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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8. 2022

매일 불안에 떨고 숨죽여 제대로 말소리도 못 냈지만,

전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일기 문학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남기다.

172번째 대가의 이야기.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 오토 프랑크(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Edith Frank)의 두 딸 중 차녀로 태어났다. 에디트 프랑크는 개혁파 유대교(진보성향의 유대교) 신자여서 개혁파 유대교 신자로 자랐다.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에 대한 독일의 박해가 심해지자 1933년 가족 전체가 당시 중립국에 해당하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4살 이후 네덜란드에서 쭉 자랐다.


하지만, 이후 나치 독일이 유럽 전체로 동맹국이나 점령국을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중립국인 네덜란드까지 마수를 뻗치게 되고 그녀의 가족 전체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망명조차 갈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 되자,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를 피해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서 또 다른 유대인 가족이던 판 단(이후 정확한 이름은 ‘판 펠스’ 임이 밝혀진다) 가족, 그리고 유대인 치과의사 알베르트 뒤셀과 함께 숨어 지내는 생활을 하게 된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 소녀로 나치스가 유대인을 박해하자 나치스를 피해 2년 동안 숨어 지내면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기를 남기고 결국 발각되어 수용소로 끌려가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우리에게는 『안네의 일기』를 작가로 유명한 본명, 안네리엘 마리에 프랑크(Annelies Marie Frank)의 이야기이다.


안네 프랑크의 사망 후 『안네의 일기』 는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버지가 발견하여, 1947년 네덜란드어(語)로 출판된 이후 각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은 연 방문객의 수가 50만 명을 넘는 관광명소가 되었고, 『안네의 일기』 를 각국어로 번역한 48권의 책과 가족 및 수용소 사진 등이 진열되어 있다.


사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안네 프랑크가 자신의 일기장에 쓴 작품 중에는 나중에 출판된 동화 『아기곰 브라리』라는 작품이 있다. 아직 세상을 다 알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어린 소녀가 자신만의 세계를 어린아이의 언어로 풀어놓은 동화로 발랄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감수성을 맛볼 수 있다. 한국에만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을 뿐, 세계적으로는 동화의 고전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안네의 일기』 는 안네가 13살이 되던 날, 생일 선물로 일기장을 받은 1942년 6월부터 가족과 함께 살던 은신처가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수용소로 전원 압송된 1944년 8월까지 약 2년 2개월 동안 쓰인 일기이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박물관에 일기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일기는 안네가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던 시기에 쓰였지만, 독일에서 태어나고 어렸을 때부터 처음 배운 모국어가 독일어였기 때문에, 일기의 대부분은 독일어로 작성되어 있다. 다만 안네 본인은 4살이 이후 살았던 네덜란드의 언어에 능통하였고, 독일을 떠난 이후에는 자신을 네덜란드인으로 규정하며 독일에 대한 반감과 네덜란드에 대한 호감을 일기에도 남긴 바 있다.

일기 원본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 중 일부는 안네가 일기를 은신처에 있을 때부터 쓴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은신처로 들어간 시기는, 생일 선물로 이 일기장을 받고 나서 2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그러니 선물로 일기장을 받자마자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니 은신처로 들어가기 두 달 전부터의 기록인 셈이다.


안네는 책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특히 14살 때 『그리스 로마 신화』 와 『두 도시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수학 과목은 유급을 겨우 면하는 정도였지만, 언어 점수는 늘 만점인 천상 문학소녀였다. 본인이 쓴 글을 반 전체 앞에서 발표하는 기회가 많은 정도였는데, 일기나 동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필력과 문체가 유려한 이유도 엄청난 다독 덕분이었다고 평론가들은 분석하였다.

