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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2. 2022

세금을 잔뜩 실은 배가 난파되었다고 유배까지 당했지만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생과 함께 목숨을 바쳐 싸우다.

1823년 경기도 음죽현 상율면 석원동(현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 1리 돌원마을)에서 3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관직이 없었으나, 할아버지 어석명(魚錫命)은 인동부사(仁同府使)까지 지냈던 인물이었다.

이천 생가

그는 어렸을 적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힘이 센 장사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1841년(헌종 7)에 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음력 10월에 총융초관(摠戎哨官)이 되면서 무관으로서의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845년 부장(部將:종6품),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종6품),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종5품), 1846년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종4품), 형조 정랑(正郞:정5품), 1847년(헌종 13)에는 광양현감(光陽縣監)이 되었으며, 1850년(철종 원년)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로 품계가 올랐고, 같은 해 평안도 중군(中軍:정3품)과 부호군(副護軍:종4품)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평안도 중군에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날 광양현감에 재임하고 있었을 당시 조운선이 침몰한 사건에 대해 조정에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가 광양현감에 재임하고 있던 당시, 전라도 일대 각종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적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1850년 8월 이 조운선이 과적과 악천후로 인하여 난파되는 사건이 있었던 것을 나중에 문제 삼은 것이다.

 

이에 대한 형벌은, 그의 관직을 모두 빼앗고 장형 1백 대에 대해 돈으로 바치고 한양에서 3천 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어야만 한다고 공격하는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그는 세조 때 함길도 관찰사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봉되었던 어세공(魚世恭)의 12대손이었기에, 그 형벌이 다소 감형되어 장형 90대에 해당하는 금전을 납부하고, 파직된 뒤 1851년 4월 충청도 제천현 천수역(泉隨驛)에 2년 반 동안 유배되어 강제노역을 하게 된다. 이후 1852년(철종 3) 4월에 풀려났다.

 

1853년 4월에 다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1854년 겸사복장(兼司僕將:종2품), 1856년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종3품), 1859년 내금위장(內禁衛將:종2품), 1862년 대구진영장(大邱鎭營將:정3품), 1864년(고종 1) 장단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 등에 제수되었다.

조선 후기의 무장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강화도 앞바다에 침입한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킨 장군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못한, 하지만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인 어재연(魚在淵)의 이야기이다.

 

특히 그는 신미양요 때 단, 600명의 군사로 미국 군함 5대와 1,230명의 군사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충도(公忠道:지금의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 재직 중이던 1866년에는 프랑스 해군의 피에르 구스타프 로즈(Roze)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병사를 이끌고 광성보를 수비하였다.


이후 회령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종3품) 겸(兼) 회령진병마첨절제사(會寧鎭兵馬僉節制使:종3품) 북전위장토포사(北前衛將討捕使)로 부임해서는 북쪽 변경 지방의 비적을 토벌해서 치안을 확보한 동시에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1871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정2품), 금위영 중군(禁衛營中軍:종2품) 등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만 체아직인 호군(護軍:정4품)에만 제수되어 요양 중에 있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6월 1일 손돌목[孫乭項]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하자, 삼군부의 추천으로 진무영 중군(鎭撫營中軍:정3품)에 급히 제수받고 강화유수부 광성보로 출전했다. 이것이 신미양요의 시작이었다.

본래 신미양요의 시작은, 1866년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평양의 군민들과 충돌하여 선원 전원이 사망한 사건, 이른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며 시작되었다. 미국은 계획대로(?) 이 사건에 대한 응징과 손해배상 청구, 그리고 조선의 개항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한 것이었다.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가 군함 5척에 병력 총 1,230명을 이끌고 나가사키(長崎)를 출발하여, 음력 4월 1일에 충청도 해미(海美) 앞바다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북상하면서 조선 해안을 측량하였는데, 미국 함대의 접근 소식은 곧 조선 정부에도 알려졌다.


결국 조선 정부는 4월 13일 대표 3인을 함대에 파견하여 협상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미국 측은 강화해협 탐측을 실시한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고, 다음날 실제로 탐측을 강행하였다. 미국 측 탐사대가 강화도 손돌목에 이르자 강화수병이 포격을 시작하였고, 탐사대도 응사하여 쌍방 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조선군의 대포는 미국 측의 대포에 비하여 성능이 훨씬 뒤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진지에서 철수하게 된다.

