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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7. 2022

제대로 언론에 대해 공부해본 적도 없는 16살이었지만

전 세계의 저널리스트의 표본이 되는 전설의 여기자로 우뚝 서다.

1929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도시가 르네상스의 정점이던 시기의 미술품들을 유산으로 품고 있었기에, 어려서부터 곳곳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같은 거장들의 걸작을 직접 눈과 가슴에 담으며 자랐다. 사실 저널리스트로서 그녀가 타고난 반골기질은 무솔리니에게 대항했던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빠듯한 살림에도 탐욕스러울 정도로 책을 사랑했고 자유를 위해 피 흘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집에는 고전 작품을 비롯해 새로운 지식과 개혁적 사상을 담은 책들이 가득했고, 그녀의 부모는 어린 달에게 독서가 갖는 힘을 권하고 자연스럽게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 둘 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자식을 싸고돌며 보호하기보다는 함께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이미 부모를 따라 반 나치 투쟁 단체인 ‘자유를 위한 자원봉사단’에 가입하여 레지스탕스 간의 연락이나 수류탄 운반, 유태인의 탈출 등을 도왔다. 그녀는 어린 나이였지만 이 레지스탕스 운동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 가진 가치를 깨달았고 이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운동의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체포당한 후 심한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극렬한 레지스탕스 지도자였다.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레지스탕스 교육을 시켰고 총 쏘는 법, 사냥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독립심을 키워주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49년 9월 25일 토요일. 연합군이 피렌체에 처음으로 폭격을 가해 숱한 오폭의 기록을 남긴 날이었다. 연합군은 무기와 병력을 수송하는 독일군 선로(線路)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마을과 광장 유적을 마구 폭격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광장에서 300m 떨어진 교회에 있었다. 폭탄이 소나기처럼 퍼부었고 부녀(父女)는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건물 안에서 손을 꼭 잡고 오로지 죽지 않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당연히 스무 살의 아무것도 모른 젊은 딸은 울음이 터졌다. 그래도 강인하게 자란 터라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감정을 억제하며 흐느끼는 정도였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딸의 모습을 본 아버지의 냉정한 반응이었다. 


아버지는 두려움에 떨며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딸을 껴안고 다독이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따귀를 세차게 후려쳤다. 그리고 이렇게 단호히 타일렀다.

“여자애는 울 수도 없고 울지도 말아야 해.”

 

보통 딸이었다면 스무 살의 이 처연한 기억에 아버지를 원망할 만도 하건만, 그녀는 훗날 “나를 엄하게 키운 아버지에게 감사한다”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이 날을 추억했다.

 

“인생은 어차피 힘겨운 모험이다. 그 사실을 빨리 알아차릴수록 좋다. 나는 약한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않다. 내 본성과도, 내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도 약한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않으셨다. 난 그때 아버지가 내 뺨을 때린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키스 같았다.”

 

그렇지만 그날의 경험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기 그녀에게는 큰 정신적 충격으로 남았다. 그녀는 그날 이후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감정적 불구자’가 된다. 그녀는 자신의 책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어른이 되어 큰 슬픔을 당해도, 또 베트남 전쟁 취재 때 폭탄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때나 멕시코 혁명 취재 때 총격을 당해 마치 칼날이 몸 안을 휘젓는 듯한 육체적 고통을 느낄 때도 펑펑 울고 싶었지만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출신의 종군 전문 기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였으며, 이후 벌어졌던 베트남 전쟁의 종군 특파원으로 활약했고, 그 뒤로는 본격적으로 세계 유수 권력자들과의 인터뷰로서 유명세를 얻은 전설의 여성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의 이야기이다.

