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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0. 2022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일생을 다 바쳐 혼자서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집대성하다.

1130년, 일가가 전란을 피해 임시로 거처하던 복건(福建) 남검주 우계(尤溪)현에서 아버지 주송(朱松)과 어머니 축씨(祝氏)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관적(貫籍), 즉, 본관은 신안(新安)으로 알려져 있는데 신안은 휘주무원(徽州婺源)의 옛 지명이다. 오늘날 중국의 안휘성 황산시 일대에 해당한다.


아버지 주송은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 충돌로 퇴직하고 우계로 낙향한 것이었다.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장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상당히 일찍 학문에 눈을 떴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5, 6세부터 생각에 잠겨 괴로워했다. 대체 천지사방의 바깥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사방은 끝이 없다고들 사람들이 말하지만 나는 꼭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11세 때인 1140년 아버지 주송은 금나라에 대한 화친 정책에 반대하다가 중앙 관계에서 추방당해 건안의 환계정사에 은거하기 시작했고, 아들을 직접 가르치는 것에 집중했다. 아버지는 그가 14세 때 세상을 떠났고,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져 다양하게 공부를 했다고 알려졌다.

 

18세 때 지방의 과거 예비시험 해시(解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수도 임안(臨安)에서 본시험에 합격했으며, 1151년 22세 때 이부(吏部) 임관시험에 합격하여 종 9품 좌적공랑이 되어 천주 동안현 주부(문서처리 담당직)로 임명되었다. 24세 때 임지에 부임한 그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동안현의 학교 행정도 함께 담당하게 된다.

 

이때 그는 연평(延平) 이통(李侗)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정통 유학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후 1158년에 그는 이통(李侗)을 다시 찾아갔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게 된다. 당시 송대의 성리학자들 가운데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철학 이론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 동안 사상의 주도적 위치를 상실하였던 유학의 학문적, 사상적인 위상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었는데, 그는 스승 이통(李侗)의 영향을 받은 이후 그 방면의 일에 전념할 결심을 하게 된다.

중국 남송의 유학자.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호(號)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후 성인들에게만 칭하는 ‘자’를 붙여 우리에게 주자라는 존칭으로 불렸던 성리학을 집대성한 장본인, 주희(朱熹)의 이야기이다.

 

사후 영종에게 문공(文公)이란 시호를 받고 다시 휘국공(徽國公)으로 추봉되었다. 신안 주씨(新安 朱氏) 시조(주문공, 朱文公)이다.

주희는 28세 때 동안현 주부직 임기를 마치고 귀향한 뒤로 다양한 관직에 간헐적으로 임명됐지만, 그 대부분은 실권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부임하여 근무했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주어진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따로 부임하여 관리직을 수행하거나 할 필요가 없어 자연스레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관료로서 조정에서 중용되어 출세의 길을 걷는 것은 처음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주희는 임지에서 기근을 구제하고 학교를 재건하는 등 최선을 다해 일했고 인정도 받았지만 관료로서 주목받지 못한다. 그런 탓이었는지 본래 학문에 집중하고자 했던 뜻도 가세하게 되면서 학자로서의 진면목을 찾게 된다. 이 즈음부터 주희는 동시대의 많은 뛰어난 학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당시 주로 학문을 토론하며 교류했던 친구로는 장남헌(張南軒), 여동래(呂東萊)가 있고, 또 논적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었는데,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학문을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시키는 과정을 겪게 된다. 예컨대 그는 여동래(呂東萊)와 1175년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했다. 주희와 여동래(呂東萊)가 두 달간 함께 지내며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글과 말에서 622개 항목을 가려 뽑아 14개의 주제별로 분류, 정리한 이 책은 이후 성리학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텍스트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는 저서가 되었다. 여동래(呂東萊)는 주희보다 일곱 살 아래였지만, 주희는 그의 인품과 학덕이 충분히 자신과 친구로 교유할 수 있는 훌륭한 이라 여겨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우정을 돈독히 다졌다.