안네가 사춘기 소녀였고 독서나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우리에게 일기로 워낙 유명해서 그저 소심하고 책만 읽고 글을 쓰는 전형적인 내성적인 성향을 보이는 문학소녀일 것 같은 이미지는 『안네의 일기』를 제대로 읽지 않은 이들의 선입견일 뿐이다. 그녀는 은신처에 가기 전 학교에 다닐 때는 수학 빼고는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고 소위 활발하고 쾌활하기 그지없는 말괄량이 여자아이에 가까운 성향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네를 좋아하는 남학생들도 많아서 안네 본인은 그런 남자애들을 ‘추종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지칭하고 있다. 정말 키 크고 잘생기고 수줍은 남자아이와 가까워질 때도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적당히 잘 지낼 남자를 구분해서 사귀는 똑 부러지는 면이 있어서 '남자 친구 여러 명 두는 게 뭐 어떻죠?'라며 열린 연애관을 가지고 있어 엄마와 늘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그녀가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때에 은신처에서 사춘기 시절을 보내면서 자신의 상황과 성장을 겪는 고뇌를 겪으면서 성장한다.

안네의 가족 사진

은신처로 사용하던 회사에서 8명의 유대인들이 그곳에 숨어 있는 걸 모르는 직원들도 있었고, 손님들도 자주 오는 곳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가 들릴까 봐 제대로 대화를 나누거나 일상생활을 하는 것조차 어려웠으며, 공간도 좁아서 여러 명이 방을 같이 사용해야만 했다.


은신처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물품은 늘 부족하여 작은 속옷을 억지로 입어야 하거나, 개인 물건을 소유하는 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았으며, 청결을 유지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워졌다. 생필품이 다 떨어지게 되면 안네의 아버지가 깊은 밤중에 몰래 은밀하게 밖에 나가서 암시장에서 비밀리에 구매해 오는 것이 전부였다.

은신처 비밀 입구

사실 어른들도 견디기 어려운 답답하고 힘겨운 환경이었으므로, 숨어 지내기 전까지 주변 생활수준으로 보건대 해외로 휴가를 다녀올 정도로 유복했던 가정에서 자란 안네에게는 특히나 힘들고 낯설고 견디기 어려운 생활이었을 것임을 충분히 추정해할 수 있다. 안네는 은신처의 상당히 열악한 환경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도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의 처지와 비교하면 천국 같은 곳이라며 견뎌내는 성숙한 모습도 보여준다.


속이 깊고 생각이 조숙한 데다 일기의 후반엔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면서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며, 여자에게 성적인 감정을 느꼈던 일화 등 자신의 성 지향성이나 다양한 피임 방법 등 여성의 본질적이면서도 생활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어른들은 애들한테서 성에 관한 얘기를 쉬쉬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끼리 올바르지 않은 정보만 갖게 된다.


아들뿐만 아니라 딸에게도 성교육을 해야 한다.’라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상당한 설득력을 갖춘 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였는지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는 딸의 일기를 출판할 때 성에 대한 얘기 등 대체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일부는 쏙 빼놓아 후에 비판받았다.(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한국어로 번역된 것들 중에서도 청소년용이라는 이름으로 적당한 편집이 된 버전과 비교적 최근에 무삭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작품이 있는데 읽어본 이들도 그렇지만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후자를 읽어보라고 권하는 바이다.)

언니와 함께

사춘기의 여자아이들이 대개 그렇기는 하지만 사이가 가장 안 좋았았던 건 어머니 에디트였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일기장에 자신의 불만을 적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안네의 기록에 의하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할 수 없다.’라고 적어 아버지보다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이 적지 않았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갇혀 지내는 동안 어머니 에디트는 큰딸 마르고가 잘못한 일들까지 동생 안네를 혼내곤 했기 때문에, 안네의 입장에서는 어머니에 대해 가족으로써의 정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불만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물론 사춘기 소녀의 일방적인 생각이었기에 더욱 반목이 심해져서 그런 표현들이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머니 에디트의 보수적인 성격이 진보적인 사춘기 딸 안네와 충돌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여느 가정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반목과 갈등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중평이다.


부모님과 다른 어른들이 명랑하고 수다스러운 안네보다 얌전하고 공부를 잘했던 언니 마르고를 더 착하고 예쁜 아이라며 칭찬했던 것이 안네의 사춘기 반항심리를 더욱 자극해서 비뚤고 날 선 반응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안네의 묘사에 의하면, 언니 마르고가 잘못하면 주의를 주는 것에 그치는 반면, 안네가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온 가족이 나서서 자신을 혼냈었다고 느꼈다는 점등이 바로 그런 사실을 대변한다.

