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Mar 09. 2022

부모의 불화에, 엄마의 죽음에, 기괴한 상상만 했었지만

최고의 의사로, 누구도 연구하지 못했던 현대 심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다.

179번째 대가의 이야기.


1875년, 스위스 북부 투르가우 주의 콘스탄스 호숫가의 작은 시골 마을 케스빌에서 츠빙글리 파에 속하는 개신교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본래 독일 마인츠에서 살았지만, 의사였던 할아버지 때에 스위스 바젤로 이사하여 이후로 스위스 국적을 갖게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부모의 갈등이 심각한 상태로 치닫는 탓에 그리 밝지 못했다. 특히 그의 어머니가 3살 때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하면서 그는 더욱 큰 심리적 불안을 얻게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불안을 조성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부모의 불화가 심각했다. 특히 프로이드가 말한 오이디푸스라고 불리는 시기에 그는 부모를 모방의 대상이 아닌 그들의 심판자와 같은 입장에서 그의 부모를 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부모의 관계는 심각할 정도로 안 좋았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것은 나에게 일종의 자아 팽창을 가져왔으며, 삶에 대한 내 신뢰감을 근본에서부터 허물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자기 내면의 세계 속으로 침전하기 시작하여 자기애적인 내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두 번째, 어머니가 장기간의 입원을 하게 되면서 파생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의 부족을 야기하게 되었다. 어린 소년의 삶이 어머니를 통해 흡수하고 성장하게 되는 여성적인 특유의 따스함을 강제적인 이유로 인해 상실한 것이다. 이 상실은 그에게 존재 심층은 연약하며 믿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형성하게 했고, 삶의 근본적인 불신을 심어 주게 되었다.


세 번째, 그의 연상(聯想)적 상징이다. 그는 어린 시절 중에서 특히 밤을 무서워했다. 그것은 외로움의 또 다른 형태였다. 그에게 밤은 흔히 들었던 귀신들이 나오는 곳이라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밤이 무서웠으며 그것은 검은색과 동일시되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교회에서 집례를 할 때 항상 입던 옷이 검은색이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항상 유약한 아버지의 이미지와 일치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장과정의 특이점으로 인해,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이며,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큰 줄기를 만든 학자이자 콤플렉스 심리학과 분석심리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이야기이다.


그는 프로이트의 수제자라 불릴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엔 아들러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을 창시해냈다.

융은 동양사상에 대응하는 서구 사상의 원류로 연금술을 재발견하였다.


연금술을 물질의 변화가 아닌 영혼의 연성으로 해석하였으며, 상징들이 가진 의미를 추적하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상징들에 대한 해석은 꿈이나 환자에게서 채집할 수 있는 인간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상징들과 연결되어 사례 해석의 뒷받침이 되었다.

이 무렵, 그는 또 하나의 경험을 하는데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 장례식 때 이루어지는 의식들 속에서 그는 죽음을 보았고 예수는 죽음을 가져오는 부정적 인식을 그에게 주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그 당시 제수이트(Jesuite) 파의 사제를 산길에서 만났는데  제수이트파 사제들의 검은 망토와 검은 모자가 그에게는 죽음의 사자로 인식되며 임사체험을 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특히, 유년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또 다른 경험은, 거대한 남근(男根)에 관한 꿈을 꾼 일이었다. 이때 그가 꾼 꿈속에서 보았던 남근은 보통의 남근이 아닌 제의적인(rituel) 남근으로서 지하세계의 신(dieu souterrain)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그는 후에 분석했다. 이 꿈에 의하면 그는 이 무렵에 융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하 세계의 신과 동일시하고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긍정적인 존재나 사랑할 만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산 사람의 신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신이었다.


