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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4. 2022

글도 잘 못쓰고 평생을 맞춤법 때문에 고생했지만,

전쟁에서 조국을 구하고, 컴퓨터를 고안해낸 천재로 인정받다.

170번째 대가의 이야기


191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원래 공무원이던 그의 아버지가 당시 영국령 식민지 인도에 파견 나가 있었을 때라 인도에서 태어날 뻔했으나 자식만큼은 영국에서 키우겠다는 부모의 의지로 런던에 돌아와 아이만 낳고 다시 돌아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했다. 아버지는 근무를 마치지 못한 탓에 어머니와 함께 다시 인도로 건너갔고, 갓난아기였던 그는 형 존과 함께 퇴역 대령의 집에 맡겨졌다. 그 뒤로 그의 부모는 인도와 영국을 오가는 생활을 지속하다 4년이 지나서야 어머니만 먼저 영국으로 돌아와 아들들을 키우게 된다.


워낙 천재라는 호칭이 고유명사처럼 붙어 다니는 그는 어릴 때부터 탁월한 학습능력과 천재적인 재능으로 눈에 띄었다고 한다. 흔히 천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데, 꾸미지 않는 너저분한 외모에 말을 더듬고 영어와 라틴어를 몹시 싫어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수학에만 관심을 보이는 괴짜였다고 한다. 정작 읽기와 쓰기를 배운 지 3주 만에 마스터할 정도였으면서도 평생을 맞춤법과 글쓰기를 잘하지 못했고, 오른쪽과 왼쪽을 잘 구분하지 못해, 왼손 엄지에다 빨간색 점을 칠해두어 왼쪽을 기억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수학에서만큼은 이미 아주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미적분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상태에서 난해한 미적분 문제를 풀었을 뿐 아니라 난해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단순히 이해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인슈타인의 운동법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14살 때 도싯의 셔본 공립학교에 들어간 그는, 총파업으로 도시의 교통이 마비되었음에도 통학을 포기하지 않고 무려 100km에 달하는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하며 공부하는 근성을 보여준다. 15살 때는 수학적 재능이 빼어난 ‘크리스토퍼 모컴(Christopher Morcom)’이라는 친구와 만나 친해지게 되었는데, 둘은 힘을 합쳐 엄청나게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기로 의기투합한다.


하지만, 2년 뒤인 1930년에 소결핵균으로 모컴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낙담하게 된다. 그래서 슬픔 속에서 친구를 추모하기 위해 그가 생각해낸 것은, 모컴의 뇌에 있던 지능을 기계에 저장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방법을 고안해내는 것이었다. 다소 황당할 수 있었지만, 결국 이 고민은 그의 필생의 과제가 되었고 그 결과로 ‘계산 이론’을 창안하게 된다.

영국의 수학자, 암호학자이자, ‘컴퓨터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현대 컴퓨터과학을 정립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앨런 매시슨 튜링(Alan Mathison Turing)의 이야기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킹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의 교수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부의 요청에 따라 나치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을 맡아 연합군 승리에 기여, 세계대전 기간 단축 및 대략 1400만 명을 구해냈다.


종전 후 군에서 복귀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으나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어 화학적 거세를 당하는 핍박을 당한, 성소수자로서 큰 차별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앨런은 18살에 영국의 명문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36년에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 문제의 응용에 관하여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이란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하며 학계에 주목을 받는다. 이 논문에서는 튜링 머신 이론과 노이만형 컴퓨터에 있어서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튜링 머신은 컴퓨터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명제의 증명 가능성에 대한 연구에서 처음 이용된 개념이다. 튜링은 러셀의 역설이나 불완전성 정리처럼 ‘나는 유한 번의 논리 처리로는 증명 안 됨’이라는 명제를 증명하였는데, 중간에 튜링은 칸이 나눠진 긴 종이 띠와 이 위의 데이터를 읽고 바꿔 쓰는 기계가 읽은 데이터에 대해서 바꿔 쓰는 결과를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이것이 수학적 증명과 인간의 지능과 동일하다는 걸 증명한다.