 

팔라치는 과격한 언행에다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소인배적으로 대한다는 점도 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흠이 많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지만, 그녀가 다혈질에 냉혈한적인 면모를 보인 것만으로 공격받기에는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베트남 전쟁, 중동전쟁, 헝가리 민중봉기, 멕시코시티 대학살, 라틴아메리카 민중봉기 등)에 뛰어들어가 기자 정신을 발휘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는 진정한 저널리스트의 표본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기자직에 입문하게 된 것은 16세 때였다.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생계가 안 된다’는 부모의 만류로 피렌체 의대에 진학한다. 그러나 기계적인 암기 위주인 의학공부는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추론과 비판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고민이 깊어갈 무렵, 갑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녀는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자퇴하고 만다. 그리고 과감하게 바로 언론사를 찾아간다. 당시 피렌체의 유력지 <나지오네 디 피렌체>를 찾아간다는 게 그만 이름도 없는 <일 마티노 델리탈리아 센트랄레>라는 신문사를 찾아갈 정도로 세상 물정에 모르는 치기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가 ‘열일곱’이라고 속인 뒤 무작정 편집장을 찾아가 “리포터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시작부터 남달랐다. 그러자 장난기가 동했던 편집장은 12시간 안에 나이트클럽을 취재해서 기사를 써올 수 있겠느냐는 도발적인 테스트를 던져줬는데, 초짜 치고 실제 잠입을 통해 기사를 잘 써냈던 터(간단한 스케치 기사에 전쟁 후 여름을 맞은 이탈리아 사회의 단면을 끼워 넣어 기사의 수준을 높였다.)라 그 길로 바로 기자로 채용되었다. 


이때는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법원에 출입하여 기사를 쓰려고 해도 판사가, ‘어린애는 나가 달라’고 직접 호명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워낙에 기사를 잘 썼던 타고난 기자였던 터라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기자로서의 기본을 다지고 유명해지면서, 사건부 기자로 이름을 날리다가 점차 인물 인터뷰 전문 기사를 맡게 되었다.

그녀의 기사가 사람들 사이에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은 그녀만의 글쓰기가 갖는 특징에 있었다. 그녀는 남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 풍경을 그 특유의 시선으로 글에 담아 호평을 받았다. 낡은 수녀원 건물에 대한 기사를 쓸 때는 뜰의 벚나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수녀원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했고, 피렌체의 비둘기 기사에서는 한때 번영을 누리다가 몰락한 피렌체의 역사에 비둘기의 운명을 빗댔다. 팔라치 특유의 문학적 저널리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기사는 단순한 정보전달이 목적이 아닌 글로 구분되었다. 생생한 아이디어, 문화적인 사안에 대한 지적인 논의, 예술성이 살아 숨 쉬었다. 그녀는 한마디로 기사를 소설의 반열로 올린 문학적인 저널리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을 보고 쓰는 단순한 형태에 그친 게 아니라 운치와 인간미를 더해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녀의 글쓰기는 객관적 사실의 요약이 아니라 철저히 주관적 관찰에 의한 글쓰기였다.

 

1952년, 가짜 기사를 쓰라는 압력에 맞서 대들다가 해고당하기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서 다른 매체에 취직했으며 인터뷰 전문 기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녀는 기존의 예의 바르고, 수사적인 어구로 가득했던 인터뷰 방식에서 벗어나,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자비한 질문 공세를 퍼붓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결과 팔라치와 인터뷰를 했던 이들은 그들이 쓰고 있던 정치적, 사회적 가면 아래의 민낯이 거침없이 까발려졌으며, 그들의 치부를 공격당하는 쓰라린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 중에는 언변이나, 술수로는 어디 가서 안 밀릴 그 분야의 정점에 있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절의 그녀는 주로 연예기사를 썼다. 물론 연예기사라고 해도 나름대로 퀄리티는 좋아서 잘 팔렸으며 페데리코 펠리니, 알프레드 히치콕을 비롯한 거물들에게 특유의 공격적 인터뷰를 통하여 유명한 기사들을 많이 썼다.

 

기자로서 잔뼈가 굵으며 지역지를 거쳐 이탈리아 최고의 주간지 <레우로페오(L'Europeo:유럽인)> 의 기자가 된 1967년 오리아나 팔라치는 또 한 번 자신의 인생에서 큰 전기를 맞을 결정을 내렸다.