<근사록(近思錄)>

<근사록(近思錄)> 편찬을 마친 주희와 여조겸은 강서성 연산현 동북쪽의 명승지 아호(鵝湖)를 유람하면서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 육상산(陸象山)과 만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주희는 ‘천리에서 부여받은 본성(性)이 곧 이치’(性卽理)라는 입장을 취했고, 육상산(陸象山)은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는 입장을 취했다. 훗날 주희에서 비롯된 이학(理學)과 육상산(陸象山)에서 비롯된 심학(心學)의 분화는 바로 이 논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실제로 이들은 치열한 자세로 논쟁에 임했지만, 그만큼 서로 간을 존중하며 교류가 돈독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주희는 나중에 육상산(陸象山)을 백록동 서원 강의에 초빙했고 육상산(陸象山)은 그에게 형 육구령의 묘지(墓誌)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학문적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서로를 깊이 존경했다.

육상산(陸象山)

사실 성리학을 창시한 것이 주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자라고 칭송하고 심지어 주자학이라는 그의 이름을 붙인 학문으로 불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일일이 주석을 달아 정리했던 주자 집주(朱子集註) 사서(四書;<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편찬이었다.


1190년에 사자(四子)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 새롭게 간행한 일이었다. 한당(漢唐) 시대 유학을 오경(五經) 중심의 유학이라고 한다면, 송대(宋代) 이후 유학을 사서(四書) 중심의 유학이라 하는데, 그 기준을 만들어 흐름을 바꾼 것이 바로 주희가 대학자로 이뤄낸 업적에 따른 것이다.

 

주희는 사서를 집주(集注)하면서 자연적인 올바른 이치(理)와 그것이 인간 본성으로 내면화된 성(性)을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성리학(性理學)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그 작업이 중국과 동양에 끼친 학문적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무려 1313년부터 1912년까지 사서(四書)를 중국의 학교 교육과 관료 선발시험에서 공식적인 기본 교재로 사용하였다.

 

주희는 사서(四書)를 별개의 분리된 서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묶으면서, <대학>이 근본적인 큰 틀을 제시해 주고 <논어>가 견실한 기반이 되며, <맹자>가 보다 세세한 부분들에 이르기까지 지도해 주고 <중용>이 미묘하고 심원한 철학성을 제공해 준다고 보았다. 주희는 사서(四書)에 주석을 집필하는 작업에만 무려 40년 동안을 쏟아부으며 몰두했다.


심지어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까지도 그는 <대학>의 주석을 다듬는데 몰두했다. 주석이라고 해서 단순히 그것을 해제하는 수준에만 멈췄다면 그에게 성인에게만 붙는 ‘자’가 붙으며 그를 성인의 경지라고 칭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맹자>의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맹자가 올바름(義)과 이익(利)의 차이에 관해 말하는 구절에 대해 주희는 자신만의 해석을 구축하는 독특함으로 해설을 시도한다.

올바름(義)을 하늘의 이치(天理)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익(利)을 사사로운 인간의 욕구(人欲)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 이전의 유학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해석으로, 성리학적 입장의 해석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성리학을 주창한 것이 주자가 아님에도 진정한 성리학을 완성시킨 학자로서 주자가 칭송받게 된 것이다.

 

주희는 철학뿐 아니라,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이 원칙이 없이 체계를 갖추지 못하였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다시 편집하여, 1172년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의 필독서로 널리 읽혔다. 심지어 유럽까지 전해져 유럽 최초로 간행된 중국 역사서인 『중국 통사』의 토대가 될 정도였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이 역사서의 정리 과정에서 나온 현대에까지 미친 영향은 한 가지가 더 있다. 현대 사람들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유비의 촉한(蜀)을 정통으로 보는 견해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영향에도 그가 소설이 나오기 이전에 주장했던 ‘촉한 정통론(蜀漢正統論)’에 근거하여 형성된 것이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나오기 전까지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조조의 위(魏) 나라를 정통으로 보았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연의>의 촉한 정통론은 정통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하지만, 주희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보완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펴내면서 촉한 정통론을 주장한 이후 촉한 정통론에 무게가 실렸고, 지금의 <삼국지연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상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정립되었다.


