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Feb 11. 2022

최초의 디바로 사랑을 받던 ‘The Voice’였지만

마약의 유혹에 이기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다.

1963년,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가스펠 가수인 씨씨 휴스턴이고 아버지가 연예 기획사의 최고 경영자인 존 러셀 휴스턴 주니어이며, 사촌인 디온 워윅, 디디 워윅 역시 가수인, 뮤지션 가문 출신이었다. 1967년 뉴어크에서 폭동을 겪고 난 후 가족 모두가 뉴저지 주의 이스트 오렌지(East Orange)로 이주한다.

9살 때부터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녹음실에 자주 갔고, 11살부터 임 교회 성가대의 독창자로 활동하였고, 어머니가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할 때 같이 무대에 서기도 했다. 가족이 뮤지션이 많았고 아버지의 사업 자체가 연예기획사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아레사 프랭클린 이외에도 글래디스 나이트, 샤카 칸, 저메인 잭슨 등 다양한 가수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음원 작업에 백보컬로 참여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갈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10대 시절에 백보컬에 참여한 곡이 1978년 발매된 샤카 칸의 ‘I'm Every Woman’이다.

 

그즈음에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1980년 십 대 패션모델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다양한 틴에이저 패션 잡지 등에서 표지 모델로 활동했다. 모델 활동 중에도 각종 녹음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는데, 처음엔 어머니와 인연이 있는 가수들의 음원에서 백보컬만 맡다가 점차 가수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점차 다양한 가수들의 앨범에 자신만의 음원을 실으면서, 빠르게 경력을 쌓아 나갔다. 이후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하며 지내던 중, Arista Records의 신인 발굴 과정에 발탁되면서 음반 기획자이자 프로듀서인 클라이브 데이비스를 소개받아, 그의 눈에 들어서 데뷔하게 된다.

화보 모델로 활동하던 10대 시절

정식 데뷔는 1985년 싱글 ‘Thinking about You’였지만, 1983년 이미 TV 프로그램 <The Merv Griffin>에 나와 ‘Home’을 독창하고 어머니와 함께 ‘I Say a Little Prayer’, ‘Ain't No Way’, ‘You Send Me’를 공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이 중 ‘Home’ 라이브는 여러 매체들에서 휘트니 휴스턴 최고의 라이브 공연 중 하나로 꼽히는 무대이기도 하다. 

https://youtu.be/jpwxxyZ4GfA


이후 1집 《Whitney Houston》이 발매될 때까지 듀엣곡들을 작업했는데, 대표적인 곡이 1984년 발표된 Teddy Pendergrass와의 합작 ‘Hold Me’와 같은 해 발표된 저메인 잭슨과의 ‘Take Good Care of My Heart’였다. 이 중 ‘Hold Me’는 빌보드 Hot 100에 진입하여 18주 동안 차트에 머물렀고, 최고 46위까지 올라갔다. 정식 데뷔도 하지 않은 무명의 신인이 이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은 상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데뷔 앨범 발표 전 두 곡을 낸 탓에, 1년 6개월여 뒤 1집의 상업적, 비평적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1986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신인상에 후보로 지명되지 못한다.

미국의 가수 겸 배우.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The Voice’라고 칭송받았던 팝의 디바 휘트니 엘리자베스 휴스턴(Whitney Elizabeth Houston)의 이야기이다.

 

여가수 중 상업성과 영향력에서 역대 TOP3 안에 드는 전설적인 가수이다. 미국 대중음악사에서 아레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의 뒤를 이은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디바로 인정받은 흑인 여성 보컬리스트이며, 1985년에 데뷔하여 2000년까지 약 15년 간 정상의 위치에서 커리어를 이어간 인물이다. 특히,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5년 2월, 데뷔 앨범 《Whitney Houston》을 낸다. 이 앨범은 장장 2년에 걸친 프로젝트로 제작비로 40만 불을 쏟아부은 대형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이 데뷔 음반은 초반에 부진해서 빌보드 200에조차 들지 못했다. 이에 Arista Records사에서는 3개의 싱글을 각각 다른 지역에서 1집의 첫 싱글로 발표함과 동시에 흑인 여성은 출연하기 어려웠던 TV 토크쇼에 휘트니 휴스턴을 출연시킴으로써 데뷔 음반을 홍보하려 했다. 