전후에 튜링은 이 가상으로만 설정했던 만능 기계 실제로 구현하려다가 실패하지만, 결국 그것에서 약간 변형된 형태가 폰 노이만에 의해 구현되면서 지금의 컴퓨터의 원형으로 공개된다.


이 논문이 계기가 되어 튜링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알론조 처치 교수 밑에서 공부했고, 1938년에 기존의 튜링 기계를 보강한 하이퍼계산(Hypercomputuation)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 교수 존 폰 노이만과 친분을 다졌다. 노이만은 튜링의 성적 지향을 알았지만 계속 친구 관계를 유지했으며, 동성애가 범죄로 분류되는 영국으로 귀국하기보다는 미국에 남기를 충고했다. 노이만은 튜링에게 자신의 조교직을 제안하였으나, 애국심에 불타던 젊은 튜링은 조국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조교직을 거절하고 영국으로의 귀국을 선택한다.

프린스턴 대학교 재학 당시

귀국 후 튜링은 1939년 영국의 암호 해독 기관 ‘GC&CS’에 참여해 나치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세션 ‘Hut 8’의 책임직을 맡게 된다. 책임자로 전임하는 동안 튜링 봄브(Turing Bombe)를 개발했고, 당시 아무도 풀 수 없을 거라던 악명 높은 에니그마를 해독해 낸다.


에니그마는 타자기 안에 설치해둔 회전체로 인해 입력한 철자 대신 다른 철자가 타이핑되어 나오는 방식의 암호기였다. 초창기에는 회전체가 3개였지만 나중에는 해독을 못하게 하기 위해 8개까지 불어났다. 이런 다중 회전체 시스템으로 인해 타이핑되어 나오는 경우의 수는 백만 가지가 넘었다. 게다가 매일 회전체 위치도 바뀌었기 때문에 24시간 안에 암호문을 해독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 난공불락의 그야말로 수수께끼였다.(에니그마는 그리스어로 ‘수수께끼’라는 뜻이다.) 었다. 초창기 블레츨리 파크에서는 암호문을 푸는 데 몇 달이 걸렸다.

그런데 침몰한 독일 잠수함에서 암호책이 입수되면서 그것을 토대로 수많은 계산기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들어졌고, 무한한 수학적 상상력과 치밀한 계산,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직관력이 총동원되었다. 튜링은 시끌벅적한 그곳에서 이방인처럼 지냈다. 일에만 파묻힌 채 군대 내 규칙이나 법규는 깡그리 무시했다.


또 자기보다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향한 경멸감과 군대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고, 법적으로 동성애가 금지된 시절이었음에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거침없이 발설했다. 그것이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묘사된 그의 모습이었다.

1940년 튜링이 고안한 봄베(bombe)라는 기계들이 블레츨리 파크에 드디어 설치된다. 봄베 하나는 전기로 연결된 12개의 원통형 연산기로 이루어져 있었고, 24시간 가동되면서 독일 무전들 가운데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철자들을 걸러냈다.


봄베의 수가 15개로 늘어나면서 연산 속도는 획기적으로 빨라졌고, 에니그마가 양산해내는 엄청난 경우의 수도 두 가지 방식으로 압축되었다. 첫째, 에니그마에서 사용되지 않는 세 철자를 배제했다. 즉 원래 허용되지 않은 진짜 철자 하나를 포함해서 오타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좌우 두 철자도 에니그마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독일군의 암호 체계가 매일 바뀌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어저께 알아낸 것은 하루가 지나면 무조건 잊어버렸다. 이로써 가능한 조합의 수는 현저히 감소했다.


그다음 작업으로는 암호에 가장 자주 나오는 철자들을 모아 군대 용어 중에서 가장 자주 쓰는 단어들과 일치시켰다. 이렇게 어느 정도 예상 답안지가 나오면 그것을 독일군에서 내보내는 일기예보와 비교했다. 독일 해군은 아침 여섯 시가 되면 정확하게 그날의 날씨를 일선 부대에 타전했는데, 날씨와 폭풍, 비, 파도 같은 단어들은 유추하기가 쉬웠다. 특히 암호화된 단어와 실제 단어의 철자 수는 늘 똑같았기 때문에 해독 작업은 한결 수월했다.


