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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4. 2022

미혼모라는 이유로 자기 아이를 양부모에게 맡겨야 했지만

여자 교육부 장관이자 세계 유아교육계의 기본을 갈아치우다.

176번째 대가의 이야기.


1870년,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주 키아라발레(Chiaravalle)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극히 보수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평범한 여성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자신의 딸이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남성의 그늘에 가려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소 자신의 흥미를 전공으로 삼기 위해 기술학교에 진학했고, 의사가 되고자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의대에서는 여학생의 입학을 원천적으로 불허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왕과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며 여성 앞에 가로놓인 장애물을 거두려 애썼다. 결국 그녀는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 의학과 입학허가를 받아낸 이탈리아 최초의 여자 의대생이 된다.


어렵사리 진학한 의대였지만, 공부 또한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많은 수업에서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그중에서도 그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해부학 수업이었다. 당시 로마 의대에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해부학 실험을 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내려오고 있었다. 해부학 실습에서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예 격리되어 다른 방에서 해부하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차별과 고난에도 결코 자신의 꿈을 접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혼자 시체 해부실에 남아 실험을 하는 오기와 집념을 보였다. 그녀는 대부분의 차별을 극복하고 학점을 따내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 6년 만에 로마대학교 의과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6년 그녀는 드디어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동시에 이것은 전문적 지식을 가진 여성으로서 19세기 말 이탈리아 여성을 대표하는 선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행보였고 결과물이었다.

이탈리아의 아동 교육학자이자 아동 정신과 의사였던, 교육학에 문외한이더라도 그녀의 이름을 딴 ‘몬테소리 교육법’이란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다는, 마리아 테슬라 아르테미샤 몬테소리(Maria Tecla Artemisia Montessori)의 이야기이다.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 ‘어린이의 집(Casa dei Bambini)’을 열어, 이른바 몬테소리 법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몬테소리는 유아교육의 대명사처럼 사람들에게 수많은 교육업체들에게 활용되고 있지만, 정작 몬테소리가 그녀의 이름인지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몬테소리는 대학을 졸업한 1896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개최된 국제 여성 권리 대회에 이탈리아의 특사로 파견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임금, 그리고 남녀평등 문제에 대해 강도 있는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았고 당시 유럽에서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 사회적, 학문적인 측면에서 유럽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고민하게 했으며 여성 교육을 현실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비록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의사로 주목받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녀를 현장 의사로 뽑아주는 데는 거의 없었다. 그녀는 여러 차례의 구직 활동을 통해 아픈 사람을 직접 만나 치료하는 자리가 아닌, 로마대학 부속 정신병원 보조의사로 의사생활을 시작한다. 그녀는 임상사례를 얻기 위해 방문한 로마 시내 사회복지시설에서 정신지체 아동들이 마치 동물처럼 수용돼 있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마리아는 또 로마 인근 공원에서 거지 모녀의 행동을 관찰할 기회를 갖게 된다. 구걸하는 어머니 옆에서 어린 딸이 헌 보자기 하나를 손에 들고는 접었다 폈다 하면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의 얼굴에서 넘쳐나는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아동교육이다’라고 마음먹었다고 마리아는 훗날 회고했다.


