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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7. 2022

가는 곳마다 쫓겨나고 정신병자라고 비난받았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예술가로서 우뚝 서다.

177번째 대가의 이야기.


1904년, 스페인 카탈루냐 동북부의 소도시 피게라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탈루냐계 변호사이자 공증인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 형이 뇌수막염으로 사망했고, 그의 부모가 그를 형의 환생이라고 믿으며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3살 어린 여동생 안나 마리아는 이후에 커서 오빠의 인생과 예술에 대한 책을 집필한 작가로 성장한다.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자기 성격이 고집불통에다 안하무인인 성격이었다고 자신을 회상한다. 그는 금기시된 것들에 대한 도전으로 유년시절을 보낸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공립학교의 교육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가 16살이 되던 해에 그를 프랑스어 학교에 보냈다. 그는 가족의 여름 별장이 있는 카탈루냐 지로나 주의 카다케스(Cadaqués)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후 그의 부모는 그에게 첫 전시 스튜디오를 카다케스에 제공해주었다.


1916년 그는 가족과 함께한 여름휴가에서 처음 현대미술을 접한다. 그리고 이듬해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 자신이 그린 목탄화 전시회를 개최한다. 1921년 그가 17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아버지의 재혼에 대해서 ‘이모를 존경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기술했지만, 실상은 사춘기를 접어들며 아버지와의 마찰이 매우 잦았고 격화되어갔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영화 제작자로, 20세기 미술에 큰 족적을 남긴 우리에게는 살바도르 달리로 유명한 본명, 살바도르 도밍고 펠리페 하신토 달리 이 도메네크(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의 이야기이다.


그는, S.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설에 공명, 의식 속의 꿈이나 환상의 세계를 자상하게 표현했다. 스스로 ‘편집광적·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그의 창작 수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녹은 시계들이 사막에 널려 있는 풍경을 그린 <기억의 지속>처럼, 익숙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문맥 속에 놓았다. 그런 작품에서 보여준 충돌과 부조화는 평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그해,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절에 달리는 다른 천재들을 만나며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학창 시절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 시인 로르카와 영화감독 부뉴엘을 만났다. 부뉴엘과는 크게 논란이 되었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를 공동 제작하기도 했다.


로르카는, 다른 사람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던 달리가 천재라고 인정했던 스페인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훗날 스페인 내전의 희생양으로 로르카가 어처구니없이 그라나다에서 처형당하자 그는 그때의 심경을 일기에 적나라하게 비판하며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과 심지어는 프랑코를 추종하는 파시스트들까지도 로르카의 죽음을 이용하여 수치스러운 선전선동을 일삼았다. 오늘날 로르카를 보라! 어떻게 되었나? 그는 정치적 영웅이 되어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살바도르 달리, 한 때 그의 절친한 지기였던 나는 이제 신과 역사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바이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그는 백 퍼센트 순수한 시인이었으며 내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완벽하게 비정치적인 사람이었음을 맹세한다’라고 말이다. 그는 단지, 개인적인 타인이 결코 범해서는 안 될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시대의 가련한 희생양이었다.”


학창 시절 마드리드의 대학을 다니며 그는 멋쟁이로 상당히 유명했다고 한다. 172cm의 키에 길게 기른 구레나룻, 코트, 스타킹 등이 미국에서 유행하던 유미주의와 일치했다. 학창 초반 그는 입체파의 성향을 띄었지만 다다이즘을 실험적으로 접한 후 입체파보다 다다이즘이 그의 작품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그는 반정부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잠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한다.


급기야, 1926년 기말고사에서 부정행위한 것이 발각되어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일설에 의하면 달리의 퇴학 사유가 ‘선생을 비판하고 교내에서 학생을 선동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기도 하고, 미술사 과목의 답안 제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자서전에 ‘심사위원보다 내가 더 완벽하게 답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제출을 거부했다’고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자신의 순결을 뿔로 범하게 될 젊은 처녀>(1954)

그래서 퇴학이 아니라 자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달리 박물관의 <달리 연대기>에 의하면 그는 ‘학교 체제 속 작품의 평가에 대해 염증을 느꼈고 교수들이 자신의 그림을 평가할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퇴했다고 한다.


