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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4. 2022

흙수저 출신이라 제대로 대학에 가보지도 못했지만

이전 시대와 구분되는 새로운 현실 정치를 온몸으로 써내다.

1469년 피렌체에서 2남 2녀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한때 발 디 페사(Val di Pesa)의 많은 토지를 소유했었고 은행업과 양모업 등으로 제법 많은 재산을 모은 것은 물론, 그것을 바탕으로 역대 선조들이 13명이나 피렌체 정부의 요직을 맡았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가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태어날 무렵, 집안의 가세는 과거의 영광은 흔적을 찾기에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특히나 그 유명한 메디치 가문이 떠오르는 태양이었던 것과 비교하자면, 몇몇 법률가를 배출하기는 했지만 권력으로부터는 아주 멀어져 버려 평범한 평균 이하의 가문으로 떨어졌다. 그의 당숙이자 피렌체 대학의 법학교수였던 지롤라모(Girolamo Machiavelli)가 1460년 반(反) 메디치 음모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그 가문의 최후의 희망이 무너져버린 사건이었다.

 

그의 아버지 베르나르도(Bernardo)는 학자 스타일의 법률가로, 재산을 불리는 데에는 전혀 능력이 없었다. 공증인 자격증을 갖고 있었지만 부채가 너무 많아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이름은 시 정부의 공식 문서에 ‘부채자’(specchio)로 이름이 올라가 있었는데, 밀린 세금을 내려고 노력했지만 매년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농장은 매우 작고 소출도 적었으며, 1480년 세금 보고서에 ‘일정한 직업이 없다.’고 썼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다만 학문적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좋은 책을 얻거나 사는 데 무척이나 열심이었고, 법률적 논쟁만이 아니라 풍부한 문헌학적 식견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1475년 리비우스의 『로마사(Ab Urbe Condita)』의 지명 색인 작업을 도와주고 10년이나 기다려 책을 제본해 얻은 일화만 보더라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학문적 열정 덕분에 그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도 최고의 선생들과 함께 인문학적 기초를 쌓을 수 있었다. 일곱 살 때부터 마테오(Maestro Matteo)에게 라틴어를 배웠고, 이듬해 포피(Battista da Poppi)로부터 문법을 배웠다. 그리고 몇 년 후 당대의 석학이었던 란디노(Cristoforo Landino)의 동료로서 큰 명망을 누리고 있던 파골로 론칠리오네(Pagolo Sasso da Ronciglione)로부터 직접 사사하며 인문학적 교양을 넓힌다. 


그는 피렌체 학당(lo Studio Fiorentino)에 출석했지만 정규 대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당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필수과목으로 이수하여 읽을 수 있었을 그리스어를 읽지 못한다는 합리적인 근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 정치학자, 저술가이자 근대 정치철학의 기틀을 만든 사상가로 인정받는 <군주론>의 저자로 유명한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이야기이다.

 

마키아밸리 이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의 철학을 통해 ‘정치는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당위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관점에서 정치를 사유했다면, 마키아벨리를 거치게 되면서 ‘현실 정치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은 무엇인가?’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근대 정치철학을 제시하였다고 인정받는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오히려 당시 귀족들이나 유력 가문의 자제들과 어울려 대학 교육을 받았더라면 상처를 받았거나 더욱 과격해졌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공화주의의 정신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시인의 기질이 그의 독자적인 생각을 탄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버지를 통해 배웠던 ‘한 명의 군주에게 의지하는 통치보다 인민에 의해 만들어진 법을 통한 통치가 월등하다.’는 생각은, 이후 그의 소신이자 정치철학의 기본 정치 정신으로 자리 잡았고, 어머니의 남다른 시적 능력은 그의 문장이 틀에 박힌 공직자들의 뻔한 당시 문장이 아닌 자신이 쌓아온 인문학적 교양들이 축적된 고양된 글쓰기를 통해 시대를 뛰어넘는 정치적 상상력을 담아낼 수 있는 창의력을 배양시켜주었다.