하루속히 결과를 내놓으라는 영국 정부의 압력은 1943년 3월 1~20일 사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만큼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다에서 독일 잠수함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독일 잠수함들은 이 3주 동안 무려 108척의 선박을 침몰시켰다. 상선을 호송하던 전함도 21척이 파괴되었다. 반면에 적의 잠수함은 단 1척만이 격추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3월 21일부터 전세가 급변하는 반전이 일어난다. 암호해독을 완성한 것이다. 격침된 연합국 선박의 수는 현저히 줄어든 반면 연합국에 의해 침몰되는 독일 잠수함의 수는 크게 늘어났다. 히틀러가 사실상 대서양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다.


튜링은 암호를 해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한 시간으로 단축시켰고, 나중에는 단 몇 분간으로 줄였다. 이로써 영국 함대사령부는 독일 잠수함의 위치와 공격 계획을 모두 미리 읽을 수 있었다. 암호가 모두 해독되었다는 사실을 독일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독일 잠수함들을 너무 빨리 공격하지 않는 데 신경을 써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블레츨리 파크 팀의 이와 같은 활약상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 정부가 이 비밀작전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묻어 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전쟁 후 튜링은 국립물리학연구소에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 팀장으로 일하다가 1948년에 맨체스터 대학의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초기 디지털 컴퓨터인 맨체스터 마크 1의 개발에 참여했고, 영국 최초로 폰 노이만형 컴퓨터인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 구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1950년엔 인공지능에 대한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언급되고 증명되었던 것처럼, 그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란 단어가 생기기도 전에 인공지능을 고안하고, 이의 광범위한 사용을 예측한 것으로 유명하다.


논문 속에서 앨런은 현재 튜링 테스트라 불리는 인공지능 실험을 제안한다. 저명한 철학 학술지 <마인드(Mind)>에 기고된 해당 논문은 튜링 기계 개념과 결합하여 현대 심리철학 가운데 ‘기능주의’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미국 철학자 존 설이 1980년에 제시한 ‘중국어 방(Chinese Room)’ 논증도 유명하다.

앨런은 전산학의 기초가 되는 논문들뿐만 아니라 형태 형성의 화학적인 토대(The Chemical Basis of Morphogenesis)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논문에서 튜링은 생물의 발생에서 새로운 형태가 생겨나는 과정인 ‘형태 형성’을 모의실험하였고, 지금은 당연하지만 당시로서는 입증조차 불가능했던, ‘유전자에서 태아가 발생하는 이론’을 이 시기에 귀납적으로 증명해내기도 했다.


또한 이 논문은 카오스 이론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언급되는 ‘대칭 붕괴’와 ‘분기 붕괴’란 현대적 개념을 미리 파악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튜링은 생물학을 자신의 특기였던 수학과 물리학, 화학을 통해 설명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로부터 비롯된 카오스 이론의 주요 영역을 예측할 정도로 다방면에서 수십 년 후에나 증명된 사실들을 예측하고 증명해낸 천재 학자였다.

그렇게 마흔도 되기 전에 엄청난 업적을 이룬 앨런의 불행은 소리 없이 그를 찾아왔다. 동성애자였던 튜링은 19세의 아널드 머리(Arnold Murray)라는 청년을 우연히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앨런의 집이 도둑이 들었고 아널드가 이 사건에 연루돼 있었단 게 밝혀진다.


상당한 배신감을 느낀 은 경찰에 신고했고, 둘이 무슨 관계냐고 묻는 경찰의 질문에, 동료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성적 지향을 말하고 다녔던 것처럼 아널드와 자신의 관계를 솔직하게 진술했다. 그러나 앨런이 세상을 몰랐다. 그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동성애자였던 앨런은 결국 법을 어긴 중범죄자로 전락하고 만다.


직업상 자신의 성적 지향보다는 능력과 인간성을 중요시하던 동료들로부터 차별 없는 대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것이 앨런에게는 되레 치명적인 비수로 돌아왔던 것이다. 튜링의 업적과 평소 행실과는 상관없이 당시 영국의 동성애 금지법에 의하여 앨런 튜링은 명백히 사회를 교란하는 중범죄자로 낙인이 찍혔고, 대중과 사법부로부터 파렴치한 악인 취급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당시 서방의 자본주의 국가에 만연했던 매카시즘 열풍에 의해 소련 측의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악성 루머까지 얹어지며 슬픈 누명을 쓰게 되었다.

