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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5. 2022

회사의 돈을 횡령해가며 사람을 믿고 거지가 되었어도

10년 만에 중국 최고의 부자가 되어 역사에 기록되다.

171번째 대가의 이야기


1823년 안휘성 적계현(績溪縣)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읽고 쓰는 법밖에 배우지 못하였고, 13세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방랑하며 쌀, 화퇴장수의 곁을 따라다니며 일꾼으로 지내다 2년 뒤 항주에 있는 신화전장(新和錢庄)에 견습사환으로 들어가 일하게 된다.


‘전장’이란,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근대적 은행의 전신으로 19세기 말 무렵에는 예금, 대부, 환어음 등을 다루는 거의 은행에 가까운 사설 금융 기관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전장에 들어가 처음 한 일은 돈을 다루는 일은 근처에도 못가보고 청소와 빨래, 밥 짓기 등 허드레 일부터 시작되었다.


3년간의 수습기간 동안 총명함을 증명한 호설암은 이후 전장의 돈을 다루는 사환으로 승격되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호설암은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기에 이른다. 허름한 찻집에서 만난, 기회를 잡지 못해 울분에 찬 유학자 왕유령(王有齡)에게 아무 담보 없이 전장에서 수금한 돈 500냥을 빌려준 것이다.


복주 사람인 왕유령(王有齡)은 ‘절강염운사(저장성의 소금 거래에 부과한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하는 관리)’라는 벼슬을 얻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북경으로 올라가 정식으로 위임 절차를 받아야 하는데 돈이 없어 항주에서 머물러 있던 중이었다. 빚 수금을 하다 손에 넣은 은 500냥어치의 은표(지폐)를 전장에 돌려주지 않고 그에게 넘겨주어 노자로 씀과 동시에 나중에 자기를 도와주는 투자의 의미로 내주는 모험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왕유령은 그에게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작별인사를 한 뒤 북경으로 떠났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미천했던 그의 입장에서는, 왕유령이 겉보기에는 한량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단순한 시정잡배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큰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왕유령에게 넘긴 돈은 엄밀히 말해 남의 빚에서 받아낸 돈이라 원칙대로라면 전장에 돌려줘야만 하는 돈이었으니 명백한 횡령이었다. 그는 서류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게 하려고 일단 왕유령의 명의로 달아둔 500냥어치의 어음을 발행하지만 주인뿐만 아니라 동료 사환들에게도 완전히 찍혀 결국 신화 전장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때 그는 짐꾼 등 허드렛일을 하며 소병(燒餠)으로 배를 채우고 길바닥에서 잠을 자는 부랑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청나라 말기의 사업가로 청나라 말기에 항저우에서 창업하여, 상하이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불과 10년 만에 중국 최대의 거상(巨商)이자 거부(巨富)로 인정받은 상업의 신으로 불렸던 이름은 광용(光墉), 자는 설암(雪巖)라 호설암(胡雪巖; Hú Xuěyán)이라 불린 전설의 이야기이다.


호설암은 살아있을 때 이미 ‘활재신(活財神;살아있는 재물의 신)’이란 말을 들었고 죽고 나서도 상신(商神;상업의 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호설암이 10년 만에 중국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부를 축적하고 심지어는 청나라 정부로부터 상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모자에 붉은 산호를 달 수 있는 관직(관리에게만 허용하던 홍정모와 관복을 상인의 신분으로 극소수의 특례로 부여받은)을 받아 ‘홍정 상인’(紅頂商人)이 된다.

한편, 그의 돈을 가지고 간 왕유령은 북경에서 죽마고우인 호부시랑 하계청(何桂淸)을 만나 그의 추천서와 5000냥의 은표를 받고 절강 순무인 황종한(黃宗漢)에게 보내줄 것을 부탁받고 항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은인인 호설암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심지어 전에 일하던 신화 전장조차 내쫓은 지 오래라 어디 있는지 도저히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항주의 청루(기방)에서 손님을 맞던 점원 호설암과 재회한 것이 1848년의 일이었다.


