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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3. 2022

비천한 집안 출신에 학생 시절 내내 왕따를 당했지만

왕보다 더 강한 권력으로 유럽을 쥐락펴락하는 자리에 오르다.

169번째 대가의 이야기

 

1473년 잉글랜드 서퍽(Suffolk)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중세부터 양모를 수출하는 무역항으로 알려졌던 입스위치(Ipswich)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여러 정적들의 공격에서 수차례에 걸쳐 그를 ‘천한 도살자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며 몰아붙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도살업자였다는 것이 사실로 증명된 적은 없었다.


다만 1519년 영국을 방문한 베네치아 대사가 남긴 기록에서 그의 신분이 매우 비천한 출신이었음은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비록 도살업자까지는 아니었지만, 귀족 출신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천한 신분 출신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탁월한 학업 능력을 보였다. 입스위치에 위치한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에서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고, 15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있는 모들린 칼리지(St. Mary Magdalen College)에 진학하여 문법, 수사학, 논리학, 수학, 음악, 천문학, 지리학 등을 수학하게 된다.


여기서 7년여에 걸친 기초과정을 마친 그는, 당시 많은 학생들이 법학부를 선택했던 것과 달리 신학을 선택한다. 어려서의 그가 세속적인 야망이나 출세를 위한 학문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던 중세 스콜라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의향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신학부에 진학하고서는 제대로 학업에 대한 열정을 쏟지 못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주변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갈등이 고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 즈음부터 언제나 주변에 적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과의 대척으로 인해 학업에 전념할만한 상황을 갖지 못하였다. 특히 1498년에는 주변 친구들이 그가 장학생이었다는 이유를 집요하게 비난하곤 했는데, 이는 당시 모들린 칼리지가 탑을 짓느라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료들은 그가 장학금을 수혜 하는 것에 대해 학교 재정에 부담을 주는 파렴치한 행위라며 비난했다.


하지만 1496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터라 재정적 여력이 없었던 그의 입장에서는 학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지독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학교를 나와 쉬어야만 했던 그는 돈을 모으기 위해 도싯 후작(Thomas Grey, 1st Marquis of Dorset)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가 운명을 바꾸게 된 시작이 된다. 당시 그는 후작의 15명의 자녀 가운데 가장 어린아이들 3명을 맡아 가르치고 있었는데, 후작은 훌륭한 가정교사를 구했다면서 좋아하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듬해 옥스퍼드에 복귀할 수 있었으며, 교수가 되려던 그의 꿈도 머지않아 보였다.

 

그러나 안정된 생활도 잠시, 1501년 9월 후작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너무도 빨리 후원자를 잃고 말았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했던 그는 자리를 잡아야만 했고,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헨리 딘(Henry Deane)의 서기관으로 발탁되었다. 딘 아래에는 수십 명의 서기관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막내였던 그는 온갖 잡무를 도맡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이미 나이가 70에 가까웠던 딘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


그는 마지막 장례식까지 서기관중에서 막내였다는 이유로 딘의 장례절차 전반을 홀로 처리해야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장례식으로부터 그의 인생역전이 시작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이자 정치가였고, 유능한 외교관으로 헨리 8세의 첫 번째 총리이자 당시 가장 높은 자리였던 대법관까지 겸임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자로 등극했던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의 이야기이다.

 

왕실의 개인교사였던 그는 1509년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해서 1515년에는 헨리 8세의 첫 번째 총리이자 대법관까지 겸임하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alter rex(또 다른 왕)’라고까지 불렸던 권력의 정점에 올랐었다. 헨리 8세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이혼 문제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자 상황이 악화되면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압송되던 중 병사하고 말았다.

 

미국 드라마 <튜더스(The Tudors)>의 시즌1에 <쥐라기 공원>의 샘 닐이 연기한 인물로 잠깐 등장하지만 그 존재감을 뽐냈던 인물로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졌다.