휘트니 역시 클럽 무대나 루서 밴드로스 등 가수들의 콘서트 오프닝 공연에 올라서 자신의 데뷔 음반을 홍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눈물겨운 홍보활동에도 불구하고, 발매된 3개의 싱글 중 ‘Someone for Me’는 인기를 얻지도 못하고 차트에 들지 못했다. 


하지만, 나머지 2개의 싱글, ‘All at Once’가 네덜란드와 벨기에 차트에서 TOP 5에 올랐고, ‘You Give Good Love’은 발매된 지 3개월 만에 빌보드 Hot 100에 진입하고 캐나다에서 7위, 빌보드 Hot 100에서 최고 3위를 기록하며 북아메리카에서 히트곡이 된다. 이 싱글차트 성공을 발판 삼아 1집도 빌보드 200 50위권에서 치고 올라와 TOP 15을 기록한다.

데뷔 당시

1985년 8월 중순 1집의 4번째 싱글인 ‘Saving All My Love for You’가 발매됐다. 앞선 싱글 ‘You Give Good Love’의 성공과 1집의 판매량 상승에 힘입어 이 곡은 휘트니 휴스턴의 첫 번째 빌보드 Hot 100 1위 곡이자 첫 번째 빌보드 연말 차트 진입곡이자, 빌보드와 UK차트 동시 1위 곡이 된다. 연이어 1985년 11월 발매된 5번째 싱글 ‘How Will I Know’도 빌보드 Hot 100 1위를 2주간 기록하는 등, 휘트니의 싱글은 연달아 히트를 치며 성공한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198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최우수 여성 팝 보컬’, ‘최우수 여성 R&B 보컬’에 후보로 지명된다. 또한 ‘You Give Good Love’은 ‘최우수 R&B 노래’에 후보로 지명되었다.

https://youtu.be/EChcz8-Inrs


연이은 싱글 히트 덕에 휘트니 휴스턴은 1985년 12월 빌보드에서 선정한 ‘New Black Artist’, ‘New Pop Artist’로 선정되었고 마침내 빌보드 200 차트에서 14주 1위를 차지하였다. 당시 음반 판매는 미국 내 총판 1,300만 장(RIAA 13 ×플래티넘 인증) 및 전 세계 2,2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여자 가수 데뷔 음반 최고 판매 기록을 경신했다.

 

하지만 1집의 이러한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찬사에도 불구하고 1986년 Grammy에 후보로 지명된 3개 부문 중 단 한 부문, 그것도 장르 부문인 ‘최우수 여성 팝 보컬’만 수상하고, 본상 수상에는 실패한다. 그래미 어워드 이후 1986년에 앨범의 마지막 싱글 ‘Greatest Love of All’이 발매되고, 이 싱글이 빌보드 Hot 100에서 3주 연속 1위, 1986년 빌보드 연말 차트 11위를 기록함으로써 여성 아티스트 최초로 3개의 1위 곡을 한 앨범에서 배출하는 성적을 거두며 휘트니 휴스턴의 인기는 상승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렇게 휘트니 휴스턴은 1986년 7월 말 ‘The Greatest Love World Tour’라는 제목의 월드투어를 시작한다.