그러한 사실을 입증할만한 일화도 전하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성모 마리아의 고딕 조각을 보고 ‘눈에 보이는 대로’ 정확하게 그리라는 교수의 과제에 광고지에서 본 저울을 그려낸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자기 자신이 세기의 천재라고 확신하고 있던 달리는 고딕 조각의 성모 마리아를 저울로 그렸고, 그 그림을 보고 아연실색하고 있는 교수에게 “선생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 고딕 성모상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울을 보았습니다”라는 황당한 답변을 했다. 이것은 그의 기행의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달리는 아버지의 돈을 펑펑 쓰면서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보고, 그리고, 조작했다. 그는 미술아카데미에서의 파행적인 행동으로 정학 처분, 반정부 활동 혐의로 감옥생활도 하면서 아슬아슬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앞서 언급했던 스페인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이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동문이자 절친관계였던 달리는 인터뷰에서 그를 아웃팅 시키며 동성애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둘의 관계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바로 <리틀 애쉬>다.


로르카는 스페인의 국민 시인이자 민족 운동가였기 때문에 한때 스페인 정부는 로르카의 사회적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달리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인터뷰와는 별개로 달리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야 자서전 집필 작가를 통해 “그것은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었다”며 두 사람의 연인관계를 암시했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1926년, 달리는 자신이 존경하던 파블로 피카소를 파리에서 만나게 된다. 피카소는 후안 미로를 비롯한 자신의 친구들에게 달리를 소개했고 그 영향으로 향후 몇 년간 피카소의 화풍과 큐비즘이 달리의 작품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르셀로나의 인형>(1927년), <달빛 아래의 정물화>(1927년)을 그렸던 시기에 달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탐독하며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였고 이는 달리가 꿈과 정신의 세계에 대해 표현하게 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관능적인 죽음>(1951)

하루는 달리가 독일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시인 에드워드 제임스와 함께 자신이 존경하는 프로이트를 방문하러 갔다. 달리는 편집증에 관해 발표한 자신의 글을 프로이트에게 읽어봐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무심하게 대했다. 달리가 물고 늘어지자 프로이트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완벽한 스페인 사람의 원형은 내 처음 봤소. 이 광적인 집요함이라니요!”


달리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인데, 이것은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리는 파리로 여행을 가, 초현실주의 운동에 합류했다. 이전에 다다주의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이 이끌었던 초현실주의 그룹의 미술가와 작가들은 합리적 사고에 좌우되기 쉬운 개념이나 이미지를 거부하고,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서 영감을 찾았다. 달리는 이미지에 대해 무의식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가 ‘편집증적인 비평 활동’이라고 불렀던 과정, 즉 환각 상태로 자기 자신을 유도했다. 그의 그림들은 모두 꿈속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그 속에서 모든 사물들은 황혼의 메마른 풍경을 배경으로,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변형된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문맥 속에 놓음으로써 생긴 충돌과 부조화 때문에 달리의 작품은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시초라고 알려진 앙드레 브르통과의 불화로 인해 초현실주의 화가 그룹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의 기이한 언행은 브르통이 평생을 걸쳐 지키려고 했던 초현실주의의 순수함과 엄격함에 균열을 냈고, 특히 달리가 자주 정치적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 때문에, 초현실주의가 그렇게 싸우고자 했던 자본주의, 파시즘의 망령을 찬양하는 발언을 자주 하여 브르통을 비롯한 수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달리의 발언 자체는 진지했다기보다는 찬양을 빙자한 빈정거림에 가까웠던, 종잡을 수 없는 빈정거림이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초현실주의 추구의 끝은 결국 스스로를 부정하고 파괴하고 뛰어넘는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달리의 수많은 빈정거림과 악성 조크들은 어떤 면에서는 초현실주의의 정수를 가장 잘 구현해냈다고도 오늘날 평가받고 있다.