이러한 부모의 자양분과 교양이 그가 시대를 뛰어넘어 그것을 선도하는 새로운 생각들을 꺼내놓기에 가능하게 하였으며 무엇보다 기존 유행했던 문장들과 달리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문장의 구성을 통해 ‘신이 내린 글’(divina prosa)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가 다스리는 군주국이었다. 당연히 귀족도 아니고 상류층에 속하지도 못했던 마키아밸리는 그들에게 있어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무능했던 피에로는 1494년 프랑스의 침공으로 당시 피렌체의 영토이던 피사마저 빼앗겼고, 자신들의 영토를 상실한 무능은 결국 피렌체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결국 메디치 가문은 졸지에 민중의 야유를 받으면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피렌체에 정치적 공백이 생기자, 산마르코 수도원의 원장 사보나롤라가 슬쩍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종교적 카리스마와 종말론을 앞세워 귀족들을 제압하곤 민중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피렌체에 공화국을 세웠다. 


즉, 피렌체는 이제 한 명이 지배하는 군주국에서 다수가 지배하는 공화정의 형태로 정치체제가 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스스로를 예언자라 부르면서 금욕을 통한 구원을 내세우고 지나친 도덕주의를 강요한다. 이로 인해 민중들의 반감을 샀고, 게다가 부패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비판하면서 프랑스 편에 섰기 때문에 교황의 분노마저 사는 등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스스로 좁혔다. 교황은 피렌체에 교회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금지시키는 성무 금지령을 내렸고, 이에 피렌체 사람들은 사보나롤라 파와 교황파로 갈라서서 서로를 비난하며 분열했다.

 

교황파의 수도사들은 사보나롤라가 예언자임을 증명하려면 직접 불길을 통과하는 시험을 치러야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은 단번에 피렌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이끌어냈다. 하지만 주최 측의 사정으로 이 시험 자체가 무산되어버리자 성난 군중들은 사보나롤라를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결국 사보나롤라는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후 피렌체 공화국은 온건중도파인 피에로 소데리니(Piero Soderini) 를 지도자로 내세운다.

 

피에로 소데리니(Piero Soderini)

흙수저로 기반이 없던 마키아벨리는 1498년 2월에 있었던 선거에서 사보나롤라의 추종자인 안토니오 밀리오로티(Antonio Migliorotti)에게 패한다. 메디치 가문의 복귀를 모색하는 ‘회색파’(bigi)는 아니라도 최소한 사보나롤라의 정치 개입에 불만을 가졌던 ‘분노파’(arrabbiati)라는 소문이 돌았고, 스스로도 사보나롤라 추종자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498년 6월 사보나롤라가 사형당하고 난 뒤 벌어진 선거에서 상황은 호전되었다. 그의 반(反) 사보나롤라적 행보가 제2서기국의 서기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선거에서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어떻게 두 번에 걸쳐 80인 위원회로부터 후보 지명을 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한 것은 마키아벨리의 탁월한 문장력 말고는 없다.

 

29살의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피렌체 공화정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제2서기장에 발탁된 것이다. 공식적인 직함은 ‘10인 위원회(Dieci di Libertà e Pace)’의 서기장으로, 임무는 공화국의 군대를 감독하는 기관의 통신문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비록 마키아벨리는 중요한 정책 수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었지만, 정책을 집행하고 상관을 보좌하는 과정에 있어서 정보를 취합하고 요약하여 전달하면서 공화국의 외교정책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여러 대사들이 급하게 보내온 공문서들을 처리하면서도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항상 노력했기 때문에, 상관들은 그가 보낸 공문서를 높게 평가했고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자신의 재능을 살려 공직을 수행하는 것이 좋았다.

 

1499년 마키아벨리는 피사 재정복 작전에 가담한 용병대장 야코포의 주둔지로 파견되었다. 야코포는 피옴비노의 영주이기도 했는데, 그는 피렌체 정부로부터 자금과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지 못하면 작전에서 이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마키아벨리는 야코포를 잘 설득해 원래 합의된 조건을 따르도록 만들었지만, 한 나라가 용병들에 의존하는 미봉책만으로는 그 나라를 결국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과 일련의 과제들은 마키아벨리에게 민병대의 필요성을 각인시킨 사건으로 작용한다.

여군주 카테리나 스포르차

또한 비슷한 시기에 피렌체의 북동부에 위치한 소국 포를리로 가서, 그곳의 여군주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만났다. 마키아벨리는 그녀가 피렌체에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랐고 그녀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그녀는 피렌체의 적대국인 밀라노에 힘을 보태주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카테리나는 “피렌체 사람들의 말은 언제나 만족스럽지만 행동은 항상 실망스러웠다.”라는 변명을 했다. 