 

동시에 1986년 빌보드에서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되고 1집 《Whitney Houston》은 여자 가수의 앨범으로서는 최초로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또, 1987년 1월 AMA에서 7개 부문에 후보 지명 및 ‘Favorite Pop/Rock Female Artist’, ‘Favorite Soul/R&B Female Artist’를 포함한 5개의 상을 수상하며, 1987년 영국 브릿 어워드에서 ‘Best International Solo Artist’ 부문 후보에 오른다. 단 2년 안에 화려한 수상이력을 남기며 그녀는 세계적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https://youtu.be/gtnjrCFZNUc


1987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올해의 레코드상에 후보로 지명되었다. 앞선 화려한 수상이력을 바탕으로 제너럴 필드를 수상하나 싶었지만 아깝게도 수상하지 못한다. 이후 약 2달 뒤 휘트니 휴스턴의 정규 2집 《Whitney》 가 발매되면서, 정규 1집 《Whitney Houston》 활동은 휘트니 휴스턴이 세계적인 크로스오버 스타가 되었지만 음반의 뛰어난 상업적 성과와 비평적 호평에도 불구하고, 그래미 어워드의 기저에 깊게 깔려있는 인종차별 때문에 그래미 어워드의 제너럴 필드를 수상하지 못하고 마무리된다.

 

휘트니 휴스턴의 1집이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흑인 여자 솔로 가수의 유리 천장이 깨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흑인을 외면하고 백인 중심으로 돌아가던 MTV에 ‘How Will I Know’ 뮤직비디오가 연일 쏟아져 나왔으며, 1986년 ‘Best Female Video’를 수상했던 것이 이를 상징한다. 자넷 잭슨, 토니 브랙스턴, 비욘세, 앨리샤 키스 등 1980년대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자 가수가 대중음악계에 대거 진출한 것 역시 이 앨범의 대성공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현재 《Whitney Houston》 이 상업적인 것 이외의 부분으로 호평을 받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한편 휘트니 휴스턴은 이 시기부터 빼어난 가창력을 바탕으로 오페라의 주역 프리마돈나에게 쓰였던 호칭인 ‘디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디바의 원조’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그녀가 이 용어를 대중음악계에 최초로 도입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987년 2집 활동 당시

1987년에 발매된 2집 《Whitney》로 대성공을 거두면서 소포모어 징크스를 극복하며 프린스, 마돈나와 함께 팝 음악계의 대표 가수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마이클 잭슨을 잇는 세계적인 흑백 크로스오버 아티스트로 부상한다. 당시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마돈나를 물리치고 1987년 AMA에서 ‘Favorite Pop/Rock Female Artist’상을 수상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확인한다. 2집 Whitney 앨범은 전작의 히트메이커였던 마이클 월던과 마이클 매서를 주축으로 전작의 히트 공식을 충실히 따라갔으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여가수 최초로 빌보드 200 1위 데뷔에 성공하여 총 11주간 정상에 머물렀으며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4개나 배출하고 빌보드 연말 차트 TOP 10곡 2곡을 배출함과 동시에 전 세계 2,0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 앨범, 특히 타이틀 곡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는 UK Official 차트 2주 1위, 연말차트 3위를 기록하는 등 유럽에서 전작보다 히트하면서 휘트니를 대체 불가능한 월드스타로 만들어준다.

 

한편 휘트니 휴스턴은 2집을 발매하자마자 ‘Moment Of Truth World Tour’라는 제목의 월드투어를 시작한다. 1987년 미국 플로리다를 시작으로 1988년 11월 홍콩 마지막 공연까지, 월드투어는 총 1년 4개월 넘도록 진행되었으며 투어 동안 147회의 공연이 개최되었다. 이 투어는 2000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거두며 ‘1987년 여자 가수의 투어 중 가장 높은 수익을 거둔 투어’, ‘1987년 가장 높은 수익을 거둔 10개 투어’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2개의 음반과 2번의 투어를 바탕으로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86-87년 가장 많은 돈을 번 연예인 TOP 40’ 순위에 총 4400만 달러(2021년 기준 한화 약 1116억)의 수익으로 8위에 올랐다.