왕유령은 자신의 은인이 이렇게 거지꼴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슬펐고, 영향력 있는 관리로 돌아온 왕유령을 만난 호설암은 오히려 내가 사람을 잘 봤던 것이라 흡족해했다. 그러고난 뒤, 호설암은 왕유령에게 조언을 하여 아직 주지 않은 5000냥의 은표를 황종한에게 바로 갖다 줄 것을 조언하고서 바로 해운국의 좌판 직을 얻는다. 그 뒤 왕유령은 호설암을 자신을 대리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에 호설암은 해운국의 공금을 종잣돈으로 삼아 쌀 등 물건의 시세를 조사하고 상해에서 물가가 저렴할 때 매점매석을 하는 방식으로 해운국의 빈 관선을 이용해 하역한 후 천진으로 보내어 팔아 막대한 차익을 남기는 방법으로 짧은 시간에 거금을 벌어들이게 된다.


이때부터 호설암은 왕유령과 운명공동체처럼 움직이기로 한다. 그 둘은 수익금을 일단 가지고 있다가 다시 재투자를 하게 되는데, 자신의 꿈이었던 자신만의 전장을 차리기로 하고 이름을 ‘부강(阜康)’이라 지은 뒤 자신을 내쫓은 신화 전장을 인수하기 위해 시도한다. 마침 신화 전장은 그가 관료를 등에 업은 것을 알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빤한 수법에 넘어가지 않고 총 70만 냥의 해운국의 공금을 신화 전장에 예금하도록 주선한 뒤 중개료로 일부 지분을 자신의 몫으로 남겨놓고 기다리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설암이 신화 전장의 잔고가 10만 냥뿐인 것을 알게 되자마자 30만 냥의 은을 급한 일이 있으니 당장 인출하겠다고 통보하는 방식으로 신화 전장을 겁박한다. 결국 신화 전장 측은 울며 겨자 먹기로 호설암에게 신화 전장의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으로 형사처벌을 면하게 해달라고 빌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호설암은 그 종잣돈을 다양한 종류의 상점에 대출하고 꾼 돈을 갚지 못하면 인수해 운영하는 방식으로 자기 소유의 상점과 전장을 늘려가며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다.

호설암은 상인은 이득을 위해서라면 칼날에 묻은 피도 핥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몇 가지 원칙을 정해 물욕으로 사업이 타락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는 법의 범위를 벗어난 검은 돈을 경계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이익을 탈취하지 않으려 했으며, 친구에게 돈을 빌리되 미안한 일을 만들지 않았고, 신의와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돈을 벌려고는 하지 않았다. 거기에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그 이익 뒤에는 반드시 재물을 베풀어 선을 행하고 구두쇠가 되는 것을 늘 염려하였다.


이 즈음 그의 파트너 왕유령 역시 절강 순무로 승진하여 양측에서 두 사람은 급성장을 하게 된다. 왕유령은 오히려 호설암에게 관직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호설암은 오히려 그 제안을 거절하고 상인 분야에서 최고 정점을 이뤄 보이겠다고 결심을 보인다.


1861년, 태평천국군이 항주를 포위하자 2개월 동안 버티다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왕유령은 호설암을 불러 공금 2만 냥의 은표를 주어 구원병과 군량미를 항주로 가져올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호설암이 군량을 가져올 때 항주는 이미 점령당하고 왕유령은 관청이 점령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좌종당(左宗棠)

호설암은 태평천국 군을 피해 조차지였던 상해로 피신해 머물다가 다시 자신의 두 번째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태평천국을 토벌하기 위해 좌종당(左宗棠)이 증국번의 추천으로 절강 순무의 관직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상해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군자금과 군량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좌종당은 호설암을 그저 졸부에 잡상인 정도로 여기고 처음에는 그를 횡령죄로 사형에 처하라고 할 정도로 모질게 대했으나 그가 은표와 군량이 국가의 재산인 점을 들어 모두 돌려주는 모습을 보이자 태도가 누그러지고, 사석에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본 뒤에야 비로소 호설암의 사람됨에 매료되어 그를 매우 신뢰하게 되었다. 처음 인연이 되었던 왕유령이 죽었지만 그 대신에 좌종당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은 호설암의 또 다른 전성기의 서막이었다.


좌종당이 전쟁터를 누비며 태평천국 군과 싸우는 동안 호설암은 그 뒤를 물심양면 지원해 주고 민심 수습과 구휼을 앞장서서 해결해 내면서 둘 간의 신뢰는 점점 두텁게 쌓아가고 있었다. 좌종당이 민절 총독으로 승진하고 난도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해군의 중요성을 깨닫고 프랑스로부터 기술원조를 받아 복주에 중국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복주 선정국(福州船政局)을 설립하였는데, 이에 대한 실질적인 사업은 거의 호설암에게 일임하게 된다.

