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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8. 2022

하급무사들에게조차 멸시당하던 장사꾼 집안의 울보였지만,

막부시대를 끝내고 근대 일본의 문을 혼자서 열다.

1836년, 오늘날 일본 시코쿠 고치(高知) 현 고치시, 당시의 도사(土佐) 번 고치성에서 태어났다. 조닌(町人)이었다가 최하급 무사 신분 고시(鄕士)를 획득한 가문으로 3대 호상에 드는 나름 유복한 상인 집안이었다. 


위로는 형과 세 명의 누나가 있었다. 귀여움을 잔뜩 받고 자란 탓에 어릴 때는 울보, 겁쟁이에 12살 때까지 야뇨증이 있었다고 한다. 셋째 누나 오토메가 오줌싸개 버릇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만 봐선 약간 작아 보일 수도 있는데, 신장이 그 당시 일본인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12살 때 쿠스야마쥬쿠(塾)에 들어갔지만 친구와 심하게 다투어 함께 퇴학당하고 14살 때 히네노 벤지의 도장에 들어가 오구리(小栗)류의 검술과 유술을 익혔다.

 

전술했던 바와 같이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이다니야(才谷屋)라는 전당포, 주조업, 포목상을 하던 상인 집안이었으나 증조할아버지대에 번에 사카모토라는 성씨를 쓰는 것을 허락받고 따로 분가해서 하급무사 자격을 얻었다.(아버지가 3대 당주) 즉, 돈을 주고 무사 계급을 산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분이 상승되거나 대접을 받으 것은 아니었다. 


도사 번은 번의 성립 배경으로 상급 무사와 하급 무사의 신분적 차별이 심했고, 사카모토 집안처럼 사채놀이를 하고, 술과 옷감을 만들어 팔아서 돈 번 상인이 돈으로 양반 계급을 산 무사일 경우에는, 하급 무사한테도 무시를 당하는 최하급 무사계급이었다. 그래서 어릴 적에 같은 동네에 살던 상급 무사의 자제들한테 집단 따돌림을 당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학문보다는 검도에 빠져 검도사범이 되려는 꿈이 있었다. 12살 때 병약했던 어머니가 죽자 검술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1853년 19살 때, 검술 수행을 위해 약 1년 동안 에도에서 집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유학해서 호쿠신이토(北辰一刀)류의 검술과 나기나타 면허 개전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 서양 문물의 수용 양상과 그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무사로서의 삶보다는 가문의 DNA가 꿈틀거리며 상인으로서의 삶에 더 관심이 쏟게 된다. 실제로도 에도로 상경하고 이후 각지를 전전하다가 주식회사 개념의 사설 함대인 해원대를 창설하고 사쓰마나 조슈 등에 군수물자를 팔기도 했는데 삿초 동맹에서 중개인 자격으로 입회한 것은 그렇게 사쓰마와 조슈 양쪽 모두에게 인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에도 막부 말기의 검객, 정치가, 기업인이었던 일본 근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손꼽히는 근대 일본을 만들었다고 일컬어지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이야기이다. 료마로 워낙 많이 알려져 있는데, 본명은 료마가 아니라 나오 나리(直柔)이다.

 

사실 그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었는데, 일본의 국민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로 그의 치열했던 삶이 집대성되면서 더욱 주목받게 된다. 그는 격변기 짧은 기간의 치열한 활약을 통해, 일본이 도쿠가와 막부체제를 종식시키고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로 재탄생하는 길을 여는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전 시리즈에서 손정의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고 언급했던 인물이 바로 료마, 되시겠다.

에도에서 유학 중에 흑선 내항 사건(1853년)이 일어났고 에도에 파견 나온 도사 번의 경비대 소속이었던 료마는 미국의 증기선을 목격했다. 같은 해 12월 난학자이자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사숙(개인 학원)에 입학해서 포술, 한학, 난학 등을 배웠다. 다음 해 1854년 7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연로했던 아버지도 죽음을 맞이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서양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와다 쇼료를 찾아가 서양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 미국의 국력과 민주주의 공화정 제도에 대해 배우고 나서 ‘무사를 떠받드는 신분제 토대를 바꿔 일본이 거듭나지 않는 한, 미국과 싸워서 이길 턱이 없다.’라는 글을 남긴다. 1856년 10월부터 약 2년 간 다시 에도에서 검도 유학을 했다. 당시 일본의 경제적 수준과 시대적 분위기로 볼 때 에도로 유학 다녀올 수 있었다는 점만 하더라도 그의 집안이 어느 정도 재력을 갖췄었는지 알만한 대목이다.