 

비슷한 패턴으로 인기에 의존한다는 평을 들으며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으나, 1986년과 똑같게 1988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최우수 여성 팝 보컬’, ‘최우수 여성 R&B 보컬’의 총 3 부문 후보로 지명된다. 이로써 휘트니 휴스턴은 3년 연속 그래미 어워드 제너럴 필드에 후보 지명되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제너럴 필드 수상은 불발되었고, 198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우수 여성 팝 보컬’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https://youtu.be/SkdMFmBsHgE


그래미 어워드에서 제너럴 필드를 수상하는 것은 불발됐지만, 대중들의 인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2집 《Whitney》의 3번째 싱글 ‘So Emotional’은 1988년 빌보드 연말 차트에서 6위를 기록하여 그의 3번째 빌보드 연말차트 TOP 10 히트곡이 되었고, 연이어 발매된 4번째 싱글 ‘Where Do Broken Hearts Go’ 역시 빌보드 Hot 100 1위에 성공하며 한 앨범에서 4개의 1위 곡을 배출한 최초의 여자 가수의 앨범과 사상 최초로 연속으로 발매된 7개의 싱글이 1위를 달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후자의 기록은 비지스와 비틀즈의 연속된 6개 싱글 1위의 기록을 경신한 것이며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휘트니 휴스턴만이 달성한 것이다. 이렇게 휘트니 휴스턴은 1988년 역시 성공적으로 보내고, 2집 《Whitney》의 활동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이후로는 1990년 11월 정규 3집 《I'm Your Baby Tonight》이 발매될 때까지 약 2년 간 간간히 싱글을 발매하고 짧은 투어를 다니는 정도로만 활동하며 휴식기를 갖는다.

 

1988년 하반기에 《1988 Summer Olympics Album: One Moment In Time》의 타이틀 트랙인 ‘One Moment in Time’이 발매되었는데, 미국에서의 성적에 비해 영국, 독일에서 1위를 달성하는 등 유럽에서 더 히트하는 기현상을 빚어낸다.

 

한편 휘트니 휴스턴은 에이즈, 암 등 질병으로 고통받거나 노숙하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기금을 마련하는 단체인 ‘The Whitney Houston Foundation for Children’을 1989년에 설립하였다. 설립 이후 1990년대까지 꾸준히 활동해왔으나, 2000년대 이후 휘트니의 개인사에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한편, 1~2집 시절에는 백인 취향의 음악만 한다는 (주로 흑인 평론가들의)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백인 취향 어덜트 컨템퍼러리 팝을 소울 창법으로 부른 것에 불과하다는 평이었는데 실제로 백인 대중의 입맛을 잡기 위한 마케팅이기도 했다.

 

2집 《Whitney》 활동 이후부터는 휘트니 휴스턴의 목소리가 조금씩 굵어지고 악화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과도한 라이브 공연, 즉 거의 모든 공연을 100% 라이브로 진행함과 동시에 마약 투여, 흡연, 음주의 증가 등 휘트니의 자기 관리 부실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1987년 공연, 1991년의 공연, 1994년의 공연을 각각 들어보면 시간 순서대로 목소리가 굵어지며, 고음에서 음을 유지(hold)하는 시간이 짧아지고, 음역대(Range)가 확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회사의 요구에 따르기만 했던 1~2집과 달리, 슈퍼스타가 된 휘트니는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다. 1989년 말부터 시작한 3집 《I'm Your Baby Tonight》의 작업에서 1,2집의 성공의 주역인 기존 프로듀서 진의 참여를 최소화시키고 베이비 페이스와 L.A 리드를 메인 프로듀서로 데려왔고 자신도 프로듀싱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흑인 음악을 시도하게 된다. 