어재연이 급하게 파견되어 도착한 당시 강화도의 방어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휘하 군사들 중 대부분이 강화도에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자들이었고, 징집된 군사들도 모두 원래 소속 진영이 다르다 보니 훈련 상태도 제각기 달라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전술을 짜던 어느 날 동생 어재순(魚在淳)이 찾아와 형의 밑에서 종군하겠다고 하자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를 작정이냐고 혼을 내서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어재순이 나라가 어지러운데 어찌 떠날 수가 있겠냐며 설득하는 말에 도리어 감복하여 동생을 거두게 된다. 결국 어재순은 형의 밑에서 그렇게 힘을 보태 백의종군하게 된다.

 

이윽고 미 해군이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본진인 광성보로 쳐들어온다.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 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草芝鎭)을 점거하였다. 이에 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서 배수진을 치고 수비하던 어재연은 6월 11일에 덕진진까지 점령한 미군의 총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하였다.


여기서 손돌목돈대까지 밀리자 어재연 장군은 휘하 군사 350명과 함께 최후의 전투 준비를 하게 된다. 손돌목돈대에서 미군과 조선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펼친다. 어재연 장군은 수륙 양면 작전을 전개하는 미군에 맞서 싸우며 야포 사격을 전개하다가 육박전에 돌입해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미군 수병 제임스 도허티가 찌른 총검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48살, 동생 어재순의 나이 45살이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및 어재순과 휘하 군사 53명이 전사, 100명이 자결, 20명이 포로로 잡히는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하지만 자신들과 끈질기게 싸운 조선군을 높이 평가한 미 해군에서는 어재연을 포함한 장교들을 정중히 매장해준다.


남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었던 어재연과 어재순 형제의 부인들이 전사할 경우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두 형제들에게 표식을 해두었는데 표식을 보고 두 사람을 고향에 안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후 조정에서는 어재연에게 병조판서(정2품) 겸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종2품)에 추증하고, 직책이 없는데도 자원 출전했던 동생 어재순에게는 이조 참의(정3품)에 추증했다.

어재연의 묘

그리고 어재연에게는 특별히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873년에는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려 쌍충비를 세웠는데 내용은 이렇다.

 

“형은 나라를 위해서 죽고 동생은 형을 위해서 죽으니 이 가문의 충성을 널리 알려라. 늠름한 충성은 달빛과 같이 밝으니 형제가 죽음을 서로 뒤따라가서 돌아가는 것같이 하였구나.”

 

어재연이 단순한 무관이 아니었음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단순한 무관이 아닌 지방관으로 파견되었을 때마다 백성들을 위한 관리로서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었다. 비록 1847년 첫 지방관이었던 광양현감으로 있을 때 조운선 선적의 실수로 인하여 유배형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이후에는 지방관에 부임할 때마다 지방의 폐해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여러 차례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고 백성들에게는 존경을 받았다.

 

풍천 부사에 재직하였을 때는 바닷가 주변 마을에 염분으로 인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자, 새로 양전(量田)을 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다시 부과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1859년(고종 10) 방어사(防禦使)의 이력(履歷)을 허락받게 된다. 대구 영장 재직 시에는 도둑 단속을 잘하여 백성들의 민생치안을 확실하게 지켜냈다고 기록에 전한다. 이때 고종이 즉위하면서 1864년(고종 1) 각도 관찰사에게 어진 관리[良吏]를 선발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어재연이 그중 한 사람으로 뽑히게 된다.

 

곧이어 장단부사로 부임하였는데, 그가 부임했던 이 고을은 개성의 남쪽에 위치하여 서울로 가는 요로였기 때문에 중국 사신이나 고위 관료들의 행차가 많은 곳이었다. 따라서 각종 연회 등 경비지출이 많았는데, 이를 틈타 썩어빠진 아전들이 세금 포납과 과중한 조세 징수, 불공평한 과세를 행하였고, 따라서 백성들의 불만도 당연히 높아져만 갔다.


어재연은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세금 비리의 실태를 근원적으로 밝혀내고 또 수세상의 감면 혜택을 공정히 베푸는 등 조세행정을 바로잡았다. 오래된 토착 비리를 바로잡았다는 공로로 고종으로부터 표리(表裏: 임금이 신하에 내리는 옷감)를 하사 받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866년에는 회령 부사로 발령받았다. 이곳은 국경지대로 조선 상인들과 중국 상인들 간의 거래를 둘러싼 갈등이나 국경 주변의 도적떼 출몰 등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쟁단(爭端: 다툼의 실마리)이 끊이지 않았다. 어재연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국경시장을 일시 폐쇄함으로써 중국 상인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령을 시행한다.