그 기회를 잡아 호설암은 서양의 상인들과도 관계를 터서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무역에도 관여하기 시작했고 좌종당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서 회풍 은행(匯豊銀行)을 통해 상승군을 창설하고 중국 전체를 아우르는 거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마침내 항주를 되찾고 왕유령의 장례를 치러준 뒤 좌종당의 추천으로 서태후에 의해 정 2품의 벼슬을 받아 홍정 상인이 되었다. 이때 그의 재산은 2천만 냥을 넘는 당대 최고의 거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 태평천국을 진압한 뒤 좌종당이 섬감총독 자리를 받은 뒤 따라가 회족 봉기를 진압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이때 약방을 운영하여 명성을 얻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설기약창(雪記藥廠)’이다.


이 설기약창은 평소에는 군인들에게는 무상으로 약품을 제공하고 사용 후 남은 것들을 모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굴지의 어용 상인에서 본격적으로 자선사업가로 확장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이 설기약창은 나중에 강남 각지에서 약방으로 뻗어나가는데, 이때 상호를 ‘호경여당(胡慶餘堂)’으로 바꾼다.

호경여당(胡慶餘堂)

좌종당이 섬서, 감숙, 영하, 신강의 회족 봉기를 진압하고 나서 호설암의 공로를 조정에 보고하는 동시에 북경에서 서태후를 알현하는데 그녀에 의해 정 1품으로 승진하는 동시에 청나라 최고의 영광을 상징하는 황마괘(黃馬掛)를 하사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양강, 민절 4개 성의 조세 징수 대리권을 호설암이 운영하는 부강 전장에 위임하여 중국 역사상 최고의 상인으로서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의 거침없는 성장도 정점에 이르자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정치가 그러하듯이 좌종당은 점점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양강 총독으로 밀려났고, 그와 동시에 호설암이 지금까지 자신을 도와주는 동시에 중간에서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증국번이 죽으면서 불거지기 시작한 좌종당과 이홍장의 권력 암투는 호설암에게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홍장은 좌종당의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그의 경제적 배경이 되는 호설암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착착 추진하고 있었다.


그즈음 호설암은 국내에서 영국 상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견직물의 원료인 생사(生絲;누에고치)를 무차별적으로 매점매석하게 되는데, 그 정도를 지나치며 양강 일대에서 생사(生絲)의 물량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로 인해 영국 상인들은 중국에서 생사를 단 한 톨도 살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과욕은 그의 그간 키웠던 방식의 양날의 검이 되어 발목을 잡게 된다. 영국 상인들이 생사(生絲)를 중국이 아닌 누에고치가 한창 풍작이었던 이탈리아에서 조달하면서 국내의 수요를 충족하는 바람에 호설암이 생사를 매점매석했던 배팅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나름 보험이라 생각했던 프랑스 상인단조차 때마침 일어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중국의 국경분쟁으로 인해, 1883년 10월 프랑스 군함이 상해 항구에서 무력시위를 한바탕 벌이며 청나라 측에서 프랑스와의 무역을 전면 중단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도 저도 하지 못해 그가 비싸게 매점매석했던 생사(生絲)를 팔 판로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생사(生絲)는 현물이었지만 보존이 어려웠던 제품이라 점점 썩기 시작하면서 호설암은 눈물을 머금고 생사를 투매하기로 결정한다. 이로서 매점매석은 결국 자신에게 비수로 돌아왔지만 그저 경제적인 손해를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때를 같이 하여 이홍장의 사주를 받은 성선회는 이전에 호설암의 제안으로 생사를 사 모았던 상인들을 부추겨 생사 매집을 거부하게끔 만들었다.

이홍장

생사 값은 폭락했고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전장에 예금된 돈까지 모두 모아 생사를 사들였던 호설암은 궁지에 몰렸다. 이즈음 역시 성선회의 지휘로 부강 전장에 맡기던 청나라 정부 자금이 고의로 지연되면서 호설암은 돌발적인 자금 부족에 빠졌다. 이것이 신용 문제로 발전하고 각 성의 설치된 부강 전장의 지점은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것은 호설암이 운영하는 부강 전장의 예금과 어음 등 대출금에 커다란 충격으로 돌아오면서 결국 대대적인 연쇄 도산으로 이어져 결국 항주의 본점이 먼저 부도가 났고 곧이어 북경, 진강, 복주, 무창 등의 20여 개의 지점도 연쇄부도라는 된서리를 맞게 된다. 이윽고 12월 5일 부강 전장은 최종적으로 부도처리, 사실상 상장폐지 처분을 받는다.