이 사건은 마키아벨리에게 굴욕에 가까운 조롱이라 느껴졌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느끼게 되는 피렌체의 현실적 무능력은, 훗날 그의 《군주론》을 집필하게 되는 씨앗으로 잉태된다.

체사레 보르자

한편,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교황과 한편이 되어,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함께 피렌체 북쪽에 위치한 밀라노를 점령했다. 피렌체는 친프랑스 정책을 펼치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체사레 보르자였다. 체사레 보르자는 포를리를 집어삼킨 뒤 아드리아 해안의 페사로와 리미니를 손에 넣으면서, 점차 피렌체의 북부 지역에 그 자신의 영토를 더 확장하려는 야욕을 보였고, 피렌체는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1500년, 결국 피렌체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프랑스에 마키아벨리를 파견한다. 마키아벨리는 낡은 복장으로 화려한 프랑스 궁전을 돌아다니면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한다. 그러나 감정과 논리만으로 호소하기에 실질적인 정치와 외교는 한계가 있었고 프랑스인 동조자를 뇌물로 매수하는 것만이 최선의 판단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보고를 피렌체 정부에 전달한다. 


결국 마키아벨리는 한쪽이 다른 쪽의 목을 조르는 국제정세의 현실 앞에선, 양심이나 공정한 태도, 또는 주장의 정당성에 호소한들 소용이 없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통찰은 정확했다. 결국 피렌체 정부가 뇌물로 쓸 실탄(돈)을 보내오고 나서야 프랑스 국왕은 체사레 보르자에게 해당 지역을 간섭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피렌체의 여러 고위 인사들은 마키아벨리의 외교활동을 성공적으로 평가하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501년, 32살의 마키아벨리는 8월의 어느 날, 명문가에서 자란 마리에타 코르시니와 결혼했다.

 

한편 마키아벨리의 성공적인 외교활동으로 체사레 보르자는 이제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야욕을 조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는 1502년 6월, 피렌체 동쪽 산악 요충지인 우르비노 공국을 기습 점령하면서 피렌체에 다시금 긴장을 조성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자신이 확립한 패권을 인정해 달라는 내용의 협정을 맺기 위해 피렌체 정부에 대표단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다시 마키아벨리가 사절로 파견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우르비노에 도착한 뒤, 자정이 넘어서야 궁전의 새 주인인 체사레 보르자를 접견할 수 있었다. 횃불이 어른거리는 음산한 분위기에서 마키아벨리는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야욕으로 불타고 있던 인물, 훗날 《군주론》에 나오는 무자비한 참주의 본보기가 될 ‘그’를 대면하게 된다. 


이 첫 만남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설명하는데 할애된 분량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피렌체 정부의 우유부단함과 다르게 체사레 보르자의 단호하고 당당한 모습은 마키아벨리에게 두려움과 존경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은 잊지 않았다. 체사레 보르자가 피에로 데 메디치의 복귀를 거론하며 거들먹거리는 순간, 마키아벨리는 발끈하여 피렌체의 일은 피렌체 사람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며 강하게 응수한다.

 

그의 노골적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와 피렌체 정부는, 일단 루이 12세가 체사레 보르자의 꿍꿍이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더는 약자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막아줄 것이라고 판단했고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해 꾸물거렸다. 마키아벨리는 그 비굴한 게임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했지만, 딱히 다른 방도도 없었다. 

루이 12세

그렇게 어렵게 번 시간 동안 다행히 루이 12세가 체사레 보르자의 영토확장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라 개입하면서 당장의 위기는 모면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체사레 보르자의 야심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마키아밸리의 불길한 예감은 아주 강하게 현실에 덮여오고 있었다.

 

그런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150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가 연회에 참석한 후 구토를 동반한 고열에 시달렸고, 교황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로서 체사레 보르자의 세력 확장에 대한 뒷배 역할을 해주던 교황의 비호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한 달 넘도록 병으로 고생하면서 자리를 비우고 있어도 그의 부하들은 감히 반란 일으킬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정도로 그의 입지는 탄탄했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다음 교황이 되겠다는 율리오 2세가 계속해서 그를 예전처럼 비호해 주겠다고 한 약속을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었다. 