또 도적 패거리를 엄히 단속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1869년에 이르러 어재연은 회령 부사로서의 임기가 다 되어 교체되어야 했는데, 백성들이 어재연이 계속 지방관으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고 하여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1년이나 유임하게 되었고, 그 직후 급히 전쟁으로 투입된 것이었다.

<매천야록>

구한말 역사가였던 황현이 쓴 <매천야록>을 보면 어재연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던져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적혀있다. 또한 당시 미군 기록에 의하면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의 군사들은 항복을 모르는 용감한 군사들이었다고 적혀 있다. 어재연과 군사들은 무기가 부러지거나 총탄이 떨어지면 맨손으로 싸우거나 돌이나 흙을 집어던지며 저항했다고 자세하게 적고 있어서 당시의 조선 군사들의 모습이 얼마나 참혹하고 처절했을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이때 처참한 패배로 인해 ‘수자기’로 불린 어재연 장군기가 미군의 손에 넘어가는 치욕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이 수자기는 신미양요 후 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2007년 10월에 10년 임대 형태로 돌아왔고 2014년에 갱신할 때 2020년까지 연장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했었다. 이후 협상에서 단기 2년 방식으로 연장하였고, 2022년 10월에 임대 기간이 종료되어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갈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군사력은 물론이고 당시 무기의 수준 차이에서 이미 싸움의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평생 무관이던 어재연이 그 전력의 차이를 확인하지 못하였을 리 없다. 심지어 그는 그 이전 프랑스군과의 전투 경험으로, 서양의 무기가 갖는 위력과 그들의 전투 능력에 대해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사지에 가서 죽음을 불사하며 전투를 한 것도 차마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수 없지만, 형의 절박한 상황에 그나마 힘이 되겠다고 달려간 45살의 동생을 보며 그는 동생을 내치지 못했다.


전투가 일어나는 순간 그들은 장렬히 전사해야 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즉, 동생 어재순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형이 혼자서 죽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다고 여겨 달려간 것이었다. 아무런 직함도 없이 그저 혈혈단신 달려가 형의 부관으로 싸움에 힘을 보태고자 한 것이었다.

 

미군은 이미 전쟁의 빌미도 만들어냈었고, 조선군의 상황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등장하는 첫 장면의 처참한 전투씬은 당시 전투 상황을 아주 적나라하게 재현한 것이다.

당신이라면, 처음 부임한 지방관 자리에 서울에 올려 보낼 세금을 잔뜩 실어서 그것이 난파되었다는 이유로 그것도 한참이 지나 자신을 시기하고 트집 잡으려는 벼슬아치들에게 저격당해 죄라고 논해지고 형벌을 받아 유배까지 당해 1년이 넘도록 갇혀 지내야 하는 일을 당했다면, 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이미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지에 뛰어들 수 있었겠는가?

어재연의 편지

위 사진의 편지는 어재연이 한성부 아윤(亞尹)에게 상소를 신속하게 처리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으로 보낸 편지가 이후 그의 근묵을 정리하며 발견된 것이다. 상소란 행정처리에 있어 문제가 되는 사안에 대해 중앙정부에 그 문제를 인식하고 빨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려달라고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이다.


그런데 그 상소를 임금에게까지 올리기 위해서는 절차라는 것을 밟아야만 한다. 지금도 존재하는 결제라인이라는 것이다. 사장에게 뭔가 건의하고 싶거나 현장의 문제점에 대해서 보고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사장실에 달려가서 직보 할 수 없기 때문에 절차라는 것을 밟아 내 위의 상사를 통해 그 위의 상사에게 알리고 또 알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보고가 사장에게, 왕에게 가는 것을 지체하거나 아예 묵살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유도 다양하다. 그 상소가 왕에게 알려지게 되면 자신이 잇속을 차리던 뒷거래가 걸려 곤란해지거나 계속해서 이익을 챙길 수 없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고, 더 어이가 없는 경우는, 그러한 보고 자체가 올라가는 것이 자신이 제대로 일을 챙기지 못해서 발생한 관리 소홀이라 지적당할까 봐 묵살하는 경우까지 있다.

 

그래서 이재연은 자신이 올린 상소를 신속하게 처리해달라고 간절하게 편지까지 보내 부탁 아닌 부탁을 한다. 당연히 상소는 자신의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잘못된 행정을 바로잡기 위해 위의 허가와 지원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 당시 그의 상소를 제대로 처리하진 않은 자들, 지방관의 주 업무가 서울에 있는 왕이나 권세가들을 위한 세금을 가득 채우는 것이 주 업무가 아니었음에도 무관으로서 처음 지방관으로 파견된 그에게 그들은 책임을 물었다. 심지어 그는 그곳에서의 임무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승진하여 파견된 후였다.


