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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1. 2022

모두가 전설과 신화라며 아마추어라 비웃었지만

자신만의 노력으로 신화 속의 도시를 현실로 끌어올리다.

1822년, 북독일 메클렌부르크 노이부코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 때 아버지에게 선물로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라는 책을 읽게 되면서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삽화에 빠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트로이 전쟁의 사실을 발굴, 확인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남겼던 그 삽화에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트로이가 활활 불타고 있었고, 불 한가운데를 뚫고 살아남은 트로이 왕족들이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는 저렇게 견고한 성벽의 도시였다면, 땅속 어딘가에 그 성터가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거였다. 

<트로이 화제 이후 도망치는 아이네아스>, 루벤스.

그렇게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는 결심을 한 그는 그런 탐험에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든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닫고 일단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일찌감치 14살부터 부모의 곁을 떠나 인근 마을의 잡화상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치즈와 자두의 무게를 다는 일로는 많은 돈을 모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아메리카에서 한몫 잡겠다는 각오로 배의 선실 보이로 일했다. 그러나 배가 전설의 잉카에 닿기 전에 난파하는 바람에 그는 암스테르담의 상점에서 회계 보조원이 되었다.

 

일과가 끝나면 그는 매일같이 여러 나라 말을 공부했다. 모국어인 독일어 이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스웨덴어, 폴란드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러시아어, 아랍어, 터키어, 네덜란드어로 대화가 가능했다고 전하는데, 외국어를 익히기 위한 그의 노력과 방식이 매우 독특했다,

 

그의 배우고 싶은 언어로 쓰여진 소설을 두권 정도 구해서 한 문장도 빠짐없이 모조리 외워버리는 방식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당연히 회화용 교재가 아닌 소설이었지만, 그것을 소리 내서 읽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기본을 익힌 후에는 작문을 해서 원어민에게 첨삭을 받고 그 첨삭받은 내용까지 모조리 다 외우는 방식으로 외국어를 정복해나갔다.

당시 슐리만이 공부하며 살던 집

영어소설인 <아이반호>와 <웨이크필드의 목사>를 외워 영어를 마스터했고, 프랑스어 소설인 <텔레마크의 모험>과 <폴과 비르지니>를 외워 프랑스어를 마스터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방식으로 두 언어를 배우는 데에 각각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기록에는 전한다. 


이 방법이 익숙해지자 이후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데에는 각각 6주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리스어는 <폴과 비르지니>를 외워서 6개월 만에 마스터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상점에서 일하는 동안 8개 국어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의 러시아어 실력을 눈여겨보던 주인은 그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했다. 거기서 그는 인디고 수입업자로 자리를 굳혔다. 1854년 크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군대와 계약을 맺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그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골드러시의 시대에 캘리포니아로 가서 미국 시민이 되었다.

독일 출신의 사업가로 및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트로이아와 미케네 유적을 발굴한 것으로 잘 알려진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의 이야기이다.

 

‘과학적 고고학의 아버지’, ‘새로운 학문의 선구자’로 찬란한 조명을 받는 반면, ‘더러운 도굴자’, ‘비과학적인 완전한 고고학의 초심자’, ‘문명 파괴자’와 같은 정반대의 신랄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는 1870년 본격적으로 트로이 발굴에 착수하기 이전에는 무역과 은행업 등을 하는 사업가였다. 그리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고고학을 공부하며 발굴작업에 뛰어든 아마추어 고고학자였기에 정통 고고학자들이나 학계에서는 그에 대해 그다지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언어 공부에 몰두했던 그가 그렇게 감동받았던 호메로스의 언어인 그리스어를 정작 공부하지 않았다. 슐리만은 사업에 점점 성공가도에 오르면서도 트로이 발굴의 꿈을 접지 않고 늘 그것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발굴을 위해서는 상당히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슐리만이 그리스어를 최후까지 남겨두었던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되기도 전에 자신의 사업을 내팽개치고 트로이 발굴에 모든 열정을 쏟게 될까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1856년이 되어서야 그리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역시나 6주 만에 그리스어를 숙달했으며, 3개월 만에 호메로스의 난해한 시에 통달했다. 이제 트로이 발굴을 위한 경제적 조건을 모두 갖추게 된다.