암호를 해독하던 암호학교 건물

앨런은 평소 체스나 보드게임을 매우 즐겼는데, 케임브리지 재학 중 튜링의 게임 파트너에 훗날 KGB의 거물 간첩이 되는 킴 필비를 비롯한 케임브리지 5인조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우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1급 전산학자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영국 정보부의 감시를 받아 일상이 자유롭지 못했는데, 이런 참사까지 겹치게 되며 앨런의 사회적 지위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결국 법원에서 동성애 혐의에 대해 위법 판결이 내려져 수감형 혹은 여성 호르몬 투여에 의한 화학적 거세형 중 하나를 택하도록 요구받는다. 뼛속까지 학자였던 튜링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수감을 거부하고 화학적 거세형을 선택하게 되지만, 그 영향으로 신체의 여성화가 진행되는 형벌 아닌 형벌을 겪게 된다. 영국 정부도 튜링을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직에서 해임했다.


이로써 튜링은 컴퓨터 개발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1년 동안 여성호르몬을 복용하는 동안 그는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고, 그 기간이 끝나자 그의 삶은 반년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중에서

결국 앨런은 1954년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을 택하고 만다.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앨런이 청산가리를 주사로 주입한 사과를 깨물어먹고 사망했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실제 사망 현장에 반쯤 깨문 사과가 있긴 했으나, 사과를 반만 먹는 건 앨런의 평소 습관이었으며 그 사과에 청산가리가 주입되어 있었단 명백한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앨런의 사망이 자살이 아닌 사고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전문가 Jack Copeland의 조사기록에 따르면, 튜링은 사과를 다 먹지 않고 반쯤 남겨둘 때가 많았고, 사망 전 책상에 쪽지를 남기긴 했으나 이는 유서가 아닌 Bank Holiday라는 휴일이 끝난 후 할 일을 적어놓은 메모였다.


심지어 앨런은 사건 발생 4일 전 티 파티를 열었고, 앨런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는 앨런의 친구였던 로빈 갠디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검시관은 ‘제대로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에서의(while the balance of his mind was ddisturbed)자살이라며 급하게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의 죽음을 확인했을 당시, 앨런의 어머니는 그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화학 물질 관련 실험을 진행하던 도중 사고로 사이안화 수소를 흡입해 사망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일 뿐, 앨런의 자세한 사인은 지금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앨런의 부고 소식은 단지 영국의 신문지에 조그마하게 ‘천재 과학자의 비참한 죽음’이라고 기사 하나 난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미국에서 살라는 제안을 거부하고 조국으로 돌아와, 세계대전의 종전을 2년이나 앞당기고,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해내고, 컴퓨터의 개념을 창시한 젊은 천재의 삶은 초라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사망한 이후에도 튜링에 대한 대우는 오랫동안 처참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허무한 죽음과 함께 그의 존재가 서서히 잊히는가 싶었으나, 1974년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해독 작전에 군정보요원으로 동참했던 프레더릭 윌리엄 윈터 보섬이 『울트라의 비밀(The Ultra secret)』이라는 책을 내면서 비로소 대중들은 앨런의 존재와 업적을 알게 됐다. 영국 당국으로부터 애니그마 암호 해독에 관련된 이야기를 책으로 써도 좋다는 허락을 간신히 받아낸 끝에 이뤄진 결실이었다.


2000년대에 성소수자 인권 신장 운동과 함께 튜링에 대한 사죄 청원 운동이 시작됐고 잊혀 가는 앨런에 대한 억울한 과거 영국의 부당 처벌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노동당이 집권했던 2009년에 고든 브라운 총리는 앨런이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정식으로 사죄하였다. 영국 우체국은 2012년 2월에 발행할 우표에 담을 ‘위대한 영국인 10명’ 가운데 앨런 튜링을 포함했다. 성문법상 범죄자였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또 그의 위대한 업적에 좀 더 비중을 두면서 반세기 만에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한편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을 튜링의 해로 만들려는 캠페인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 하원은 이런 움직임에 찬물을 제대로 부어버렸는데, 2월 6일 영국 하원에 상정된 앨런 튜링에 대한 국가적 사죄와 사면 결의안이 부결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보수당을 중심으로 한 데이비드 캐머런 내각 입장에서는 튜링에 대한 사면이 동성애에 대한 용인으로 비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튜링에 대한 사면을 거부하는 게 아니냐라는 입장이 반영된 결과였다.


