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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2. 2022

누명을 쓰고 자신이 세운 단체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고

죽는 날까지 세상을 위한 도움의 손길을 거두지 아니하다.

174번째 대가의 이야기.


182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제네바의 명문 집안 가운데였는데, 아버지는 제네바 시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했고, 실업가이며 제네바 지구 치안 판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종교개혁자 장 칼뱅을 존경하는 개신교 신자였다. 그의 부모 모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사람들로 아버지는 소년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으며, 교도소 재소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이런 가풍은 물론이고 칼뱅주의 기독교 신앙은 어린 앙리의 마음속에 평생을 추구할 이상주의와 도덕주의를 심어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부모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그는 소년 시절부터 틈이 날 때마다 가난한 사람과 장애인, 또는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돕고 위안을 주는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2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제네바에 있는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일을 하며 일요일 오후를 보내기도 하였다.

 

18세 때에 제네바 자선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해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성서 연구와 봉사 활동을 병행하는 동아리를 조직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에 나섰다. 21세 때인 1849년에 대학을 자퇴한 그는 은행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4세 때인 1852년에는 이 단체를 토대로 YMCA(1844년에 영국 런던에서 창립)의 제네바 지부를 출범시키게 된다.

스위스 출신의 사회사업가이자 작가였으며 우리에게 흔히 ‘적십자’라고 알려진 국제적십자위원회를 창시한 인물로, 1901년 제1회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장 앙리 뒤낭(Jean-Henri Dunant)의 이야기이다.

1853년 스위스 뤼랑에소테 은행에 입사하여 아프리카 알제리, 튀니지, 시칠리아 등지로 출장을 다녀왔고, 그곳에서 식민지 경영에서 막대한 이익이 창출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튀니지 섭정 정치에 관한 보고>(1858)라는 첫 저서를 출판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


뒤낭은 미개 지역의 개발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을 것을 꿈꾸며, 은행을 그만두었다. 1856년에는 제분회사(製粉會社)를 설립했고, 프랑스령 알제리에 있는 토지 개발 허가를 얻어내서 밀과 옥수수 등의 농산물 가공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사업은 어려워지고 자금난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주변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의 사업이 위험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1859년 궁지에 몰린 뒤낭은 알제리를 식민 통치하고 있던 프랑스 황제를 찾아가 도움을 청할 결심을 하고, 북이탈리아 전선에 머물며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탄원서를 제출한다. 당시 황제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연합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급기야 뒤낭은 사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제를 직접 알현하러 전장인 솔페리노로 향한다.

이탈리아 북부의 만토바 인근에 위치한 솔페리노에서는 1859년 6월 24일에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과 오스트리아군 간의 전투로 무려 4만 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전황에 대해 버나드 몽고메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프랑스군은 (...) 적절한 군수품을 갖추지 못해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최초의 부대는 담요나 요리 장비는 물론 탄약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솔페리노 전투에서는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셔츠를 찢어 붕대로 사용했는데, 정작 의료장비는 제노바의 부두에 쌓여 있었다. 솔페리노에서 막대한 인명 손실을 낳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전투가 순전히 단순한 백병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군사 역사상 보기 드문 사건으로, 어느 쪽도 즉각적인 싸움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백병전을 벌였다. 놀랍도록 높은 사상자 비율을 낸 그 전쟁은 의료부대를 혁신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투 당일 밤에 이곳에 도착한 뒤낭은 전쟁터에 버려진 채 죽어 가는 부상병들의 참상에 깜짝 놀랐다. 이때 그는 전쟁터에서 경험이 많고 자격을 갖춘 남녀 봉사원이 있었더라면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바로 인근 주민들로 구성된 민간인 구호반을 조직했으며, 필요한 물품을 자비로 조달해 가면서 야전병원을 구축했다. 일찍이 크림 전쟁 동안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비롯한 자원 간호사들의 활약을 보고 크게 감동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낭은 자원봉사자들에게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할 것을 당부했고, 의사가 부족하자 프랑스군에 건의해서 포로 가운데 오스트리아 군의관들을 석방해서 야전병원 업무를 시켰다. 이때 그의 인생은 사업가에서 사회활동가로 뒤바뀌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7월에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솔페리노의 회상 (Un souvenir de Solferino)>이라는 책을 자비로 출간한다. 전투로 인한 참상을 자세히 설명한 다음, 뒤낭은 이렇게 설명하며,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부상과 간호를 위해 열성적이고 헌신적이며 충분한 자격을 갖춘 자원봉사자들로 평시에 구호단체를 조직할 수는 없을까? 모든 나라에 전쟁 부상자를 위한 구호기관을 설립하고, 평소에 사람들을 잘 훈련시킨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를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쟁 무기로부터 이들 구호요원을 보호하기 위한 조약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어쨌든 사람들이 진보나 문명에 대해서 그처럼 자주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와서도 불행히도 전쟁을 전적으로 피할 수는 없으므로, 인도주의와 진정한 문명 정신에 입각하여 전쟁을 방지하거나 적어도 전쟁의 공포를 감소시키기 위하여 애써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긴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 책을 유럽 각국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에게 배포했고, 사업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한 채 직접 여행을 다니면서 자신의 제안을 널리 알렸다. 부상자를 돌보는 초국가적인 구호단체를 설립하자는 그의 제안은 좋은 반응을 얻어서, 1863년 2월 9일에 우선 제네바 소재 공공복지협회에서 뒤낭의 제안을 실천하기 위한 ‘5인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법학자 귀스타브 모이니에를 필두로 육군 장성 앙리 뒤푸르, 의사인 루이 아피아와 테오도르 모누아 등의 제네바 명문 인사들이 힘을 합쳤고 앙리 뒤낭도 물론 그중 하나였다. 일주일 뒤인 2월 17일에 5인 위원회는 ‘국제 부상자 구조 협회’를 발족시켰으며, 이는 오늘날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설립일로 간주된다.


