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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3. 2022

나치라고 재판정에 서고, 2년간 지휘도 금지당했지만..

전설적인 오케스트라 녹음을 남긴 '클래식의 황제'로 기억되다.

175번째 대가의 이야기.


1908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본디 고조부가 그리스 출신으로 그리스를 떠나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이주해 작센 선제후국의 켐니츠에 정착했다. 작센에 정착한 고조부와 그의 형제들은 이후 상업, 의료 계통에 종사하면서 1792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로부터 귀족 작위까지 받으면서 성 앞에 귀족을 상징하는 von(폰)을 붙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잘츠부르크의 의사였다. 그의 아버지는 수준급의 아마추어 클라리넷 연주가로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되면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귀족의 특권도 폐지되며 귀족의 성 앞에 붙는 von도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그의 성 앞에 붙는 von도 공식적으로는 호적(?)에서 사라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von을 계속 사용한 것은 예술가로서 일종의 예명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형과의 경쟁심 때문이었다. 그는 몸집이 작아 덩치가 큰 형에게 항상 열등감을 가졌으며, 피아노를 시작한 것도 그런 경쟁심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했지만 건초염으로 추정되는 손가락 기능 이상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1926년 빈 공대(Technical University of Vienna)에 진학하였다.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카라얀은 공대에 다니면서 효율을 높인 엔진을 개발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공대를 그만두고 빈 음대(University of Music and Performing Arts, Vienna)에 들어가게 된다. 건초염 등으로 인해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잘츠부르크에서의 은사인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의 조언을 받아들여 지휘자의 길을 택한다.

그렇게 그는 1929년 빈 음대를 졸업한 직후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이때 지휘한 작품은 무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후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 등이었다. 이때 청중 가운데 있었던 울름 오페라극장의 극장장의 스카우트 제의로 독일 울름 가극장의 지휘자가 된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20세기 음악사를 대표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들 가운데 한 명이자 세계 최고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35년간 종신 지휘자로 군림한, 클래식 음악의 전설로 ‘20세기 클래식의 황제’라 불리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의 이야기이다.


카라얀 이전까지 일부 상류층이나 고급 취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던 클래식은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해서 대중도 즐길 수 있는 음악이라는 인식을 만들어주었다. 클래식 음반 판매량은 작곡가 별로 따로 집계가 하지 않지만, 지휘자, 연주자 별로 집계한 통계자료를 보면 카라얀 지휘의 음반은 무려 2억 장 넘게 공식적으로 집계된 가장 많은 클래식 음반을 판매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울름 오페라극장의 상황은 매우 열악해 단원이 약 20명 정도, 합창단은 16명에 불과했다. 가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기 직전에 극장장의 초대로 울름 오페라극장이 야심 차게 준비한 로엔그린 공연을 본 카라얀은 그 허술함을 목도하고 경악한다.


악보상으로 아홉 대의 트럼펫이 찬란한 팡파레를 터트리는 장면에서 단지 한 대의 트럼펫만으로 대폭 축소되었던 것이었다. 대학 시절 빈 국립 오페라를 견학하면서 공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20대 전반을 울름에서 보내면서 그는 경험을 쌓게 된다. 부족한 악기는 카라얀 자신이 피아노를 치며 메워 나가야 했고, 때로 큰 악기들을 수레에 실어 나를 때는 직접 도와야만 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그 경험들이 연주자뿐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시점에서 음악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며, 음악을 막상 연주해보려고 할 때 느끼는 그 압박감을 느끼고 이겨내 흡수한 후에야 음악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카라얀이 울름 오페라극장에 취임했던 1929년은 세계 대공황이 발생한 해로, 간신히 회복세로 접어들던 독일 경제가 미국발 세계 경제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아 다시 나락으로 추락하던 상황이었다. 세계 경제 대공황 당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같은 메이저 악단조차도 큰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였기에 그는 참고 그 시기를 견뎌낸다.

