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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8. 2022

월급도 못 받고, 두 번이나 자살시도에, 우울증까지..

전 세계에 일본 애니의 저력을 알리는 전설로 우뚝 서다.

178번째 대가의 이야기.


초등학교 시절부터 만화와 텔레비전에 푹 빠져 살았던 이른바 1세대 오타쿠. 중학교 시절에는 순정만화에도 심취,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부의 부장을 맡을 정도로 그림 실력이 출중했다.

2021년 방영된 다큐멘터리 <프로페셔널; 일의 유의>에서 그는 당시를 상황에 대해 담담하게 회고했다. 그의 아버지는 나무를 베는 일을 했었는데, 팀원 때문에 다리를 저는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갖게 되었고 세상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며 세상에 대한 증오를 쏟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증오는 흘러넘쳐 아들을 향했고, 그는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마다 TV와 그림의 세계로 도피했다고 한다.


덕분에 그림실력을 일취월장 늘어갔지만, 문제는 그림의 내용이었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사람이 아닌 기계나 거대 로봇이었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팔다리가 뜯기고 파괴되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가 뭔가 결여된 자신의 마음이 반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며 ‘인간은 뭔가가 결여된 것에 애틋함을 느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엔 아마추어 특촬 모임에도 들어간 적도 있었으며, 덕분에 재수한 끝에 실기시험만으로 입학 가능한 오사카 예술대학에 들어갔으나 학업보다는 동아리 활동에 매진했다. 재학 시절에는 《돌아온 울트라맨》이란 패러디 특촬물에 《애국 전대 대일본》 DAICON III, IV 오프닝 같은 작품의 제작에 참여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동아리 시절에 만난 학우(가이낙스를 설립하게 되는 주축 멤버들)와의 인연으로 DAICON FILM의 멤버로, 오사카에서 열린 SF대회의 오프닝 애니메이션과 특촬 영상 제작에 참가하게 되었다.

일본의 애니메이터이자 애니메이션 감독, 영화감독으로 1990년대 일본 만화의 개방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대표작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전 세계에 일본 애니의 저력을 알린 안노 히데아키(庵野 秀明; あんのひであき)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만난 지인들과의 인연으로, 아르바이트 애니메이터로 스튜디오 누에의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의 원화를 그리거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의 거신병 장면의 원화를 담당하게 된다.


잡지 <아니메쥬>에 실린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화 스태프의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하게 되었는데, 면접 과정에서 가져간 원화를 미야자키가 보고 그 재능을 높이 평가받아 까다롭다고 여겨졌던 클라이맥스의 거신병 등장 장면을 맡겼다고 한다. 물론 실상은 당시 작업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인데, 안노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겨졌다.


스즈키 토시오 말로는 그런 어려운 씬은 젊은 애들에게 맡겨야 필사적으로 하니까 일부러 맡겼다고 밝힌 바 있다. 안노가 나중에 밝히길, 자신은 거신병 장면 타임을 더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화팀에 여유가 없어서 개봉일자에 못 맞추니 그걸로 됐다고 했는데, 굳이 안노가 거신병의 그림자도 색을 더 넣어서 거대한 입체감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미야자키 하야오로부터 2색까지 늘리는 것은 허락하나 3색으로 늘리면 죽여버린다는 쪽지를 받았다고 한다.

안노는 스태프들 몰래 타임을 늘려 원화를 그려버렸지만, 지금도 “거신병이 무너져지기 전에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고개를 한 바퀴 돌리면서 녹아내렸어야 했다, 그리고 거신병이 녹아내리는 장면도 원화와 원화 사이의 동화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동화 5장이면 된다고 지시했는데 동화 7장을 넣었어야 했다. 녹아내리는 것이 너무 빨라서 러시 필름을 봤을 때는 죽고 싶었다. 실패작이었다”라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이 3개월간 카나다 요시노리와도 함께 일했는데, 카나다는 애니메이션은 대충 할 곳은 대충 해도 된다는 단순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안노는 거기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즉, 정해진 예산이 100일 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면까지 일일이 공을 들이면 전반적으로 퀄리티가 낮아질 뿐으로, 보여주고 싶은 대목에 80을 들이고 나머지는 20으로 대충 해도 된다는 진리 아닌 진리였다. 이 가르침은 이후 안노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 시기 지브리에서 채용이 결정되고, 오사카 예대는 학비를 내지 않아 제적되고 말았다.

