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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1. 2022

투옥되어도 감옥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죽었지만,

독립운동 투사의 아이콘으로 민족혼을 일깨운 존재로 기억되다.

 173번째 대가의 이야기.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유중권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작은할아버지 유빈기(柳斌基)가 가장 먼저 개신교에 입문하고 한글 성경을 파는 매서인이 되어 선교사를 이끌고 귀향하면서 집안 전체가 개신교에 눈을 뜨게 되는데, 이후 숙부 유중무가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일가친척들도 개신교인이 되었다.


다만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은 일가친척이 모두 개신교로 개종하는 상황에서도 조상에 대한 의무 때문에 혼자서 제사 지내며 전통의 풍습을 지키는 것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나 장남 유우석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고, 자신의 자녀들을 신식학교에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즉, 여성이던 그녀가 당시까지 남아 있던 유교 문화의 잔재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집안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숙부가 지령리 교회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그녀 역시 5세를 전후해 개신교를 접하였고, 이후 교회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교회에서 노는 것이 익숙했다.

오빠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그녀는 지기 싫어하고 고집스러우며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다. 특히 어린 시절 그녀가 좋아하고 잘 불렀던 노래는 당시 마을 청년들이 부르던 우국 창가로 “무쇠 골격 돌주먹 청년 남아야…”라는 기세가 넘치는 가사가 인상적인 노래로 여자아이가 부르기에 다소 과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여느 소녀들과 남다른 면모를 보였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07년 4월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가자 1907년 8월 유중권, 유중무 등이 중심이 되어 목천 이동면 교인 82명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집안과 향리의 애국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그녀의 의식 속에는 민족, 국가, 헌신 등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배어들게 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3.1 운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기억되어 언급되는 17살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한 대가로 감옥에서 숨져야만 했던 열사 유관순(柳寬順)의 이야기이다.


이름만 알고 있을 뿐, 그녀가 했던 독립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 많다. 실제로 3.1 운동이라는 것은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운동이고, 유관순이 벌였던 만세운동은 4월 1일(음력 3월 1일)에 아우내에서 벌인 3·1 만세운동을 의미한다.

충청남도 공주 영명 학당에서 수학하다 1915년 미국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S. Alise H. Sharp; 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그녀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재학 중에는 교내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며 하란사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용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 가던 시기에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의 좋은 기회를 맞았던 시기였다.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초 이 같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독일 ·​ 오스트리아 등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되고, 연합국 측의 일원으로 승전국인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전되고, 다음 해 1월부터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립운동가들 입장에서는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의 계획은 이 기회에 한국 민족이 대동 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기대감 속에서 그들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게 된다. 중국 상해에서 신한 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 유학생 학우회를 중심으로 국내외 동포들이 혼연일체가 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한국 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따라서 3․1 운동의 초기 단계는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경술국치 이래 민족운동을 모색해 왔던 천도교 측은 손병희(孫秉熙) ·​ 권동진(權東鎭) ·​ 오세창(吳世昌) ·​ 최린(崔麟) 등이 수차 회합하여 논의한 결과, 1919년 1월 중순 대중화 · ​일원화 ·​ 비 폭력화 등 3대 원칙을 수립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기독교 측에서도 1919년 1월 말 2월 초순경 상해 신한 청년당의 선우혁(鮮于爀)이 국내로 들어와 이승훈(李昇薰) ·​ 양전백(梁甸伯) 등 옛 신민회(新民會) 동지들을 만나 국제정세를 전하고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이로써 평양과 정주, 선천 일원의 교회와 기독교 계통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학생들 또한 1919년 1월 하순 보성전문의 강기덕(康基德) ·​ 연희전문의 김원벽(金元璧) ·​ 경성의전의 한위건(韓偉健)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 계획은 2월 초순 천도교 측의 요구에 의해 이승훈이 상경하여 연합 전선 형성 문제에서 약간의 난관은 있었으나, 2월 24일 민족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두 종교계는 교단과 종파의 이질성을 초월하여 연합 전선을 형성할 것에 동의하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도 수립하였다.