안네가 지내던 다락방

이러한 어머니 에디트의 방식 때문에 나온 『안네의 일기』 중 등장하는 저 유명한 문구, ‘나는 친구 같은 엄마는 필요 없고, 엄마 같은 엄마가 필요하다.’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에게도 실망하고, 어머니에 대해 극렬한 증오심을 가진 것에 대해 스스로도 조금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감정적으로 훨씬 더 성숙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기를 읽어보면 안네의 성격은 크게 1942년 말과 1943년, 1944년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큰 변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1942년 말 은신처로 옮기기 전에는 굉장히 활발하고 항상 행복하지만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는 사색하는 사춘기 소녀의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1942년 말 은신처로 옮기게 되면서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절망과 희망 사이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다가, 1943년 말기에 접어들면서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1944년에는 본인의 1942년 전쟁 이전 모습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성장한 면모와 여성의 삶, 왜 전쟁이 일어나는지, 사람들 모두가 친하게 지낼 수 없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는 굉장히 사고의 깊이나 폭이 이전에 비해 깊고 넓어진 양상을 보여준다.


그녀는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역사 분야를 너무 좋아한다고 일기에 여러 번 쓰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푹 빠져 뮤즈 9명의 이름을 외우고, 헤라클레스 이전 애인 이름들도 줄줄이 읊었다. 유럽 왕실의 계보도를 신문이나 책에서 발견하는 즉시 종이에 적어두고 외웠다는 언급도 나온다.


1944년 7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안네는 드디어 은신처를 떠나 자유를 만끽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깊은 어둠을 지나 드디어 새벽을 맞이하게 된다는 기대와 희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놀드 판덴베르그’라는 네덜란드 출신의 같은 유대인의 밀고로 1944년 8월 4일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의해 그들이 지내던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안네가 그렇게 소망하고 꿈꾸던 희망과 자유의 그날은 결국 오지 않았고 졸지에 어둠과 죽음의 벼랑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녀의 가족이 숨어살던 창고 건물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사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육군 장교로 군 복무를 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안네의 은신처를 급습한 나치의 비밀경찰 카를 실베르바우어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서는 머뭇거렸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조국을 위해 전쟁을 치른 장교마저도 수용소로 보내야 하는 현실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훗날 이 비밀경찰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딸 안네를 비롯한 자기 가족이 은신처에서 지낸 2년은 행복했다는 말도 했다. 내가 믿으려 하지 않자 그는 은신처로 온 뒤 안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표시를 새겨 넣은 문설주를 가리켰다.”


안네와 그 가족들이 살았던 곳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은신처였지만, 같이 숨어산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수용소보다는 훨씬 나은 자유 속에서 행복을 찾았고, 전쟁이 어서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1944년 9월 6일 안네는 은신처의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의 작은 마을 아우슈비츠에 끌려간다. 하지만, 당시 안네와 함께 있었던 수용소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절대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소녀의 몸이었던 안네는 중노동을 견뎌내기 몹시 힘들었지만 다행히 아우슈비츠의 의사들 중 한 명이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친구였기 때문에 언니와 함께 진료를 받고 노동도 오후에는 면제되는 등 아우슈비츠에서도 비교적 혹독한 생활에 시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판 펠스 씨가 제일 먼저 가스실에서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판 단 부인과 언니 마르고, 안네 셋이 수용소에서 제일 건강한 여성 3명으로 뽑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새로 옮긴 수용소의 상황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이미 뼛속까지 쇠약해져 있던 모친 에디트는 언니 마르고를 어떻게 하려던 경비병에게 대들던 사건으로 찍혔다가 혼자서 수용소에 남게 되자 정신 착란을 일으키다 숨졌고, 언니 마르고도 베르겐-벨젠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장티푸스를 앓다가 침대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언니 마르고의 사망을 숨기려고 했지만 결국 그 사실을 알게 된 안네 또한 부모님도 분명 이미 다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절망에 빠졌다가 1945년 2월 말 혹은 3월 초에 장티푸스로 결국 사망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겨우 15살이었다.