애니메이터 카나다 요시노리

안노는 이 시절에 만난 이타노 이치로와 미야자키 하야오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 작화 스승이 이타노고 연출 스승이 미야자키이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로부터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의 역할이 무언가에 대해 확실하게 배웠다고 한다.


이때의 작업을 발판 삼아 1985년도에 같이 DAICON IV를 만들었던 사람들(야마가 히로유키, 아카이 타카미, 오카다 토시오)과 ‘가이낙스’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왕립우주군》 제작에 참여했다. 당시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일반 대중들의 반응은 재미없다며 외면했고 흥행을 말아먹고 쫄딱 망할 지경에 이른다. 당초 이 작품만 만들고 해산할 예정이었던 가이낙스는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빚잔치를 할 방법을 궁리하여 여러 애니메이션의 하청작업과 간간히 만드는 오리지널 창작물로 회사의 생계를 꾸려가게 된다.

《왕립우주군》의 실패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전기였다. 가이낙스 사장이었던 오카다 토시오는 짊어진 빚을 갚기 위해 잘 팔릴만한 노선으로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미소녀와 메카가 등장하는 각종 패러디로 버무려진 OVA SF 애니메이션 《톱을 노려라!》를 기획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각본을 읽은 안노는 자신이 감독을 자청한다. 이 작품은 의외로 많이 팔렸고, 재능 있는 작화가 정도로만 인식되던 그가 뛰어난 연출 능력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고 이로서 업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톱을 노려라!》

《톱을 노려라!》의 준수한 흥행과 평가 이후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NHK와 도호라는 굴지의 대기업으로부터 주문받게 되었고 이 작품은 단번에 가이낙스의 대표작이 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며 안노를 애니메이션계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에게 상당한 좌절을 안긴 빛 좋은 개살구였다. 사실상 이 작업에서의 가이낙스의 역할은 하청업체로서 버거운 스케줄을 감내해야 했으며 스폰서와의 잦은 충돌을 겪으며 회사 조직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는데, 그나마 실질적인 수익은 대부분 NHK에서 가져가게 됐고 대박이 났음에도 빚은 다 갚지도 못한 채였다.


결국 《나디아》 종영 직후 오카다 토시오가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는 가이낙스를 떠나버렸고, 마에다 마히로 등의 인물들은 퇴사하여 ‘곤조’라는 회사를 따로 설립한다.

《나디아》

그렇게 그는 《나디아》 이후 4년의 공백기를 갖게 된다.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말에 따르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기획이 오랫동안 승인되지 않은 채 지지부진했고, 안노는 스튜디오에서 이불을 깔고서 4년이나 폐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2년이 지난 시점에는 월급도 안 나왔다고. 안노는 이 시절 자신에게 있어서 멘토이자 목표이기도 한 토미노 요시유키를 찾아가 그의 아래에서 일을 하면서 비로소 초심으로 돌아와 다시금 자신만의 방향성을 추구하게 된다.


《나디아》 종영 이후 운동을 시작하며 몸에 체력을 붙였고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스쿠버 다이빙을 취미로 즐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도 스쿠버 다이빙 장면이 약간 뜬금없이 나오기도 한다.

1995년, 그의 대표작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드디어 세상에 선보였고 온갖 은유, 오마주, 패러디에 음모론으로 점철된 이 작품은 이례적일 정도로 대성공을 이루었다.


안노에게는 4년 만에 겨우 만든 작품으로, 작품 제작 전에도 힘들었지만, 에바의 제작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제작비에 압박을 받으며 간신히 완성했다. 결국 TV판의 종영 이후 안노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두문불출하다가, 사이가 벌어져 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독려로 폐인 생활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미야자키의 ‘이후에 다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손 끝 하나 대지 말아라’라는 조언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렇게 힘들게 만든 작품이라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있던 안노는 주변의 공격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1996년에 있던 인터뷰에서는, 논란이 많던 최종화 두 에피소드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으며 만약 이상하다면 시청자 니들 잘못’이라고까지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이후 안노와 가이낙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극장판의 제작에 착수하게 되고, 극장판으로 총집편 사도 신생(이른바 ‘데스 & 리버스’ 판)과 완결 편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내놓았다.


