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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5. 2022

일찍부터 부모님을 여의고 주교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금기시하는 진실을 세상에 외치다.

1473년 폴란드 왕국 왕령 프로이센의 토룬(Toruń)시에서, 독일계 상인 아버지 슬하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폴란드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했고 이탈리아어와 그리스어도 어려움 없이 구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그의 문헌들 대부분은 당시 유럽의 학문 공용어인 라틴어로 쓴 것들이며, 독일어로 쓴 편지가 일부 있다. 그가 태어난 토룬이 독일어권이었기에 그의 모어(母語)가 독일어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현재 공식적으로 그는 논란의 여지없이 ‘폴란드’ 출신이다.

 

10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인 바체르로데 신부 밑에서 자랐다. 고향에서 학교를 다닌 뒤 1491년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 천문학, 고전학 등을 공부했다. 원래 신부가 되기 위해 입학한 크라쿠프 대학에서 철학 교수인 알베르트 브루제브스키가 학교 바깥에서 개설한 천문학 강좌에 참여하고 다른 몇 명의 교수들에게도 천문학을 배웠다.


크라쿠프에서 그는 기하학, 대수학, 우주 구조론, 천문 계산, 광학 등을 배우고 고대의 철학적 자연학을 익히면서 천문학자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또한 이 시기부터 그는 천문학 문헌을 수집하여 탐독하며 기존 천문이론들 사이의 모순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천동설)과 알폰소 항성 목록 사이의 불일치를 알게 되었다. 당시의 천문학에는 교회력(敎會曆)의 시정과 항해력의 개량이라는 2개의 큰 문제가 미해결로 있었다.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이자 가톨릭 사제. 당시 주류였던 지구중심설(천동설)을 뒤집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주장한 인물로 본명은 폴란드어로 '미코와이 코페르니크(Mikołaj Kopernik) 독일어로 니클라스 코페르니히크(Niklas Koppernigk). 우리에게는 라틴어 이름으로 익숙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이야기이다.

 

그의 주장은 천문학 사상 가장 중요한 재발견으로 여겨지고 있다. 당연히 폴란드에서는 국가적 영웅으로 평가한다. 독실한 가톨릭인 폴란드의 상황상 가톨릭 주교일 뿐만 아니라, 지동설을 재발견했고, 오늘날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과의 분쟁에서도 폴란드 측의 승리에 한몫을 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1496년 이탈리아로 가서 볼로냐 대학에서 신학, 법학, 고전학을 공부했지만 주된 관심은 천문학이었다. 파도바 대학, 페라라 대학 등에서도 공부한 그는 1500년 로마에 머무르며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했다.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의학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는 1505년경부터 플라우엔 부르크 성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법학 지식으로 교구 행정에 참여했으며, 수학 지식으로 통화(通貨)와 경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성당 참사회 입장에서 그는 매우 쓸모가 많은 ‘준비된 인재’였다.

 

1513년 코페르니쿠스는 성당 참사회의 상회에서 800개의 돌과 석회를 구입했다. 천문 관측을 위한 지붕 없는 탑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천문 관측기술의 한계 탓에, 그의 관측이 새로운 천문이론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514년에는 교황의 비서관으로부터 교회력 개정을 위한 회의 참석을 요청받았지만 거절했고, 다만 달력 개정을 위해서는 태양과 달의 관계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의견만 제출했다.

 

1512년에 자신을 돌봐주던 외삼촌이 죽자, 바르미아 영주성이 있던 하일스베르크를 떠나 수도 사제로서 바르미아 교구의 주교좌인 프라우엔 부르크 대성당에서 기거하였다. 그때부터 야간에 옥상의 망성대에서 스스로 만든 측각기를 이용하여 천체관측을 시작하였다.

그가 지동설을 착안하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1510~1514년 사이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천문 체계에 관한 개략적인 생각을 발전시켜 그것을 짧은 논문으로 작성했다. <천체 운동에 관해 구성한 가설에 대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소론(小論)>, 줄여서 <소론(小論)>이라 일컫는 논문이다. 논문 제목은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아니라 그것을 필사하여 유포시킨 이들이 붙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논문을 소수의 지인들에게만 배포했다(정식 인쇄본 출간은 1878년). 이 논문에서 그는 본격적인 수학적 설명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천문학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구가 움직이는 태양 중심 체계를 가설로 제시했다.