드라마 <튜터스>에서 울지역할을 맡았던 샘닐

매우 꼼꼼한 성격이었던 딘은 양초 하나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장례절차 전반을 미리 정해두었던 사람이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장례식을 일체의 잡음 없이 마무리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울지는 딘의 세세한 지시를 꼼꼼히 수행하며 성공적으로 장례식을 마무리 짓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딘의 지정 유언집행자였던 레지널드 브레이 경(Sir Reginald Bray)이 눈여겨보고 있다가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브레이 경은 울지의 행정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친우이자 칼레의 부총독이었던 리차드 낸펀 경(Sir Richard Nanfan)에게 강력히 추천하게 된다. 사실 브레이 경과 낸펀 경은 당시 국왕이었던 헨리 7세(Henry VII)가 아끼던 신하였다는 점에서 울지는 상당히 강력한 후원자를 얻게 된 셈이었다.

15세기 칼레항

칼레의 부총독 낸펀 경은 당시 주요한 무역항이던 칼레에서 무역 상품들의 수량과 가격, 관세를 관할하는 책임자였다. 그런데 1503년 즈음에는 고령의 나이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때마침 브레이 경이 울지를 추천하자, 낸편 경은 곧바로 울지를 칼레로 불러들이게 된다.

 

칼레에서 울지의 꼼꼼한 행정능력은 빛을 발했다. 울지는 항구를 통과하는 상품 하나하나를 감독했음은 물론, 그 가격과 관세를 매기는데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며 낸펀 경은 울지를 점차 중용했고, 건강 악화로 칼레 부총독의 지위를 내려놓을 때가 되자 울지를 헨리 7세에게 추천하게 된다.


헨리 7세는 자신이 아끼던 부하 낸펀 경의 추천을 적극 받아들여 울지를 왕실 예배당의 사제로 받아들이게 된다. 가는 곳마다 후원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던 울지가 드디어 왕실 사제로 부름 받게 되면서 그의 인생역전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울지는 왕실 예배당에서도 금세 인정받았다. 또한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비슷한 출신의 실무자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타고난 성실함과 눈치 빠른 일처리로 울지는 헨리 7세에게도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 이는 울지가 1507년 헨리 7세의 대사로 임명되어 신성로마제국으로 파견되었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헨리 7세

1503년 아내와 사별한 헨리 7세는 결혼을 통해 유럽 내 강국들과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려고 했다. 특히 헨리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의 딸 마가렛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잉글랜드에게 중요한 위협이었던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가렛은 나이 많은 헨리 7세와 결코 결혼하고 싶지 않았고, 결국 1506년 이 혼담은 파기되고 만다. 울지의 첫 번째 외교업무는 아무런 소득을 거두지 못했고, 울지는 헨리 8세의 등장까지 비교적 조용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의 딸 마가렛

왕실 예배당의 사제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던 울지는 1509년 헨리 7세의 사망과 함께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의 출세 행진은 새로운 군주 헨리 8세의 즉위와 함께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의 정책과 외교적 사고방식은 부왕인 헨리 7세와 판연히 달랐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울지가 출세할 수 있었던 요인은 헨리가 그의 치세 초반기 동안 꼼꼼한 사소한 일까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헨리 7세의 통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울지는 귀여움과 지원은 받았지만,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 많은 책무를 맡은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헨리 7세는 ‘왕실 정부’로 알려진 체계 아래 자신이 직접 나라의 모든 방향을 직접 관리한 스타일로, 특히 재정에 관해서는 하나하나 본인이 모두 챙기는 꼼꼼한 스타일이었다. 당시 헨리 8세는 자기 형 아서 튜더가 죽게 되는 12살이 될 때까지 웨일스 공이 되지 못하고 무대에 등장하지도 못했었다. 이것은 그만큼 그가 왕위를 이을 제왕학의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때문에 왕좌에 오른 그는 경제 문제와 국내 정세를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과거 자신에게 정치를 가르쳤던 가정교사인 울지를 기용하는 것에 지극히 편안하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1509년, 헨리 8세에 의해 구호금 분배 관리관의 지위에 임명된 울지는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추밀원의 좌석에 앉으면서 왕과의 상호 보좌 관계를 명확하게 성립하면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본래 헨리 8세를 도와줄 첫 번째 고문들은 부왕으로부터 그대로 이어받은 폭스 주교와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햄이었는데, 그들은 신중하고 보수적인 성향이었다. 그래서 헨리 8세에게 부왕처럼 신중한 통치자가 될 것을 조언하였다. 당연히 헨리는 그 딱딱하기 그지없는 보수적인 아재 스타일의 고문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관점과 성향이 있는 사람들로 추밀원을 갈아 채우기 시작했다.