사도 신생은 TV판 1화~24화의 단순한 총집영상.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본편의 25화와 26화를 대신하는 새로운 에바 TV판의 결말이다. 파격적인 연출과 내용 전개로 끝을 맺는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완전히 멘붕에 빠지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에서도 안노는 “어릴 적에 건담 프라모델 다 만들어놓고 불태운 일이 종종 있었다”며, “완벽하게 끝낸다는 것 자체가 싫다”라고 토로하여 그런 결말이 나온 배경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풀기도 했다.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내용을 정리한 바에 의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는, 안노가 어린 시절부터 TV를 보고 자란 ‘테레비 세대’가 자신이 좋아하는 특촬물(울트라 시리즈, 가면라이더) + 아니메 거대 로봇물(기동전사 건담, 전설거신 이데온) + 인형극 썬더버드 + 영미 SF 소설(유년기의 끝)과 영화에서 이것저것 흉내 낸 것(패러디와 오마쥬) 일 뿐으로, 자신이 영향을 받은 작품을 스스로 소화해서 재창조한 철학과 사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평은 당시 어마어마했던 에반게리온 팬들에게는 들리지도 않았다


안노 혼자서 그렇게 고군분투하여 대박을 터트리자 가이낙스에는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만큼의 거액이 들어왔다. 하지만 막상 돈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가이낙스 경영진들은 사업 계획도 없고 그냥 되는대로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막장 경영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막대한 돈과 인력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손해만 본 프로젝트가 수없이 많았고, 프로젝트가 줄줄이 망해도 경영진이나 담당 책임자는 돈이 있으니 개의치 않고 막장 식의 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후 1999년 당시 가이낙스 사장이었던 사와무라 타케시(澤村武伺)의 탈세 사건이 일어나자 안노 본인은 경영에 전혀 손을 댄 적이 없고 해당 사건을 당시에는 전혀 몰랐음에도 에반게리온의 방송국인 TV 도쿄에 불려 가 사죄를 해야만 했다.

다음 해인 2000년 탈세 사건으로 사와무라 타케시가 사장직을 사임하고 야마가 히로유키가 사장이 되었고 야마가는 안노에게 ‘네 이름이 대표이사직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신용을 해주지 않는다. 이름만이라도 괜찮으니 임원을 해 달라’라는 말을 듣고 이름만 올리는 거라면 상관없다며 대표이사직을 맡게 된다.


몇 년이 지난 2003년 무렵, 막장 경영은 계속되었고 안노가 직접 확인한 바, 일을 거의 안 하는 사원들은 높은 급료를 받고 있었고, 정작 가이낙스를 부자로 만들어준 에반게리온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사원들은 급료가 낮았다고 한다. 안노는 수차례 사내 시스템의 개선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2004년 또다시 에반게리온 덕으로 회사가 살아나지만 이로 인해 90년대 후반 당시처럼 돈을 낭비하게 된다.


이후 안노는 스튜디오 카라를 설립해 가이낙스를 퇴사하지만, 이후로도 가이낙스와의 로열티 및 빚 문제, 사장의 성추행 사건 등으로 가이낙스와의 관계는 여전히 안 좋은 상태 그대로였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결국 안노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여운이 가실 즈음인 98년, 에바에서의 독기가 빠진 순정만화 원작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의 감독을 맡았다. 여러 실험적인 연출로 나름 호평을 받고 상업적 성과도 나쁘지 않았으나, 막판 전개에서 자금 부족으로 여러 실험적 연출만 하다가 마지막화를 흐지부지 끝내버렸는데, 이 때문에 에반게리온 때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그러나 애니메이터 스즈키 슌지의 증언에 의하면 고교생의 사랑보다 더 앞서 나간(?) 묘사를 제대로 해보려다가 프로듀서와 싸우고 강판된 거라고 밝혀졌다. 즉, 막판에 쫓겨나서 이야기가 산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후 안노는 한동안 애니메이션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러브 & 팝》, 《식일》 같은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실험적 실사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평론은 좋지 않았다. 애니에서나 먹힐 기법을 무리하게 실사 영화에서 시도했다는 비평을 받았다. 그러던 와중 2003년에 연출한 《큐티하니》 실사영화판을 애니메이션스러운 연출법과 안노 자신의 취향이 적극 반영하여 B급 수준으로 만들어 완전히 흥행에 실패하고 제작사까지 망하게 만들어버린다.