 

“1863년 말에는 내가 기대했던 것을 훨씬 능가하는 재산을 가지게 될 정도로 나의 사업은 하늘의 축복을 받았다 (…) 나는 나를 그토록 매혹시켜 왔던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사업에서 은퇴했다.”

 

이제 슐리만의 꿈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사업을 접고 1866년 파리로 이주하여 소르본 대학에서 이집트학과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와 아랍 철학자들, 고전시, 근대 불문학과 비교 문법을 배웠다. 사업상의 이유로 잠시 학교를 떠났지만, 1868년 1월 슐리만은 다시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한다. 그리고 이듬해 4월 독일 로스토크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으며 기본적인 소양을 모두 갖춘다.

 

그때까지 많은 학자들이 트로이의 위치를 ‘부나르바시’라는 마을로 추측하고 있었던데 비해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트로이를 히사를리크 언덕에서 찾을 것을 주장했다. 사실 그도 처음에는 부나르바시를 고대 트로이의 위치라고 생각했지만, 그곳이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의 지형과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부나르바시 보다 더 바닷가에 가까운 곳에 있는 히사를리크가 트로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드디어 1870년 4월 슐리만은 그의 ‘트로이 발굴’에 일등 공신인 친구 프랭크 캘버트와 함께 히사를리크에서 조사활동을 시작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오스만 투르크 정부의 발굴허가를 받아 1871년 10월 첫 발굴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이후 20년에 걸쳐 슐리만은 7차례 발굴작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리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유감스럽게도 슐리만은 정규 교육을 받은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프리아모스 궁전의 위치를 찾아내 발굴의 성과를 올리는 데 열중한 나머지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 유적이 있는 층을 지나쳐 더 깊이 파내려 갔다. 


그 결과 역사에 나오는 트로이보다 훨씬 더 오래된 촌락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아킬레스와 아가멤논이 미녀 헬레나를 빼앗기고 복수하기 위해 쳐들어왔던 기원전 13세기의 잔해였다.

 

슐리만의 발굴 작업 결과 히사를리크 언덕은 도시의 폐허가 여러 겹으로 중첩된 고고학의 보고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곳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들이 수천 년간 번영과 멸망을 반복했던 장소였던 것이다. 슐리만은 이러한 층들이 발굴될 때마다 거기서 나온 유물들을 재빨리 발표하였다. 

실제 트로이의 벽 일부

이 과정에서 슐리만은 도자기들과 고고학의 방법론인 층서학(stratigraphy)에 큰 관심을 가졌다. 층서학을 슐리만이 처음 고안해 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스케일로 층서학을 적용하여 발굴하고 연구한 것은 슐리만이 처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2년간 정신없이 발굴에 매진했던 그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1873년 6월 15일, 발굴을 종료시켰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아마도 카터 경이 투탕카멘 무덤을 발견하기 전까지 전 세계를 가장 흥분시켰던) 발견은 바로 이날 이루어졌다. 


아내와 함께 발굴 작업을 하고 있던 슐리만은 이제 더 이상 무언가가 발견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발굴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인부들은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궁이라고 믿었던 석조 건물의 아래층인 지하 8.5미터 아래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심히 발굴을 지켜보던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갑자기 아내를 시켜 인부들을 돌려보내게 했다. 그리고 낙석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덩이로 뛰어들어 칼로 무언가를 꺼냈다. 


금으로 된 보물들이었다. 그것은 슐리만에 의해 빛을 볼 때까지 3000년간을 그곳에 묻혀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는 그중 귀걸이 한 쌍과 장식 목걸이를 그의 어린 그리스인 아내에게 걸어주며 속삭였다.