당시는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였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회사의 허락을 받지 않고 베트남으로 갔고 ‘죽어도 좋다’는 서약서를 쓰고 베트남전에 종군기자로 참여했다. 회사는 발칵 뒤집어졌지만 이윽고 그녀가 베트남에서 보내오는 생생한 전쟁 기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남베트남의 부패상과 학살을 보면서 북베트남 측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에 이런저런 개입을 해대면서 개판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남베트남이든 북베트남이든 똑같다면서 모두까기하는 입장이 되었다.

 

잡지는 나오자마자 매진되었고 오리아나 팔라치의 기사는 세계 각국으로 번역되었다. 오리아나 팔라치가 보내오는 기사는 그저 전쟁 상황에 대한 스케치가 아니라 그녀가 여성의 몸으로, 아니, 인간의 몸으로 직접 겪는 전쟁의 공포와 잔혹성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었기에 많은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1968년에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멕시코 학생시위를 취재하면서 멕시코 당국이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강경 진압하면서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을 특종으로 써냈고, 세계적으로 큰 찬사를 받았다. 팔라치 본인도 이때 두 방이나 총을 맞아 병원에 실려가는 등 죽을 경험을 했다고 하며, 이후로 본격적으로 권력자에 대한 인터뷰에 나섰고 이때 남긴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현재까지도 팔라치가 전설적인 기자로 기억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2월, 하노이에서 보응우옌잡 장군과 인터뷰를 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를 프랑스적인 속물로 평가했지만 예측력은 좋다고 신랄한 평가까지 인터뷰 말미에 넣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이어진 1972년 11월, 헨리 키신저와의 인터뷰는 미국 사회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인터뷰 당시 키신저

키신저는 원래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팔라치가 보응우옌잡과 인터뷰했다는 사실에 팔라치와의 인터뷰를 허락했다. 하지만 인터뷰에 들어가자, 키신저는 팔라치를 매우 박대하면서 미소도 짓지 않고 인사 한마디만 건넨 다음에 업무에 열중했다. 그리고 문서를 다 읽고 난 후에야 팔라치에게 자리를 권하며 미덥지 않은 학생을 대하는 교수와 같은 오만한 태도로 팔라치를 대했다. 


팔라치에게 보응우옌잡에 대한 질문을 던져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은 키신저는 그제야 본격적인 인터뷰를 허락했고 11월 4일, 팔라치는 백악관에서 키신저와의 2차 인터뷰를 가졌다. 하지만 10분마다 닉슨의 전화를 받던 키신저는 급기야 팔라치를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가버렸다.

 

하지만 이때 팔라치는 전설적인 일화를 남겼는데 다름 아닌 "박사님께서 영화배우처럼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계신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통령보다 더 많은 명성과 인기를 누리고 계시는 이유는 뭔가요?"라고 질문을 던져 제대로 낚아버린 것이다. 우쭐해진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중요한 건 내가 항상 혼자서 행동한다는 겁니다. 미국인들은 그런 것을 아주 좋아하죠. 미국인들은 말을 타고 혼자 맨 앞에 서서 마차 행렬을 이끄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혼자 말을 타고 도시와 마을로 들어오는 카우보이를 좋아해요. 그가 탄 말 외에 그의 옆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쩌면 총도 없을지도 모르죠. 카우보이는 총을 쏘지 않으니까요.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곳에 있는 것. 그것이 카우보이의 행동입니다. 간단히 말해 서부영화와 같죠.”

 

그러자 팔라치는 “박사님은 자신을 헨리 폰다처럼 생각하시는군요.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정직한 이상을 위해 맨주먹으로 싸울 준비가 된 사람. 혼자서, 용감하게.”라고 빈정댔다. 

이 인터뷰가 공개되자 키신저는 ‘당신이 감히 대통령 무시하냐? 네가 그 모든 걸 다했냐?’ 등 엄청난 욕을 먹었다. 실제로 정치적 파트너였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그의 전화 해명을 받고도 골이 나, 이후 독대까지 거부해버렸다. 물론 정치 외교의 거물 중의 거물이었던 키신저 입장에서는 스스로가 해낸 성과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탁월한 현실주의자로 인정할지언정 그를 영웅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 말은 지나치게 오만한 말이었을 뿐이었다. 그 민낯을 끄집어낸 것이 바로 그녀였다.