망작 《큐티하니》

2021년 방영한 <프로페셔널의 유의>의 ‘안노 편’에서, 그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끝나고 인터넷에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살해 모의를 하는 게시판을 보았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자살 시도를 2번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 이후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싫어졌다고 한다.

《에반게리온: Q》

그러나 안노는 《에반게리온: Q》를 만들면서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각본, 콘티를 너무 늦게 작성해서 제대로 작화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고 스즈키 슌지가 화를 내고, 회사를 그만두는 등 제작 현장에 불화가 생기게 된다. 그렇게 안노는 대부분의 창작 활동을 접게 된다. 1년간 회사에서 출근하지 않고 두문불출했으며 동료와 아내 안노 모요코가 회사를 대신 운영했다고 한다.


이때의 이야기는 그의 아내이자 만화가 안노 모요코가 <커다란 순무>라는 작품으로 애니 화했다. 그 작품에서 Q라는 순무를 뽑고 안노가 만신창이가 되는 걸 볼 수 있으며 그 이후 아내의 지원을 받고 요양을 하며 일본 애니(메이터) 견본시장, 신 고질라를 만든다. 그리고 표정이 밝아지고 깨달음을 얻는 엔딩으로 끝난다. 정황상 2017년 경에는 우울증을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와 그의 아내

《에반게리온 Q》 안노는 토호로부터 《고질라》 신작의 감독직을 제의받아 이를 수락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에바 팬들 사이에서는 ‘하던 거나 제대로 끝내라’는 악평과 비아냥이 이어졌으나, 고질라 시리즈 팬들은 12년 만에 드디어 신작이 나온다며 기대감이 높아졌다.

《신 고질라》

《신 고질라》는 초대 고질라를 현대 일본에 맞게 리메이크해서, 고질라 자체보다는 고질라라는 거대한 재난이 닥쳤을 때 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일본 관료제의 경직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개봉 이후 여러 매체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2016년 일본 실사영화 중 흥행 1위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해 일본 아카데미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7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때 호평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고 우울증을 극복했다고 한다.


현재 코로나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을 예고하고서도 론칭을 못하고는 있지만,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걸출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이제 환갑을 넘은 그의 심하게(?) 굴곡진 인생을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당신이 그보다 더 스펙터클한 굴곡진 삶을 살지는 않았기에 그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통해 충분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의 뼈를 때리는 이야기부터 하자면, 그림으로 시작해서 만화로 이름을 날린 그는 무엇보다 애니메이터로서 ‘인물’을 전혀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그 대신에 메카, 건물, 기계, 폭파, 파편 작화는 수준급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타고났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그가 이타노 이치로의 집에 눌러앉아서 이 기술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물이나 거대 메카닉 작화는 지금도 업계 일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이낙스의 《왕립우주군》 제작할 때 폭파 장면에 대해서도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우주선이 발사될 때 연기와 불꽃을 리얼하게 그리기 위해 그 와중에 직접 미국 NASA 견학까지 다녀왔다. 그 한컷을 위해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끝이냐구?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현재 그는 만화가가 아니라 연출가이다.