그에게 보이는 다른 유명 화가들과 가장 큰 차이점은 가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와 그의 반려자 갈라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입장, 이른바 부유한 층에 속했기 때문에 생활고를 겪으며 불우한 시절을 보내거나 생활을 위해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고, 실제로도 돈을 위해 예술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아비다 돌라스(Avida Dollars)’라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가지고 활동했던 배경을 통해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달리와 갈라

1929년 카다케스의 집에서 많은 이들을 초대한 가운데 달리는 자신의 운명적인 뮤즈, 갈라(본명은 엘레나 이바노바 디야 코노바(Елена Ивановна Дьяконова)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의 열성적인 구애에 흔들려 연정을 품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파리에서 달리의 개인전이 열리던 도중 동반 도주하여 홀연히 잠적했으며, 이후 갈라는 1934년 폴 엘뤼아르와 이혼하고 달리와 결혼하게 된다. 갈라는 달리보다 10살이나 연상이었는데 이때 갈라가 40세, 달리는 30세였다.

이후 갈라는 달리의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달리의 매니저로서 그의 작품 전시와 일정 조정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모든 전시 장소 계약과 작품 판매는 모두 그녀의 손을 거쳐 성사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때때로 달리의 그림에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달리는 갈라를 매우 사랑했다. 주변 사람들이 ‘달리는 갈라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는 오직 갈라만을 위해 발레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를 제작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젊은 남자에 지나친 탐닉을 보였던 갈라는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고 그래 보이고 싶은 욕망에 유난히 집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랄 수 있는 성형수술까지 감행했다. 또한 피부를 위해 고가의 화장품들을 사용하고 수시로 병원의 시술을 받으며 관리에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달리의 아버지는 불륜 관계에서 시작되었던 갈라와 달리의 결혼에 대해 매우 반대했다. 그 와중에 그의 아버지는 달리가 프랑스 전시에서 ‘나는 그저 재미로 어머니의 초상화에 침을 뱉곤 한다’라는 인터뷰 한 기사를 읽고 당연히 화를 냈으며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지만 달리는 거절했다.


결국 달리는 1929년 상속권을 박탈당했으며 또한 카다케스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말 것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다음 해 여름, 달리와 갈라는 포르트리가트(Port-lligat) 해변에 작은 오두막을 사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몇 년에 걸쳐 주변의 땅과 오두막들을 매입해 빌라를 지었다. 포르트리가트(Port-lligat)와 카다퀘스는 매우 가까운 거리였고, 이후 아버지는 달리와 그의 아내 갈라를 차츰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신념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달리는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그는 194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41년에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열었다. 달리는 뉴욕에서 영화, 연극, 패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은 “정말 큰 충격을 주었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과학, 신비주의, 종교와 관련된 더욱 아카데미적인 양식으로 변했다. 여전히 에로틱한 주제들을 다루긴 했지만, 기독교적인 도상이 그의 작품의 주를 이루었다. <참치 잡이>(1966~1967) 같은 대작을 포함한 그의 후기 작품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은 정신분석학적 스릴러 영화 <스펠바운드>(1945)를 찍을 때 꿈의 시퀀스를 만들어줄 미술감독이 필요했다. 그때 살바도르 달리를 떠올려 바로 연락을 취한다. 당연히 달리는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달리는 옥상, 피라미드, 무도회장, 도박장의 네 장면에서 커다랗게 확대된 가위가 커튼에 그려진 눈을 자르는 장면을 제작했다. 그러나 달리가 처음에 계획했던 대부분의 기획안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라서 실행되지 못하고 만다. 그는 1949년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와 잉태한 성모,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 등 종교적 색채를 드러낸 작품들을 제작한다.