 

아무튼 그도 거물은 거물이었는지라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받아친 대목도 많았지만, 팔라치는 그걸 이렇게까지 남들을 파악하려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방어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말로 대차게 까버렸다. 결국 그 이전까지 정치 외교의 슈퍼스타였지만 은막에 가려진 인물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스스로를 마치 영웅처럼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져 버리면서 그의 이미지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본인 스스로 실패한 과거로 생각하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베트남 전쟁은 실패한 전쟁이었다.”라고 말해버림으로써 미국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해버렸다. 물론 베트남 전쟁을 키신저 혼자 힘으로 좌지우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깊게 관여한 전쟁의 실책에 대해서는 피하고 싶은 게 당연지사였는데, 팔라치는 그의 실책을 인터뷰를 통해 기어코 그가 스스로 인정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키신저는 인터뷰로 한창 진탕을 겪었다가, 팔라치를 상대로 ‘내가 한 말을 호도했다. 조작했다’며 싸움을 걸고 본질을 호도하려 들었지만 팔라치는 녹음테이프를 들이미는 것으로 맞대응했고 결국 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심지어 팔라치는 키신저를 ‘고자 같은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그 후, 헨리 키신저는 본인 스스로 “오리아나 팔라치와 인터뷰한 것은 내 인생 최악의 멍청한 실수였다.”라고 말할 지경까지 자신의 실언에 대해 인정하고 말았다.

 

이후 팔라치는 키신저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키신저가 멍청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그를 믿는 사람들이 멍청하다는 것은 확실하다’라고 다시 한번 그의 이미지에 대못을 받았다.

그 외에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의 에피소드도 익히 알려져 있다. 대화 도중에 차도르를 찢어버렸던 일화나, 당신은 독재자가 아니냐고 대놓고 물었던 것, 반대 세력 500명을 처형한 것을 비롯하여, 그의 냉혹함과 잔인함에 관련된 온갖 것들을 모조리 캐물었던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그것도 그 서슬 퍼렇던 이란의 중심부 한가운데서 대놓고 했던 질문과 행동들이라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롭게도 호메이니는 몇몇 답변에 거부하거나 중간에 나가버리기까지 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서 끝까지 인터뷰를 마쳤다. 


정말로 총을 맞거나, 최소한 인터뷰를 거부당하고 쫓겨나지 않아도 이상할 상황에서 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온갖 질문을 던졌던 팔라치나,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로 분노했으면서도 결국에는 하나하나 대답을 해준 호메이니나 대단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 중평이다. 특히 그가 정치가이기 이전에 사상적으로 철저히 무장한 권위적인 종교 지도자였음을 생각하면 이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하일레 셀라시에와의 인터뷰에서는 하일레 셀라시에가 가난한 사람들은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것이라며 자신은 오로지 용기와 품위 있는 사람만을 총애한다고 대답하자 분노한 팔라치는 그의 면전에서 그를 몰아내려고 쿠데타를 기도했던 멩기스투 네웨이와 저멘인 네웨이 형제야말로 용기와 품위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도발했고, 이에 격노한 셀라시에는 인터뷰 주제를 바꾸라고 6번이나 명령을 내렸다가 팔라치가 황제가 생각하는 죽음이 뭐냐고 묻자 참지 못하고 “저 년은 뭐야? 저 년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당장 꺼져버려! 더 이상은 못 참아!”라고 격노하여 내쫓아버렸다. 


이후 에티오피아의 이탈리아 교민 사회는 공포에 질려 팔라치에게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은 다시는 에티오피아에 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까지 보냈다. 그러자 팔라치는 아무래도 무솔리니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모양이라고 교포들까지 까버렸다.

