 신제품 멀티 믹서를 내놓았지만 판매는 영 신통치 않았다.

 

1954년, 50대에 멀티 믹서기 판매를 던 그는 캘리포니아 주 샌버너디노의 작은 드라이브인 식당에서 이 신제품을 무려 8대나 구입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도대체 그 식당이 뭘 파는 곳이길래, 이렇게 많은 밀크셰이크용 믹서기를 많이 구입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직접 그 가게에 방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서는 그 가게를 찾아게서 직접 그 이유를 알아내게 된다.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햄버거와 밀크셰이크를 사는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의 머릿속에는 상상의 나래가 번개를 맞은 것처럼 번쩍 스치고 지나간다.

 

사업가 특유의 감각으로 전국 프랜차이즈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이 식당을 전국의 도로 변마다 세우면 대박이 날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는 식당 주인 형제에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고, 바로 양측은 변호사를 대동하고 만나 계약 조건을 결정했다. 


매장 이름을 비롯하여 메뉴, 매장 구조, 운영 방식, 심지어 일종의 상징물인 금색 아치까지도 원래 주인 형제가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세부적인 내용들에 대해 합의했다. 그 식당의 이름은 주인 형제의 성(姓)을 그대로 따서 붙인 지금은 전 세계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그 ‘맥도날드’(McDonald’s)라는 가게였다.

정작 맥도날드를 창립한 사람도 아니면서 현재의 맥도날드를 있게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체코계 미국인 사업가이자 미국 벤처 정신의 상징으로 불리는 레이 크록(Ray Kroc)의 이야기이다.

 

그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원형을 만들고 전 세계에 퍼트렸다. 남들이 은퇴 후를 계획할 52세 때 패스트푸드 사업에 도전하여 시작한 맥도널드는 현재 전 세계 120여 개 나라 3만 5,000여 매장에서 1,800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매일 6,900만 명의 고객들을 맞이한다.

 

대표 상품 ‘빅맥’이 각 나라의 물가를 측정하는 지수로 사용될 정도로 맥도널드의 브랜드 가치는 물론 현재 단일 기업으로는 가장 많은 부동산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으로까지 성장했다. 그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 올랐으며 수많은 기업인에게 영감을 주고 영향을 끼쳤다.

본래 ‘맥도날드’라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식당의 창업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모리스 제임스 맥도날드(Maurice James McDonald, 1902~ 1971)와 리처드 제임스 맥도날드(Richard James McDonald, 1909~1998) 형제였다. 뉴햄프셔 출신인 이들은 1920년대에 캘리포니아로 와서 영화업계에서 일하다가 1937년에 처음 이 식당을 차린다.

맥도날드 형제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던 맥도날드 식당은 지금의 맥도날드와는 이름 빼고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창업 초기인 1940년대는 고속도로 운전자들이 차에 탄 채로 즉석에서 햄버거나 밀크셰이크 등을 사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드라이브인 노점이 인기를 끌었다. 맥도날드도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에 편승한 식당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맥도날드는 지금처럼 햄버거가 아닌 바베큐를 주력 메뉴로 삼았다. 오히려 햄버거는 당시 취급했던 27가지 메뉴 중에서 가장 뒤에 등장하는 구색을 갖추기 위한 메뉴에 가까웠다. 가게 이름도 정확히는 ‘맥도날드 페이머스 바비큐’였다. 창업하고 나서 얼마간은 돈벌이가 제법 쏠쏠했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다른 가게들과 차별성이 없는 그저 그런 고속도로의 한 가게로 인식되자 사업은 정체되기 시작했고, 맥도날드 형제는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맥도날드 형제는 드라이브인 자체의 한계점을 파악했다. 주문하고 음식을 받는 데까지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렸고, 주문을 받을 점원들도 생각 봐 많이 필요해 인건비 지출이 심했으며 고객들의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메뉴들로 인해 재료도 그렇고 수익보다 지출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분석하게 된다.

그래서 맥도날드 형제는 대대적으로 시스템을 새롭게 바꾸게 된다. 점원이 주문을 받는 대신 직접 손님이 주문하는 현재의 시스템이 처음 도입되었고, 매출을 검토한 결과 매출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햄버거와 감자튀김, 음료수라는 것을 파악하고 되어, 과감히 메뉴를 정리하여 햄버거 위주의 라인업을 갖췄다.