 

1860년,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을 시작으로 이 시기는 존왕양이 운동이 절정기였다. 이듬해 도사 번에서도 하급 무사 출신인 다케치 한페이타(다케치 즈이잔)가 200명의 하급무사들을 규합해서 도사 근왕당(勤王黨)이라는 막부 타도를 목표로 한 결사 모임을 조직했고, 료마도 가맹한다. 


이들은 친(親) 도쿠가와막부 성향의 공무 합체파 도사 번의 참정 요시다 도요와 대립했고, 도요는 암살되었다. 그러나 료마는 카츠 카이슈의 설득으로 1862년 결별하고 낭인이 되었다. 한편 1863년 교토에서 존황양이파가 쫓겨나는 정변이 발생하여 도사 번에서 존황양이파가 탄압당하고 다나카 신베에는 자살, 요시다 도요를 암살한 배후로 지목된 다케치 한페이타는 할복하고, 오카다 이조는 도주하다 체포된 후 고문 끝에 자백하고 참수형 당해 근왕당(勤王黨)은 무너진다.

1862년 3월, 시모노세키로 찾아가 시라이시 쇼타로를 방문하고, 에도 막부의 정사 총재직 마쓰다이라 슌사쿠(후쿠이 번주이자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보좌역)로부터 소개장을 받아서 그해 12월 막부 군함 부교직 가쓰 가이슈를 만나 제자가 되어 증기선의 항해술을 배운다. 이때 막부 개화파인 가이슈를 암살하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가 오히려 그의 사상에 감화를 받아 제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가쓰는 막부가 건조한 증기선 지휘관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근대적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양이(攘夷)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료마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개해 준 것도 가쓰였고, 료마는 사이고의 배려로 사쓰마번의 보호를 받으며 동지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가메야마샤추를 결성했다. 료마의 생각은 번과 막부 차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을 향하고 있었다.

 

그 내막에는 가쓰 가이슈의 상소를 받아들인 에도 막부가 고베에 해군 양성소의 설립하고자 그 설립자금 문제로 고민할 때, 사카모토 료마를 백업하는 도사 번의 금융 네트워크(사채업자)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서 소개장을 들고 찾아온 그를 만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그렇게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어 스승이 미국 방문 체험으로 깨달은 ‘일본도 통일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합중국·연방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공의정체론(公議政体論) 사상을 배웠다.

1862년 분큐의 개혁 이후 격동의 시기로, 다음 해 8월 18일의 정변, 시모노세키 전쟁, 금문의 변을 거쳐, 1863년 조슈번은 조정과 막부의 양이(攘夷) 방침에 따라 미국 상선을 포격했지만 군함의 포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개항해야 했다. 그런데 막부는 조슈번의 포격으로 손상된 군함을 에도에서 수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료마는 막부가 사실상 외국 함대의 조슈번 공격을 도와 외국과 내통했다고 보았다. 1864년 조슈번과 조율하기 위해 가이슈는 나가사키로 출장을 가게 되고 료마도 동행한다. 


이즈음 그는 막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일본을 세탁해야 한다’는 결의와 천하를 움직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때를 기다린다. 결국 가이슈는 정계에서 실각하고 고베의 해군 양성소는 폐쇄. 료마는 사쓰마로 망명한다. 이즈음 오료와 결혼한다.

 

사쓰마 번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나 돈과 선박을 지원해주면 이제까지 중계 무역을 독점하는 에도 막부를 배제하고 사쓰마 번에게도 돈벌이가 되는 장사(밀무역)를 하겠다고 설득,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나가사키에 해원대(海援隊)의 전신이 되는 무역회사 카메야마 사중(社中)을 1865년에 설립한다.

