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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6. 2022

귀족조차 아닌 군바리에 정통 아랍인도 아니었지만

이슬람의 수호자이자 예루살렘을 수복한 영웅으로 일어서다.

1137년,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에서 쿠르드족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대부터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인 이마드 앗 딘 장기(عماد الدین زنكي‎, Imad ad-din Zangi)와 그의 아들 누르 앗 딘(نور الدين, 일명 누레딘)을 섬기던 군인이었다. 


누르 앗 딘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지하드의 기치 아래 무슬림들을 단합시켰고, 십자군과의 전쟁에서도 많은 승리를 거두며 ‘성왕(聖王)’으로 칭송받았다. 그의 아버지 아이유브는 지략으로,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는 뛰어난 용병술과 무용으로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 역시 젊어서부터 누르 앗 딘의 측근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이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이집트 정복 때였다. 훌륭한 군인으로 성장한 그는 숙부의 도움으로 시리아의 장기 왕조(개창자는 ‘이마드 아딘 장기’. 1127년 셀주크 왕조의 술탄 무하마드가 장기를 모술 총독에 임명함과 동시에 아타벡의 칭호를 주었는데, 이때 세력을 신장시키고 신자르·자지라·하란·알레포·하마 등으로 영토를 넓혔다.)에 들어가 국왕에게 중용되었다. 


당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내분이 계속되어 고관 중의 한쪽에서는 십자군과 손을 잡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장기 왕조와 손을 잡고 있었다. 이 파티마 왕조에 십자군이 몰아닥친다. 궁정 내의 친(親)시리아파(派)는 장기 왕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왕은 그의 숙부와 그를 이집트에 파견, 십자군을 물리치게 하고 그대로 그곳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는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사지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것은 그의 숙부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당장 파티마 왕조의 실권을 장악해 버렸다. 그는 숙부 시르쿠의 부관으로 이집트군과 십자군을 동시에 상대하며 4차례에 걸친 어려운 전쟁 끝에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의 숙부 시르쿠는 파티마 왕조의 재상이 되어 본국 시리아에 보내는 송금을 지연시킬 수 있을 만큼 지연시키는 뻔뻔함으로 자신의 잇속을 챙긴다. 그러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숙부 시르쿠가 식사 중 폭식하다가 어이없는 급사로 죽음을 맞게 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겼고, 이집트 관리들에 의해 졸지에 그가 이집트의 새 총독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그렇게 재상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역시 숙부처럼 시리아에 돈을 보내지 않았다. 화가 난 장기 왕조의 국왕은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으나 그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이집트 관리들이 그를 자신들의 새로운 총독으로 지지했던 이유는 그가 순전히 숙부의 세력을 등에 없고 성공한 우유부단한 젊은이 정도라고 판단한 안일한 의도에서였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대단히 민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후 그는 겉으로는 누르 앗 딘에게 충성을 바치는 척하면서, 자신의 군대를 확충하여 수단과 요르단,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점차 확장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이후 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이를 경계한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쳐들어가려고 했지만 60세가 넘은 고령이었던 탓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순수한 아랍인이 아니라 이슬람교도인 크루드인(人)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창건자이자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의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회복한 이슬람 지도자로, 우리에게는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의 이야기이다.

 

그의 온전한 풀네임은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이다.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알 말리크 안 나시르), 승리의 아버지(아부 알 무자파르), 신앙을 품은 정의(살라흐 앗딘),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의 아들인 샤디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라는 의미이다. 즉, 유수프(يوسف)가 그의 본명인 셈이다. 이슬람 경전 <쿠란>의 등장인물인 유수프(요셉)와 아이유브(욥)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살라딘은 먼 바그다드의 칼리프(敎王. 이슬람교도의 최고지도자임에도 당시 이미 유명무실화되었던 존재였다.)의 이름을 사용해 ‘나는 칼리프의 이름 아래 이집트를 대리 통치한다.’고 선언하고 사실상 이집트의 왕의 자리에 오른다. 살라딘은 자신을 ‘왕’이라 칭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왕이라 불렀고, 이것이 살라딘의 아버지 이름을 딴 아이유브 왕조의 시초이다.