아마도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달았을 것이다. 감히 임금에게 올리는 세금을 실은 조운선이 파손되어 제대로 세금이 올라오지 못한 것에 대해 일벌백계를 통해 그 업무가 얼마나 엄중한가에 대해 표본을 보여야 한다는 둥, 이제 갓 지방관의 일을 시작한 무관이 문관들보다 얼마나 일을 허술하게 하는지에 대해 본을 보여 어설픈 무관들이 감히 문관의 섬세한 행정처리보다 얼마나 부족하기 그지없는지에 대해 따끔한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며 거들먹거렸을 수도 있다.

그의 첫 지방관 발령 이후 그가 처음 겪은 실패이자 좌절이었다. 억울했을 것이다. 그가 누구처럼 그 세금을 착복하여 자신의 재산으로 삼은 것도 아니고 세금을 실은 배가 얼마나 가득 싣고 올라가려 했으면 갑자기 나빠진 날씨에 배가 전복되어 버렸을까? 그런데 그것을 자신이 싣고 올라가던 길도 아니었고, 그의 잘못이나 실수로 인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알았을 것이다.


그가 잡고 있던 끈이 없고 파벌이 없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형벌로 유배를 당해 1년이 넘도록 깡촌이던 제천으로 쫓겨나 갇혀 지내면서 그가 얼마나 속상하고 억울했을까?

 

문제는 그다음이다. 다시 벼슬에 복직하여 지방관을 지내면서도 그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임하는 고을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부정부패를 개선하려 하였고, 사소하지만 자신이 무관이라는 점을 살려 백성들의 민생치안에 힘썼다.


사지로 달려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던 1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다스리던 고을의 백성들이 1년만 더 있어달라고 그대로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는 바람에 이례적으로 유임까지 하며 고을을 다스렸던 무관이었다.

 

아무도 그를 사지에 내몰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자진해서 강화도로 가기 전, 그는 몸이 너무 안 좋아 병으로 이미 왕명이 있던 자리에서 부임하지 못하고 요양 중인 상태였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에 그는 병석을 떨치고 강화도로 달려갔다. 강화도에 가본 적도 없는 오합지졸을 보고, 제대로 총기를 다룰 줄도 모르는 군사들을 보며 자신들의 오합지졸보다 두 배도 더 되는 미군의 위용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시 48살이면 죽음을 생각할 노년이다. 세 살 어린 동생이 형을 혼자서 죽게 할 수 없다며 형의 곁을 지키겠다고 달려왔을 때, 부모님을 생각하며 그는 동생을 다그친다. 형제가 함께 죽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효가 아니라고, 그러자 동생 어재순은 형에게 도리어 눈물 섞인 설득을 토해낸다.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인데 효도가 먼저 일 수 있겠느냐고?

 

오늘 내가 어재연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에게 가져온 이유는 그가 장렬히 전사할 수밖에 없던 서구 열강이 막 조선을 밟기 시작했던 그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크게 달라져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미국의 기록에 의거하자면, 어재연 형제의 죽음은 처참한 패배였고, 미국이 한국을 공식적으로 짓밟은 치밀한 계획하게 이루어진 대승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처참하게 패배하여 빼앗긴 어재연의 장군기조차 제대로 다시 받아오지 못하고 전리품으로 그들이 가져간 것이라는 주장에 빌려달라는 구차하고 추잡한 외교라는 것을 하면서 빌려 얻어와야 하는 모습으로 수자기를 다시 접할 수 있었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어떤 처참한 꼴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역사가 일러주는 부동의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런데 원천적으로 생각해보자. 어재연이 겪은 최초의 실패가 어재연의 잘못이었나? 세금을 잔뜩 싣고 서울을 향하려던 배가 전복된 것이 어재연의 잘못이었나?


어재연이 동생의 목숨까지 함께 잃어가며 그렇게 장렬한 전투를 벌여서 미국을 막아냈고 우리나라를 지켜냈나?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때 고종은? 고종을 보필해야 할 그 조정 관료들은 무엇을 했던가? 그들이 죽음을 감수하고 형제가 뛰어들어 죽는 것을 이미 예감하면서도 미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맞짱을 떴던가?