 

가장 중요시한 변화는 바로 음식 제공 속도의 혁신이었다. 평상시 30분이나 기다려야 할 것을 30초 만에 나오도록 고안한 것이었다. 맥도날드 형제는 인근 공원의 테니스 코트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가며 가장 효율적인 주방 동선과 기구의 배치를 고안했다. 그리고 실제 크기로 그린 전개도 위로 직원들을 보내 직접 동선을 몸에 익히도록 시뮬레이션까지 해가며 획기적인 음식 준비 시스템의 혁신을 이뤄낸다.

 

맥도날드 형제의 시스템은 손님이 직접 햄버거를 주문하고, 조리원 1명은 패티만 굽고 다른 1명은 빵을 굽는 식으로 햄버거 조리를 분업화하여 햄버거 가격과 주문한 햄버거를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절반 이상 줄였다. 그리고 접시나 식기류를 제공하지 않고 종이 포장으로만 충분한 핑거 푸드의 형태를 구현함으로써 비품 가격과 그에 들어가는 쓸데없는 인건비용까지 줄일 수 있었다.

 

이 혁신적인 시스템이 안착되기까지 시행착오를 겪긴 했지만 결국 형제는 자신들의 분석과 노력을 통해 다른 가게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요리가 제공되는 창의적인 식당으로의 탈바꿈을 창업 10년 만인 1948년에 이뤄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바로 이것이 현대의 당신이 보고 있는 패스트푸드의 시작이다.

 

그렇게 획기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폭발적인 밀크셰이크 주문을 속도에 맞춰 해결하기 위해 멀티 믹서가 출시된 것을 알게 되었고, 1954년, 그 대량 주문에 호기심을 가진 체코계 미국인 멀티 믹서 영업사원인 레이 크록이라는 사람이 이들을 찾아오면서 맥도날드의 전국구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게 된 것이다.

이렇게 52살의 한물간 믹서 판매원이던 크록은 맥도날드라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게 된다. 그는 아내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55년 4월 15일, 자신의 연고지인 시카고의 디플레인스에 맥도날드 제1호 지점을 개장한다. 물론 맥도날드의 최초 매장은 샌버너디노의 본점이고, 그 외에도 크록을 만나기 전에 맥도날드 형제가 허가한 10여 개의 프랜차이즈 지점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맥도날드가 시작된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제1호 매장은 바로 디플레인스 지점이다. 전혀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그때, 크록의 나이는 무려 53세였다. 갈 길은 멀었지만, 일단 첫걸음은 뗀 셈이었다.

맥도날드 전설의 시작, 디플레인스 지점

물론 크록의 새로운 사업이 시작부터 일사천리 성공 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었다. 프랜차이즈 권리료가 비교적 저렴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본사의 수입이 몇몇 지점의 수입을 합친 것보다도 적었다. 크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맥도날드는 각 지역 매장을 본사에서 소유하고 점주에게 장기 임대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시스템을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맥도날드는 햄버거를 파는 게 아니라, 햄버거 파는 가게를 임대하는 부동산 사업자”의 형태로 각 도시의 주요 지점의 부동산을 사들이고 개점하는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방식을 취하게 된다. 청결 관리를 철두철미 강조한 크록은 매일 아침 제1호 매장에 나가 직접 청소를 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완벽이란 성취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나는 맥도날드에 완벽을 바랐다.” 그는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QSC & V)라는 기준을 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그렇게 6년 만인 1960년에 맥도날드의 지점 수는 200개를 돌파한다. 크록은 이때부터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새로운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1961년에 본사에 일명 ‘햄버거 대학’(Hamburger University)을 만들어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전국 각지의 점주들을 모아 서비스 교육을 하고, 그 과정을 마친 사람에게는 ‘햄버거 전공, 프렌치프라이 부전공’으로 학위도 수여했다. 1963년에는 맥도날드의 마스코트인 어릿광대 ‘로날드 맥도날드’가 탄생함으로써 다른 기업보다 한 발 앞서 ‘아동 고객’을 공략하는 영업전략에도 선제적 마케팅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낯설지만, 로날드 맥도날드는 한때 산타클로스에 버금갈 정도로 미국 어린이에게는 큰 인기를 누렸다. 1966년에 맥도날드는 주식시장에 상장을 하게 되었고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주가는 두 배로 뛰어오른다. 기존의 드라이브인 방식을 탈피하여 오늘날과 같은 ‘좌석’을 갖춘 매장을 최초로 개점한 것도 같은 해에 시행하게 된다.