 

당연히 시리아의 장기 왕조와의 관계는 전보다 더욱더 악화되었다. 장기 왕조의 국왕은 이집트 원정군을 편성하기 시작했는데 살라딘은 은혜를 입은 주군(主君)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며 애써 전쟁을 피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장기 왕조의 국왕이 왕비와 어린 왕자만을 남겨 놓고 갑자기 죽고 말았다. 살라딘은 “저는 왕자님의 충실한 신하입니다. 왕자님을 섬기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하며 시리아로 들어가 왕비와 결혼, 장기 왕조를 사실상 차지해 버려 신분상승을 완성한다.

그러던 중에도 영토 확장과 개편을 잊지 않아 서쪽의 북아프리카에도 군대를 보내 그의 시대에 아이유브 왕조는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서쪽으로는 튀니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딘이 이집트를 차지했을 때부터 살라딘을 경계해 동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이집트로 해군을 통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결국 폭풍우로 모두 잃게 된다. 누르 앗 딘의 죽음 이후 시리아로 살라딘이 세력을 넓히자 십자군 계열 국가에서 기사를 파견해 견제하려다 살라딘이 생각보다 많은 군대를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도망쳤다.

한편 자지라 원정 중 살라딘은 십자군이 다마스쿠스 일대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더 전진하여 더 큰 성과를 얻겠다는 강공을 펼쳐 3일간 알레포를 포위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끝에 더 북상하여 장기 왕조의 심장부인 모술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한 달간의 포위에도 별 성과가 나지 않자 살라딘은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3일간 행군, 모술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신자르를 포위하였다. 도시는 15일간 저항했으나 결국 함락되었고 살라딘이 말릴 틈도 없이 튀르크 병사들은 저항의 대가로 약탈을 자행하였다. 겨우 신자르 총독과 그 장교들을 구출한 살라딘은 그들을 명예롭게 대해주며 모술로 되돌려 보냈다.

 

1183년 5월, 살라딘은 티그리스 강변의 견고한 성벽 도시인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하였다. 시내에는 많은 보화와 무기, 그리고 백만 권의 책이 있다고 알려진 도서관이 있었다. 살라딘의 재상 카디 알 파질은 자신이 택한 책들을 낙타 70여 마리에 실었다고 한다. 한편 아직 모술, 알레포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한 영토 경영을 피한 살라딘은 디야르바크르를 자신의 충실한 봉신인 히신 카이파의 누르 앗 딘에게 주었다. 그리고 알레포의 장기 2세가 십자군과 동맹하고 아이유브령 시리아를 습격한다는 소식에 살라딘은 모술 대신 이번엔 알레포로 향하였다.

살라딘에게 항복하는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

이후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었지만,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1185년에 보두앵 4세가 사망한 직후,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그의 매제이며 기회주의자인 기 드 뤼지냥이 약삭빠르게 왕위를 차지함으로써 지도자들 간의 내부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때를 틈타 살라딘은 성전(지하드)을 선포하고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국가를 향한 총공세를 펼친다. 1187년 6월 3일, 살라딘이 이끄는 무슬림 군은 하틴 전투에서 더위와 갈증으로 무력해진 기 드 뤼지냥 휘하의 십자군 주력부대를 대파하는 성과를 올린다.

 

이 기세를 몰아 살라딘은 아크레, 베이루트, 시돈 등 기독교 국가의 주요 도시를 차례로 점령했고, 1187년 10월 2일에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예루살렘 하면 보통은 기독교의 성지로 유명하지만, 이곳은 한 뿌리를 지닌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특히 이슬람교의 입장에서는 메카와 메디나 다음 가는 성지였으니, 아브라함과 여러 예언자(이슬람교에서는 예수 역시 예언자로 존중하지만,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기독교와 다르다)의 활동 무대였으며,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천상에 다녀왔다고 전하기 때문이었다.