1933년 4월, 나치에 입당하고 5월에 두 번째 입당 절차를 밟은 후 1934년 아헨 독일 가극장과 아헨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며 독일 최연소 음악감독을 맡게 된다. 소도시 울름과 달리 큰 도시였던 아헨은 오페라 극장 또한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카라얀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헨 오페라 극장에 부임한 직후인 1934년 여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빈 필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1937년에는 최고의 오페라 극장인 빈 국립 가극장에서 지휘하였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베를린 국립 가극장에 초빙되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성공을 거두었다.


1938년 드디어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국립가극장과 베를린 필에 각각 데뷔했다. 특히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데뷔하면서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 기사에서 처음 언급된 ‘분더 카라얀(기적의 카라얀)’은 이후 카라얀의 별명처럼 사용되는 수식어가 되었다.


그는 이 성공을 발판으로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정식 음악감독이 되었다. 1938년 4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도 데뷔하였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한 순간 베를린 필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악단임을 느꼈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해 7월에 그는 아헨에서 알게 된 11년 연상의 오페레타 가수 엘미 호르 가레프와 첫 번째로 결혼한다.


그러나 1939년에 그의 인생에 잊지 못할 사건이 벌어진다. 카라얀은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유고슬라비아 국왕 초청 갈라 콘서트를 지휘하고 있었다. 당연히,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를 하고 있었고 공연 중 바리톤 루돌프 보켈만이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부르던 도중 실수를 하는 바람에, 결국 연주를 중단하게 된다.

그런데 극장에 관객으로 와있던 히틀러가 화가 나서 옆에 앉아있던 위니 프레트 바그너(리하르트 바그너의 며느리)에게 카라얀이 앞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한다. 이 사건은 나중에 카라얀이 탈나치화 재판에서 증거자료로 제출되기도 했다. 괴벨스 등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푸르트벵글러를 항상 높이 평가한 반면에 카라얀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2년 재력자 집안 출신의 이혼녀 아니타 귀터만과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아내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나치당 내부에서 활동에 일부 제약을 받기도 했다. 전쟁 직후 그 방해가 되던 아내의 혈통은 반대로 나치당원이었다는 그에 대한 나쁜 여론을 어느 정도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서 그동안 전쟁에 징집되지 않았던 카라얀이었지만, 전쟁 말기에 징집 대상이 확대되자, 그동안 징집 면제를 받아왔던 카라얀도 군입대에 대한 여론의 압박을 받았다. 카라얀은 기왕 입대할 거라면 공군으로 가서 파일럿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괴링과의 연줄을 이용하여 공군에 들어갈 생각도 했다.


그러나 결국 전쟁 말기에 푸르트벵글러 등과 마찬가지로 제3 국으로 나가 귀국하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밀라노에서의 콘서트를 핑계로 아내와 베를린을 떠난 후 종전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고 밀라노와 인근 북부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것이다. 밀라노에서는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민병대에게 털려버리고 알거지가 된다.

카라얀 부부가 투숙했던 호텔에 독일인들이 많아 타깃에 되었기 때문이었다. 돈이고 귀중품이고 모두 털려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했지만, 길거리를 배회하던 중 다행히 한 이탈리아 음악 애호가의 호의로 그의 집에 머물게 되어 숙소를 해결할 수 있었다. 카라얀의 아내는 영어 통역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카라얀 자신은 악보 공부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 지휘 자리를 알아봤는데 여의치 않아서 밤무대 같은 곳에서라도 지휘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이 시절 카라얀은 매우 열심히 공부했는데, 매일 자신이 목표로 한 양의 공부를 다 하지 못하면 스스로 끼니를 거르는 것으로 벌칙을 정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꽤나 능숙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종전 후 간신히 지인들과 연락이 닿은 카라얀은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향해 출발했는데,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이 여정 역시 쉬운 일이 아니어서, 기차 안에서 통역 알바를 하면서 여비를 벌기도 했고, 중간 경유지의 삼류 극장에서 지휘를 해서 여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종전 후 독일의 다른 거물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약 2년간 연주활동이 제한되었다. 활동 금지 기간 동안 푸르트벵글러 등 다른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카라얀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에 있는 부모님에게 얹혀살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카라얀에게 구세주로 나타난 이가 바로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였다.