하지만 다섯 명의 위원 가운데서도 주축이라 할 수 있는 뒤낭과 모이니에 사이에는 처음부터 의견의 대립이 있었다. 뒤낭의 이상적인 애초 제안과는 달리 모이니에는 중립적 기구라는 발상이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보다 완화되고 실용적인 방법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반면 이상주의자였던 뒤낭의 성격은 협상과 조율이라는 구체적인 실무를 담당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뒤낭의 역할은 점차 줄어드는 반면 모이니에의 역할은 점차 늘어났으며, 1863년 10월 26~29일에 열린 제네바 회의에서도 뒤낭의 역할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뒤에는 스위스 의회의 주도로 최초의 제네바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이때도 뒤낭의 역할은 보조적인 차원에 머물고 말았다.


제네바 회의에는 14개 국가(오스트리아, 바덴, 바이에른, 프랑스, 하노버, 헤센-카셀,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러시아, 러시아 제국, 작센, 에스파냐, 스웨덴-노르웨이, 영국)에서 온 36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이때 논의된 주요 의제는 부상병 구호를 위한 국제단체 설립, 부상병을 위한 중립 및 보호 유지, 전장에서의 구호를 위한 자원봉사자의 활용, 주요 의제를 향후 법적 구속력 있는 국제조약으로 만들기 위한 회의 조직, 그리고 전장에서 의료요원을 보호하기 위한 공통 상징 도입 등이었다.


1864년 8월 22일에 이 회의에서는 전장에서 부상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1차 제네바 협약’을 채택했다. 이후 이 협약은, 해양에서 부상자 및 난파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2차(1907년), 전쟁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3차(1929), 전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4차(1949) 협약 등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인류를 위한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에 뒤낭의 삶은 크나큰 위기를 맞게 된다. 1867년 초에 제네바의 한 은행이 파산하면서 뒤낭의 회사가 연쇄 피해를 입는 바람에 결국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터졌는데, 그 과정에서 의혹이 불거지면서 스캔들로 비화되는 바람에 그에 대한 형사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형벌은 면할 수 있었지만 뒤낭은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된다. 특히 그가 하려던 사회사업의 성격상 사회적으로도 체면이 크게 손상되어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뒤낭은 국제 적십자 협회의 임원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위원회는 완전히 모이니에의 주도하에 운영되기 시작한다. 정작 본인이 설립한 YMCA 제네바 지부에서조차 불명예스럽게 퇴출당한 뒤낭은 결국 고향 제네바를 떠나 평생 다시는 찾지 않았다.


파리로 간 뒤낭은 넉넉지 못한 빈곤한 생활 중에도 여전히 박애주의에 입각한 구호 활동을 위해 노력했다. 1870년부터 시작된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당시에는 ‘공동구조협회’를 조직했고, 곧이어 ‘질서 문명 공동연합’을 결성했다. 이어 국가 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국제 법정’의 설립을 제창했으며, 한편으로는 ‘세계 도서관’의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형편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그나마 주위에서 도와주던 지인들도 하나둘씩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그 계획은 이뤄지지 못하였지만 이후 그 계획은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의 바탕이 되어 그가 죽은 이후에서야 꽃을 피우게 된다.