1099년에 제1차 십자군이 무자비한 대량 학살 끝에 예루살렘을 장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1187년에 살라딘은 그곳을 방어하던 기독교인과 협상을 벌인 끝에 무혈 입성했다(물론 입성 후에는 적잖은 피바람이 불긴 했지만). 무슬림 측에서 보자면 무려 88년 만의 감격적인 탈환이었다.

 

무슬림의 예루살렘 탈환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각국은 경악해 마지않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와 그 후임자인 클레멘스 3세의 새로운 십자군 파병을 호소에 여러 군주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 결과물인 제3차(1187-92) 십자군은 중세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이동이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살라딘과 리처드 1세(1157-1199)라는 중세 이슬람과 유럽의 두 영웅이 격돌했다는 점 때문에라도 각별히 주목할 만하다.

 

‘사자왕(Lion Hearted)’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명성과 무훈을 자랑했으며, 훗날 로빈 후드 전설이라든지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 등을 통해서 중세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영원히 이름을 남겼다.

 

‘사자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의 지휘하게 십자군과 대치하게 되면서 살라딘은 전투에서 승리하기가 만만치 않은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의 승리하고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3차 십자군이 동쪽으로 진군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기독교 국가의 잔존 세력이 다시 한번 결집하여 살라딘의 대군을 상대로 전투를 재개했다. 기 드 뤼지냥이 지휘하는 기독교인 군대는 무슬림이 장악한 항구 도시 아크레를 탈환하려 육지에서 포위 공격을 가했고, 그런 기독교인 군대의 배후를 살라딘의 군대가 또다시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살라딘은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적을 쉽사리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런 와중에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함으로써 전세는 기독교인 군대 쪽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신규 병력에 리처드 1세라는 탁월한 지휘관까지 보유한 기독교인 군대 앞에서는 살라딘의 대군조차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살라딘과 리차드 1세

기독교인 군대는 1191년 7월 12일에 아크레를 함락했으며, 이후 느리지만 착실한 진군 끝에 이듬해 7월에는 예루살렘의 코앞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기독교인 군대가 무력으로 성도를 탈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순간에 군대를 되돌린다. 


때마침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의 부재를 틈타 그 동생(훗날의 존 왕. 폭정 끝에 귀족과 시민의 압력으로 마그나카르타를 승인하는 수모를 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이 왕위 찬탈 음모를 꾸몄고,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도 일찌감치 십자군에서 발을 빼고 고국으로 돌아가 휴전 서약을 깨트리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잠식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에게 ‘부활절까지 돌아올 테니 그때 결판을 내자.’라고 약속하였고 살라흐 앗 딘도 그에 응했다. 1192년 10월, 마침내 살라딘과 평화조약을 맺은 리처드 1세가 팔레스타인을 떠나 고국으로 향함으로써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일단 막을 내린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약속은 두 사람 모두 지키지 못하게 된다. 살라흐 앗 딘은 약속했던 부활절 3주 전에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했고, 리처드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이때 두 군주 간의 관계는 꽤 신사적인 편이었다.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흐 앗 딘은 자신의 의사에게 치료받을 것을 권유했으며, 약으로 쓰라고 시원하게 눈 속에 덮어놓은 과일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리처드가 말을 잃었을 때 살라흐 앗 딘은 대신하라고 말 두 마리를 보냈다. 리처드 또한 살라딘을 높이 평가하면서 살라딘을 예우했으며, 사절단으로 찾아온 살라딘의 일족 사람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했고 살라딘의 조카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에게 자신의 누나 조안을 살라흐 앗 딘의 형제에게 결혼시킴으로써 이슬람과 가톨릭을 화해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고 하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었다. 양측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양측의 공동 영지로 지정해 서로가 싸우지 말고 잘 지내보자는 의미였고, 살라딘은 이를 실제로 고려하였지만, 피로 수복한 예루살렘을 내놓을 수 없다며 결사반대 의지를 보이는 참모들 때문에 결국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애초에 왕족도 아니고 정통 아랍인도 아니었던 살라딘이 그 자리에 올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성도 탈환’이라는 기치 하에 일어난 지하드 덕에 완성된 것이었고, 그들 덕에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자칫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리차드 1세측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세력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대가 무척 컸고, 이슬람도 기독교도 혼인성사 문제 때문에 한쪽의 개종 문제가 필수적으로 발생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가급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한편, 살라딘과 리처드는 실제로 얼굴을 마주대고 만난 적은 없고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기묘한 펜팔 리처드가 돌아올 땐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흐 앗 딘은 ‘기왕 뺏길 거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뺏기는 게 낫다’라는 낭만적인 답장을 보냈다. 이때의 휴전 조건이 예루살렘 순례자를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가톨릭 쪽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살렸다고 할 수 있고, 이슬람 쪽에서는 살라흐 앗 딘의 치세 이후로 순례자를 박해한 적이 없으므로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대로 원만하면서도 문제가 될만한 여지는 없는 타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살라딘은 사자왕 리처드와 휴전협정을 맺은 후, 리처드와 약속했던 재격돌을 하기로 했던 부활절 3주 전에 몸 상태가 악화되어 병상에 누웠는데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향년 56세였다. 