호설암의 고택

재앙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1884년 9월 좌종당도 병사하고 2개월 후인 11월, 서태후는 성지를 내려 호설암을 국가경제를 파탄 내었다는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 처분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나 그는 재산을 정리해 하인과 첩들에게 나누어 주어 내보낸 뒤 재산이 없는 상태에서 80을 넘긴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향년 64세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고 나서야 성지를 받은 항주 지부와 전당, 인화현의 지현 두 사람이 함께 그의 저택에 도착해 재산을 정리하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중국의 문호 루쉰은 호설암이란 인물을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표현했다.

“호설암이야 말로 봉건사회의 마지막 위대한 상인이다.”


호설암은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가진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꾼이었다. 하지만 그냥 장사꾼은 중국 역사상 발에 채일 정도로 넘쳐났지만 중국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장사꾼으로 인정하는 사업가는 그 한 명이다.


그에게는 다른 장사꾼과는 다른 돈을 버는 데 있어 원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전부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상술과 상도를 넘나들며 사업을 확장해간 사업가였다. 그는 비록 관과의 결탁이기는 했으나 왕유령, 좌종당 등의 탁월한 인물에게 투자할 수 있는 배짱을 가졌으며 그들과의 관계를 끝까지 이어가는 신의도 보여주었다.


시대적 한계와 그 시대적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 관상 상인이 되기는 했으나 정말 부패한 관료들과의 관계는 스스로 멀리했으며, 제대로 된 인물을 골라 그의 경제적 배경이 되려고 했던 것이 그의 승부수였다. 그는 신용을 중시했는데 호경 여당의 경영에 있어서도 약은 사람의 목숨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절대로 이익을 위한 거짓된 판단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약국에 ‘계기(戒欺; 거짓을 경계한다)’라는 현판을 걸고 신의를 지켜나갔다.


홍정 상인이 된 후에도 자신의 권력으로 다른 이들을 짓누르고 그것을 이용하여 부를 더 늘리기보다는 직접 관복을 입고 붉은 산호 모자를 쓴 채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으로 정성과 신의를 다했다. 그는 약재의 조제 과정을 직접 감독하여 한결같이 좋은 품질을 유지하였다. 그 결과 호경 여당은 사람에게 많은 신뢰를 얻어 호설암 파산 이후에도 살아남아 호설암이 일으킨 사업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호설암은 현재 경영학의 개념 중에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까지 선구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는 상해에서 발행되던 《신보(申報)》를 이용해 대대적인 광고를 했으며, 처음으로 약을 배달해서 판매하기도 했다. 또한 점포의 간판은 상인의 얼굴이라 하며 늘 깨끗하게 유지하게 했고 고객을 위해 상점을 아름답고 쾌적하게 꾸몄다.


그는 민족 자본가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나갔지만 외국의 상인들과 척을 지지는 않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보이며 중국의 경제규모가 커지는 데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생의 마지막에는 비록 유럽의 상인들과 맞서며 안 좋은 결말을 맞기도 했지만 사업을 하는 내내 유럽 상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국제 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기도 하였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호설암은 자신의 부를 적극적으로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노력했던 상인이었다. 이는 그때까지 보였던 일반적인 상인들의 가치관과는 상당히 다른, 진보적인 발상이고 실천이었다.


당시에는 자신을 위한 재산을 모으는 것이 상인으로서의 기본개념이었을 뿐, 그것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없는 이들을 위해 돕는다는 기부나 사회환원의 개념이라는 것 자체가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호설암은 중국 각지에서 수해나 가뭄이 일어나면 의복, 쌀,·금전 등의 구호물자를 아낌없이 보냈으며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이를 반드시 돕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기에 그를 가까이서 본 좌종당은 호설암을 ‘상인 중에서 특이한 존재이며 의협심이 있다’고 평가했다.


사업을 함에 있어서는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더 큰 것을 바라보고자 하였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성실과 배움, 인맥관리를 중시했던 것이 그를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기업가로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현대 중국의 기업인들도 그를 벤치마킹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알리바바의 창업주인 마윈이 그의 광팬을 자처하는 기업가이다.