 

사실 맥도날드 형제가 혁신적인 패스트푸드 시스템을 현장에 적용하고 잘 나가는 상황에서 크록의 제안이 들어왔을 때 두 형제는 서로 다른 의견을 보여서 본의 아니게 형제간의 불화가 일어난다. 당시 크록의 전국구 패스트푸드 사업의 동업 제안에 반대하던 형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반대의 의견을 명확하게 했다.

 

“큰 현관이 있는 하얀 집이 보이지? 그게 바로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우리 집이야. 우리는 저녁마다 현관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고, 여기 있는 우리 가게를 내려다보면서 평화를 느끼면 되는 거야. 우리는 이 가게를 운영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복잡한 구조를 만들 필요는 없어. 더 많은 가게를 내면 그만큼 더 많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삶을 즐기고 있고.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는 생활이야.”

 

그러면서 그는 계약을 하자고 계약서를 들이미는 레이 크록을 비웃으며 물었다. “어려울 겁니다. 누가 우리 대신에 새 매장을 열겠습니까?” 그 말에 레이 크록은 강력한 확신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내가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정작 맥도날드를 창업하고 현대의 패스트푸드 시스템을 만들어낸 맥도날드 형제가 아니고 레이 크록이 된 가장 결정적인 판단 차이였다.

 

실제로 햄버거 대학까지 설립하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확장시킨 레이 크록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돕는 부동산 회사’를 별도로 설립하여 프랜차이즈 사업에 관한 맥도날드 형제와의 계약을 살짝 틀어 배신 아닌 배신을 모색하며,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점들의 토지를 소유해 사업을 장악하게 된다. 

이 부동산 회사가 결국 지금의 맥도날드가 된 것이다. 레이 크록의 맥도날드는 전국적인 사업이 된 반면 고작 점포 하나만을 가지고 있던 맥도날드 형제는 결국 1961년에 270만 달러와 연 이익의 1.9%를 지급받는 조건으로 자신들이 가졌던 원래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사업의 권리를 크록의 회사에 모두 넘기는 눈물겨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고 만다. 


심지어 이익의 1.9%를 지급하겠다는 조건은 문서도 아닌 구두로 계약되는 바람에 그 점을 악용한 크록에게 당하고 이를 증명하질 못해 이 권리마저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듯 물러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점포에서조차 자신들이 만든 이름인 ‘맥도날드’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자 ‘The Big M’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지만, 이미 그들은 기회를 모두 날려버리고 만 그저 시골 동네 식당 주인일 뿐이었다. 


겨우겨우 시간이 한참 흘러 그들이 창업자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기에 크록은 그 형제를 맥도날드의 친선대사로 활동하는 것으로 용돈 정도를 챙겨주는 간악함을 보였다.

영화 <파운더> 포스터

2017년 개봉했던 영화 <파운더>는 이 일화를 아주 적나라하게 다룬다. 작중 레이 크록 역은 원조 배트맨 마이클 키튼이 맡아 연기했는데, 영화 자체가 레이 크록이나 맥도날드의 성공신화를 다룬다기보다는 위에 언급한 레이 크록의 잔혹하기 그지없는 행보들에 대한 적나라한 보여주기 식 비판에 가까운 영화였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실제로 레이 크록은 잘 나가게 되기까지 함께 고생했던 조강지처를 아름다운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면서 헌신짝 버리듯이 차 버리거나 1972년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거액의 선거 자금을 기부하고는, 그 직후에 10대 직원의 급료를 최저 임금보다 더 낮게 지급해도 된다는 이른바 ‘맥도날드 법안’을 통과시켜 도덕성에 상당히 여러 번 구설수에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 <파운더>에서 레이 크록 역의 마이클 키튼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창업자인 맥도날드 형제를 놔두고 철저한 장사꾼인 레이 크록을 진정한 맥도날드의 창업자라고 여길까? 이것은 오늘 그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는 화두와 연관이 되어 있다.

1974년 텍사스 대학에서 레이 크록의 강연이 열렸다. 강연이 끝난 후 레이는 학생들에게 ‘내가 무슨 사업을 하느냐?’며 물었다. 학생들은 당연히 웃으면서 ‘햄버거 사업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는 그들의 대답을 바로잡는다.

“틀렸소. 난 햄버거 장사가 아니라 부동산 사업을 한다오.”