살아생전 굉장히 검소했던 탓에 국왕이었음에도 그의 장례식 때는 장례를 치를 돈도 없어 일가친척의 지원을 받아 장례를 겨우 치렀다. 다마스쿠스를 방문한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가 살라흐 앗 딘의 무덤이 초라한 목제 관인 것을 보고 대리석으로 된 고급 관을 기증했으나 여전히 그의 시신은 목제 관에 안치된 상태이다.

 

살라딘은 탁월한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였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아랍권의 전제군주로서의 무자비한 모습이 아닌, 살라딘은 상당히 관대하고 합리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전투에도 물러섬이 없었지만, 경우에 따라 외교적인 기술을 충분히 발휘하고 대안으로 삼았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통치자로서 좋은 후대의 평가를 받는 이유는 살라딘이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했고, 종교적 의무를 항상 앞세웠으며, 결코 정무를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사유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 장례 준비를 할 돈조차 없었다는 후일담은 그의 검소함과 청렴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후대들에게 각인되었다.

또 게임으로 유명한 사상 최초의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평가되는 ‘아사신(암살단)’과의 대결로도 유명하다. 원래 이슬람교 시아파의 신비주의 종파였던 아사신은 시리아 북부 산악 지대의 요새를 근거지로 삼고, ‘산 위의 노인’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지휘 하에 반대파 요인을 종종 암살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사신 단원은 잠든 사이에 인공의 낙원으로 옮겨져 극치의 환락을 맛보고 깨어난 경험을 토대로 사후세계의 존재와 보상을 확신하고, 이후 상부의 지시라면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반드시 이행하곤 했다. 일찍이 시리아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살라딘은 두 차례나 암살을 모면하고 분노한 나머지 아사신을 소탕하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기 베개에 꽂혀 있는 아사신의 단검과 경고장을 보고 경악하고서, 결국 패배를 시인하고 더 이상 아사신의 뒤를 쫓지 않았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살라딘은 의외로 십자군을 소재로 한 여러 낭만적 문학작품에서 종종 리처드 1세의 숙적이면서도 존경할 만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

가끔 이슬람 문화권의 인물들을 이 시리즈에 소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백인 문화에 종속되듯 너무도 일방적인 영향을 받아 그들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편견 어린 시각을 가지고 세계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워서이다. 특히 유럽 문화를 대표하는 십자군을 박살 냈던 전설의 이슬람 문화의 영웅으로서 갖는 살라딘의 입지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오늘 살펴본 살라딘은 전술한 바와 같이 정통 아랍의 적통도 아닌 쿠르드족이었다. 쿠르드 족은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터키 국경 지역의 산악 및 평야에서 살아가는 민족으로, 아직 독립 국가조차 이루지 못하고 한동안 이슬람 세계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민족이다. 게다가 그는 선택받은 왕족이나 귀족 신분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부족에서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세계의 해방자이며 구원자로 추앙되는 인물이 나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결코 작지 않다 할 것이다.