 

1866년 여름, 막부는 조슈번을 공격했다. 사쓰마번의 지원이 없었음에도 조슈번은 막부군을 참패시켰다. 료마는 가메야마샤추의 배로 조슈번을 지원했다. 료마는 이때부터 대정봉환(大政奉還), 즉 막부가 정권을 일왕 조정에 반환하는 것에 관한 구상을 내놓고 1867년 2월 하순부터 도사 번의 참정(參政) 고토 쇼지로를 설득했다. 고토는 도사 번주였던 야마우치 도요시게를 설득하여 료마의 대정 봉환론이 도사 번의 공식 입장이 됐다.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상하 의정국을 설치하여 의원을 두며, 외국과의 교류를 위해 널리 공의(公議)를 취하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이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막부 무력 타도에 주안점을 둔 데 비해, 료마와 도사 번은 무력을 배제하지는 않으면서도 평화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이후 그는 고토 쇼지로와 대정 봉환을 목표로 한 협력관계를 맺고 도사 번의 지원을 받아 1867년 일본 최초의 해운 상사인 해원대(海援隊)를 창설한다.

 

그렇게 료마는 서로 원수지간이나 사쓰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같은 처지에 서게 된 사쓰마와 조슈를 중재하여 사쓰마-조슈 동맹(삿초 동맹)을 성립시켰으며, 대정 봉환을 기안하고, 메이지 유신 달성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1867년 10월 3일 도사 번은 대정 봉환 건의서를 막부에 제출했고 료마는 10월 10일 막신 나가이 나오무네에게 건의를 수용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13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니조성에서 번주 회의를 소집하자 료마는 고토 쇼지로에게 편지를 보내 “만일 당신 한 사람의 실책으로 이 절대적인 호기를 놓친다면 그 죄는 천하가 용서치 못할 것”이라며 대정봉환에 전력을 다해줄 것을 촉구했다. 결국 10월 14일 대정봉환이 최종 결정됐다. 료마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제도와 강령의 작성에 들어갔다.

 

1867년 12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군대가 교토를 장악했고, 이듬해 1868년 1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촉구에 따라 메이지 일왕은 왕정복고를 공식 선포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왕정복고와 막부 폐지에 반발해 저항했지만 교토에서 대패하고 에도로 후퇴한 뒤, 1868년 4월 막부군 사령관 가쓰 가이슈가 에도를 포기했다. 260여 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체제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일본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한 달 여가 지난 1867년 12월 10일 료마는 나가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가와라마치(河原町) 오우미야(近江屋) 2층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 료마는 오우미야 종업원이라 생각하여 방심하고 있었다. 료마는 머리에 칼을 맞아 사망하고 나가오카는 중상을 입고 이틀 뒤 사망했다. 향년 불과 31세였다. 


괴한들의 정체는 막부의 별동대 신센구미(新選組)라는 설과 막부가 교토의 치안유지를 위해 결성한 미마와리구미(見廻組)라는 설이 있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막부 상층부의 지시에 따른 암살이라는 설은 변함이 없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근대 역사적 인물로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언제나 1,2위를 다투는 사마모토 료마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그렇게 허망하게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빠르게 사라져 버린 별에 대해서는 전설이 살이 붙기 마련이다. 그가 국민적 영웅이 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국민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베스트셀러 <료마가 간다>가 그의 인생을 재조명하면서부터가 맞긴 하다. 하지만 그는 소설의 캐릭터가 아니었다. 실존인물이었고, 그와 같은 존재가 있었기에 일본은 한국을 정복할 수 있는 발전을 거듭하여 막부시대를 마감하고 근대 일본을 열 수 있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료마전> 포스터

사카모토 료마를 비난하는 이들의 주장처럼 그는 유일한 업적이라는 사쓰마-조슈의 동맹(삿초 동맹)을 맺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탈번(脱藩)한 낭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그저 우연히 낭인의 신분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그런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어린 아이라도 안다. 그 삿초 동맹이 없었다면 메이지 유신은 없었고 사카모토 료마가 없었다면 삿초 동맹은 없었다는 것은 불변의 역사적 사실이란 말이다.

 

그의 사상이 드러나는 신정부강령팔책만 보더라도 그가 만들려 했던 일본이 어떤 방향을 향해 가려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8가지 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으로 강령이 되었던 앞의 3항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第一義 天下有名ノ人材を招致シ顧問ニ供フ

제1항 천하의 유명한 인재를 모셔와 고문으로 삼는다.

 

第二義 有材ノ諸侯ヲ撰用シ朝廷ノ官爵ヲ賜イ現今有名無実ノ官ヲ除ク

제2항 유능한 제후를 등용하여 조정의 관직을 하사하고 현재 유명무실한 관직을 폐지한다.