월터 레그와 함께

이미 오래전부터 카라얀의 재능에 주목해 왔던 레그는 미래에 녹음할 연주들에 대해 미리 선지불하는 형식으로 카라얀의 숨통을 틔여준다. 1946년 1월부터 카라얀과 레그는 이미 빈 필과 음반 녹음을 시작했다. 비록 카라얀이 연주활동을 금지당한 상황이었지만 레그가, 녹음은 공식적인 음악회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제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연합국의 제재를 피해 갈 수 있었다.


1948년 카라얀은 연합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무혐의를 인정받아 지휘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카라얀이 활동을 재개하자 푸르트벵글러의 견제도 다시 시작되었다. 베를린 필에서는 물론이고 빈 필과 국립 오페라극장에서도 푸르트벵글러는 자신과 카라얀 중에서 양자택일하라며 압박을 가했다.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전혀 불평하지 않고 언젠가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자리라고 말하며 크게 연연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음반 산업의 미래를 내다본 월터 레그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의 필요성을 느껴 자신이 직접 영국 내의 우수한 연주자들을 접촉, 모집하여 1946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카라얀은 1948년 이 악단과 첫 녹음을 시작했는데, 푸르트벵글러의 견제로 빈 필을 지휘하기 힘들게 되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까지 카라얀의 사실상 모든 녹음이 이 악단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카라얀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사실상 이끈 지휘자였지만 상임 지휘자 등의 정식 직책은 갖지 않았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이기도 해서 1959년까지 상임지휘자가 없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로 창단되어 처음에는 스튜디오에서 녹음만 했고, 대중들 앞에서 연주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후 카라얀과 레그가 악단의 성장을 위해서는 공개 콘서트를 가질 필요성이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아 공개 음악회도 열기 시작했다.


이어 1952년에는 유럽 순회공연까지 가졌다. 이때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직접 관람했던 토스카니니는 큰 감명을 받아 나중에 직접 런던을 방문하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을 남겼다. 이 유럽 순회공연의 마지막 공연은 베를린에서 열렸는데, 이는 언젠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것이라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카라얀의 포석이었다. 이 순회공연에 사비를 털어 지원했던 월터 레그도 카라얀의 이러한 바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연주회를 ‘카라얀을 베를린으로’라고 불렀다.

종전 후 푸르트벵글러 때문에 베를린에서 연주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 공연을 통해 카라얀은 베를린 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것이다. 이 공연 이후에 카라얀을 베를린 필 정기연주회에 초청할 것을 요구하는 여론이 더욱 높아졌고 결국 베를린 필은 푸르트벵글러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1953년 11월 카라얀을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초빙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1955년부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악대 복무 요원들을 중심으로 창설된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나치 치하의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였던 카라얀과 단원들 간에는 심리적인 거리감이 없을 수 없었다. 1960년 카라얀과 EMI와의 계약 연장이 불발되면서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관계는 완전히 끝을 맺는다.

1954년 11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사망 후 카라얀은 드디어 베를린 필의 대권을 잡게 된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카라얀이 상임지휘자가 된 것이 당연하다고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 그것은 당시 상황을 알지 못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이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언론과 음악계에서는 카라얀뿐만 아니라 첼리비다케, 요훔, 뵘, 카일 베르트 등 다양한 인물들이 비중 있게 거론되었다. 즉 카라얀이 독보적이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요훔은 자신이 차기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여 베를린에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고 한다.


첼리비다케는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기 직전 즈음에 베를린 단원들과 격렬한 말다툼을 벌인 끝에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차기 후보에서 완전히 제외된 상태였다. 뵘은 당시 빈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를 겸직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 보였다.