적십자 운동이 큰 호응을 얻고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가던 1874년부터 1886년까지 뒤낭은 유럽 각국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먼 친척의 도움으로 겨우 경제적 안정을 찾게 된 뒤낭은 1887년에 스위스의 하이덴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워낙 심한 고생과 오래된 어려운 생활로 인해서 그는 50대 후반의 나이이었음에도 외모가 거의 노인처럼 보였다고 전한다.

1887년 스위스의 하이덴에 도착한 앙리 뒤낭은 하이덴 양로원에서 자서전을 집필하며 지내게 되었는데, 우연히 스위스 지방신문 기자에 의하여 1895년 9월, 장크트갈렌의 한 신문에 적십자의 창립자 앙리 뒤낭에 대한 기사가 실리면서 다시 한번 세간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게 되었다.


이 때는 이미 전 세계인들이 적십자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가 제안한 ‘전쟁 중에도 자비를’이라는 표어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또 전쟁터에서 버려진 채로 죽어갔을 수많은 부상자들이 적십자 덕분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수년간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살아온 이 노인이 실제로 적십자의 창설자라는 것을 발견한 기자는 곧 기사를 썼고, 이 기사는 세계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앙리 뒤낭은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뒤늦은 명성과 지원 덕분에 뒤낭의 입지는 크게 향상되었으며, 1897년에 이르러서는 적십자의 설립과 역사에 관한 책에서도 이전과 달리 뒤낭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었다. 1901년에 뒤낭은 국제적십자운동의 창립자이며 제네바 협약의 발안자로 인정받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공동 수상자인 프랑스의 평화주의자 프레데리크 파시는 ‘국제평화 동맹’의 설립자였으며, 뒤낭과는 일찍이 질서 문명 공동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었다. 물론 모이니에와 적십자 단체 역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올라 있었으며, 뒤낭의 후보 및 수상자 자격을 두고 한동안 잡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세는 뒤낭의 편이었고, 오랫동안 뒤낭을 냉대하고 외면했던 국제적십자측에서조차 뒤늦게나마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이러한 영광을 받을 사람은 귀하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40년 전 전쟁터에서 부상자들을 구호하기 위한 국제기구를 만드는 일에 착수한 사람은 바로 귀하이기 때문입니다. 귀하가 아니었다면 19세기에 최고의 인도주의의 성취인 적십자는 아마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뒤낭은 상금 가운데 10만 4천 스위스 프랑을 받았지만, 이 돈은 그의 사후에 거의 대부분 평생 지고 있던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무를 모두 청산하지는 못했다.


1903년에 뒤낭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말년에는 우울증과 피해망상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지켜 왔던 기독교 신앙마저 저버렸다고도 전한다. 그는 하이덴 양로 병원 12호실에서, 1910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사이가 틀어져 이후 평생 원수로 지냈던 귀스타브 모이니에가 사망한 지 2개월 뒤였다. 그는 취리히의 시립묘지에 묻혔으며, 사망 20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건립된 묘비에는 ‘장 앙리 뒤낭, 1828년 탄생, 1910년 서거, 적십자의 창시자’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의 생일인 5월 8일은 오늘날 국제적십자운동의 기념일이다. 그가 여생을 보낸 양로원은 앙리 뒤낭 박물관이 되었고, 국제적십자운동 소속 회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는 2년에 한 번씩 앙리 뒤낭 메달이 수여된다.


당신이라면, 자신의 좋은 이상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였는데, 자신의 사업이 자신의 의지와 달리 은행의 파산으로 인해 도산해버리고 그렇게 경제적 지원의 원천을 잃은 것도 억울하고 속상한데 그것이 의도적인 위장폐업이라는 식으로 매도당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하려던 사회사업마저 매도당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모두 부정당한 상황에서 다시는 고향을 돌아보지도 않을 정도의 분노를 느끼고서도 다시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조직을 구성하고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그에 대한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다 보면, 앞서 한 줄로 설명했던 ‘당시 그의 나이가 50이었는데 완전 늙은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라는 말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외모의 변화를 통해 알 수 있을 지경임을 사진을 통해 역력히 확인할 수 있다.