 

1511년까지 울지는 다른 고문들과 같이 단호하게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프랑스 침공에 대한 열의를 표명하자 그는 바로 왕의 의견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의 야심을 키워나가기 위한 기회를 노리게 된다. 자신의 관점을 실용적인 스타일로 완전히 바꾼 것이다. 심지어 그는 전쟁에 적극 찬동하는 의견을 내면서 추밀원을 설득하는 연설까지 하게 된다. 프랑스 전쟁에 대한 열의를 공유하지 않았던 고문들인 워햄과 폭스는 당연히 힘을 잃었고 울지는 능란하게 그들의 행로를 가로막았다.

 

1512년 잉글랜드는 당시 프랑스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던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스페인의 페르난도 5세(Fernando II),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와 손을 잡고 프랑스의 루이 12세(Louis XII)를 공격했다. 비록 전쟁 초반에는 고전했으나, 1513년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투르네(Tournai) 지방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성공의 일등 공신은 바로 울지였다.

 

울지의 주역할은 무기와 식료품 보급이었다. 본국의 보급 상황을 꿰고 있던 울지는 잉글랜드가 결코 이 전쟁을 오래 끌고 갈 수 없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을 지속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은 울지는 1514년 프랑스와의 정전협상을 추진했다. 여기서 울지는 잉글랜드의 상황을 철저히 숨긴 채, 온전히 잉글랜드에게 유리한 계약을 맺는데 성공한다.

 

그가 꺼낸 패는 바로 결혼 외교였다. 울지는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와 루이 12세의 결혼을 추진하는 한편, 프랑스로부터 앞서 정복했던 투르네 지방을 완전히 양도받는 데도 성공한다. 완벽한 외교협상의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다만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결혼하기를 싫어하는 메리를 달래고자 ‘루이 12세가 죽는 즉시 사랑하는 남자와 재혼하겠다’는 메리의 요구를 받아들여주는 것으로 이 결혼 외교는 성사된다.

메리의 초상화

하지만 정말로 결혼 3개월 만에 루이 12세는 사망했고, 메리도 즉시 사랑하던 남자와 비밀리에 결혼해버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프랑스 왕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마지막 끈마저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호전적 군주 프랑수아 1세(François I)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울지의 평화 구상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잉글랜드가 차지한 투르네 지방 역시 풍전등화의 위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에 울지는 즉각 스페인, 신성로마제국과 손을 잡고 프랑스를 압박하며 잉글랜드의 안위를 꾀했다. 아무리 호전적인 프랑수아 1세라고 하더라도 세 국가와 전쟁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헨리 8세는 울지의 탁월한 외교협상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 위기 상황에서의 임기응변에 감탄하여 울지를 요크의 대주교 및 대법관직에 앉히게 된다. 울지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것은 헨리 8세만이 아니었다. 교황 역시 울지를 자신의 대변인으로 삼아 외교협상에 활용해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사실 울지가 교황청으로부터 추기경으로 임명받을 수 있던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교황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울지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한편, 교황의 특사로 삼아 유럽 각국의 협상에서 교황의 대변인으로 활용했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울지는 신중하게 다른 고문들의 영향력을 파괴하거나 무력화하는 정치 고수로서의 모습으로 정적들을 제거해나갔다. 1521년에 그는 지긋지긋한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를 제거하였으며, 1537년에는 헨리의 친구인 윌리엄 컴프턴과 헨리의 전 애인 앤 스태퍼드를 간통죄로 교회 재판에 기소하였다. 서퍽 공작 찰스 브랜든에 대해서는, 그를 제거하기보다 한편으로 만들기 위해 헨리의 누이인 메리(프랑스의 미망인 왕비)와 은밀히 결혼했다고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헨리에게 두 사람을 용서하라고 충고하였다.