카라얀의 경우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시절부터 푸르트벵글러 때문에 베를린 필을 거의 지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베를린 필과의 유대관계는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는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베를린 필 단원들은 많은 음반을 녹음하던 카라얀의 활동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데는, 1955년 베를린 필의 미국 순회공연이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0주년인 1955년 독일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것은 독일이나 미국 양측에 큰 이슈였다. 애초에 이 순회공연은 당연히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면서 순회공연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자 기획사가 대신 요구했던 유일한 지휘자는 카라얀이었다. 베를린 필 측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기 전에 유사시에 카라얀에게 미국 순회공연을 맡아달라고 언질하기도 했다. 미국 공연을 3개월 앞둔 상황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였고, 미국 순회공연의 지휘자 자리는 그렇게 카라얀에게 돌아갔다.

카라얀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푸르트벵글러 사후 약 2주간의 논의 끝에 카라얀을 차기 상임지휘자로 내정했다.


그러나 카라얀과 베를린 필 간의 계약은 세부 조건의 합의에서 난항을 겪어 쉽게 체결되지 못했다. 1955년 2월 말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미국 순회공연을 떠날 당시에도 카라얀은 상임지휘자직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였고 베를린 필과 관련된 아무런 직함도 없었다. 그러나 카라얀은 일생일대의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카라얀은 베를린 시의회와 베를린 필 운영진을 조르고 구슬리고 협박한 끝에, 마침내 이 중요한 순회공연을 떠나기에 앞서 진행된 공식 인터뷰에서 “카라얀이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을 지휘한다”는 발언을 하도록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카라얀은 대중에게 자신이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에 확정된 것과 같은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여론은 카라얀의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취임을 기정사실처럼 여기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미국 순회공연 이후에도 카라얀과 베를린 필 측은 세부적인 사항에서 이견이 있어 계약에 사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카라얀은 다른 권리를 약간 포기하고서라도 자신의 계약기간을 종신으로 확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종 계약은 1956년 4월 25일에서야 이루어졌다.


평생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염원해왔던 카라얀은 자신에게 돌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카라얀은 훗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저질렀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베를린 필과 미국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카라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카라얀은 그토록 염원했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촌각을 다투면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중한 어머니를 한 번도 찾지 못했다.


베를린 필과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도 전인 1956년 3월 카라얀은 고향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측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또 1956년에는 홧김에 사표를 낸 칼 뵘의 뒤를 이어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였다. 1958년 10월 모델 출신의 금발 여성 엘리에트 무레와 세 번째로 결혼하였다. 엘리에트는 비록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었지만 카라얀을 열심히 내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엘리에트 폰 카라얀은 지금도 잘츠부르크에 거주하며 카라얀의 막대한 유산과 지금도 매년 수십억씩 지급되는 음반 로열티를 받으며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다.

카라얀은 오페라 제작비를 절감하면서 세계 유명 극장에서 최고 수준의 오페라 공연을 공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명 극장 간의 공동제작을 구상해왔는데,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하면서 실제로 이를 구현했다. 또, 냉전이 한창이던 1969년에는 베를린 필이 소련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공연함으로 국제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1975년 말 척추 연골이 돌출되어 5시간에 걸친 큰 수술을 받았다. 이로 인해 1976년 전반기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었다. 회복 이후 걸음걸이가 불편해졌다. 1978년 9월에 리허설 때 지휘봉을 줍다가 지휘대에서 넘어지면서 허리가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에는 단지 균형을 일어서 넘어진 것으로 발표가 났지만 카라얀 사후 출판된 전기들에 따르면 뇌졸중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1980년 1월에는 정기연주회 때 위해 청중들 앞에서 지휘대에 오르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불화가 터진 계기는 80년대 초 자비네 마이어 입단 사건이다. 1982년 23세의 나이에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과한 자비네 마이어는 카라얀이 직접 수석 클라리넷 연주자로 발탁했다. 자비네 마이어는 이로써 베를린 필 100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단원이 되었다.


클라리넷 수석 주자로 카라얀이 지지했던 자비네 마이어를 베를린 필의 목관 단원들이 소리가 너무 밝고 오케스트라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마침내 사달이 난다.