1973년 무아마르 카다피와의 인터뷰에서는 장광설을 늘어놓는 카다피에게 질문에 대답이나 하라고 몇 번이나 윽박을 지르는가 하면은 카다피에게 신을 믿느냐고 몇 번이나 추궁하였다. 당황한 카다피가 당연한 것을 왜 묻냐고 하자 “대령님이 하는 걸 봐선 나는 대령님이 스스로를 신으로 착각하는 줄 알았거든요.”라고 면전에서 빈정댔다. 그리고 ‘돼지새끼 같은 이디 아민’을 리비아에 숨겨준 것이 사실이냐고 마구 추궁하여 카다피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팔라치의 이러한 태도는 무시무시한 권력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폴란드의 사회운동가였던 레흐 바웬사와 만나자마자 기선제압을 위해 스탈린과 정말로 외모가 닮은 걸 인정하냐고 돌직구를 날렸고 인터뷰 이후 바웬사를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 졸렬한 파시스트라고 마구 까버렸다. 

골다 메이어

골다 메이어와의 인터뷰 직후, 리비아 공작원들이 팔라치와 카다피의 인터뷰 테이프를 훔쳐가기 위해 호텔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혹시 배후에 모사드가 있지 않나 의심하여 골다 메이어에게 다시는 자신을 볼 생각하지 말라고 강경 항의하는 전보를 보냈는데 그 전보를 받은 골다 메이어는 큰 충격을 받고 즉시 2차 인터뷰를 요청하여 팔라치와 오해를 풀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권투 챔피언인 무하마드 알리에게 자신과 인터뷰하던 알리가 자꾸 트림을 하며 무례하게 굴자 격노한 팔라치는 그가 세 번째 트림을 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 마이크를 집어던지며 ‘이런 무식한 놈이 챔피언이라니!’ 하고 면전에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렇듯 팔라치와의 인터뷰는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철권통치를 휘두르는 지도자라도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일단 인터뷰를 하게 된 이상 치부가 드러나는 것은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팔라치의 인터뷰가 많았던 것은, 그녀와 인터뷰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떨칠 만큼 중량감 있는 인사임을 증명하는 셈이었기 때문에. 결국 독재자들의 입장에서는 약점을 내주고 스포트라이트를 취한 셈이다.

물론 팔라치의 이런 무자비하고 거친 인터뷰 방식이 인정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뉴욕 타임스>에서는 그녀가 자신과의 인터뷰를 거부하는 것을 비겁한 행동으로 간주하고, 이를 무기 삼고 있다고 평했던 것은 그녀의 지나친 공격성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보여주는 면이기도 했다. 언론인 로버트 쉬어는 팔라치의 인터뷰 방식을 그대로 벤치마킹해서 팔라치를 인터뷰하면서 공격했고 팔라치가 진절머리를 내면서 쉬게 해달라고 하자, “당신은 당신의 인터뷰이들을 쉬게 해 줬습니까?”라고 쏘아붙였다. 


그 외에도 세계적 유명인사가 되면서 사소한 것이라도 거슬리면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하며 갑질을 했기 때문에 ‘비판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권력자 까는 사람이 자기가 권력에 도취되었다.’ 등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이슬람권 전체와 멕시코에 대해 편견 섞인 태도로만 일관했던 탓에, 그녀의 이런 편견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그녀의 삶과 방식에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렸지만 결과적으로 ‘진실’을 파고드는 그러한 태도와 결과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고 그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의 독재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에 맞서 싸운 독립투사였던 연인 알렉산드로스 파나 굴리스와의 비극적 사랑도 유명하다. 후에 파나 굴리스가 1979년 의문사하자, 그녀는 그리스의 암살설을 주장하여 외교마찰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기자 생활을 잠깐 접고 소설가로서 맹렬히 집필하여 여러 편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남편과 함께

삶의 후반부에 접어든 이후에도, 1990년대 이후 팔라치는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면서 뉴욕에서 은둔하였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별다른 활동 없이 칩거하는 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일어난 미국의 9.11 사태를 목도한 오리아나 팔라치는 다시 펜을 집어 들어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이라는 책을 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이슬람권의 세계 정복에 대한 야심과 종교전쟁을 경고하고 9·11 테러를 주도한 이슬람권을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암투병 끝에 2006년 9월 15일, 피렌체로 돌아와 삶을 마감했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자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단 한 명도 기레기이지 않은 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평생 동안 다 한 명도 제대로 양심이 박힌 검사나 경찰을 만나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 사실에 대해 부인하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데리고 와라, 그들이 그간 겪어온 삶의 자취를 집어내어 그 민낯을 적나라하게 밝혀주마.