 

그는 체인점의 부지와 위치가 사업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실제로 맥도날드는 단일 기업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거리와 교차로에 땅을 갖고 있다. 사실 말 그대로 레이 크록의 맥도날드사는 맥도날드 형제와의 식당 프랜차이즈 계약을 편법으로 우회하려고 부동산업 기업으로 등록되어있다.

 

기존의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이미 토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장을 내도록 해 주었고 저렴한 프랜차이즈 비용을 받는 방식이라, 처음 매장을 열 때 높은 비용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맥도날드의 경우, 회사가 직접 부동산을 소유해 매장을 개업할 때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고, 매장 설립 이후 프랜차이즈 비용에 임대료를 포함하여 받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경쟁 업체보다 빠른 속도로 매장 수를 늘리는데 크게 기여한 획기적인 경영 전략이었다. 


이런 사업 방식을 유지하려면 맥도날드 본사가 소유한 부동산이 매장 영업이 잘될 만한 입지여야만 하며, 결론적으로 이 모델은 맥도날드 본사가 지역의 상권 분석을 정확히 해서 좋은 위치의 부동산을 소유해야만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는 상당히 고도의 분석과 전략 수립이 필요한 새로운 사업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맥도날드의 방침은 꽤 그럴듯한 전략이었다. 어떤 곳에 맥도날드 매장이 들어서면 흔히 옆에 KFC나 버거킹, 한국일 경우 롯데리아, 필리핀의 경우 졸리비가 같이 생긴다. 그리고 여기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는 경향이 있었다. 맥도날드도 바보는 아니니 상권이 형성될 만한 곳을 골라서 부동산을 사서 직영점을 꾸미고, 경쟁사가 이런 맥도날드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주변에 가맹점을 내게 만들었다. 


그렇게 상권이 형성되면 당연히 그 일대의 부동산이 오른다. 심지어 이 이론은 한국의 지방도시 맥도날드 매장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맥도날드는 그렇게 돈을 버는 시스템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

 

다른 프랜차이즈들의 경우, 지점 매출액의 6-10%를 건물주에게 임대료로 지불하는데 맥도날드는 10-15%를 임대료로 맥도날드 본사에 지불한다. 당신이 이제까지 모르고 있던 진실이었겠지만, 맥도날드 본사의 영업이익에서 무려 30%는 부동산 임대수익이다. 가맹 지점 점주는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지만 확실한 상권이라는 기존 데이터를 확인했기 때문에 투자 위험이 적고 불황을 거의 타지 않는 안정적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에 계약을 하겠다고 줄을 서는 것이다.

크록이 자서전을 발표한 1976년에 맥도날드는 창립 20여 년 만에 총수입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22개국에 4,177개 매장을 거느리고 있었다. 1980년대에는 총수입 100억 달러에 매장 1만 개를 돌파했다. 2008년을 기준으로 맥도날드의 총수입은 200억 달러 이상이며, 119개국에 3만 1,000개 이상의 매장이 있다. 레이 크록은 <타임> 지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984년 1월 14일, 크록은 8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모든 것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크록이 직접 뭔가 한 것은 없었다. 심지어 크록은 메뉴를 고안하겠다고 나서서 몇 가지 실제로 내놓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작으로 퇴출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창업자였던 형제들은 한 푼도 제대로 대가를 받지도 못하고 쫓겨나듯 물러났고, 크록의 케이스는 아직도 미국의 비즈니스 스쿨에서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인정을 받고, 그의 자서전은 손정의가 직접 감수하며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다.

 

무슨 차이가 있었는지, 왜 내가 오늘 도덕적으로는 빵점에 가까운 크록의 인생을 보여주는지 알겠는가?

 

크록의 장점은 독창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인재를 발굴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용병술의 달인이었다. 맥도날드 형제와 레이 크록의 삶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형제는 뛰어난 아이디어로 패스트푸드 방식을 만들어냈고, 크록은 이를 세계 최고의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일궈냈다.


1961년에 이들 형제는 연 0.5%의 로열티를 포기하고 ‘맥도날드’라는 상표권까지도 모두 넘기는 대가로 크록에게 현금 270만 달러를 요구했다. 30년 동안 일한 대가로 세금을 떼고 각기 100만 달러씩 나눠 갖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형제가 받던 로열티 금액으로 따지면 15년어치를 단번에 받겠다는 조건이었다. 막대한 금액이었지만 크록은 그 기회에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해버리는 쪽을 선택하고 그때부터 혼자서 독주하기 시작한다.