이전 촉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촉한 정통론(蜀漢正統論)’이 전국구로 인정을 받게 되고 소설로까지 나와 인기를 끌게 된 것도 결국 역사서를 정리했던 주희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주희는 삼국지의 인물 중에서도 제갈량의 광팬이었다.

아예 ‘와룡암’이라 이름 지은 암자까지 지어서 기거했을 정도고 심지어 “맹자 이후로의 인물로는 오로지 장량과 제갈량, 이 두 사람만 있었을 뿐이다.”라는 패기 넘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주희가 평생에 걸쳐 학자를 자처하며 편찬했던 책은 80여 종, 남아 있는 편지글은 2천여 편, 그의 대화를 기록한 대화록이 140편에 달하며 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이 467명에 달했다. 그는 늘 연구하고 글을 쓰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 즉 정사(精舍)를 복건 지방에 세 곳이나 세웠었다. 서원 두 곳을 재건하고 여섯 개 서원에서 강의했으며, 열세 개 서원의 현판 글씨 또는 그 연혁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스스로 “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병이 심할 때도 앞장서서 늘 일하려 한다.”라고 말하며 결코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서 소홀함을 보이지 않았다.

 

앞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주희는 그 이전 시대까지의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북송 오자(北宋五子)라 일컬어지는 북송 시대 유학자 다섯 명(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그리고 소옹)의 사상을 종합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희의 업적이 그저 선대 유학자들의 사상을 종합하고 부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착각해서는 큰 오산이다.


주자의 집주에도 등장하는 그보다 앞선 정호, 정이가 리(理)를 강조하여 부각하기는 했지만, 주희는 리와 태극(太極)을 사실상 동일시하면서 리와 기(氣)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켰다.

 

“리(理)와 기(氣)라 불리는 것들이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니기는 하나, 사물의 측면에서 그 둘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있다.”

 

“우주에서 리(理) 없이 기(氣)가 있었던 적은 없으며, 기(氣) 없이 리(理)가 있었던 적도 없다.”

 

이 대표적인 정리만 보더라도 그가 개념에 대해 정리한 것이 단순 정리가 아닌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개념의 정립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논리적 측면에서는 리(理)가 기(氣)에 앞서지만 사실적 측면에서는 리(理)와 기(氣)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앞선다고 함부로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태극에 관해서도 주희가 정리한 개념은 이후 공부하는 이들에게 기본 인식이 되었다.

 

“근본적으로는 다만 하나의 태극이 있지만, 만물 각각이 태극을 부여받아 각자가 온전한 태극을 갖추고 있다. 하늘 위에 뜬 달은 다만 하나지만, 그 빛이 수많은 강에 비추면 결국 수많은 달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달이 여러 개로 나누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대학>의 경우는 주석에 그치지 않고 아예 원문에 손을 대서 자구를 수정하고 자신만의 체계로 분장(分章)했으며, 심지어 소실된 구절이 있다 생각되는 부분에는 자신이 글을 보충해서 넣기도 했다. 죽기 사흘 전까지 <대학>의 주석을 손보고 있었다고 전해진 것은 바로 이런 그의 학문에 대한 진정성과 집념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절동제거(浙東提擧)로 봉직하던 53세 때 주희는 악행과 불법을 일삼은 당중우(唐仲友)의 파면을 조정에 요청했다. 그러나 당중우(唐仲友)는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던 재상 왕회(王淮)의 인척이었다.