이 시기 활동의 특징으로는 공연에서 안무 비중이 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2집 활동 당시에는 댄스곡에서만 가볍게 무대를 옮겨 다니는 정도의 안무만 했고, 이외의 곡을 공연할 때는 주로 백댄서 없이 가만히 서있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3집 활동 시기에는 흑인 음악을 시도하면서는 체계적인 안무를 하며 공연하면서, 안무와 라이브를 동시에 소화하게 된다. 이 시기의 공연 영상을 보면 확연히 안무의 비중이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알앤비 소울에서 뉴 잭 스윙까지 당시 흑인 음악 트렌드를 충실히 반영했고 흑인 음악의 대부 스티비 원더와 R&B계의 신사 루서 밴드로스까지 참여한 이 앨범은 흑인 사회에 휘트니의 위상을 재정립할 계기가 된 의미 있는 앨범이 된다. 실제로 '89년엔 소울 트레인 뮤직 어워드에서 흑인 관중들의 야유를 받았었지만 이 앨범의 발매와 '91년 국가 제창을 계기로 하여 흑인들 사이에서 휘트니에 대한 인식은 180도 달라진다.

1990년 활동 당시

1990년 10월 3집의 리드 싱글 ‘I'm Your Baby Tonight’이 발매되었다. 이 곡은 팝의 색채가 짙던 기존 휘트니의 싱글들과는 달리 당시 유행하던 뉴 잭 스윙 장르의 곡이었다. 음악계를 뜨겁게 달구던 당시의 신인 머라이어 캐리의 ‘Love Takes Time’의 4주 연속 1위를 저지하면서 1위를 얻어내면서, 당시 마돈나와 함께 여자 가수들 중 빌보드 Hot 100에서 가장 많은 1위 곡을 보유한 가수가 된다.

 

연이어 1990년 12월 3집의 두 번째 싱글 ‘All The Man That I Need’가 발매되었다. 직전 싱글과 달리 휘트니의 1,2집 성공을 이끌었던 Narada Michael Walden이 프로듀서로 참여하였기에 1,2집의 수록곡들과 유사한 느낌의 곡이었다. 이 곡은 2주 1위를 차지한 후 머라이어 캐리의 ‘Someday’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3집 활동 시기에서는 연말 차트 TOP 10 히트곡을 배출하지 못하는 등 전작에 비해 다소 아쉬운 성적을 기록한다.

망나니 남편 바비 브라운과 함께

1992년, 휘트니는 바비 브라운과의 결혼과 <보디가드>라는 영화 출연을 통해 인간으로서, 그리고 가수로서 전환점을 맞이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영화는 대성공했고 OST 앨범은 4,5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OST 앨범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여가수 앨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5위와 같은 무수한 기록을 세우며 공전의 히트 및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자아낸다. 빌보드 200 차트에서 총 20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으며 1곡의 1위 곡과 2곡의 Top 5곡을 배출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1993년 BBMA에서 대상인 ‘Top Artist’상을 포함하여 총 11개의 상을 수상하였고, AMA에선 총 8개의 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994년 그래미 시상식에선 그래미 최고 알짜배기인 올해의 앨범상과 올해의 레코드상, 그리고 최우수 여자가수상을 받으며 비평적으로 최고의 호평을 받는다.

 

특히 OST 앨범의 리드 싱글이던 ‘I Will Always Love You’가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여가수 싱글, 빌보드 HOT 100 차트 14주 1위, 1993년 연말차트 1위, 1990년대 Song 차트 7위, 빌보드 올타임 차트 54위라는 기록을 세우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곡은 원래 1974년 컨트리 가수인 돌리 파튼이 작곡하고 불렀던 곡이었는데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가 매끈한 알앤비 곡으로 변모시킨다. 


본래 《What Becomes of the Broken Hearted》를 메인 테마로 사용하려 했지만 다른 영화에서 이미 사용했기 때문에 케빈 코스트너의 추천으로 이 곡을 사용하게 되었다. 돌리 파튼이 본래 작사해 두었지만 자신이 버전에 발표하지 않았던 곡의 3절 가사를 휘트니에게 선물한 것은 당시 유명한 일화이다.