체사레 보르자는 율리오 2세가 교황이 되는 것을 충분히 방해할 수도 있었고 이를 통해 가장 큰 경쟁자이자 장애물이 성장하는 것을 막을 수 기회가 있었지만, 율리오 2세의 사탕 바른 그 약속만을 믿고 그를 지지했다.

 

결국 다음 교황으로 선출된 율리오 2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적당한 핑계를 대다가 체사레 보르자를 체포하곤 감옥에 가둬버렸다. 그렇게 체사레 보르자가 이끌던 군대의 잔당들은 자연스레 괴멸당하면서 피렌체는 전화위복으로 안정을 되찾게 된다.

율리오 2세

외세와 용병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피렌체를 보며 그 외교 최전선에서 국제 정세를 겪은 마키아벨리는 민병대(자국 시민군_의 필요성을 더욱더 절감하게 되었다. 오로지 돈을 위해 싸우는 용병에게 국가의 안위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근본적 해결책이었다. 


따라서 그는 피렌체 시민군의 창설에 앞장섰으며 많은 노력을 통해 시민군을 육성하고 이를 이용하여 피사를 재탈환하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피렌체를 둘러싼 상황이 영 녹록지 않았다. 새로운 교황 율리오 2세는 호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체사르 보르자가 몰락하고 남긴 땅을 베네치아가 손쉽게 접수하자, 본인이 직접 나서 신성로마제국(독일), 스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1509년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단 하루 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베네치아가 외세에 의해 너무나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고 난 교황 율리오 2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베네치아와 스페인과 손을 잡고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을 내쫓기로 결심한다.

 

피렌체는 이런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와 대결구도의 변화가 무척이나 불안했다. 피렌체 공화국의 전통적 우방인 프랑스가, 무슨 일이 있어도 피렌체가 이 전쟁에 참여해야 된다며 압박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피렌체는 전쟁에 소규모 분대를 형식상 파견했고 그 분대의 파견은 당연히 프랑스를 몰아내겠다던 호전적인 교황의 분노를 샀다. 피렌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러한 상황만큼은 피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외교술은 한계에 봉착했고, 자국의 군인들 말고는 믿을 곳이 없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에 의지했던 피렌체 공화정의 운명은 1512년 4월 라벤나 전투에서 총사령관을 잃은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파국을 맞는다. 8월에 피렌체령인 프라토(Prato)가 스페인 군에게 유린되고, 교황의 지지와 스페인의 지원을 등에 업은 메디치의 군대가 피렌체 민병대를 연파하면서, 피렌체 공화정은 9월 친(親) 메디치 쿠데타로 역사에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후 공화국은 해체되었고, 피렌체의 체제는 메디치 가문에 의해 다시 군주국으로 되돌려졌다. 이 과정에서 마키아벨리는 반-메디치 인물로 낙인찍혔고 결국 15년간 있었던 공직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직후 메디치 가문 암살 모의에 휘말려 감옥에 갇히면서 이른바 날개꺾기(strappado) 고문을 여섯 번이나 당하기까지 했다. 

날개꺾기(strappado) 고문

실제로는 그는 암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그런데 반전이 또 한 번 일어난다. 갑작스레 율리오 2세가 말라리아열에 걸려 죽고, 뒤를 이어 메디치 가문의 형제 중 형인 조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e' Medici)가 교황 레오 10세로 등극하면서, 기분이 좋아진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대규모 사면을 실행하면서 가까스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1513년 3월 11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 마키아벨리는 산탄드레아의 조그만 산장에 칩거해 『군주론』를 집필한다. 그는 감옥에 갇히면서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했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물려주었던 산트 안드레아의 작은 농장이 있어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은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과된 벌금을 갚아야 했고, 동시에 가족들을 부양했었기 때문에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그의 집필은 이른바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줄리아노가 자신의 사면을 도왔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자신을 그 절망적 상황에서 해방시켜 공직으로 다시 데려갈 인물도 줄리아노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최초에 『군주론』을 헌정할 사람으로 그는 줄리아노를 염두에 두었다. 교황 레오 10세의 즉위로 피렌체와 로마가 모두 메디치 가문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황에서, 줄리아노에게 복귀에 대한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 생각이 없던 줄리아노의 무관심과 교황청에 있었던 정적들의 견제로, 복귀를 위한 여러 노력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모든 것을 잃은 후’(post res perditas)의 절망적 삶은 1526년까지 지속된다.