2013년 12월 23일,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수만 명의 식자층의 튜링 복권 청원이 접수되면서 결국 여왕 특별 사면령으로 튜링이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무려 사후 59년 만에 이루어진 늦어도 너무 늦은 복권이었다.

객관적인 주변 친구들이나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성격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그려졌던 것처럼 괴팍한 자아도취형 히키코모리 성향의 괴짜 천재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굉장히 위트 있고, 재미있고, 심지어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밖에 나와 활동적인 운동을 하길 좋아했고 마라톤에도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천재이니까 성격에 문제가 있었겠지.’ 라던가 ‘동성애자였으니까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겠지.’라는 식으로 그의 삶은 오랜 시간 매도되어왔다. 뛰어난 자신의 능력을 이미 알아본 폰 노이만을 비롯한 미국 대학의 천재들이 그를 잡고 그에게 더 좋은 대우를 제안했지만 그는 조국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자신이 사랑하고 지키고자 했던 조국에서 철저하게 배신당했고 자신의 업적이 덮혀졌으며 그에 응당한 대우를 전혀 받지 못했다. 아인슈타인과 폰 노이만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국적을 바꿔 미국에서 연구활동을 계속했다면 훨씬 더 엄청난 연구 성과를 거둬내고 마흔이 갓 넘어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당시 동성애를 중범죄로 처벌하는 법이 영국에 있었던 것은 그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것에 대해 안일하게 스스로 자백한 꼴이 되는 모습을 만든 것은 세상을 잘 알지 못했던 그의 실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조국인 영국을 구하기 위해 군인의 신분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일을 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전쟁이 끝나고 그가 필요가 없어지자 다시 문제가 되어 결국 화학적 거세를 당했어야 할 그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은 물론이고 학자로서의 자존감도 모두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만약 당신이라면 세상을 바꿀만한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가지고 무엇이든 만들고 한 나라는 물론이고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연구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그런 능력을 갖추고서도 이런 대접을 받고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의 삶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너무도 섬세하고 예민했으며 여린 사람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신념을 결코 꺾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회라는 곳에 속하게 되면 분명히 잘못되었음에도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피해 입는 부정한 사람들이 많으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눈을 감으라고 암묵적 강요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신념에 맞게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심각한 불이익을 받고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경험을 하거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더 입을 다물고 불의에 암묵적 동조를 하게 되고 공범이 된다.


천재가 아니어도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아니어도 그릇된 것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반드시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옳은 소리를 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능력을 갖추고 출세하고 윗자리에 있는 자들일수록 실제로 그런 행동을 실천에 옮기는 이들은 드물다.


당신이 단지 당신의 고집이나 신념이 아닌 정말로 옳은 것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면 그것 때문에 당신이 받은 혹은 받을 불이익을 억울해하지 마라. 대개의 경우 당신의 불이익이나 그들이 당신에게 보낸 린치가 지금은 일상적이고 그들이 대세인 것 같아도 결정적인 순간 하늘은, 당신의 옳은 판단에 대해 보답을 내려준다. 혹, 그렇지 못하고 앨런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 뒤바뀌지는 않는다. 진실은, 옳은 것은 세력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실패의 원인이 그러한 외적인 것이라면 당신이 비겁하게 신념을 꺾어가며 시류에 편승하려는 그 유혹에서 이겨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신이 수긍하지 못하는 성공은 자신이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실패만도 못한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 성공이 아닌 자신에게 당당한, 당신의 자식과 당신을 믿고 기다려준 부모님과 가족에게 당당한 성공이 아니었던가?


지금 힘들고 속상하고 억울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신념이 당신에게는 있다. 그것을 버리고 나면 당신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게 된단 말이다.

잊지 마라.

당신이 당신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에게 당당한 바로 그때라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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