울지 추기경의 초상화

1516년 헨리의 장인이자 잉글랜드의 굳건한 동맹자인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의 죽음은 예상보다 큰 타격이었다. 그는 즉시 프랑스와 함께 평화를 제안했던 카를 5세로 대체하였다. 1519년에 막시밀리안 황제가 서거하면서 그 후계자로 카를 5세가 선출되었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힘은 대륙에서 상당히 제한받았다.


그러나 울지는 다른 수단을 이용하여 잉글랜드의 힘을 주장할 수 있었다. 1517년 교황 레오 10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1518년 교황특사가 된 울지는 교황을 위해 런던 조약을 조직하여 합법화하였다.

 

1518년 런던 조약은 유럽의 중재인으로서의 울지의 능력을 보여준 것으로, 20개국을 포함한 광범위한 평화 정상회담을 조직하였다. 이 덕분에 잉글랜드는 고립에서 벗어나 유럽 외교의 맨 앞에 등장하여 바람직한 동맹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는 이틀 후에 맺은 영불 조약으로도 잘 알 수 있다.


반어적으로 이 평화조약은 부분적으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대립을 가져왔다. 1519년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노발대발하였다. 그는 자신이 황제로 선출되려고 선제후들에게 뇌물을 주고자 막대한 돈을 투자하였다. 그는 이처럼 합스부르크와 발루아의 충돌을 정당성을 증명할 이유로 런던 조약을 이용하였다. 울지는 두 강대국 사이의 중재자로서 등장하였으며, 양쪽 다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으며 경쟁하였다.

<금란의 들판(Field of the Cloth of Gold)>,1774.

그의 또 다른 외교적 공적은 이른바 ‘금란의 들판(Field of the Cloth of Gold)’을 들 수 있다. 그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와 헨리 8세 사이에 5천 명의 수행원을 동반한 웅장한 모임을 계획하였다. 이것은 왕이 평화적인 교섭의 문을 열어가기를 원했던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전에 나머지 유럽에 잉글랜드 사람들의 부유함과 힘을 아낌없이 과시할 기회이기도 하였다.


잉글랜드의 충성을 노리고 프랑스와 스페인 두 나라가 경쟁을 벌이면서, 울지는 자신의 정책에 더 알맞은 동맹국을 선택할 수 있었다. 울지는 잉글랜드의 경제가 주로 옷감 무역 산업 벌이에서 흔히 손실을 겪곤 하였기 때문에 카를을 선택하였으며, 프랑스는 그 대신에 네덜란드를 선택하였다.

 

하지만, 1528년의 런던 조약은 1년 만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울지는 프랑스와의 충돌에 대비하여 1518년의 영-불 조약을 무시한 채 1520년 카를 5세와 동맹을 맺었다. 울지와 로마의 관계 또한 상극이었다. 그는 교황직과 유대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수족에 가까웠다. 런던 조약은 교황 레오가 바랐던 유럽의 평화를 목적으로 공들여 만든 것이었지만, 로마에서는 교황의 일부 비난을 도용하고 잉글랜드가 유럽을 좌우하려는 시도로 비쳤다. 게다가 울지의 평화 주도 작업은 성지로의 십자군 파병을 방해하였으며, 그것은 유럽의 평화를 바라고 있던 교황청을 자극하였다.