호설암의 삶을 다룬 드라마

당신이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돈을 벌어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출세를 하든 사업을 넓히든 아니면 물건을 팔든 하게 될 것이다. 모든 세상사는 인간관계이다. 만약 당신이라면 호설암처럼 회사의 돈을 횡령하고 그것으로 자신이 걸인의 신분으로 내팽개쳐질 위험을 감수하면서 돌아올지도 모를 왕유령(王有齡)을 도와줄 생각을 했겠는가? 실제로 도와주더라도 신의를 가지고 그 은혜를 갚겠다고 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고대 앞의 영철버거 사장이 없는 돈에 조금이라도 장학금으로 지급하겠다고 하자 고대 법대 출신의 지방 개천 용들이 그 돈을 알차게 받아갔다. 그런데 정작 영철버거가 파산의 위기에 몰라고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다고 하자, TV 방송에서 그렇게 학교 다닐 때 어렵다며 장학금을 받아 용돈으로 썼던 이들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장학금을 받은 이들 중에서 고대 법대 출신 중에서 검사가 된 이들에게 피디가 연락을 취했다. 가게 사정이 이러한데 지금이라도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들은 바쁘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도움을 갚지 않은 것도 인간이 아니지만 은혜를 입고서도 원수처럼 갚는 짐승 같은 것들이 발에 차이는 세상이다. 아쉽게도 그것은 더 배운 자들일수록 심하다.


호설암은 자신의 안목을 믿었고, 연락이 없는 왕유령(王有齡)을 원망하지 않고 길거리로 쫓겨나 다시 점원생활로 연명하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다. 나중에 아주 우연히 자신이 점원으로 일하던 가게로 찾아온 왕유령(王有齡)을 만나 재회했을 때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감사했다. 그것이 그의 운명에서 한 번이었다면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이 돕고자 했던 왕유령(王有齡)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더 큰 운명인 좌종당(左宗棠)을 만났을 때도 그는 왕유령과 신의로 인연을 맺었을 때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훨씬 더 발전된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물론 그가 매점매석 행위를 통해 재부를 이루었다는 점이나, 전형적인 관료와의 결탁을 통해 정치적인 배경을 활용했다는 점은 비난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운명도 그 장점이 단점이 되어 그를 실패하고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유령으로 인해 도박이 아닌 사람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안목을 믿고 밀어붙인 점이나 그렇게 사그라들 수 있었던 운명을 같은 마음가짐으로 더 밀어붙여 새로운 더 큰 운명이 되어준 좌종당과 인연을 맺었던 것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사람에 대한 투자가 돈보다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실천했는지를 보여준다.


만약 그가 그저 관료들과의 이합집산을 해대던 장사꾼이었다면 그때마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이와 인연을 맺는 방식을 취하지, 처음부터 관료도 아니었던 왕유령과 인연을 맺거나 정치적으로 핀치에 몰렸던 좌종당을 끝까지 지지하고 지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한번 인연이 된 친우(親友)를 버리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당신이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될 것이고 사람 때문에 배신을 당하고 힘겨워질 수도 있다. 무조건 사람을 모두 믿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그 사람을 믿고 함께 갈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도 결국 당신의 안목이고 그것은 도박이 아닌 당신의 공부와 수양 단계에 따라 판단력의 정확도를 높이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확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람은 키우는 것이지 키워진 완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최선을 다해 그만한 그릇이 되어 있어야만 상대가 당신에게 그만한 신뢰를 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간보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해서는 안될 일이기도 하다.


당신이 신뢰를 사람됨을 그 정성을 있는 그대로 쏟아부어 키워나간 신뢰관계는 신의라는 이름으로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지 원래부터 마음속에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상대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신의 마음에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누구나 이익을 앞에 두고 더 나은 상대를 만났을 때 갈아타고 싶다는 본능에 흔들린다. 하지만, 그렇게 이리저리 이익만을 위해 옮겨 다니는 날파리가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는 것은 이제 글을 읽기 시작한 초등학생도 본능적으로 아는 일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 호설암이 당신에게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어야만 실패를 실패로 끝내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조언한 것을 전해주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안일하게 지내는 사람에게는 크고 높은 뜻이 생길 수 없다. 큰 뜻을 가지고 큰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부단한 연마와 수련이 선행되어야 한다. 눈은 먼 곳에 두되 가까이에 있는 인연에 충실하다 보면 장차 드넓은 천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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