자비네 마이어

한스요르크 셸렌베르거, 칼 라이스터 등 목관 단원들을 중심으로 베를린 필은 카라얀의 독단적인 성향을 비난했고, 만년에 완고해진 카라얀도 자신의 예술적 견해가 단원들에게 무시당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 카라얀과 단원들의 갈등 사이에 끼어 곤란한 위치에 놓였던 자비네 마이어는 버티지 못하고 9개월 만에 베를린 필을 퇴단한다.


카라얀도 꼭 같이 연주해보고 싶었던 마이어가 쫓겨나듯 퇴단한데 대해 분노하여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후 마이어는 20여 장의 클라리넷 연주곡 앨범을 내면서 세계 최고의 클라리넷 연주자로 명성을 떨치지만 이때는 고작 24세에 불과한 어린 연주자였다.


84년 카라얀은 그해 연말까지 상임지휘자로써의 최소한의 의무인 정기연주회를 제외한 모든 녹음 일정과 순회공연, 외부 페스티벌 출연 등의 부가적인 스케줄을 취소하였다. 당시 음반 녹음을 비롯한 외부활동으로 연봉의 다섯 배의 수입을 올렸던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재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편 베를린 필의 수뇌부였던 셸렌베르거(오보에 수석)와 겔러만 등은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카라얀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지 논의하였는데, 꽤 효과적인 아이디어들이 튀어나와 대담하게 이를 실행에 옮겼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텔레 몬디알과의 계약을 취소하고 출연을 거부하는 것으로 응수한 것이다. 텔레 몬디알은 카라얀이 본인의 영상물 녹화를 위해 사적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텔레 몬디알과의 계약 파기는 카라얀이 자신의 영상물을 남기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베를린 필 단원들이 카라얀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선택한 카드였다. 카라얀은 사건 초반에는 베를린 필에서 자신의 권위의 우위를 재확인하는 선에서 일이 수습되고 베를린 필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길 원했던 듯한데, 텔레 몬디알 계약 취소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고 베를린 필에서 마음이 떠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베를린 필은 카라얀 이외의 다른 지휘자들과 녹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베를린 필 단원들은 DG와의 전속계약마저 파기했다. DG는 전속계약의 대가로 베를린 필에게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40% 높은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었는데 베를린 필은 이마저도 포기했다.


그러나 카라얀 없이도 잘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베를린 필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베를린 필 단원들 중 일부는 DG가 높은 로열티를 지급하는 것이 카라얀이 아닌 베를린 필 자체에 있다고 생각해서 DG와 재협상할 때 DG가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도 많이 했다. 게다가 베를린 필의 음반 녹음 제의를 받은 무티 등의 지휘자들은 대부분 카라얀과의 관계를 고려해 이를 거절했다.


베를린 필과의 갈등의 와중에 있던 1983년 허리 통증이 극도로 악화되어 다시 수술을 받았다. 실패할 위험성도 높았던 수술이라 계속 미루다가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지자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수술에 임했다고 한다.


1988년에는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총 6회로 예정된 돈 지오반니 공연을 3회밖에 지휘하지 못했다. 그해 하반기에는 건강 악화 때문에 베를린 필과의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날 일본 투어를 위해 출국하자 베를린의 여론은 또 안 좋아졌다. 한편 그해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일본 투어는 카라얀의 마지막 방일이 될 것이라는 예측 때문에 표를 구하기가 엄청 어려웠다고 한다.