이로 인해 주희는 중앙의 기득권 관료들로부터 견제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희가 54세 때(1194) 즉위한 영종 황제는 재상 조여우의 추천을 받아들여 주희를 임안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영종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한탁주(韓侂胄)가 정적이던 주희의 학설과 행실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파직시켰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주희의 학문을 정도에서 어긋난 거짓 학문, 위학(僞學)으로 지목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조치로 인해 주희의 저서 간행과 유포가 금지되었고 정치활동을 비롯한 모든 공적인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다가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년과 1230년에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 사당에 모셔졌다.

주희는 과감하게 직언을 하고, 늘 소신 있는 의견을 펼쳤으며, 부패와 사욕이 지배하는 정치판을 비타협적으로 공격하다가 파면되거나 외진 지방의 관직으로 쫓겨났다. 주희는 정치적 탄압 외에도 많은 질병에 시달렸지만 학문을 향한 열정을 결코 사그라뜨리지 않았다.


예학(禮學)을 집대성하는 작업에 몰두한 것도 말년이었고, 66세 때는 한유의 전집을 교정한 <한문고이(韓文考異)>를 완성했고 69세 때는 <초사집주(楚辭集注)>를 완성했으며, 70세 때 <후어(後語)>와 <변증(辨證)>을 완성했다. 1200년 3월 9일 새벽, 주희는 제자들을 곁으로 불러 가까스로 붓을 들려했지만 결국 글은 쓰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자는 성리학이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곡학아세(曲學阿世)되어 악용되면서 현대에 오해로 인한 비난을 많이 받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주자는 무조건적인 복고주의나 통제주의를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학자였다. 이른바 주자의 경세론 중에서 토지론만 살펴보더라도 그러한 사실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주자의 토지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부의 불평등을 막고 자발적인 경제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낮은 세율과 공평하게 나뉘어진 토지가 필수이다, 그렇지만 토지는 적고 사람은 많은 현실에서는 이걸 진짜 하려면 국가 개입이 지나쳐지고, 그럼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일단의 토지 국유화 대신 토지 간 경계를 확실하게 규정하고 토지의 거래와 양도를 일정 정도 허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주자는 오히려 당초의 균전제와 같은 토지의 국유화 및 국가 권력에 의한 토지의 균등 재분배 등 파격적 주장의 실효성을 의심했던 모습을 보인다. 그는 정부 관료와 공신들에게 할양되었던 공전의 경우, 법적 재정비를 통해 침탈, 매매 및 대여 등의 불법 행위를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는 일반 지주 및 자영농 계층의 사적 소유권을 상당 부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방법으로 상사, 세습, 혼인, 매매 등의 형식 모두 인정하고 있으며, 토지의 사용과 처분에 있어 대여, 매매, 교환 등을 일정 정도 허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주희가 이 정도의 토지 사유권을 인정하고 있음은 도학의 경세 담론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표면적으로 정전제는 토지의 국유화를 전제하고 있지만, 결국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자영 농민층 육성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전제의 이상에 따라 토지는 원칙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어야 하지만, 사용 및 처분을 포함하는 실질적인 소유권은 결국 백성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자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조선의 성리학과 주자학에서 잘못 원용된 부분을 그대로 주자의 학문이고 사상인 것처럼 오해하면서 주자는 조선을 거쳐 나라를 말아먹은 보수주의자들의 원조로 공격받아야만 했다. 오늘 당신에게 그의 인생과 사상과 그가 걸어온 길을 소개하는 것은 그가 그간 제대로 공부해보지도 않고 그를 오해한 당신들에게 하등의 그런 대접을 받을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주자의 돌무덤