 

왜 이렇게 도발적으로 이야기를 하는지는, 내가 오늘 이 전설의 저널리스트 다혈질 이탈리아 아줌마의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와 같다.

그녀는 언론에 대해 단 한 번도 한 줄도 공부한 적이 없다. 모 언론 재벌사들이 자신들이 중세 시대의 족벌 계승을 하는 것처럼 사주의 딸을 버젓이 낙하산으로 끌어올리는 짓을 하는 대한민국에는 다소 자극적이었지만 ‘진실’을 제대로 추구하려고 평생을 전장에 목숨을 내놓고 뛰어다녔던 그녀의 삶을 한 번쯤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자는 글을 잘 쓰기도 해야 하고, 인터뷰를 잘하기도 해야 하고, 아이템을 잡는 통찰력도 좋아야 한다. 하지만 기자의 가장 큰 덕목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감춰진 진실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 종군기자는 그저 전쟁에 목숨을 내놓는 단순 무식함이 자랑이 아니라 직접 전쟁에 가서 그 참상과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없는 독자들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녀는 이미지 메이킹으로 먹고사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의 민낯을 모두 까발리는 다소 공격적인 방식의 인터뷰를 추구했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녀가 도덕군자가 아니었다는 것은 그녀 자신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럼 기레기들 저격용으로 심장 폐부를 후벼 팔 것이지 왜 이 시리즈에서 기자를 업으로 삼지도 않는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은가? 기자만이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기레기들은 신문이든 매체든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 독자들에게 외면받는 매체는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기레기들은 당신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기레기들을 키운 팔 할은 당신의 클릭과 구독과 관심이었단 말이다.

 

당신의 실패가 단순히 당신의 잘못일 수도 있다. 당신의 판단 미스일 수 있고 당신의 과욕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큰 구조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실패에 대한 원인 분석은 해보았는가?


그녀는 자신은 보았지만, 독자들은 보지 못한 것을 모두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한 ‘진실 찾기’만 충실했고 그것만으로도 전설로 불렸다. 그녀가 그것 하나만 지켜서 전설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그리 쉽지 않거나 대부분의 기레기와 뭇사람들이 그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결과가 나온다.


당신은 당신이 당연히 지켜야만 할 도리를 지켰는가? 노력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적당히 노력하지 않으면서 연줄을 찾거나 뒷돈을 집어주고 일을 처리하려는 이들이 생기면서 진실이라는 것이 생긴다. 진실이 생긴다는 것은 진실을 덮는 모종의 가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당신이 추구해야 할 것이 진실이라는 점은 굳이 따로 정규 교육시간에 배우지 않아도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이상한 유혹에 넘어가 그렇게 살지 못할 때 당신은 실패를 맞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그러지 않으려 해도 그런 짓거리를 하는 이들로 인해 방해받고 실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언제나 간단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된다.

오늘 살펴본 그녀의 삶이 보여준 바와 같이 진실을 격하게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당신의 실패와 당당히 이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당신이 가식으로 점철된 아슬아슬한 독배가 든 성공의 길이라며 자위하는 그 길은, 지금 매체를 그저 직장이라 생각하며 A.I보다 못한 기사를 소설처럼 양산하며 그것으로 뒷돈과 명예와 네트워크를 형성해 먹고사는 기레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따위로 살아놓고서는 왜 세상이 이리 힘드냐고 소주잔 기울이며 소시민 코스프레를 하고 싶은가?

웃기지 마라!


그녀가 남겼던 당신에게 해주라는 말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친다. 

 

"나는 수천 가지 분노를 가지고 인터뷰에 임했다. 그 수천 가지 분노는 수천 개의 질문이 되어 내가 상대에게 공격을 퍼붓기 전에 먼저 나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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