 

망명해 있던 피에로 소데리니가 라구사 공화정의 서기장을 제의하기도 했고, 1521년 제2서기국 서기장 봉급보다 훨씬 더 많은 돈으로 용병대장 콜론나(Prospero Colonna)에게 요직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그는 피렌체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공직을 모두 거절했다. 그래서 진정한 공직으로의 복귀는 메디치 가문의 의심이 사라진 이후에야 가능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가 마키아벨리가 쓴 『피렌체사』(Istorie fiorentine, 1525)를 매우 흡족하게 여기고, 1526년 5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 대적해 교황을 중심으로 코냑 동맹(the Holy League of Cognac)이 결성되면서, 마키아벨리는 그토록 염원하던 외교의 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를 끊임없이 의심했던 클레멘스 7세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그가 필요해졌던 것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526년 5월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마키아벨리를 피렌체 성벽 증축을 위해 급조된 위원회의 서기장으로 임명한다. 4월에 교황의 명을 받아 스페인에서 망명을 온 군사전문가 나바라 백작(Pietro Navarra)과 함께 피렌체 성곽을 둘러보고 쓴 보고서가 효과를 거둔 것이다. 이때 그는 지금의 근대식 전쟁은 커다란 요새와 탄탄한 포좌(砲座)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했고, 산 미니아토(San Miniato) 성당이 있는 동남쪽 언덕을 포기하고 아르노 남쪽 제방으로 방어선을 옮길 것을 주장한다. 


산 미니아토 성당을 포기하는 의견은 교황청 내부의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끝내 관철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위협이 코앞에 닥친 1527년 봄까지 이렇다 할 일의 진전은 없었다.

 

사실 1526년부터 마키아벨리는 성곽 보수를 감시하는 일보다 외교적 잡무로 동분서주했다. 카를 5세의 군대가 다가오자 교황령과 동맹군의 영토는 소요로 들끓었고, 민병대 육성에 남다른 명성을 가지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외교업무와 함께 군사업무도 조언하고 다녔다. 아치아이우올리(Roberto Acciaiuoli)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푸념하듯, 마키아벨리의 군사훈련은 현장에서 환영받지도 실현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외교업무에서는 남달랐다. 특히 클레멘스 7세의 소심한 행보가 동맹의 계획들을 무산시킬 때마다, 그는 모데나(Modena)에 있던 귀치아르디니와 머리를 맞대고 난국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했다. 1526년 9월 콜론나(Colonna) 가문의 기습을 받은 교황이 맺은 휴전으로 롬바르디아에 있던 동맹국들이 철수하고, 스페인 군대에게 피렌체가 노출된 11월 이후 그의 노력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당시 지도 상황

1527년 5월 4일 스페인 군대는 피렌체를 향할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방향을 돌려 로마를 함락시켰다. 치욕적인 ‘로마 대(大)함락’(il Sacco di Roma)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미 피렌체는 그해 2월부터 정국이 불안했고, 마키아벨리는 권력다툼을 뒤로하고 피렌체를 지켜낼 묘안을 고민했다. “나의 조국(patria)을 내 영혼(anima) 보다 사랑한다.”는 그의 절규가 보여주듯, 그는 오직 피렌체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또다시 그를 배신한다. 5월 16일 ‘대(大)평의회’(Consiglio Grande)와 함께 공화정이 부활되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메디치의 하수인’이라는 낙인뿐이었다. 사보나롤라의 추종자들과 반(反) 메디치 귀족들이 주축을 이룬 새로운 공화정은 그의 충정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그가 이전에 메디치 가문의 성벽 관리 관직을 맡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희망이 무너져버리자 그는 상심한 탓인지 1527년 6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그는 조그만 가족묘에 묻혔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의 미덕은 ‘권력’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개념이다. 아주 뚜렷하고 명확하며 좋은 목적, 이른바 공익(公益)을 위해 사용될 경우에만 전부도 아닌 어느 정도 절대자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좋은 목적을 가졌을 때 ‘정말 불가피한 경우에만’ 지극히 상대적인 의미에서 가벼운 도덕적 가치부터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인이 부도덕한 수단을 남용하면,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종교적 의미에서) 영광은 얻을 수 없다’고 본 그의 가치관에서 드러난다. 즉 마키아벨리는 정치인이 추구해야 할 가장 큰 목표가 ‘영광’이라고 봤다. 그러므로 부도덕한 수단을 남용하여 영광을 얻지 못한 권력자는 ‘성공한 정치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게 마키아벨리적 시선이고 통찰의 결과이다.