 

<소론(小論)>을 내놓은 이후 꾸준한 연구를 통해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1525∼1530년 사이에 집필한다. 다만 출판을 주저한 것은 종교적으로 이단자가 된다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1539년 5월 젊은 천문학자, 수학자 레티쿠스가 코페르니쿠스를 찾아왔다. 코페르니쿠스는 레티쿠스에게 자신의 노트를 보여주었다.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에 대한 확신을 굳게 지니게 되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관한 해설서를 집필해 1540년에 출간하고, 코페르니쿠스에게 노트를 책으로 출간하자고 강력히 권했다.

 

결국 1542년부터 레티쿠스는 뉘른베르크에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인쇄 작업을 감독했지만 루터파 신학자 안드레아 오시안더에게 감독 작업을 맡겨 이듬해 출간됐다. 오시안더는 교회와 마찰을 일으킬 것을 걱정하며 코페르니쿠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서문을 써넣었다. 그는 서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계산상의 편의를 위한 추상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완곡하게 돌려 적는 보험성 기술까지 잊지 않는다. 그렇게 책은 레티쿠스의 이름으로 일단 배포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자 본격적으로 출간하기로 했는데, 이때엔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체계, 즉 지동설을 구상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 유학 시기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주가 수학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고대 문헌을 조사하면서 이미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우주 체계를 생각한 고대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계기였다. 남은 문제는 새로운 우주 체계에서 행성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먼저 우주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얘기한다. 또한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 도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 실린 태양중심체계 그림

“만물의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전체를 동시에 밝혀주는 휘황찬란한 신전이 자리 잡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자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혹자는 그것을 빛이라 불렀고, 혹자는 영혼이라 불렀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길잡이라 불렀으니 그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태양은 왕좌에서 자기 주위를 선회하는 별들의 무리를 내려다본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 다른 것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시대에 그것으로 인해 탄압까지는 받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청의 일부 인사들은 그의 이론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물론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그와 동시대인인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나 하늘의 덮개, 해와 달이 아니라 지구가 회전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발버둥 치는 오만불손한 주장이 나왔다. 그 바보는 천문학 전체가 뒷걸음치는 걸 바라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세계관을 바꾸어놓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요컨대 그것은 ‘점진적 혁명’이었다.

 

종교개혁이 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교황청에 등 돌리게 만들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은 신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지구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우주적 의미를 보잘것없는 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정말로 신의 사랑을 독자치하는 존재인가? 무한한 우주를 창조한 신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왜 굳이 지구로 보냈단 말인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서양 중세의 우주관, 인간관, 세계관의 뿌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1516년 바르미아 주교령과 알렌슈타인, 멜사크의 재정 담당관이 되어 알렌 슈타인으로 이동했고, 1521년 튜튼 기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알렌 슈타인의 수성 책임을 맡아 도시를 지켜내기도 했다. 1522년에 다시 프라우엔 부르크 대성당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독일의 우표에 그려진 코페르니쿠스

그는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초판본을 출간한 지 불과 두어 시간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의하면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첫 인쇄본을 그의 손에 쥐어주자,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가 잠깐 깨어났다가 곧 숨을 거두었다고는 이야기도 전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천문학자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누렸지만, 그의 공적(公的) 생애는 어디까지나 교회 회계감사, 평의원, 교구장 등 충실한 교회 성직자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고 하는 지동설은 오랜 옛날부터 여러 사람에 의해 주장되어 왔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에 피타고라스 파의 필롤라오스도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주장했고,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에는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가 그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마게스트》를 발표한 이래로 모든 사람들은 천동설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왜 행성이 천체상을 역행하는가, 왜 수성과 금성(내행성) 그리고 화성과 목성 및 토성(외행성)이 다른 움직임을 하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라는 지동설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라는 신전 중심에 태양을 놓고, 그 주위에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을 배열하였다. 안쪽으로부터 차례로 수성 · 금성 · 지구 · 화성 · 목성 · 토성이 있고, 그 이외의 항성을 가장 바깥쪽 천체로 하는 균형 잡힌 우주 체계를 만들었다. 그는 우주를 유한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으로 그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지구의 공전 운동을 표현하는 데도 아주 복잡한 원(圓)의 운동을 계산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는 주장을 지지할 수 있는 증거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1530년부터 이미 세상에 알려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그에게 출판을 권한 반면, 루터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주장에 수학과 이론면에서 불충분한 점이 있다는 것, 그리고 반대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간행을 주저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여전히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행성의 궤도를 타원이 아니라 원으로 생각했고, 우주를 유한한 구체(球體)로 보았다. 또한 천동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을 피해, ‘지동설이 계산하는 데 편리하다’ 정도로만 주장하였다.