“헬레네!”

슐리만은 이 중에서 제2층에 해당하는 유적을 트로이 전쟁 시기의 유적으로 판단하였다. 사실 그가 발굴한 히실리크 언덕의 제2층은 트로이 시대의 것이 아니고, 제6층이 그것에 해당한다는 것이 1890년 슐리만과 함께 트로이를 재발굴한 빌헬름 데르베르트에 의해 밝혀졌다.

 

목숨을 건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슐리만도 실수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문제를 해결했고 트로이를 찾아냈다고 온 세상에 선언했다. 한 아마추어와 전문가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질 판이었으나 바로 그때 터키 관리들이 슐리만에게 추방령을 내려 논쟁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렸다. 그들은 뇌물에 만족하지 못했다. 슐리만은 그들에게 황금을 약속했던 것이다. 황금은 정말 있었느냐구?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그 위치는 슐리만이 서둘러 마구 파내려 간 층보다 훨씬 위쪽이었다. 어쨌든 적어도 당분간은 히사를리크 언덕의 흙더미를 파헤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슐리만은 원주민 인부들에게 급료를 지불한 뒤 발에 묻은 소아시아의 흙을 털어내고 그리스 본토로 향했다.

 

그의 두 번째 성공 역시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미케네 광장에서 아가멤논이 전쟁 후 귀환하여 그의 아내와 신하에게 배신당해 죽는 전설 속의 미케네 왕궁을 발굴한 것이다. 호메로스는 트로이도 부유했지만 미케네는 더 부유한 도시로 묘사했다. 슐리만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그 ‘황금의 도시를 발견했다.

발굴된 프리아모스의 보물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동부, 아르골리스의 한복판에 미케네라는 고대 도시의 잔해가 있었다. 이 도시는 성벽을 쌓는 데 사용된 거대한 돌덩이와 고대 바빌로니아의 야수 석상을 연상시키는 성문 위의 두 마리 대형 사자상으로 유명했다. 슐리만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 유적을 진지하게 탐구한 사람은 없었다. 사자문 근처를 파기 시작한 그는 시신이 누워 있지 않고 세워져 있는 희한한 모양의 구덩이들을 발견했다. 


원형으로 배열된 이 구덩식 무덤들은 아무도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시신만이 아니라 금과 은의 부장품도 도굴당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공격을 당한 경우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미케네 주민들은 적에게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고 목숨을 구걸할 겨를조차 없었던 게 분명했다.

미케네의 사자문

두 마리 사자가 문 위를 지키는 양식은 크레타의 영향을 보여준다.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슐리만은 바로 이 사자문 부근에서 미케네 특유의 구덩식 무덤들을 발굴했다.

 

미케네를 발굴했던 1876년에도 슐리만은 자신의 발견과 확신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발견 또한 아가멤논 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보다 400년 앞선 시대의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슐리만에 의해 또다시 묻혔던 새로운 역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찾던 호메로스의 세계는 아니었지만, 고고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에게 슐리만은 ‘잃어버린 세계’를 가져다준 것이다. 또한 슐리만은 10년 후에 티린스 유적을 발굴함으로써 한 때 지중해 연안을 지배했던 선사시대의 미노아 문명 연구에 기초를 제공했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1885년에 슐리만은 다시 트로이에 갔다 와서 이타카에 있는 오디세우스 왕궁의 발굴을 시도했다가 티린스로 방향을 돌렸다. 펠로폰네소스의 무척 오래된 도시인 티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가 기적의 과제를 수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티린스에서 슐리만은 온전한 궁전 하나를 발굴했는데, 이것도 호메로스 이전 시대의 유적이었다.