애니메이션의 연출은 그림을 직접 그리는 게 아니니 그의 인물 터치가 엉망인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신 그는 콘티를 작성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래서 인물 묘사도 상당히 현실적으로 리얼하게 감정 묘사를 하고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을 잘 그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사람을 묘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 것을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 투성이의 일본 애니계에서 애니메이션 연출가로서 1세대 오타쿠 감독 중에서는 최고란 평가를 받고 있다. 연출 분야에서는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오시이 마모루(《공각기동대》 감독)와 함께 최고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야오와 담소나누는 안노

여기서 그가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그만의 능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대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를 있게 한 인생작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그저 카피의 종합이라고 평가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맞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연출 복사기라는 점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토미노 요시유키, 데자키 오사무, 카나다 요시노리, 이타노 이치로, 짓소지 아키오, 이쿠하라 쿠니히코 같은 거장들이나 하는 연출을 ‘그대로’ 구사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대가의 곁에서 도제 방식으로 수행을 하는 것은 대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는 당대 최고의 여러 거장의 연출법을 모두 습득해서 그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능력을 실제로 입증해 보인 유일한 인물이다. 앞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안노가 새로운 걸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였으면서도 자신의 뒤를 이어 줄 만한 인물로 안노를 지목하는 묘한 포지션을 보인다. 스즈키 토시오가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의 속편은 안노에게 맡겨야 한다는 견해를 보이자 미야자키가 “그놈이라면 괜찮아”라고 동의한 것은 그가 단순한 카피 수준의 따라쟁이를 능가하는 역량을 가졌음을 반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안노가 자신만의 색깔을 이루지 못했다고 비난받지 않고 인정받는 이유는, 작품에 따라 혹은 그 전문 분야에 따라 최고의 대가가 보였던 장점만을 편집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편집과 작품의 템포는 영화감독 오카모토 기하치(岡本喜八)를 존경해 따라 했다고 안노가 대놓고 오마주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안노는, 팬들에게 ‘토미노 요시유키(《기동전사 건담》의 대가)가 되고 싶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된 인물’로 자주 불린다. 그가 숭배하는 인물은 토미노이지만 정작 안노의 연출법은 오히려 미야자키의 연출법이 더욱 많이 엿보이며 스스로 재해석하고 연구한 티도 더 많이 보인다는 평가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애니메이션공부했거나 그 분야에 잔뼈가 굵은 이들은 앞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평가가 어떤 의미인지 당시 충분히 이해했다. 안노의 기본적 창작 성향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재조명하고 오마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명장면이라고 평가되었던 장면들 중 상당수는 《울트라맨》, 《우주전함 야마토》, 《데빌맨》, 《이데온》, 《고질라》 등에 등장하는 장면을 오마주한 장면이다. 《나디아》만 해도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타임보칸》, 《우주전함 야마토》를 오마주한 장면이 대단히 많다. 오타쿠 안노급이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B급 영화의 오마주도 굉장히 많다. 그가 좋아하는, 실존하는 밀리터리 병기나 군함 등도 그의 작품에는 반드시 어딘가에 등장한다. 그러한 장면들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해서 해석하거나 안노가 직접 만든 창조적 장면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으나 그런 장면은 없다고 내가 장담할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것도 고려해서 평가가 이루어지지만 일본이 아닌 지역에는 안노와 같은 세대이면서도 같은 문화 환경에 노출되어 온 사람이 극히 드물다. 그리고 안노가 영향을 받은 서브컬처에 정통한 사람이 해외에서는 얼마 없기 때문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껍데기 씌우기 식의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면 그에게 그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없다는 것인데 그것이 과연 인정받을만한 것이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예술은커녕 아무것도 아니라며 사무라이처럼 칼을 세운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를 인정하는 행간을 제대로 당신이 읽지 못한 것이다. 안노는 도제 방식에서 말하는 그 카피의 단계를 넘어서 자신만의 오리지널 카피를 종합편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패러디 및 오마주가 기본 성향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여러 가지 실험을 한다. 그저 실험이 아니 제대로 돈이 투자된 작품에도 거침없는 실험정신을 투영시킨다. 심지어 애니메이션의 매체적 특성까지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는 도중에 실사 영상을 집어넣기도 하고,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에서는 원작 만화 장면을 그대로 넣기도 한 바 있다.