외모에 드러날 정도의 혹독한 마음고생과 그간의 노력에 대한 절망과 자신에 대한 실망과 인생의 허망함이 그에게 얼마나 큰 돌덩이로 마음을 눌렀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평생을 다른 이들을 구하고자 살았건만, 그리고 죽기 전에 그것이 인정되어 1회 노벨상을 수상하기까지 하였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에 대해 험담을 해냈고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근거도 없는 비난을 쏟아냈다.


당신의 삶이, 당신의 선의가, 당신의 노력이, 다른 이들에게 매도당하고 심지어 그것이 진실인 것인 양 흥분하며 당신을 욕하는 이들이 튀어나오는 상황은 인생에서 너무도 쉽게 벌어지곤 한다.

 

그때마다 한 명 한 명 그들을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그들에게 당신의 진실된 삶과 노력을 설명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이미 들을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설사 그 진실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당신에게 사과하거나 자신의 허술하기 그지없는 그 무책임함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당신의 억울함을 알리고 당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사무라이처럼 배를 갈라 보일 것인가? 자신의 아들이 만두를 훔쳐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 위해 억울해 눈물 흘리며 결백을 호소하는 어린 자신의 아들의 배를 갈라 아무것도 없었음을 보이고 그 결백과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분함을 자신의 죽음으로 대신하는 것 따위는 극단적인 일본인들의 무식함일 뿐이다.


왜 죽는가? 당신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택해도 그들은 쪽팔려서 죽었을 거라며 손가락질을 할 뿐, 아무런 반성도 미안함도 갖지 않는단 말이다.


살아라. 살아서 그들을 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져라. 그리고 그들을 압제할 수 있는 위치에서 당신에게 누명을 씌우고 마치 정의를 말하듯 배설하며 자신들의 유희를 즐겼던 그것들에게 일침을 가하라. 반드시 그렇게 하여 당신이 당한 그 수모와 모욕을 다시는 다른 누군가가 또 겪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 쓰레기 같은 것들의 머리를 얼음물로 확 채워 우동사리를 다 빼내 주어라.


아무런 생각 없이 키보드 워리어로 모니터 뒤에 숨어서 당신의 험담을 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마치 곁에서 본 것인 양 말을 꾸미고 더 보태어 당신을 인생 실패자이자 쓰레기로 전락시켜버린 그들의 입을 꿰매버리도록 하라.


그러려면 당신이 지금 실패와 좌절과 그 실망감에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앙리 뒤낭은 결국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그가 죽은 지 2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잘못을 깨닫고 그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그의 뼈가 흙으로 산화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아니, 그의 뼈는 분해서 산화하지도 못하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뒤낭의 인생을 통해 그의 힘겨운 역사를 통해, 진실을 보는 법을 알게 된 당신이라면 당신의 온전한 인생을 반드시 일으켜 살아내라. 그래서 진실을 밝히는 그날까지 더 위로 더 강하게 더 단단하게 당신의 인생을 끌어올려 살아내란 말이다.


그것들은 결국 당신이 지금처럼 힘없이 그저 그렇게 인생을 마칠 것이라 키득거리고 비아냥거리며 그저 이미 인생 조진 사람으로 여기며 떠들어대고 있을 것이다. 아니, 심지어 그들의 기억에 이미 당신은 사라지고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왜 당신이 아직까지 그런 것들에게 받은 상처로, 좌절감과 무기력에 빠져 다시 일어날 생각조차 못하는가 말이다. 그러지 마라.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반드시 있고, 그 진실을 지금 알아주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여 진실이 거짓으로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다시 끌어올려야 할 명백한 의무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유치한 복수 따위가 아니다. 당신의 인생을 온전히 완성하는 일이다.

그들에 의해 실패하고 꺾인 인생으로 기억되기에 당신의 인생은 너무도 아깝고 소중하며 다시없을 하나뿐인 것이다.

지금 다른 모든 이들이 당신을 그렇게 매도한다 하여도 내가 당신의 결백을, 진실된 삶을, 이제까지의 노력을 인정하마. 당신이 당신을 실패자라고 자인하지 않은 이상 아직 당신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성적을 매길 수 없다. 당신의 인생에 대한 성적은 오직 당신만이 매길 수 있다. 당신의 숨이 붙어 있는 이상, 결단코 포기하지 마라.


내가 당신의 삶을 응원한다, 가열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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