1522년부터 벌어진 1년간의 전쟁에서 잉글랜드는 카를이 프랑스를 쳐부수는 데 어느 정도 공헌한다. 특히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의 군사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사로잡았다. 헨리는 잉글랜드 왕들이 오랫동안 애타게 바라며 권리를 주장했던 프랑스 왕위를 자신이 빼앗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525년 카를이 동맹국으로서 잉글랜드를 버린 후, 울지는 프랑스와 교섭하기 시작했으며, 프랑수아가 포로였던 동안 프랑스를 다스렸던 그의 모후 사보이의 루이즈와 모어 조약을 체결하였다.

 

잉글랜드와 로마 사이의 친밀감은 1526년 코냑 동맹의 공식화에서 볼 수 있다. 잉글랜드는 동맹의 일원이 아니었음에도, 교황의 지지와 함께 울지에 의해 동맹의 축으로 편입되었다. 울지의 계획은 프랑스와 몇몇 이탈리아 도시국가 간 동맹으로 구성된 코냑 동맹으로 카를의 캉브레 동맹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를 주도하는 것이 로마에 대한 충성 행위와 커가는 카를 5세가 유럽 위에 군림하는 것에 대한 해답이었다.

 

1529년 카를이 프랑스와 화해함으로써 이러한 정책에 대한 결정적인 균열이 찾아왔다. 프랑스와 황제 간의 평화와 더불어 1527년 5월 6일 신성로마제국 군대에 의해 자행된 로마 약탈로 인해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에게 완전히 항복하고 말았다. 그 결과 카를 5세의 숙모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확정받고자 하는 헨리 8세의 작은 희망은 사라지게 되었다.

 

울지 추기경은 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헨리 8세의 신임은 두터웠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큰 진전이 없자 그의 입지는 좁아져만 갔다. 헨리와 캐서린 사이에 태어난 아이 가운데 유년 시절을 보낸 아들은 없었으며, 이는 장차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었다.

헨리 8세와 부인 캐서린

더군다나 당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장미 전쟁(1455-1485)의 잔흔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긴 논의 끝에 외동딸 메리는 왕위에 올라 튜더 왕가를 이어받을 권한이 없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잉글랜드가 일반적으로 여왕의 즉위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과거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의 즉위를 둘러싸고 내란이 벌어진 끝에 여왕 즉위에 실패한 역사가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헨리는 캐서린이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가 그녀가 자신의 형 아서 튜더의 미망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형의 부인이었던 캐서린과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라고 확신하며 캐서린과의 결혼을 저주하였다. 캐서린은 1519년 이후 더는 임신하지 못하였고, 그에 따라 헨리는 1527년 혼인 무효 소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캐서린은 헨리 8세와 결혼하기 전까지 처녀였다고 주장했다. 캐서린은 혼인 무효 선언으로 인해 그녀의 이전 신분인 웨일스 공의 미망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혼을 할 경우에 자신이 낳은 자식들 중 유일하게 성장한 메리가 공주의 신분이 박탈되고 사생아가 될 것이며 이후 신변안전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가 제기한 혼인 무효 신청은 국제적인 외교 문제가 되었다.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교황이 혼인 무효 선언을 하지 못하도록 협박하였다. 1526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황제를 상대로 코냑 동맹전쟁을 일으켰다가 대패한 후 산탄젤로성로 피신하여 자진하여 유폐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코냑 동맹전쟁 중인 1527년 5월 6일에 발생한 로마 약탈로 인해 황제의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카를 5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은 헨리 8세의 이혼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카를 5세

1527년 초반까지만 해도 울지는 스페인과 외교적 마찰을 고려하여 이혼에 기본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왕의 지시로 1527년 7월에 프랑스를 방문하여 프랑수아 1세에게 이혼에 대해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별반 소득 없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화가 난 헨리와 앤은 울지의 충성심까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1529년에 헨리가 자신의 런던 안 주요 거주지를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바꾸면서 울지는 요크 궁전의 장대하게 넓은 대저택을 포함하여 자신의 정치 관저와 토지를 빼앗겼다. 또한 울지는 요크 대주교 직함을 제외한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교구가 있는 요크셔로 여행을 떠나 요크셔 북부의 커 우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노섬벌랜드 백작에 의해 반역죄로 고발당하였다.