 

第三義 外国ノ交際ヲ議ス

제3항 외국과의 교류를 의논한다.

 

이것은 일본 각지 각 웅번의 실력자들에게 보내려고 작성된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가 생각하던 차세대의 리더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였다. 정치력 있는 리더,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사츠마, 조슈, 토사 같은 웅번들이 받쳐주면서 새로운 국가를 이끌어 가길 바랐다. 


그렇게 사카모토 료마는 희망을 가득 품은 채 신정부 강령 팔책을 작성하였으나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칼에 맞아 절명하고 만다. 그리고 그가 꿈꾸던 새로운 세상은 불과 1달 만에 그 환상이 깨져버렸고, 2달 만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점점 순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우리나라가 쇄국정책이 어쩌고 자기네 밥그릇 싸움을 하는 동안 일본에는 이런 행동하는 이가 있었고, 그런 그의 정신은 새로운 일본을 끄집어내는데 큰 조력을 하게 된다.

그가 어려서부터 하급 무사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상급 무사의 자제들에게 이지메를 당한 탓에, 커서 검도에 집착하여 유학까지 하며 검도를 배웠고 젊은 혈기에 암살하러 들어갔던 인물에게 매료되어 그의 제자가 되고 더 큰 세상을 보게 되기까지 그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와 고난은 그를 조금씩 조금씩 발전시키고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 낭인으로 떠돌면서도 그는 참고 기다리며 실력을 키웠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나갔다.

 

1865년 6월 29일, 사카모토 료마는 나가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사쓰마(薩摩) 번 저택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만나, 조슈(長州)번이 군함과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쓰마번이 명의를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사이고가 승낙하자 료마는 나가사키의 가메야마샤추(亀山社中. 료마가 주도해 세운 일종의 무역, 해운회사)에 구매 주선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조슈번의 이토 슌스케(이토 히로부미의 메이지유신 전까지의 이름)가 나가사키에서 8월 중순 영국 상인 토머스 B. 글로버에게 총기 7,300정을 9만 2,400량에 매입했다.

 

이즈음 료마는 사이고의 의뢰로 야마구치를 방문해 군량미 조달을 요청해 조슈번이 500섬을 공급키로 합의했다. 12월 초에는 사쓰마번이 야마구치에 사자를 보내 군량미 지원에 대한 사의(謝意)를 표했다. 군함은 10월 18일 역시 글로버에게 3만 7,500량에 매입했다. 군함 매입비는 조슈번이 지불하고 명의는 사쓰마번으로 하며 운영은 샤추가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듬해 1866년 1월 21일 료마의 주선으로 교토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회담한 끝에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 이른바 삿조(薩長) 동맹이 이루어졌다.

 

이 두 단락의 그가 이룬 역사적인 사실은, 근대 일본을 여는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이 일을 하기 위해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그 수많은 일들을 통해 자신을 다져왔고, 그렇게 다져온 자신을 믿고 일을 추진하여 성공시킨 것이다.

 

당신이 별로 기대할만한 인재가 아니라고 눈여겨볼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주위의 무시를 당하거나 무시조차 당하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노력하고 있는 그 작은 것들이 모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분명히 그 일분일초를 허투루 쓰지 않으며 당신을 잘 다져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그것이 모두 모여 거대한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만 대단하다고 기억할 뿐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뒤에서 이루어졌을 피나는 하루하루 일분일초가 존재했음을 망각할 뿐이다.

 

당신을 무시하고 당신에게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는 그들에게 서운해할 필요 없다. 그들의 그 하찮은 몇 마디에 당신의 존재가 폄하되거나 묻히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당신이 가려는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면 된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응원하고 있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정말 아무도 없다면 내가 당신의 뒤를 지켜보고 있음을 지금 이 글로 증명 하마. 당신의 그 지난한 노력과 고된 삶이 결코 이 생에서 그대로 사그라들지 않을 것을 내가 보장 하마. 당신이 정신없이 노력하고 달리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순간 터널은 끝나고 당신은 이미 밖에 나와 화려한 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오지 않는다고 어느 누구도 함부로 당신에게 입을 놀릴 수 없게 보여줘라.

대부분 그 나라의 운명을 바꿀 정도의 일을 만드는 것은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이 경우가 많았다. 당신이 나라를 바꾸려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운명하나 못 바꾼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당신이라면 분명히 해낸다. 
스스로를 믿고 의심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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