영화 <보디 가드> 중에

하지만 이 앨범을 기점으로 전 앨범들에서 보여준 목소리보다 훨씬 굵어진 목소리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음역은 조금 낮아지며 전성기를 지나 내려오는 듯하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한다. 이후 마약 투여와 과다한 흡연, 살인적인 콘서트 투어로 성대 결절을 앓게 되며 보컬 파워가 확연히 떨어진다. 이 시기에 하나뿐인 딸 바비 크리스티나를 얻어 엄마가 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임신을 하지만 모두 유산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The Bodyguard World Tour’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휘트니 휴스턴은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는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1995년에 <사랑을 기다리며 (Waiting To Exhale)>를 촬영하였고, 1996년에 영화 <목사의 아내 (The Preacher's Wife)>, 1997년에 <신데렐라 (Cinderella)>를 촬영하였다.

영화 <사랑을 기다리며 (Waiting To Exhale)>

한편 영화를 촬영하면서 OST도 꾸준히 발매하였는데, <사랑을 기다리며 (Waiting To Exhale)>의 OST는 전 세계 총 12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였으며 OST의 리드 싱글 ‘Exhale (Shoop Shoop)’은 빌보드 HOT 100에 1위로 핫샷 데뷔하고, 1주 1위, 1996년 연말차트 14위를 기록하였다. 또한 <목사의 아내 (The Preacher's Wife)>의 OST는 전 세계 총 6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가스펠 앨범이 되었고 OST의 리드 싱글 ‘I Believe in You and Me’는 빌보드 HOT 100 최고 4위까지 기록하였다.

 

1998년, 4집 《My love is your love》로 8년 만에 정규 앨범을 발매하며 컴백한다. 이 앨범은 비평적으로 본인의 앨범 중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성숙해진 목소리와 완연한 리듬감으로 R&B 가수로도 인정받으며 2000년 그래미에서 ‘최우수 R&B 보컬’까지 수상하였다. 

2000년 그녀의 마지막 그래미 수상 당시

상업적으로도 전 세계 총 13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였고 싱글로 발매한 3곡이 모두 빌보드 HOT 100 Top 5에 오른다. 2000년에는 베스트 앨범 《Whitney: The Greatest Hits》가 발매되었다. 앨범은 1000만 장가량이 팔린 것으로 추산되고 새로 수록된 엔리케 이글레시아스와의 라틴 팝 듀엣곡 ‘Could I Have This Kiss Forever’이 유럽 국가들에서 차트 상위권에 안착하며 휘트니 최후의 히트작으로 남았다.

 

이후 수많은 루머에 시달리며 대중들과 점점 멀어졌다. 대표적으로 레즈비언설, 남편과의 불화설, 그리고 마약이었다. 2001년 마이클 잭슨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에서 보여준 해골같이 마른 모습은 그런 논란을 더더욱 가중시켰다. 특히 뉴 에디션 출신인 바비 브라운과 1992년에 결혼한 후로 휘트니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진다. 남편 바비 브라운의 가정 폭력, 외도 및 여러 돌발 행동으로 인해 끊임없이 뉴스에 오르내렸다. 


신혼여행지에서 바비가 깨뜨린 유리잔으로 얼굴에 상처를 입어 흉터 제거 수술을 받기도 했고, 왼쪽 뺨이 멍든 상태로 법원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후 술, 마약에 빠지면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이후 2009년 컴백과 함께 이루어진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비 브라운은 휘트니에 대한 질투와 자격지심에 휘트니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정신적 폭력도 가했고 그 때문에 휘트니의 음악 활동에 대한 의지가 거의 사라졌다. 2002년 정규 5집 앨범인 《Just Whitney》를 발매하고 루머를 해명하겠다며 다이안 소어와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역효과만 불러일으키고 그나마 있던 긍정적인 이미지까지 망치게 된다. 


이 인터뷰로 휘트니는 마약 사용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희대의 명언인 ‘Crack is cheap. Crack is wack’을 남긴다. 자신은 싸구려 마약인 크랙을 쓰기엔 너무 부자라는 터무니없는 해명이 이어졌다. 그 결과 5집 앨범은 첫 주 판매량에서는 휴스턴의 모든 앨범 중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데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190만 장을 판매하며 상업적 실패를 기록했다. 