 

현대의 복잡다단한 학문적 기반을 갖춘 이들의 입장에서 마키아벨리의 방법론은 오류가 많고 일관성이 결여되었으며 제시한 자료도 부정확하거나 불완전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시한 올바른 방향성이 오해를 받아 마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은 어떤 것이든 용납된다는 식으로 호도되거나 하는 일은 너무도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마키아벨리가 그 전시대의 철학자들과 달랐던 그 점이 무엇인지 당신은 비교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평생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상처 입으면서 성장하고 보완했던, 바로 그 이전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현실정치로의 이면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도덕적 당위가 아니라 ‘현실의 사례’에서 정치를 살펴봐야만 한다는 절실한 외침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에서 말하는 핵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행동은 ‘고귀한 동기’가 아니라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의 통찰에 따르면, 전통적 도덕관념에 부합하는 행동을 했던 권력자들이 종종 재난을 초래했던 반면, 도덕규범을 어겼던 권력자들은 도리어 시민의 삶을 개선시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위정자란 반드시 그 행동의 동기보다 그 행동의 결과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마키아벨리즘을 마치 아무 생각 없이 비열한 행동을 한 뒤 그걸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으로서 사용하는 것은 그의 의도와는 무관한 궤변일 뿐이다. 그는 시민들의 자유와 공공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확신을 이루기 위한 비열한 행동일 경우에만, ‘겨우’ 정치적 행위로써 용납한다.

 

그는 이른바 흙수저였다. 자신의 능력 말고는 아무런 연줄도 빽도 없이 그저 몸으로 부딪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시대의 부침 속에서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자 하였고, 무엇보다 우직하게 자신의 조국에 자신의 능력을 오롯이 바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외면당했고, 예순이 채 되기도 전에 그 상실감에 마지막 희망까지 잃고서 힘겨운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당신이라면 당신의 신념을 위해 더 많은 돈이나 명예를 거부하고 온전히 외길만을 걸어 나갈 수 있었겠는가? 언제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었던 그의 부침 많은 그 인생 역정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지만,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조국에게 버림받자 도저히 견디지 못했다. 다른 외적인 힘에 흔들리는 조국을 강건하게 만들고자 했던 어찌 보면 아주 소박하고 작은 희망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한평생이었다. 그의 저술의 목적 역시 그것 하나였다.

 

당신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버는 것? 유명해지는 것? 고작 그런 것을 위해 당신의 한평생을 쓴다는 말을 입에 올리고 싶은가? 이상이나 꿈이 당신에게 밥과 빵을 제공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현실적인 정치를 논하고 현실의 국제정세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왔던 마키아밸리가 제시한 지향점은 오염되지 않은 영광을 위한 삶이었다.

 

당신이 위인과 비견될 정도의 삶이 이미 아니라고 이 생에서는 글렀다고 적당히 돈을 벌고 적당히 소시민적 삶을 살면 그뿐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이 소시민이라고 자신을 작게 이야기한다고 하여 당신이 해야 할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국민으로서의 도리가 작아지거나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 시리즈를 통해 누차 강조했지만, 죽고 나서 자신의 저작이나 미술품이 수백억이 간들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살아서 자신의 이상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데 죽고 난 뒤 유명해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이다.

그의 묘가 이장된 산타 크로체 성당

마키아밸리와 당신이 다른 점은, 당신은 그렇게 억울하고 분통해하며 삶을 마감한 그의 실패담을 통해 당신은 그 전철을 밟지 않고, 살아서 노력하고 결코 주변에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의 이상을 이뤄낼 수 있을 공부와 수양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끝내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면, 그의 사상과 삶을 따르는 수많은 이들에게서 받은 영광은 죽은 이후가 아니라 살아서 누릴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의 저서가 유명세를 타고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고 결국 18세기엔 그 명성에 걸맞게 산타 크로체 성당의 웅장한 묘로 이장되었다. 이장된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할 만큼 위대한 이름

 

당신의 이름을 세상이 어떻게 기억하게 하는가는 결국 당신에게 달린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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