그녀의 묘지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이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해방시키고 피수감자들을 전원 구출하게 된다. 그러나 해방 당시 피수감자들의 상황이 어찌나 심각했는지, 휴 글린 준장의 지도 아래 영국군이 이들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음에도 약 60,000여 명의 생존자들 중에서 정확히 13,994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해방 이후 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결국엔 숨지고 말았다고 한다.


만약 안네가 수용소에서 최대 두 달만 더 버텼다면 높은 확률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독자들과 수많은 역사의 증인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안네와 마르고를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학대하고 죽음으로 내몬 요제프 크라머 수용소장, 프리츠 클라인 수용소 담당의 등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주요 관리 인원들은 영국군에게 전원 체포됐으며, 이들 중 많은 수가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대에서 죽음을 맞았다.


『안네의 일기』는 프랑크 가족의 친구이자 은신처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왔던 네덜란드 여성 미프 히스(Miep Gies)가 보관하고 있다가, 은신처 유대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네덜란드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전해주면서 1947년에 책으로 출간하게 된다. 안네는 일기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고 쓴 내용이 나오는데, 그녀의 표현대로 안네는 비록 수용소에서 15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지만, 그녀의 일기는 전 세계에서 스테디셀러가 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까지 오르게 되며 영원히 그녀의 이름을 전 세계인이 기억하게 하였다.

가족 모두가 지냈던 다락방 거실

한 때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안네의 실제 얼굴이 촬영된 영상이 있었는데, 1941년 7월 22일 네덜란드에서 촬영된 이 영상은, 12살의 안네가 발코니로 얼굴을 내밀고 당일 결혼식을 치른 신랑 신부를 바라보는 모습이 단 몇 초간 실제로 등장한다.


2022년 1월 18일, 안네 프랑크의 가족과 다른 가족들이 함께 은신해 있다는 장소를 밀고했다고 추정되는 용의자의 신원을 공개하였다. 그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인 아놀드 판덴베르그(Arnold van den Bergh)로,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나치 정책을 시행하는 걸 돕던 기구인 암스테르담 유대인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조직이 1943년에 해산되고 대원들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게 되자 수용소에 가지 않고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쓸모 있는 정보를 나치에게 제공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안네의 은신처를 알렸다고 한다. 정작 그는 1950년에 이미 사망한 지 한참 지난 후였다.


사건 관련 전직 수사관의 파일에서 판 덴 베르그가 배신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익명의 메모 사본도 발견됐는데, 이 메모의 수신인은 안네의 부친 오토 프랑크였다. 오토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건데, 왜 진실을 밝히지 않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용의자일 뿐 확실히 밀고자인지는 수사나 명백한 증거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공개한 네덜란드 출판사가 결국 사과했다.

출판사에 따르면, 조사팀은 아놀드 판 덴 베르그가 밀고자였을 가능성을 적어도 85% 수준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며, 자신들의 연구가 종전 연구들이 채우지 못한 틈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를 너무 섣불리 단정 지어 공개했다는 사과 아닌 사과인 것이었다.


안네의 꿈은 글을 쓰는 작가 혹은 저널리스트였다. 안네의 일기에 보면,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다. 난 죽어서도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라고 적은 문구가 나온다. 『안네의 일기』를 널리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프 히스의 회고에 따르면 안네가 글을 쓰는 모습을 우연히 미프가 보게 되었는데, 안네가 당황하며 글을 감추자 안네의 어머니 에디트는 미프에게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라고 하며 딸의 재주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도 안네의 글재주는 매우 뛰어났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네의 일기는 단순히 전쟁 상황에서 어린 청소년이 쓴 일기를 넘어서는 가치를 가졌다. 유대인 박해나 전쟁, 은신처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과 두려움, 그 안에서도 느낄 수 있는 작은 즐거움들을 사실 그대로 자세하게 묘사했으며, 안네 자신의 생각이나 성장과정 같은 풍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또래의 교육 수준을 감안했을 때 너무 문장 수준이 높아서 일기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었으나, 원본에 대한 전문가들의 필체 감정으로 안네 본인의 필체가 맞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결과는 오히려 대성할 수 있는 문학가로서의 자질을 갖춘 한 소녀가 전쟁의 희생자로 너무도 허망하게 나치의 인종 학살로 안타깝게 희생되었다는 사실로 부각되며 많은 세계인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했던바와 같이 그녀는 동화를 비롯해서 단편소설과 다양한 문학적 글쓰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일기를 그렇게 열심히 기록하고 썼던 이유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일기에 쓰고 있다.