 

아니다. 그들은 저만 살겠다고 저만 그 와중에 부와 명예를 챙기겠다고 어떤 썩은 동아줄을 잡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고르고 있었다. 나라를 생각하고 나라를 지켜내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왕을 지키고 국모를 지켜내겠다며 칼을 손에 쥔 문관은 없었다.

세치 혀로 정치를 한다는 문관이 무능하고 천상 군인인 무관이 훌륭하다는 논리로 받아들여 직업군인이 이 글을 읽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뿌듯해하는 오독을 하지 않길 바란다. 대한민국의 군은 총칼을 앞세워 지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글라스를 쓰고 청와대로 입성했던 자 이래로 육사 출신에 지들끼리 나라를 나눠먹겠다는 자들이 두 명이나 대통령이 되는 순간부터 여군을 성폭행한 당나라 군대의 기강을 눈감아주겠다고 하는 현재의 군대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무관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으니 쪽팔려할지언정, 어재연이 자신인 듯 착각하고 무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어쩌다가 대한민국의 군인들마저 그 썩은 조직의 정치를 꿈꾸고, 외교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고 대한민국을 알리고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만드는데 힘을 써야 하는 자들이 외국에 나가 어떻게 한국의 세금을 더 효율적으로 지 돈으로 굴릴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국가의 품위를 지키라고 대사관 전속 요리사를 두게 하였더니 어디서 정치인들이 하는 나쁜 꼬라지와 자기 선임들이 하는 꼴을 평생 외교관을 하면서 보고 익혀왔던 지라, 뭣도 아닌 지 마누라가 자신들이 먹을 식료품과 와인까지 접대용으로 영수증에 기록하고 자기네 식구 일용할 양식으로 당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창피하지 않은 일이 되었는가 말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한복을 입은 조선족이 자기네 나라에 속한 하류 민족이라며 한복이 중국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얼마나 훌륭한 정치가였는지를 떠들며 그가 동아시아에 펼친, 한국에 펼친 지저분하고 자기네 잇속만을 차리는 저열한 정치를 벌였는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의 한심한 하품 같은 찬양이 나를 눈물짓게 한다.

 

트럼프가 그러하였고 바이든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도 그들은 한국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그들의 이익이 되기 때문에 동북아 정세를 자신들의 정치에 이용할 뿐이고, 남북통일이 자신들의 국제정세상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3.8선을 나눴을 때처럼 언제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찢어놓고 다시 붙여줄 생각을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프로파간다를 통해 한국을 지켜줄 나라는 자신들밖에 없다고 떠들어댈 것이다.

 

어재연이 말도 안 되는 유배를 당하고 나서도 병으로 골골대던 몸을 이끌고 사지로 달려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던 것은 그가 단순하게 우직한 바보여서가 아니었다. 그가 미군에게 전멸당하고 처참하게 패배했다고 해서 그의 실패가 단순한 실패와 패배로 기록되지 않아야 할 이유는 그가 보여줬던 그의 일생이 증명한다.

 

저마다 자기네 진영을 위해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 악착같으면서도 정작 대의(大義)라고 하는 나라를 위하는 것까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다. 정치인들은 허구한 날 자신들의 첫행보로 현충원을 찾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출사표를 던진다. 그들이 과연 그 의미를 알까?


그들이 조폭처럼 옆에 우르르 보좌진을 이끌고 향을 피우고 준엄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묵념하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조금이라도 숙연하고 멋지고 장엄하게 화면에 잡혀서 멋진 출발을 알릴 수 있게 해달라고?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는 대단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당신이 하는 어떤 일이라도 그것은 당신의 성과를 넘어서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나라를 떠나오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해외에 나면 행동 거지 하나하나가, 당신이 전 세계의 그 분야에서 받는 찬사나 찬미가 대한민국을 빛내는 것이 된다. 하다못해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그러하고, 영화가 그러하며 넷플릭스 드라마가 그러하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되었다. 물론 그들은 대한민국을 널리 알리겠다는 충정과 애국심으로 그 작업에 몰두하지 않았다.


모두가 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천장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기 마련이다.


맞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과대망상으로 애국심을 갖기까지는 원하지 않지만, 애국심 이전에 사람됨으로서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점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 큰 보탬이 된다는 깨달음을 얻길 바란다.

광성보 정문 앞에 강화군이 어재연 장군을 기려 광성보 전투를 표현한 조각과 함께 어재연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을 세우는 것은 그저 멋진 장식물로 거리를 꾸미기 위함이 아니다. 그 동상을 보면서 그의 업적과 그의 얼과 그의 마음을 후세의 자손들이 그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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