물론 맥도날드 형제도 당시 받은 현금이 적은 것은 아니었으니 은퇴하고 나서, 크록에게 사업권을 넘긴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찍 죽은 형과 달리 만약 그들이 현금 270만 달러 대신 연 0.5%의 로열티로 만족했다면 어땠을까? 15년 뒤인 1976년도에는 50만 달러, 1980년도에는 500만 달러, 지금 같으면 매년 1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계속해서 올렸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그 형제들은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시카고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날아가 형제와 계약을 하던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당뇨병에 관절염 증세도 있었다. 오랜 투병으로 갑상선 대부분과 담낭도 잃어버렸다. 그는 결의에 차 있었다. 시카고로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계약서를 움켜쥐며 그는 다짐했다.

 

“내 인생의 절정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이야기만 듣고, 행간을 읽지 않는다. 이제 그가 도대체 50이 훌쩍 넘도록 어떻게 지냈길래 갑자기 그렇게 잭팟을 터트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레이 크록은 원래 ‘릴리’라는 브랜드의 종이컵 파는 일을 시작했다. 이후 17년간 종이컵을 판매하는 동안 회사 내의 영업부문에서 최고 자리에 오른 레이 크록은 멀티 믹서라는 6개의 회전축이 달린 밀크셰이크 제조기를 보는 순간 새로운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미래가 보장된 보수가 좋은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의 아내는 당시 그를 만류하며 다음고 같이 말했다.

 

“그 일은 하는 건 당신의 미래 전부를 위험한 도박에 거는 거야. 당신도 이제 서른다섯이야. 그런데 지금 와서 스무 살짜리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멀티 믹서가 지금은 좋아 보이겠지. 하지만 만약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지고 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하지만, 그의 굳은 의지는 새로운 도전을 결행하게 했다. 그는 당시 사업이 번창한 비결을 ‘직설적인 설득력’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또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눈에 기회라는 것이 왔을 때 그는 자신의 상상을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오십이 넘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한 장애요소가 아니었다.

지금도 52세라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은퇴하고 구박을 받을 나이인데 1950년대의 미국이라면 어땠겠는가? 그렇게 잘 나가던 사업들을 접고 새로운 자신의 공상을 현실로 만들어나가며 기어코 억만장자가 되고 말았다.

 

당신이 오십이 넘어서 이제 뭘 새로 시작할 수 없는 나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당신의 그 어설픈 뒷걸음질에 레이 크록의 삶을 던져 주겠다. 문제는 당신의 나이가 아니고 당신의 사고방식이고, 당신이 스스로에게 한계를 긋고 그 안에 갇히는 것이다. 갑자기 빚을 져서 사업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크록의 삶이 그러하였듯이 그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겨우 영업사업으로 먹고사는 일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맥도날드 형제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희망을 향해 공상하고 상상하고 미래를 꿈꿨다.

 

그는 그렇게 억만장자로 30년을 신나게 살다가 누리며 즐기고 갔다. 100세 시대라고 한다. 오십을 넘겼으면 이제 겨우 절반을 왔을 뿐이다. 당신은 햄버거를 절반만 먹고 이제 다 먹었다고 버리는가? 


더 중요한 것은 크록의 삶이 그러하였듯이 당신의 오십 년 삶이 결코 헛된 시간과 노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신은 그 지난한 삶 속에서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누구도 갖지 못한 당신만의 경험과 노하우를 갖춰왔다. 당신이 그저 힘겨운 일상이라고 말했던 그 시간들이 당신에게 자산으로 고스란히 쌓여 있단 말이다.

52세가 되어 자신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그때까지 모아 왔던 모든 경험을 집중시켜 자신의 인생에 꽃 피운 그가 당신에게 남긴 말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행복을 빚어내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결국 자신이 하기 나름이다. 나는 늘 그렇게 믿었다. 1920년대 초, 일주일에 35달러를 받으며 종이컵을 팔고 아르바이트로 피아노를 연주해 아내와 딸아이를 먹여 살리던 그 시절부터 백만장자가 된 오늘날까지 언제나 그랬다. 또한 ‘사람은 눈앞에 나타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신조를 충실히 따르며 살아왔는데 이 역시 내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모두에게 이용만 당하고서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