그때의 경험이 마리아의 인생행로를 바꿔놓게 된다. 이후 마리아 몬테소리는 지체아동들의 치료와 교육에 매달리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전 아동들의 교육에까지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유럽에서 정신지체 아동들은 치료 대상이 아니라 격리 대상일 뿐이었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조차도 그들을 동물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경멸하고 있었고, 그저 때가 되면 밥을 주는 것 외에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 몬테소리는 그곳에서 치료의 희망을 발견했다.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가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로 노는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한 마리아 몬테소리는 아이가 그 놀이 과정을 통해 점차로 감각과 행동이 향상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장난감을 주고 그것을 가지고 노는 동안 아이들의 지능이 향상되는 것을 발견하고 감각의 자극을 통한 교육과 치료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89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교육학회에 참가한 마리아는 “장애아들도 평범한 아이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역설하며 장애아동에 대한 교육개혁을 정부에 촉구했다. 구호에 그치지 않고, 마리아는 스스로 정신지체아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한 그녀 스스로 정신 지체 아동들 사이로 뛰어들어 1898년부터 2년 간 로마의 국립 특수교육 학교에서 그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치료 의학자 이타르와 세겡의 저술에 감명을 받은 마리아 몬테소리는 그들의 이론을 실제에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정신지체 어린이들의 감각을 개발하기 위해 특수한 도구를 만들고, 이를 만지고 느끼면서 아이들이 변해 가는 모습을 관찰하였다. 확실히 성과가 있었다. 도구를 만지고 느끼면서 산만하던 아이들은 집중력이 생기고 이전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밖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몬테소리의 교육법으로 많은 정신지체아들의 지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시험에 합격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교육계, 의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시련은 그녀를 가만 두지 않았다. 동료 의사 주세페 몬테사노와 사랑에 빠졌던 마리아는 그 사이에 아들 마리오를 낳았다. 그러나 그녀가 여자 의사라는 이유로 양가의 반대가 너무 심해 결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이의 아버지 몬테사노는 바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리며 아이까지 낳은 그녀를 버렸다.


당시 미혼모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존재였다. 아이는 은밀히 양부모에게 맡겨졌다. 어린이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녀였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는 돌볼 수 없는 아이러니한 불행이 그녀에게 닥친 것이다.


이즈음 마리아 몬테소리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녀는 이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1904년 로마 대학 인류학과 교수로 부임한다. 대학 강단에 선 마리아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교수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빈자(貧者)들의 교사’가 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한 그는 결국 교수직을 버린다.

자신의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개인적 불행과 어린이 교육에 대한 관심을 승화시켜 그녀는 다시 한번 교육자로의 길을 선택했다. 1907년 그녀는 로마의 슬럼가인 산 로렌츠에 빈민들을 위한 탁아소를 열었다. 2세에서 6세 사이의 어린이들이 그녀가 세운 탁아소에서 보살핌을 받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어로 ‘카사 데 밤비니(Casa dei Bambini)’, 즉, ‘어린이의 집’이라고 이름 지은 그녀의 탁아소에는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몬테소리는 의사 시절 정신 지체 아동들을 교육하던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일반 아동들에게 이 교육법을 적용하여 보았다.

마리아는 어린이집의 의자, 책상 등 모든 가구들을 아이들이 들어 옮기고 모양을 바꿀 수 있도록 작고 가볍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촉각, 시각, 청각을 자극하는 ‘감감 교구’들과 일상생활을 연습케 하는 ‘생활 교구’들을 장난감 대신 배치했다. 작은 물건 하나만 있어도 아이들은 만지고 느끼며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갔고, 이는 아이들의 지력(知力)을 향상하고, 감각을 풍부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인성도 교정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무조건 아이들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치던 기존의 교육방식을 그녀는 철저하게 거부하고 자신마의 방식으로 새로운 교육체계를 만들어나갔다. 아이들의 인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이 실시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아이들의 신체 구조에 맞는 책상과 의자가 개발된 것도 그녀가 최초였다. 아이들이 흥미를 갖는 갖가지 교재 도구가 개발되었고 이를 통해 아이들을 위한 교육시스템은 나날이 발전해갔다.

마리아는 특히 아이가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결코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사와 부모의 ‘제1 행동 철칙’으로 내세웠다. 그는 또 주변에 있는 단순한 사물이 훌륭한 교재로 활용된다는 것을 체득했다. 눈금이 새겨져 있고 숫자대로 정돈돼 있는 구슬을 산수 교재로 썼고, 조그만 나무판자는 아이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눈 운동 자료로 활용했다. 아이들은 이러한 도구들을 갖고 짧게는 15분에서, 길게는 1시간까지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교육이란 어린이의 생명에 대한 원조 활동이며, 어린이를 존중하고 어린이의 존재 그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어린이가 성숙하기 위해서 나아가려고 할 때 필요한 도움 즉,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아이들은 어른과 다르다는 기본 원칙을 지키면서 어린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정서적, 지적, 신체적으로 고루 키워져야 할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인식을 교육계에 실천으로 각인시킨 것이다.