<십자가 처형>(1954)

1968년 달리는 갈라에게 지로나의 성을 사 주었다. 그리고 달리는 갈라의 요청에 따라 그녀의 허락 없이는 그 성에 접근하지 않을 것까지 약속해준다. 자신의 오랜 뮤즈가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달리는 신경쇠약과 우울, 그리고 건강악화를 겪게 된다. 이 와중에 갈라는 젊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70년대에도 사생활과 상관없이 여전히 작품 활동은 아직 활발했다. 1969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무대 연출과 프로그램 콘셉트 아트를 만들기도 했으며, 피게라스에 달리 미술관을 세우기 위한 재단을 창설했으며 미술관의 천장화 제작에 참가하였다. 또한 뉴욕에서 최초의 입체 작품을 전시하는 등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말년의 달리

하지만 76세가 되던 1980년, 중풍의 영향으로 달리는 붓을 잡기가 힘들 만큼 수전증에 시달리게 된다. 갈라의 불륜이 지속되면서 달리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그녀를 폭행하여 갈비뼈 두 개를 부러트리고 갈라는 흥분한 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리움을 투여했는데, 적정량을 넘어선 투약으로 달리가 혼수상태에 빠져버리고 또 이것을 처치하기 위해 암페타민이라는 중추신경 자극제를 투여하게 된다. 이러한 약물의 지속적 투여를 통해 달리는 부작용을 겪게 되고 그의 정신병이 더욱 심해지며 몸을 떨기까지 했다. 이 무렵 갈라 역시 노인성 치매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2년 달리는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후작 작위(Marqués de Dalí de Púbol)를 받게 되었지만 갈라가 같은 해 6월 10일 8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고, 이후 달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1984년 그의 집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친구들이 그를 구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달리는 화상을 입었으며, 일부 시각에서는 이 화재가 달리의 자살시도라고 보기도 했다.


달리는 심부전으로 1988년 11월 입원했고, 1989년 1월 23일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곳은 자신이 태어난 집과 불과 세 블록 떨어진 거리였다. 그의 장례는 Sant Pere 교회에서 치러졌으며 카를로스 국왕이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의 미술관인 피게라스 극장 미술관에 안치되었다.


자식은 없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다가 2017년 7월 난데없이 61세인 ‘빌라 아벨 마르티네즈’라는 여성이 딸이라고 주장하며, 3700억이 넘는 (사회단체에 속해져있던)달리 재산의 상당수 상속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논란 끝에 28년 만에 묘지가 파헤쳐졌고 피부와 손톱, 뼈에서 DNA 샘플이 채취됐다. 스페인 국립 독성학 법의학 연구소에서 이 샘플을 통해 DNA 조사를 하게 되었으나 분석 결과, 사실이 아닌 사기극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해당 여성은 묘지 발굴 비용을 물어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검사를 위해 다시 파헤치고 꺼낸 그의 관

살바도르 달리보다 20세기 미술에 더 큰 족적을 남긴 미술가는 거의 없다. 그의 작품들은 커다란 명성을 얻었고, 그의 기벽들은 전설이 되었다.


우리에게 그의 대표작으로 익히 알려진 <기억의 지속>(1931) 같은 작품은 흐늘거리는 시계의 이미지로 매우 강력하게 남아 있다. 그 그림은 달리가 두통에 시달려 친구들과 같이 극장에 가기로 한 약속 장소에 갈라만 보내고 집에 혼자 남아 우연히 그린 것이다.

<기억의 지속>(1931)

당시 작업 중이던 풍경화에 그려 넣을 오브제가 떠오르지 않아 불을 끄고 작업실을 나가려는 순간, 두 개의 흐늘거리는 시계가 ‘보였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올리브 나무 가지에 척하니 걸쳐져 있었다. 이 작품을 순식간에 완성한 뒤 극장에서 돌아온 갈라에게 공개했다. 눈을 감게 하고 그림 앞에 앉게 한 뒤 하나, 둘, 셋을 세고는 눈을 뜨게 했다. 그림을 본 갈라는 자신이 어떤 공연을 보고 왔는지 완전히 잊을 정도로 감탄했다.


그림이 그녀의 조금 전 기억을 모두 앗아간 것이다. 이 즈음 달리는 파리뿐 아니라 미국과 런던에서도 인정받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영화, 퍼포먼스, 강연, 저술은 물론 뉴욕의 백화점 매장 전시 등을 통하여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나타난다.