 

그 뒤 그의 관심은 크레타로 향했다. 크레타 섬은 그리스 본토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인간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슐리만은 또다시 뇌물을 원하는 터키의 지방 관리들 때문에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얼마 뒤 이 흥미로운 인물, 전쟁으로 이익을 취한 모리배이자 몽상가였고, 금광 투기꾼이자 모험가였던 슐리만은 죽었다. 아마 그는 천국에 가서도 곧장 낙원 이전 시대의 문명을 발굴하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슐리만은 몇 가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1890년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리스의 역사는 700년이나 늘어나 있었다. 이 자수성가한 독일인은 이 지역의 문명에 관해 대다수 학자들이 추측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깨우쳐주었다.

 

그전까지 유럽 예술사는 그리스 예술에서 시작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했다. 그리스는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게 아니라 한참 뒷부분, 거의 마지막에 속했다. 아테네인이 아크로폴리스의 주춧돌을 놓기 수천 년 전에 에게해 일대는 이미 무역과 예술과 선진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유럽 역사가들은 유럽 문명의 고향이 유럽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크레타와 그리스를 유럽 문명의 발상지로 정했지만 실은 동쪽의 오리엔트 문명이 처음 전파된 곳이 크레타와 그리스였다.

트로이 당시를 복원한 가상지도

원래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슐리만은 학계의 전문가라는 이들에게 아마추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비난을 의식했던 탓인지 슐리만은 1882년 발굴부터 경험과 과학적 발굴을 배우기 위해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였던 되르펠트를 고용했고, 비전문가라는 수식어를 떼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기록했다. 슐리만이 그의 연구결과를 학술지보다 신문에 대서특필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다는 이유로 오히려 당시 전문가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슐리만을 조롱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고학이 학문으로서 정착되는 전문화의 과정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흐름이 대학과 같은 공식 교육기관의 전공으로 정착된 것은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였다. 


따라서 19세기에 ‘고고학자’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학계의 테두리 내에서 생업으로 학문을 하는 고고학자와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말이 되면 직업으로서 고고학을 하는 전문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지만 슐리만의 시대까지만 해도 아마추어와 전문가가 따로 구분될만한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다.

 

당대의 전문가란 자신의 취미에 해당하는 생활로 삼은 것에 수입이 되지 않더라도 시간을 집중 투자한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한마디로 부유하고 한가한, 즉 생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취미생활로 학문을 할 수 있는 귀족이나 부르주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슐리만도 비록 태생은 가난한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장사로 막대한 부를 쌓은 부자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돈을 벌지 않고도 자력으로 발굴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갖췄던 인물이었다. 


슐리만의 발굴과 연구에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던 영국에서 고고학 단체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의 존경을 받는 지식인으로, 직업적 고고학자가 아닌 군인, 성직자, 다른 분야의 교수 등 개인적인 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전통적으로 귀족이거나 가문이 좋지 않은 슐리만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슐리만이 사기꾼이라고 비난받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미케네에서 발굴한 황금 유물들을 오스만 제국 몰래 빼돌려 소송에 걸린 것이나, 그의 일기나 발굴 결과 사이의 불일치와 모순 등이 그 대표적인 일들이다. 

게다가 그가 트로이나 아가멤논의 궁전을 발굴했다고 발표하고 세상에 내놓은 유물들이 불법적으로 발굴한 유물들을 매입하여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분석도 분분했다. 거기에는 그가 처음 언급했던 트로이 유적의 발굴을 꿈꿨다는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책도 꾸며낸 이야기라는 비난이 들어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모든 것을 꾸몄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마흔까지 돈을 모았고 그 돈을 모두 자신이 말하는 대로 트로이의 유물을 발굴하는 것에 모두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꿈꾸지 않는 자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 대해 이견을 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슐리만의 고고학적 작업이 파괴를 수반했다는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는 모든 유물에 대한 발굴 기록을 꼼꼼히 기록하였고, 자신이 연구한 것들을 부지런히 발표하는 등 학자로서의 면모를 당당히 남겼다. 예컨대 그가 출판한 <트로이 유물 도해집>은 사진화보를 실은 최초의 고고학 저서의 하나로 손꼽힌다.