이때 거사일, 독립선언서 및 각종 문서의 기초와 인쇄의 담당, 일본 정부와 귀족원 ·​ 중의원에 보낼 통고문,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에게 보낼 청원서의 송부 방법, 독립선언서의 서울과 지방 배포의 역할 분담, 민족대표의 선정, 불교계의 동참 등 3․1 운동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에 따라 3․1 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힌 한용운(韓龍雲)의 노력으로 불교계와의 연합도 성사되게 되었다.


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으니 동참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하여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 ​기독교 ·​ 불교 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 전선이 구축된다.

이 같은 국내의 3․1 운동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나아가 민족 대연합 전선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이었다. 1918년 말 재일 조선 유학생 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 유학생들은 최팔용(崔八鏞) 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2․8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계백(宋繼白)을 밀사로 파견하여 거사 소식을 알림으로써 국내 독립운동 진영의 3․1 운동 계획을 본격화시켜 갔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친 끝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만 1천여 매가 인쇄되었다.

거사 일자는 3월 3일의 광무황제 국장일과 3월 2일의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동일한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힐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 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 하였고,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유관순 또한 이 같은 3․1 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하여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관순은 3․1 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 ·​ 김분옥 ·​ 김희자 ·​ 국현숙 등 4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한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유관순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나가려고 하지만,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라고 하는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렇게 유관순은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이자, 민족혁명운동인 3․1 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3월 5일 유관순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1 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는 유관순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 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 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부르짖는 시위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워 갔다. 유관순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분출하며 항일 독립의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했는데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1919년 양력 4월 1일이고, 음력 3월 1일로 3.1 운동의 날짜를 맞췄다)이다.


고향에 내려온 유관순은 병천, 목천, 천안, 안성, 청주, 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및 유림 등을 방문하여 총궐기하여 만세운동을 벌이도록 종용하고, 거사 하루 전날엔 직접 봉화를 올리기도 하였다. 유관순은 거사일인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네 장터에서 3,0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간다. 이때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를 비롯한 19명이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총격으로 죽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재판에 회부된 유관순 열사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는다. 이는 재판을 받았던 당시 재판장은 그녀에게 회유성 질문을 던진다.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그러자 그녀는 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일갈하며 의자를 집어던지는 기개를 보인다.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


이에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이라는 중형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의 법제상 여성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 징역이 7년이었기 때문에 거의 최고 중형에 해당하는 형을 내렸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적 논리에 따른 양형기준에 따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중에도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으로 옥중에서 기념식을 치르고 간수들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며 어윤희 등과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수감자들도 호응해서 인파들이 몰려들었고 전차까지 마비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당시 기록에 전한다.


이후 1920년 4월, 동경 이왕세자(영친왕)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관순은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이다. 최근 밝혀진 바로는 유관순은 옥사가 아니라 일본 헌병들에게 장살을 당해 사망했다고 하지만, 고문을 당하다 죽었는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인지, 따로 죽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서대문형무소 측이 시신을 반환하기 이전에 ‘일곱 토막’을 냈었다는 말도 인터넷과 위인전 등에서 돌았는데, 사실 유무에 대해서는 근거가 밝혀진 바 없다. 이 이야기는 당대 수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윤봉춘이 1949년에 만든 영화 <유관순>에서 처음 나온 말이다.


소설가 조흔파도 <왜경 고문 비화>에서 ‘시신 훼손설’을 주장했으며, 김삼웅 독립기념관장도 2006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8주년 심포지엄에서 유관순 시신 훼손설을 언급했다. 유관순이 생전 다녔던 매봉교회 지하전시실에서는 석유 상자 사진이 유관순 시신을 담은 거라고 설명했는데, 이에 언론인 정운현은 이정은 저서 등을 인용해 ‘시신 훼손설’을 반박했고 오늘날과 같이 시신을 냉동했다가 넘겨주거나 방부 처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시 가매장 후 넘겨준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1920년 10월에 당시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가 시신을 반환받아 10월 14일에 장례를 치르게 되는데, 유해는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본이 이후 이태원동 공동묘지를 군용 기지로 사용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장하기 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바람에 유골이 분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에서 1989년 10월에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었다. 현재 유관순의 묘에 있는 석관에는 시신이 들어 있지 않다.

천안의 초혼묘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으며, 2003년 4월 1일에는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천안시 병천면에 유관순 열사 기념관을 개관하여 운영하고 있다.