 

큰 곤궁에 처한 그는 자신의 개인 사제인 에드먼드 보너와 함께 런던으로 압송당하였다. 건강이 나빠진 울지는 1530년 11월 29일 레스터에서 호송 도중에 죽음을 맞게 된다. 향년 55세였다.


당시 울지는 “만일 내가 세속에 소요했던 시간만큼만 하느님을 섬겼더라면, 내가 이렇게 늙은 후에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시는 일은 없었을 텐데….”라고 하며 깊이 후회했다고 한다.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왕따로 힘겨운 학업을 이어나가며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보였던 울지는 계속된 불운 같은 실패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자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왕에 필적할만한 힘을 갖춰나갔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서 느꼈겠지만 그의 외교는 곧 당시 유럽의 정세였고, 그의 말 한마디에 유럽이 뭉치고 흩어지는 지경까지 이를 정도로 그의 영향력을 막대하였다. 그는 외교를 통해 유럽의 평화는 물론 영국의 안전과 존립을 유지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상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누구나 역사적인 위인들의 위인전을 보면서 큰 인물이 되고자 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위인전에 나올만한 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울지의 신분이 귀족이나 왕족이 아니었음에도, 그리고 그가 다른 출세를 위해 법학을 전공했던 것처럼 부와 명예를 위한 공부가 아닌 신학을 공부하고서도 생활을 위해 시작했던 가정교사에서 왕의 선생이 되어 권력의 정점에 올라 유럽의 왕들은 물론이고 교황의 오른팔로 추기경까지 올라 모두를 아우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인정해줄 수 있는 이에게 증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

드라마 <튜터스>의 시즌1 중에서

드라마 <튜터스>의 시즌1은 그가 그렇게 정점까지 올랐지만,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55년밖에 되지 않은 인생을 누구보다 화려하고 극적으로 살아왔지만, 후회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억울함을 토로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위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도 발버둥 치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것이 인정받게 되면 승진을 하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게 되고 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다. 오늘 울지의 인생을 통해, 그의 실패를 통해 당신에게 이야기해주고자 하는 것은 당신이 정작 정점에 올랐을 때 얼마나 당신을 조절하고 그 성공에 취해 방만하지 않는가에 대한 경계를 일러주기 위함이다.

 

이 글을 읽으며, 꿇어박을 만큼이라도 어디 올라가 보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자조적인 말을 내뱉을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준비하지 않고 수양하지 않고서 그 위에 오른 자는 그 밸런스를 어떻게 유지할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것을 주의하고 삼가야하는지에 대해 연습할 시간이 없다. 인생은 연습이 아니다.


특히 권력의 정점에 오를수록 그 자리를 탐내고 호시탐탐 언제고 당신을 끌어내리고 당신을 공격하려는 이들과의 일전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야망과 자신의 능력 사이에서 그리고 설사 실패하여 좌절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조차도 당신의 지나친 욕망과 삐뚤어진 야심이 당신의 이성을 흐리게 하고 앞길을 막아 결국 꼬그라 쳐 박히게 될 위험을 당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만 한다.

아울러, 울지의 인생에서 보았듯이 모든 것이 안되고 포기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최악으로 치달았을 때, 기회는 온다는 점도 기억해주길 바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에 가장 큰 기회는 당신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당신이 가장 꼭대기의 정점에 달했을 때 위기는 함께 도래한다. 그것은 울지의 삶을 통해 당신이 알게 된 자연의 섭리이고 진리이다.

 

올라가려다 쓰러져 지쳤다고 포기하지 말 것이며, 어렵게 올라가 움켜쥔 행운과 기회를 그릇된 욕심과 야망으로 망쳐버리지 마라.


당신의 인생에 있어 이 장면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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