도무지 그 의도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장면을 짜깁기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 있기에, 이 부분에서 안노의 실험 정신이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평가되고는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장면에서조차 기승전결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실사영화감독으로 자신의 부활을 알렸던 《신 고질라》부터는 단순히 콘티에 의존하지 않고 모션 캡처와 CG로 일단 한 번 참고용 영상을 만들고 이를 돌려가면서 최적의 앵글과 연기를 찾아낸 뒤 최종 영상 촬영에 반영하는 이른바 ‘프리비즈’ 작업을 도입하고 이에 심취해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에도 이를 도입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콘티에서 바로 작화를 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결국 자기 머릿속에만 있는 평범한 게 나올 뿐이라 이런 방식을 사용해서 참고로 삼고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도 많이 받아 자신의 능력 이상의 영상을 만들고 싶다고 하였다. 그가 최근 이뤄내 극찬을 받은 영상미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완벽주의자여서 감독 데뷔작 《톱을 노려라!》에서는 외부로 발주한 그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리테이크 해달라고 하자, 하청의 미술감독이 시간도 없고 못해먹겠다며 거절하는 자리에서 바로, 한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근처의 책장에 머리를 꽝꽝 찍으면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젠장! 젠장!!” 하면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보다 못한 당시 작화 감독이었던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우는 놈은 못 이긴다면서 철야작업으로 수정해 준 일화도 유명하다.


그렇게 그는 하나씩 자신을 만들어갔고 대가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과 방식에 대해 최고의 방식을 배워나갔다. 그렇다고 그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처럼 자폐적 성향이 강한 오타쿠 일거라는 착각들을 많이 하는데, 그의 주변 증언에 의하면 그는 대학 때부터 현재의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도 여자 친구가 끊긴 적이 없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들어서고도 업계 사람들과의 대인관계가 워낙 활발해서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에 참여하는 스타 애니메이터 군단이 모두 안노가 끌고 온 개인적인 인맥들인 것만으로도 그의 성향이 폐쇄적 오타쿠일 것이라는 착각을 부숴준다.

오카토 토시오

오카다 토시오는 안노가 왜 천재인지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를 평했다.

“다른 사람들은 무언가를 볼 때 멋진 장면이 나오면 멋지다고 생각하고 끝나지만 안노는 늘 ‘이게 어째서 멋진가?’라며 그것을 분석한다.”


가이낙스의 방만하고 불공평한 인센티브제를 보며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는 항상 자신의 작품에서 일하는 애니메이터들에게 정당한 수익을 배분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가 가이낙스에 불공평한 시스템을 개선하라고 주장해도 듣지 않자 스튜디오 카라를 만들고 나온 이유가 든 것도 더 많은 인센티브를 주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의 곁에 왜 사람들이 모이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당신이라면, 아버지에게 학대받고, 팔다리 뜯겨나가는 그림을 그리는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내며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고 정진할 수 있었겠는가? 지인들과 회사를 만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대작을 만들었는데 전문가들에게 호평을 받고도 다 말아먹어 회사가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면 도망가지 않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더 열심히 하청작업과 다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다른 작품으로 대박을 냈지만, 방영했던 방송사가 이익을 독식하는 과정을 보고, 4년간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해 회사에서 기거하면서 절치부심 다음 작품을 만들어낼 엄두라도 냈겠는가?


그 역시 사람이었다. 아무리 대박이 났고, 전 세계에 일본 애니의 저력을 과시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자신을 죽이겠다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우울증에 빠져 자살시도를 2번이나 했고, 이후에도 우울증에 빠져 작품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아내와 가족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고, 애니도 아닌 실사영화의 감독을 맡아 다시 부활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실패가 그 좌절이 당신을 침몰시킬 수 없는 것이라 단정 지어라. 오늘 살펴본 안노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당신은 그 좌절과 실패를 통해 그다음을 불가피하게 진행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다시 당신을 정점으로 올릴 성공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말이 황당하고 어떻게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꾸역꾸역 선택한 차선이 최선으로 변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매일같이 무려 178명째 대가들의 실패로 점철된 삶을 돋보기로 들여다봐온 내 말을 믿어라.


당신은 결코 그대로 좌절하고 주저앉을 운명이 아니다. 아무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고, 세상이 당신을 등지고 신이 당신에게 어떤 도움의 손길도 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거 잘 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잠시 당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결코 신은 당신을 등지지 않고 아주 잘 주시하고 있으며, 당신이 지금 그 좌절을 어떻게 극복해나가고 있는지를 보고 당신을 도울지에 대해 결정을 내릴 것이다.


잊지 마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과 당신은 알고 있는 이 약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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