유관순이 아우내(併川;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의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지휘하기는 했지만, 현대에 오면서 사람들에게 마치 3.1 운동의 아이콘으로 그녀가 등장하게 된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당대의 공판 기록을 보면 3.1 운동의 실질적인 주동자는 훗날 미군정청 경무부장, 민주당 당수 등을 지낸 유석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 유관순이 3.1 운동의 아이콘에 되었던 뒷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숨겨져 있다.

박창해가 만든 최초의 대한민국 국어 교과서에 전영택이 집필한 <유관순전>이 실리게 되면서 유관순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는 유관순의 조카였던 유제한이 대한민국 박창해에게 유관순의 이야기를 제보를 하게 되면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던 것인데, 이화학당 출신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였던 박인덕 등이 해방이 되어 자신들의 행위를 덮고자 유관순을 외면했다가 뒤늦게 숟가락을 얹는 과정에서 부각된 것이다.


실제로 국어 교과서를 만든 박창해와 함께 유관순 열사 재조명에 나선 소설가 전영택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바 있다. 전영택이 쓴 <유관순전>의 내용 대부분이 이화학당 출신의 친일파였던 박인덕의 진술에 의존해 집필하였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동료들과 만세운동에 목숨을 걸고 독립을 외쳤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며 무엇보다 그로 인해 그녀는 현장에서 부모님을 모두 잃었고 자신도 옥중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그녀의 삶을 반추해보건대 그녀가 3.1 운동의 아이콘으로 의도적인 포장이 되었다고 하여 그것이 본질을 흐리거나 사실과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現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이 추서 되었다. 1972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와 탑원리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터가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으며, 생가 옆에 매봉교회를 짓고 유관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며,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한다.

 

1974년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유관순 기념관’이라는 강당이 지어졌으며, 1985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설립되고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다.

A.I가 복원한 고문 전의 아리따웠던 얼굴

물론 그녀가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았는데 그 이후에 이러한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만은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이고, 그 이유가 바로 내가 오늘 103회 삼일절을 맞이하여 굳이 유관순을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유이다. 그저 교과서에 적혀있는 유관순과 3.1 운동의 이름만 대강 알고 그것이 어떤 배경에서 벌어졌던 운동인지 그리고 유관순이 정말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단 한 번도 당신이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고 그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삶이 당신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어받고 있는가를 묻기 위함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로 알고 그것을 공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힘겨운 삶을 연명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순응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우리의 독립과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정신과 그 기개를 배우는 것은 현대를 사는 젊은 후손들에게 확실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


저마다 시대의 핑계를 대며 저 혼자만 살아남겠다고 혹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더 잘 살아보겠다고 동포를 팔고 글재주를 팔고 영혼을 판 자들이 그리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그 영화를 대대손손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상이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로 후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혜택을 받는 것에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것이야말로 조상이 왕이었기 때문에 능력 유무와 상관없이 왕위를 물려받는다거나 할아버지 대에 기업을 세웠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망나니가 재벌 3세로 그 부로 개판 인생을 향유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당신을 포함한 후손들 모두가 당시 목숨을 바쳐가며 우리의 독립을 외치고 우리의 자유를 위해 노력했던 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빚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이 남겨준 그 뜻을 계승하여 그들이 그토록 어렵사리 넘겨준 현재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여 현재를 더 나은 나라로 만들기 위한 마음가짐을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빨간당측에서 뒷돈을 받아가며 일본 대사관 앞에 가서 일본 총리님 죄송합니다 어쩌구 하는 정신 나간 아줌마 부대들이 감히 이 나라에서 발붙이고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시대로 만들어야 하며, 위안부 할머니들을 빙자하여 저 잘살겠다며 부와 명예를 움켜쥐고자 여의도에까지 진출하는 것들이 감히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게 시대를 만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오늘 그저 3월의 첫날 휴일로서 늘 맞이했던 이 삼일절은 그들의 죽음을 마음에 아로새기라고 휴일로 지정한 것이다. 그들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는 17살의 소녀였던 이의 죽음을 앗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 순간까지도 결코 후회하거나 비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상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으며 끝까지 그 희망을 놓지 않고 당당했다.

오늘 하루라도 제대로 그날의 의미를 새기고 당신이 새로운 봄을 맞아 그 의지와 그 마음가짐으로 이 나라를 그리고 당신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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