그를 언급함에 있어 초현실주의와 더불어 그가 비정상이었다는 점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물론 그의 인생을 보면 어느 한 구석 정상적인 구석이 없어 보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현실 부적응 장애는 예술가로서는 축복받은 일이기도 했다. 고전적으로 천재성을 능가해 보였던 수많은 예술가들은 연주와 노래의 극단적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이 만든 상처나 혹은 선천적인 장애를 달리와 같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랑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완벽하게 일반인들과는 다른 천재임을 태아적부터 인식했다.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지만, 어느 순간 그것마저도 넘어서 버렸다. 초현실을 넘어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넘나듦이 자유로운 예술가였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에게 있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는 무너진다.


예술가가 천재라고 불리기 위해 정신병자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예술로 승화시키는데 일일이 일반인들에게 그것을 설명하거나 자신이 일반적이지 않을 것을 구구절절이 설명해가면서 예술행위를 하는 이는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술행위가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까지 살펴보았던 시대를 앞서갔던 사상가들이 그러하였고, 일반인들이 도저히 꿈도 꾸지 못한 모험을 꿈꿨던 탐험가들의 인생이 그러하였다.


당신이 발견한 새로운 대륙이 지구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당장 우주인이 되어 어떤 인류도 찾아내지 못한 행성을 찾아낼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든이 넘는 천수를 누리면서도 달리는 자신이 결핍을 가지고 있다거나 다른 일반인들이 보기에 자신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런 자신의 창의적이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만들어내고 창조하는 것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그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그의 목적이 부와 명예가 아니었다는 것이 오늘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당신이 꿈꾸는 혹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거나 다른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볼 때는 당치않은 황당하고 가치 없는,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만한 일일 수도 있다.


아주 작게는 당신이 지금 속한 곳에서 당신이 하는 일의 방식을 가지고서도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당신을 비난하고 당신에게 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늘 당장 당신에게 사회의 기본적인 상식이나 룰을 무시하라고 권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믿고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않으면서 그저 주눅 들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혹은, ‘세상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하는 행동은 그저 튀는 거니까 그러지 말고 무난하게.’ 따위의 생각에 갇히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은 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의구현이 옳은 것을 알지만, 그것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그것을 위해 에너지를 쓰고 관공서에 항의를 하고 정식으로 민원을 내며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뜻을 모아 사회를 움직이려는 솔선수범을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현실과 타협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해봐야 사회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당신이 사회를 바꾸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신포도 이론’을 펼치며 패배자의 인생을 살지 말라고 말해주기 위해 달리의 당당했던 삶을 가져왔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는 실패한 인생이다. 여간 실패한 정도가 아니다. 남의 아내였던 열 살이나 많은 아줌마와 열애 끝에 결혼했지만, 그녀가 더 젊은 남자들과 바람피우는 것을 보아야 했고, 정작 돈을 벌어 그녀의 바람피우는 자금으로 배경이 되어주어야만 했다. 똘아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고, 예술이랍시고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고 욕을 먹었으며, 초현실주의를 함께 주창하던 이들에게 밀려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작자라는 욕을 먹었다.


그래서 그가 주눅 들고 그들에게 영합하거나 꼬리를 내리고 죽어지냈던가? 아니다. 그는 당당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했고,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자 한 것이 아닌데, 그러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뒤를 따라와 주었다. 본래 부와 명예는 따르고자 하면 얻기 어렵고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붙게 되어 있는 것들이다.


오늘도 당신의 삶을, 현실의 타협점에 두고 자신을 틀에 가두며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며 시들어져 가는 당신에게 달리가 자신의 예술관을 통해 전해달라고 했던 말을 전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초현실주의자로서 나의 성공은 내가 초현실주의를 현실에 융합시키지 않는 한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다. 나의 상상력은 고전주의로 돌아가야만 했다. 완성해야 할 작품이 하나 남아 있었고, 그 작품을 완성하려면 내 여생을 다 바쳐도 모자랄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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