1924년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당시

마리아 몬테소리의 카사 데 밤비니에서의 성과는 점차 입소문을 타고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 스스로 자신이 관찰하고 경험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책을 펴내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1909년 저서 <몬테소리 방법-유아교육에 적용한 과학적 교육방법>을 펴내면서 이른바 ‘몬테소리 교육법’을 창안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민감기’와 ‘흡수 정신’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생후 6살까지의 유아기는 외부의 모든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민감하게 흡수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유럽 언론에 의해 ‘유아원의 기적’으로 소개된 ‘몬테소리 교육법’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스페인, 네덜란드, 미국, 캐나다, 멕시코, 뉴질랜드, 인도, 중국 등에 자신의 이름을 딴 몬테소리 아카데미를 세웠다. 몬테소리 교육법은 자기 교육(Self-Education)을 기본으로 한다. 때론 교사가 특수한 ‘교육자료’를 마련해 설명하기도 하지만, 교사는 교실 뒤편에 남아 있고, 아이들이 스스로 알고, 익히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1922년에는 이탈리아의 교육부 장관이 되었으며, 몬테소리의 학교 및 교육 방법은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평화와 어린이 교육을 강조하는 등 몬테소리의 교육 방식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과 부딪히는 부분이 많았다. 결국 몬테소리는 공직을 사임하고 1934년 이탈리아를 떠나서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정착했다.

마리아는 1936년에 펴낸 <가족에서의 어린이>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교육철학을 설명했다.


“어린이에 대한 독재는 어른들이 범하기 쉬운 ‘보이지 않는 죄악’이다. 어떤 노예나 노동자도 어린이만큼 무한한 순종을 요구당해본 적이 없다. 이는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계속돼왔다. 이제 어린이들 편에서 생각할 때가 됐다”


국제몬테소리협회가 결성된 것은 1929년의 일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된 국제 몬테소리 대회는 1938년 영국에서 열린 제8회 대회를 끝으로 중단된다. 마리아는 파시스트의 통치로 1934년 조국 이탈리아를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파시즘의 깃발이 나부끼는 동안 몬테소리 교육은 유럽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점령 지역에서 몬테소리 학교는 모두 폐쇄됐다. 몬테소리 교육이 내세운 ‘자발성’ ‘독립성’ ‘창의성’은 무솔리니가 요구했던 사회 이념들과는 정면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몬테소리 교육이 재개된 것은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의용군에 체포돼 사살된 지 4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국제 몬테소리 대회가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다시 열린 것도 이때였다.


마리아는 1935년 이후부터 정력적인 집필활동에 매진한다. <아동기의 비밀>(1936)을 펴낸 것을 비롯해 <새로운 세계를 위한 교육>(1946) <인간의 잠재력 교육>(1948) <집중력 있는 사고>(1949) 등을 1~2년 간격으로 출간하며 아동교육 전도사 역할을 자임했다.

이후 많은 나라에서 몬테소리의 어린이 교육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몬테소리 식의 어린이집과 그녀의 교육법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페인, 네덜란드, 인도 등지에서 살면서 갖가지 저술활동과 강연을 통해 그녀가 알아낸 어린이 교육법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후 몬테소리는 1952년 네덜란드 노르드윅(Noordwijk)에서 뇌출혈로 향년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세 차례에 걸쳐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몬테소리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950년에 찍은 사진

그 와중에 그녀는 15세가 된 자신의 아들 마리오를 그제서야 당당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들 마리오 몬테소리는 어머니를 도와 그녀의 교육법을 알리는 데 앞장서 평생을 두고 그녀의 조력자가 되었다.


그가 사망한 뒤 몬테소리 운동은 아들 마리오 몬테소리와 손녀 레닐레 몬테소리에 의해 계승됐다. 마리오는 몬테소리 운동을 전개하면서 어머니가 평생 입버릇처럼 했던 이 말을 잊지 않고 강조했다고 한다.