이 앨범은 프로모션을 거의 하지 않았고, 진행했던 프로모션조차 곡에 대한 홍보 효과보다 대중에게 목 상태가 완전히 가버렸다는 사실을 각인시킬 뿐이었다. 이후 토리노 올림픽 축하 공연 등을 보면 목 상태는 회복 불능의 지경까지 추락했음을 알 수 있는데, 내부적으로도 그 점을 인정했는지 사실상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2007년 남편 바비 브라운과 이혼하고,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파산에 이르는 등 어려움을 겪어왔다. 재기를 위해 심기일전해서 2009년 정규 음반 6집 《I Look to You》 를 발표했으며 오프라 윈프리 쇼 Season Premier, 굿모닝 아메리카 Summer Concert Series 참여와 같은 대중과의 재회는 여전히 수많은 팬들이 휘트니 휴스턴을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런 지지에 기반하여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로 데뷔했다.

2009년 오프라 위프리 쇼에 출연할 당시

그 후 ‘Nothing But Love World Tour’가 시작되었지만 그 당시의 목 상태는 도저히 장기간 투어를 소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컴백에 팬들은 환호했지만, 동시에 전성기와 비교도 안 되는 가창력은 많은 실망도 안겨주었다. 2012년 2월 11일(현지 시각)에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향년 48세. 


사망 장소는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 있는 베벌리 힐튼 호텔. 이 날은 그래미 시상식 전날 축하 파티가 있던 날로 파티 도중에 발견되었다. 그래미 시상식 바로 전에 세상을 떠난 데다 시대를 풍미했던 디바의 씁쓸한 최후에 동료들은 물론 팬들도 큰 충격에 빠졌다. 정확한 사인은 코카인 흡입 후 익사라고 발표되었다.

 



오늘은 그녀가 우리의 곁을 황망하게 떠나간 지 딱 10년이 되는 기일이다. 내가 오늘 그녀의 삶을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녀의 기일을 기리며 그녀를 기억하고자 하는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니다.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그녀는 8,90년대 말 그대로 한 시대를 풍미한 팝의 최초 디바였다. 16살 때부터 마약을 배워 결국 마약 때문에 신세를 망치고 죽음까지 이르렀지만, 그녀의 삶이 온통 마약으로 얼룩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그 시대를 함께 보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영어 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고 감탄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가 얼마나 노래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냈었는지에 대해 추억하게 된다.

 

그녀는 누구보다 노력하는 가수였고, 그 노력으로 어렵게 성공을 이뤄냈다. 하지만, 늘 성공은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성공한 사람들이야말로 성공 이후 실패를 겪게 된다. 이 시리즈에서 내내 보아왔던 것이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낸 사람만이 진정한 성공을 맛볼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자신이 이뤄낸 그 전설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참혹하게 무너져갔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자기 관리에 실패했던 것이다.

 

그녀의 어렵기 그지없던 데뷔에서부터 성공에 이르기까지 삶을 보면 그 지난한 과정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얻어낸 성공을 유지하고 매진하는 데는 누구보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적당히 놀고 싶고, 적당히 즐기고 싶고, 적당히 좀 쉬고 놀면서 지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그 마음은 어느 사이엔가 어렵게 일군 성공을 좀먹기 시작하기 마련이다.

영혼을 흔드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그리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노력과 그 성공을 추억하며 그녀가 그렇게 황망하고 허탈하게 50도 넘기지 못하고 갈 스타는 아니었음을 기억한다.

그녀의 실패를 통해, 당신이 당신의 성공에 취해 게을러지고 싶고, 나태해지고 싶은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세상에 남아 더 아름다운 목소리로 심금을 울려줬으면 좋았을,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가 더 그리운, 그녀의 10주기 기일 앨범 앞에 이 글을 놓아둔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