 

현대에는 신분이 없다고 헛소리하는 이들이 많다. 신분‘은’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불가역적인 바리케이드가 강하게 더 강하게 쳐져 부는 계승되고 직업도 계승되며 그들의 콘체른은 더욱더 강해져 가는 중세로 역행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뿐이 아니다. 세계는 점점 국가주의로 회귀하여 자국 중심주의로 저마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우경화고 뭐고를 따지지 않고 제 밥그릇 전쟁을 위해 전쟁도 불사할 듯 으르렁거리는 시대이다.

 

살라딘의 시대에 주군을 모시는 군인이 일부러 쿠데타를 벌여 나라를 전복시킨 것도 아니고 그가 이슬람의 수호자로 등장하게 되기까지 그는 수많은 죽을 위기를 거쳐야만 했고, 26살에 처음 이집트의 총독 자리에 오를 때도 능력을 인정받기는커녕, 그저 만만하고 다루기 쉽겠다는 판단하게 지명된 것이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오독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그저 가만히 있는데 길에 있는 황금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아무도 노력하지 않는 이에게 나라를 가져다 바치지 않는다. 그가 이미 이집트에서부터 국토를 확장하고 군사를 보충하고 훈련시키며 미래를 대비한 것은 그가 전쟁광이라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얻은 부를 자신을 치장하거나 흥청망청 누리는 것에 쓰는 전제군주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십자군 전쟁에서 정의를 표방하던 유럽의 백인들 나라에서 전제군주들은 그런 행태를 보였지만, 그는 철저한 금욕주의에 절제된 생활과 엄격한 업무처리를 통해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다.

 

당신이라면 당신이 왕족이나 귀족 출신의 다이아몬드 수저는 고사하고 금수저 근처에만 갔어도 공부를 하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많은 것을 얻어 더 넓은 세계에 나가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이루겠다고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돈을 절검 하며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아끼겠는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들이 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고 미래를 계속해서 개척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저 하루만 보고 사는 하루살이처럼 근시안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해 출세하기 어렵다며 부모를 탓하는 찌질한 패배자의 삶을 살지 마라. 한국의 재벌 2세들이 욕을 먹는 것은 자수성가로 어마어마한 재부를 불려준 1세대나 2세대만큼의 개척을 통한 세계로의 확장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 당신의 문제임을 깨닫고 그것을 개선할 만큼의 피나는 노력을 해서 뛰어넘지 못한다면 당신은 평생 그저 부모의 탓이나 사회의 탓이나 정치인의 탓을 하며 찌질한 소시민으로 소주잔이나 기울이며 죽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태어난 이유가 아닐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사는 이유가 아닐 것이며 그것이 당신이 당신의 자식에게 물려준 유산은 아닐 것이다. 당신이 자식에게 물려줘야만 하는 것은 알량한 아파트나 당신의 주식계좌가 아니다. 

당신이 삶을 오르는 그 과정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내 부모가 삶을 일궈냈는지를 보고 자란 자식은 결코 금수저 다이아몬드 수저를 논하지 않는다. 자신이 삶을 개척하는 것임을 보고 듣고 몸으로 익혔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더 올라가기 위해 빈틈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에서 어디를 잡고 어디를 밟고 올라가야 할지를 빠른 시선으로 살핀단 말이다.

 

어린 시절, 어느 누구나 영웅을 꿈꾸지만 아무나 영웅이 되지는 못한다.

위인전을 읽으며 위인의 삶을 꿈꾸는 자보다는 위인의 좋은 점을 배우는 자들만이 있는 듯싶지만 정작 스스로 위인의 삶을 만들어내는 이는 반드시 나온다.


그것이 당신이길, 그리고 당신의 삶을 보고 자란 당신의 아이이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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