아들 마리오와 함께
“핀을 꽂아 놓은 ‘박제된 나비’처럼 자기 자리에 늘 고정돼 있는 아이들…. 교육은 박제된 나비들에게 덧셈과 뺄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비의 날개에 꼽힌 핀을 뽑아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처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세상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기존의 세력이라고 하는 이들이 못 박아놓은 장벽을 뛰어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요즘 여자 의사를 며느리로 맞이하는데, 여자가 의사이기 때문에 싫다고 하는 집안이 있을까?


지금은  말도 안 된다며 웃겠지만, 여자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사회적 룰이 정해져 있던 시기에는 그러했다. 심지어 이미 아이를 낳은 입장이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앞서 내용에서 간단하게 아이를 양부모에게 맡겨 15년간 다른 사람이 키웠고 15살이 되어서야 아이를 데려왔다고 했지만, 정작 아들 마리오를 자신의 자식이라고 데리고 와서 함께 살면서도 그녀는 평생을 마리오를 아들이라고 소개하지 못하고 다니는 곳마다 아들을 조카라고 소개하는 굴욕적인 연기를 해야만 했다.

말년에 아들 마리오와 함께

그녀가 살던 시대에서 여자 의사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 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사회지도층이나 회사의 상위 조직에 미혼모가 당당히 자신의 아들을 소개할 수 있는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못했다. 이제 겨우 이혼녀에게 씌워졌던 십자가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겨운 시대의 모든 첫발을 내디뎠던 그녀는 기득권을 당당히 포기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대학교수직은 의사보다 더 확실한 그녀의 사회적 지위와 성공을 담보해주는 위치였다. 그런데 그녀는 사회를 위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엄마들을 위한 제대로 된 교육과 탁아를 하겠다며 그 교수직을 포기한다.


지금 뭔가 확실한 지위와 보상을 아직 담보되지 못한 막연한 미래를 위해 버리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나은 위치와 부와 명예를 노리는 승부수일 수도 있지만, 마리아의 경우처럼 성공하는 것이 부와 명예가 아닌 자신이 정말로 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일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상상컨대, 자신이 사랑해서 아이까지 낳은 여자를 버렸던 그 빌어먹을 의사와 어떻게 연결되었다면 마리아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 7년이나 공부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의 신념을 살려 어린이의 집을 운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작 부모의 손길과 교육이 필요했던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15년간이나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만 했다. 그리고 15살이 된 아들일 데리고 와서도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감추고 사회생활을 했어야만 했다. 그녀에게 그 아이러니한 상황이 얼마나 기구하고 얼마나 힘겨웠을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글을 통해 그녀의 사람을 오늘 살펴본 이들이라면 모두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가 단지 유명해지자고, 돈을 많이 벌자고 했다면 굳이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를 하다 말고 다시 대학에 들어가 7년이나 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멀쩡하게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교수직을 사직하면서 어린이집 원장으로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전쟁과 차별 속에서 자신이 세운 이념이 제대로 꽃피지도 못하는 상황을 감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지금 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사회적인 통념에 이치에 맞지 않고 말도 안 된다고 비난받거나 힐난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했을 때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면 그것이 정말로 절실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정말 한줄기 빛과 같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시작하는데 망설일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결정한 당신의 삶에 있어, 사회적 통념으로 그것이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거나 그것이 앞으로 당신의 장래에 큰 도움이 안 된다거나 특히 그것이 당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선구자적인 첫 테이프를 끊는 일이라서 손가락질을 받거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비난받는다면 그런 하찮은 헛소리들에 귀를 기울여 상처받을 필요 없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이라면, 분명히 옳은 길이고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 방해받거나 거부당할 이유가 없다면 당당히 당신의 목소리를 높여라. 그리고 이뤄내라. 당신을 방해하는 사회의 통념이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당신의 당당함으로 뚫고 나아가라. 그리하면 당신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또 다른 당신들이 훨씬 더 잘 닦인 길로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생각해도 옳은 것이고, 맞는 것이지만 돈이 되지 않고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제껏 하지 않았던 것이라며 같잖은 조언 같은 비아냥을 날린다면 한 마디 해주어라.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잖아. 그리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게 나이어서 안될 이유는 없잖아?”


당신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아주 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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