 

돈 많은 귀족이나 가문이 대대로 부자였던 사업가 가문이 아니고서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던 고고학의 세계에 가난한 목사의 아들이 자수성가하여 선두 업적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슐리만은 갖은 루머와 비난은 이미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대개 전문가를 고용하는 방식을 취했던 그들과 달리 슐리만은 직접 공부를 했고, 필요한 자금을 위해 마흔이 넘도록 솟아오르는 발굴과 탐험에 대한 욕구를 꾹꾹 참으며 그것이 터질까 봐 그리스어 공부도 가장 나중으로 미뤘다.

그저 가게의 점원이 선생님도 없이 독학만으로 15개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어지간한 노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뤄낼 수 없는 대단한 성과임에도 어느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한다. 그의 꿈은 그렇게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것이었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기간이 마흔이 넘어서야 완성되었다. 그렇게 사업을 접고 탐험을 나서겠다고 섣불리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본격적인 기본 공부부터 대학에서 시작하여 박사학위를 따고 나서야 발굴작업에 돌입했다.

 

어쭙잖게 그의 외국어에 대한 문법 오류를 지적하면 그는 자신이 읽으며 외웠던 그 소설의 지문을 언급하며 정확하게 반박했다고 전해진다.

 

당신은 당신의 꿈이 무엇인지는 기억하는가? 그리고 그 꿈을 그대로 간직하지는 않더라도 지금 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한번 왔다가 가는 삶인데 진정해보고 싶은 꿈조차 꾸지 않는 삶이란 너무 삭막하고 각박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가?

 

꿈을 갖고 있다고 꿈꾸기만 한다고 삶이 윤택해지지는 않는다. 당신이 그 꿈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당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를 신화 속의 유적을 자신이 찾아내겠다며 외국어를 공부하고, 그 발굴을 위해 드는 기하학적인 돈을 모으기 위해 사업을 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꿈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과정은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가 없다.

 

그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열정이 과해 해당 유적보다 훨씬 더 파고 들어가 그 이전 시대의 유물들을 발굴한 것도, 시행착오나 실패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는 자신이 정한 방향을 꾸준히 노력했고 다른 이들이 뭐라 비난하던 비아냥거리던 묵묵히 자신이 믿고 공부한 사실을 토대로 밀고 나갔다. 그가 공부를 했던 것도 결국 자신에 대한 꿈이 갖는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자신에게 먼저 증명하고자 했음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언제고 자신이 공부하고 잘 알고 있지 못한 분야라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한 확신은 그저 고집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이고 그래서 전문가에게 묻는 것이다. 전문가에게 무엇을 묻고 배우려고 하더라도 자신이 어느 정도 공부하여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무엇이 맞는지 과연 그 대답이 정확한 것인지 검증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수많은 배움과 경험의 과정에서 체득했던 것이다.

 

당신도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살아온 혹은 앞으로 더 살아갈 삶도 수백 년 전의 그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당신은 여전히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이나 경험, 자금은 여전히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큰돈을 벌어준다거나 당신을 유명하게 해 준다는 어떠한 보장도 없는 일에 당신은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믿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그 경험을 했던 이들은 안다. 그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을 보장하거나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슐리만의 삶은 특별하지 않은 지금 당신의 삶이나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신이 스스로를 믿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며 준비해야만 더 파나 갈 보물이라도 만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패를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바보들에게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 무언가를 계속해서 실패를 하고 다음 성공을 계획하는 이보다 당신은 뒤져 있는 것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실패자로 의문의 1패를 안게 될 것이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보는 결코 성공을 맛볼 수 없다.


끊임없이 꿈꾸고 희망하고 그 희망과 꿈을 위해 노력하고 준비하는 삶이 실패 따위를 두려워할 리가 없으며 그러한 삶이 성공을 거머쥐지 않을 리가 없다는 진리를 당신이 얼른 깨닫고 더 힘차게 당신의 꿈을 위해 노를 저어나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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