그의 저서가 공부하는 이들의 필독서가 되었던 것은 과거시험의 과목이 사서(四書)였고 그것에 대해 당시 1타 강사로 명확하게 주석을 단 책이 그의 책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서(四書)가 과거시험의 필수 서적이 되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그가 40여 년의 평생을 오롯이 쏟아가며 왜 그 작업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목적이 본래 시험과목이었던 사서에 대한 주석을 단 입시 1타 강사가 아니었다. 그가 그 작업을 완성하고 100년이나 지나고 난 뒤에 그의 정리 작업은 과거 수험서이자 고문을 공부하는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교과서로 인정받게 된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이 인정받은 것이지, 그가 저명한 서적을 해설해서 유명세를 본 것이 아니란 의미이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사서(四書)는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닌 성현들의 말씀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공부는 그 말만 공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을 배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공부라 여기지 않는 수양으로서의 공부였고 그 배움을 통해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경세론의 지침서였다. 그것을 평생에 걸쳐 편집하고 그것을 통해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모든 정력을 쏟았던 주자의 삶은 당연히 그 성현의 가르침에 의거한 것이었다.

 

자신을 바로잡는 공부를 매일같이 계속하게 되면 사람이 바뀐다. 그것을 평생 하게 되면 어느 사이엔가 그들의 삶을 따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정점의 공부는 자신이 공부한 것을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정립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주자는 모두 거치며 자신을 완성시켰다. 저명해지고 조정에서 큰 스승으로 인정하며 불러주지도 않았고, 학문적으로 모두가 그를 인정해준 것도 아니었다. 제자들이 구름같이 몰린 것도 아니고 5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가 큰 스승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가 죽고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즉, 그는 살아서 그 어떤 것도 누리지 못하고 소박한 학자로 평생을 보내고 그렇게 눈을 감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버지가 14살에 돌아가시고, 벼슬자리에 나갔지만 변변치 못한 자리를 전전하는 삶이 아무렇지 않은 이는 없다. 하지만 그저 그렇게 초야에서 사라져 간 인물들은 너무도 많았다. 주자가 그 여러 실패와 좌절 속에서 자신의 공부를 체계화하여 정리하고 서원을 정비하여 제자들을 키우려고 했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가 공부했던 성현들의 가르침에서 몸에 배어 나온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명한 학자로서 누군가의 청탁을 받거나 국가 정비 사업에 발탁된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목표를 정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업을 묵묵히 평생에 걸쳐 수행한 것이다.

 

당신이라면 돈도 되지 않고 누구도 당장 알아주지 않는 일을 당신의 공부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묵묵히 평생을 바쳐가며 학자의 길을 갈 수 있었겠는가?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고, 유명해지는 것도 중요하고, 기본적인 생활이 되지 않고서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당신은 잊고 살고 있다. 당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인생은 연습이 아니다. 하루하루가 실전이고 현실이다. 연습으로 한 번 살아보고 아니면 다시 접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뿐인 인생에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남들이 공부하니까 공부했고, 모두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인생이 편하다고 해서 공부하고 그렇게 대학을 나오고 또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해서 대학 내내 입사 준비를 하고, 그렇게 살면 나중에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당신의 삶을 회고했을 때 의미 있는 삶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대단한 업적을 남겨야만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모두가 위인이고 대단한 대가일 수는 없다. 그런데 주자의 삶을 보면, 그가 대가가 되겠다고 하는 의식이나 세상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욕망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의 공부를 했다. 그라고 왜 속이 없었겠는가?

실제로 그 역시 인간으로서 부족한 실수와 실언을 많이 남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공부를 통해 메우려고 했고, 그렇게 자신의 평생을 학자로 보낸 것에 아무런 후회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그런 것을 원했다면 이미 말년에 조정에 나아갔을 때 정적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편한 명성을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공부한 대로 다소 고지식하지만 직언을 해서 정적을 만들었고 그렇게 좌천되고 질시받고 공격받으며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그래서 그가 후회하였을까? 그가 죽기 하루 전 자신을 찾은 제자들에게 남긴 말을 당신에게 들려주며 오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그가 정말로 후회했는지 당신이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괜히 여러분을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게 했구나. 하지만 도리(道理)라는 게 본래 그런 것이기는 하지. 여러분 모두 힘을 모아 열심히 공부하라. 발을 땅에 굳게 붙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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