세 번째 부인과 함께

1989년 4월 24일 마침내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직에 사의를 표명했다. 당시 베를린시는 새로 사민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사민당 정권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 모두에게 비판적이었다.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활발한 순회공연 활동에 대해 이전 기민당 정권은 자유 베를린(서베를린)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이라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시의 재정적 지원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 정권을 잡은 사민당 정권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외부 활동을 하며 높은 수익을 올리며 시의 재정적인 지원까지 받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했다. 사민당 정권은 전체 공연 스케줄의 3/4 이상을 베를린 밖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베를린’ 필하모닉이냐면서 비판했다. 사민당 정부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해외 공연을 줄이고 베를린 시민들을 위한 무료 공연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사민당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 상황에서, 카라얀은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과 정기연주회 횟수를 축소하는 것으로 계약을 변경할 것을 베를린 주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사민당 정부는 카라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4월 24일 카라얀은 베를린 주 정부 문화담당관과 만난 자리에서 결국 건강 문제로 더 이상 계약상 명시된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어렵다면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는 카라얀 특유의 승부수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사민당 베를린 주 정부는 뜻밖에 사표를 수리해 버렸다.


카라얀이 사표를 던진 바로 다음날 베를린 주정부는 언론을 통해 카라얀의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카라얀이 사표를 던진 직후 카라얀을 지지하는 일부 베를린 필 단원들이 잘츠부르크에 있는 카라얀 자택까지 찾아왔지만 카라얀은 끝내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7월 16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음악감독의 자격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 공연을 위한 리허설 기간 중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클래식 마니아가 아니어도 카라얀의 명성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의 인생을 비교적 촘촘하게 돋보기를 통해 들여다보며 오늘 소개한 이유는, 우아하고 고급진 인생만 살았을 것 같은 그의 인생이 얼마나 굴곡이 심했으며 수많은 실패를 극복하며 일궈낸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나치에 입당했다는 이유로 나치라는 소리를 들으며 활동에 장애를 겪고 재판정에까지 올라야 했고,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떠난 외국생활에서 알거지가 되어 말도 안 통하는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며 그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겠다며 하루 공부량을 정해놓고 궁핍한 생활을 남의 집에서 연명하면서도 노력을 거듭해왔다. 평생에 걸친 소망이던 베를린 필하모니의 지휘자가 되기 위한 그 험난한 여정을 묵묵히 참고 기다리며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능력을 갖추며 인내해왔다.


콧대가 센 수석 연주자들을 비롯한 그들과 날 선 기싸움을 하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감수하면서도 훌륭한 음악 녹음들을 남겨왔다. 그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원숙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20대부터 겪어온 그의 실패극복의 노하우가 노련함으로 장착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가 여비가 없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삼류 무대에 서서 지휘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이미 그는 당시 A급 지휘자였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무엇하나 부끄러워하지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하던 그날까지도 소니 사장과 CD 공장에 대한 건으로 통화를 통해 회의 중이었다. 오전에 찾아왔던 주치의를 물리면서까지 무리했던 그의 행보가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언제나 열성을 쏟았고 자신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굽힘을 굴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행보대로 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이상 현실적인 이유로 자신의 가치를 접지 않아도 되는 대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당당히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상임지휘직을 먼저 사직하였고, 자신을 믿고 따르지 않는 단원들에게 단호하게 선을 그어 이별을 고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거취를 정할 때, 돈을 최우선으로 하는지 자존심을 최우선으로 하는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정답은 없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삶이고 그 삶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뿐이다. 카랴얀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상황이 여의치 않고 시대가 여의치 않아 자신을 굽히고 참고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다.


자신의 의도가 아니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시기에 자신의 꿈을 위한 준비를 차근히 하면서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런 인내와 준비과정을 거쳐 때를 기다린 이들은 그저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기에 기회가 왔을 때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은 서핑과 같다. 파도가 없는데 혼자서 보드 위에 올라서서 파도를 탈 수는 없다. 하지만 파도는 반드시 온다. 중요한 것은 파도가 오는 타이밍을 기다릴 때 그저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막상 파도가 왔을 때 그것을 최대한 자신의 흐름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과정을 그 시기에 갈고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들으면 끄덕이지만 실천하지 어렵기에 그것을 해낸 이들이 대가가 되고 위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무기력한 시간들이 그저 당신에게 주어진 멈춤이라 생각하지 마라.


정작 다시 기회가 왔을 때 당신은 또 놓쳐버리고서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그저 운이 없었다며 실망하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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