 

현재의 태양계 구조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초의 케플러와 17세기 후반의 뉴턴이 등장하기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등장으로 근대 과학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에서 발행된 우표.

그의 지동설이 발표된 뒤에도 이 혁명적인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담하였다. 1616년에는 로마 교황에 의해 금서 목록에 올랐고, 약 70년 후에는 이 때문에 유명한 갈릴레이 재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실 갈릴레이가 재판에까지 끌려간 것에 비해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조심해서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였는지 자신의 발견과 주장으로 인해 탄압이나 압박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출간하는 것을 두려워했을 정도라는 것만 보더라도 그가 받았을 시대적인 압박감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외눈박이 세계에서 두 눈을 가진 자는 병신이다.

정상인지 정상이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어이가 없어 보이지만 현실은 그러하다. 민주주의의 다수결이 상식이나 진리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코미디가 현실이 되어버린 것은 이미 코페르니쿠스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옳은 의견이라고 확신이 들고, 심지어 그것이 자연의 사실이라 할지라도 기존에 있던 다수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신념이라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든 오판이고 오산일 수 있다는 위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함부로 확신을 갖는 것은 수많은 검증과 확인이 필요하다. 그것은 루터 쪽도 그랬겠지만 코페르니쿠스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코페르니쿠스 사후 70년이나 지난 갈릴레이마저도 그런 날 선 비난에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눈으로 확인되고 과학으로 입증되는 현상에도 이렇게 많은 세월 종교까지 앞세우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억눌렀을진대, 사람들의 행동이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한 마녀사냥과 자신들의 이익을 내세우며 의견을 강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당신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게 되고 당신도 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때 사람들이 선택하는 쪽으로 사회는 대부분 움직여간다. 지금 사회가 부정부패와 부조리로 물들어간다는 것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편향되게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세의 엄중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공부하고 알게 된 사실이 종교를 등에 엎은 절대적인 권력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반대편의 진실일 때, 코페르니쿠스는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당시 천동설 주장의 주류였던 가톨릭의 주교였다는 사실과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지동설을 주장한 근거가 관측의 결과에 의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철학적 직관이었다는 점이다. 이때까지 천동설이 정설인 이유는 가톨릭 교리의 방해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지동설이 천동설보다 정확하고 수학적인 모델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도 다 맞은 건 아니었다. 지동설은 기본적으로 이렇듯 철학적 사유의 결과였기 때문에 모든 천체의 궤도가 완벽한 원이라고 주장했던 것. 하지만 단순 원운동만으로 행성 궤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원과 이심을 갖다가 행성 궤도를 설명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적지 않게 오류가 생겼다. 이후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 원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게 밝혀지고 나서야 이러한 오류들이 시정될 수 있었다.

 

즉, 그 역시 확실한 확신을 가질 증거나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닌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이 이론에 대한 의구심을 증명 해내가는 과정으로서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당신의 삶이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이라면 지금 당신의 실패는, 혹은 당신이 앞으로 겪게 될 실패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쩌면 그 실패를 아쉬워하고 당신을 응원하는 사람들보다는 당신의 실패로 인해 앞서 나가거나 올라가는 것이 즐거운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당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당신의 자존감을 누르고 당신이 조직에서 튀는 것을 경계하고 질시하는 그 뭇 목소리들이 당신의 목을 조이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겠다고 당신이 용기를 냈음에도 그것으로 당신이 밀려나고 배척당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튀지 말라고,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옳은 걸 찾느냐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묻어가라고.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서 얻을 불이익이나 실패가 두려워 그들과 같은 길을 걷고 그들의 편에 서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그렇지만 그 순간 당신은 그저 쌓여있는 쓰레기 중에 하나로 당신의 소중한 하나뿐인 삶을 내던진 것이고, 당신의 양심이 깨어있는 24시간, 365일 어떤 자리에 있든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든 어떤 대가를 받고 기어올라가든 불편함에 몸을 계속 이리저리 뒤척이고 뒤틀어야만 할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란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의 인생을 보장하거나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아니고, 당신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누리는 혜택들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한 당신의 마음이 무거워짐이 당신을 내리누르는 불편함이 훨씬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무지해서 모른다면 모르겠으나, 알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한 번뿐인 당신의 인생을 그리 하찮게 만들어 시궁창에 던질 것이라면 뭐하려고 그리 살겠다고 아등바등했단 말인가?


당신이 옳다고 여기는 신념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할 거라면, 그것들과 건배를 하고 즐기고 웃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그 가식 어린 웃음의 뒤에 눈물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최소한 당신이 알고, 하늘이 알고, 내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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