“드디어 문제의 핵심, 내가 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 말할 차례인데, 그건 한마디로 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참다운 친구가 나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겠어요. 열세 살 먹은 여자 아이가 스스로 이 세상에서 외톨이라고 느끼고 있다. 아니 실제로 외톨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실제로 안네는 자신의 일기장을 자신의 친구처럼 여겨 ‘키티’라는 이름까지 부르며 인격화하고 있다. 그렇게 마치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 자신의 모든 속내를 털어놓는 글쓰기를 한 셈이다. 여느 소녀처럼 예쁘고, 개성이 강하고 발랄한 유대인 소녀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성실하게 일기를 적음으로써 점점 성숙해진다. 그녀는 이 일기를 통해 나치 치하를 살아냈던 유대인들의 자서전을 남긴 셈이다.

실제 그녀의 일기장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을 두고 말이 많은 요즘이다.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원치 않은 사람들에게 너무도 커다란 피해와 그들의 운명을 소용돌이 속에 넣어 모든 일상을 빼앗아버리고 그들의 생명마저도 앗아가 버린다. 지구의 다른 반대쪽에서는 말도 안 되는 강대국 간의 알력으로 인해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기 위해 그녀의 삶을 가지고 왔다.


어쩌면 그저 유복한 가정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문학가로서 혹은 저널리스트로서 상당히 대성할 수 있었을 소녀는 15년밖에 안 되는 삶을 끝으로 수용소에서 어이없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운명을 당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소녀의 꽃 같은 청춘이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최소한 그녀보다는 훨씬 더 오래 산 사람이고, 전쟁의 포화라던가 두려움에 숨어 지내며 숨을 죽이고 제대로 말소리조차 내지 못한 경험은 해보지도 못한 사람일 것이다. 안네 역시 자신이 자유를 빼앗기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 그나마 손바닥만 한 자유를 수용소에 끌려간 것보다 낫다고 자위하며 지내는 삶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동상과 박물관으로 공개된 은신처의 현재 모습

그러나 인생은 자신이 생각해보지도 못한 처참한 상황에 언제도 몰려버릴 때가 있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도 아닌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그런 상황에 처해버릴 때가 있다. 하지만 안네는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던 그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여의도 언니가 먼저 죽는 것을 보면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힘겨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사람 죽고 사는 일도 있는데, 죽고 사는 문제만 아니면, 살아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결코 좌절하지 말라.”


당신이 겪고 있는 실패와 좌절이 죽고 싶을 만큼 힘겹다는 것을 엄살이라고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찌 되었든 지금 당신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고통이고 힘겨운 것도 사실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힘겨움을 극복하고 넘기고 나면, 한참 뒤에 오늘을 기억하면 정말 아무런 것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어른들의 말씀처럼 사람이 살고 죽는 일도 있는데 정말 내가 아프지 않고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언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 나이에 뭘 다시 할 수 있단 말인가? 라며 스스로의 한계를 긋지 마라. 절벽에 몰려 죽음에 몰릴지라도 죽기 직전까지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안네가 당신에게 외친다. 그녀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내일을, 결국 바라보지 못한 그 내일을 당신은 오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당신이 숨 쉬는 동안, 당신은 그 이전의 모든 것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당신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떨구고 포기하는 순간이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게임 오버’라며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당신이 끝이라고 여기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만회하겠다고 버티고 있는데 감히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단 말이다.

아직 한참 남은 당신의 인생을 당신이 종 치는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15살의 어린 나이에 채 자신의 삶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끝내야만 했던 소녀도 결코 끝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남아 있는 자로서 먼저 간 소녀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마라. 당신이 어떤 상황이든 몇 살을 먹은 사람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다시 일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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