열 살 되던 무렵 그는 자신의 내면에 또 하나의 사람이 있지 않은가 하는 내면적 분열을 심각하게 겪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의 아이덴티티(Identity)에 혼돈이 생겼던 것이다. 이때부터 융은 자기 내면에서 또 다른 인격인 무의식을 발견하고 그의 진정한 모습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탐구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적 분열을 감당할 수 있을만한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제의적 행태 속에 빠져 들었다. 이것은 대단히 개인적인 것이고, 신비적이며, 자기애적인 형태였다.

  

융은 바젤 근교의 클라인휘닝겐에서 성장했고, 11세 때에 바젤의 김나지움에 입학해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12살 되던 해에, 그는 다시 한번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하루는 그가 학교에서 집에 오던 길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 그는 아버지가, "융이 건강하지 못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야."라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아 삶의 과제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와 비슷한 무렵 그의 신비적 누미노제 체험을 하게 된다. 아름다운 성당에 똥이 떨어져 성당이 무너지는 내면적 정신 에너지를 경험했다고 회상했는데, 융은 그것을 자신이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을 했던 민감한 청소년기에 견진례(confirmation)를 기대하며 가졌던 어떤 종교적 현상도 일어나지 않음을 생긴 상실감은 그를 기독교에 대한 더욱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했고 그 생각들은 융이 기독교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그는 10대, 청소년기의 정점에 달하게 되면서 그의 내면에 그의 일상적인 인격과는 또 다른 또 하나의 인격이 들어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융은 그 인격들에게 이름까지 붙였는데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인격을 '제1인격', 실제의 모습을 '제2인격'이라고 불렀다. 이때 그는 쇼펜하우어와 칸트를 읽었으며 많은 종교 서적도 읽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1895년에 융은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바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896년에 부친이 사망함으로써 융은 대학에 다니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의무를 떠맡아야 했다.


1900년, 의사 자격시험을 앞두고 융은 정신의학자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 에빙의 책을 읽으며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신의학은 아직 개척되지 않은 분야였으며, 의과대학에서 정규 과목으로 편입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융은 정신의학을 통해 본인이 관심을 갖는 정신과 자연이라는 두 가지 영역의 조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게 된다.


1900년에 대학을 졸업한 융은 취리히 의과대학 부설 부르크횔츨리 병원에 취업한다. 그는 ‘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정신의학자 오이겐 블로일러 밑에서 연구와 치료에 전념했다. 융은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자유 연상’ 기법을 개선한 ‘단어 연상’ 기법을 제안해서 주목을 받았고, 아울러 환자가 지닌 고통의 근본 원인이 되는 “다양한 생각의 집합”을 일컫는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고안했다.


사실, 당시 정신의학은 정신과 환자들의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융은 정신과 환자들의 증상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탐색하면서 치료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1903년부터 사람들의 연상(association) 속에는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1903년에 융은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했다. 스위스에서도 손꼽히는 시계 제조업자의 딸인 엠마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서 융의 연구에 독립성을 보장해주었다. 엠마는 훗날 프로이트와 서신을 교환하고 정신분석가로 활동할 만큼 지적이고 명석했기 때문에, 융에게는 이상적인 배우자 겸 동료 노릇을 해 주었다. 1905년에 융은 취리히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더욱 명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 시기에 융은 자신의 학문적 완성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주요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의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어설프게 둘의 관계를 들어본 일반인들은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를 ‘사제지간’으로 생각하는데 그건 상당한 오독이자, 잘못된 인식이다. 프로이트와 만났을 당시에 융은 이미 정신의학 분야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한 중견 학자이자 한 대학의 교수였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수많은 환자와 손님이 찾아왔고, 취리히 의과대학에서는 재학생 이외의 일반인 수강생까지도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학생들로 가득 찰 정도였다. 따라서 비록 19년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융은 학자 대 학자라는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프로이트와 교우할 수 있었다.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융은 프로이트와 활발히 서신을 교환했으며, 1907년 2월에 빈으로 찾아가 프로이트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첫 만남에 대해 융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는 낮 한 시에 만났다. 그리고 열세 시간 동안 정말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융이라는 중견 학자의 지지는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실질적으로는 융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지닌 장점 때문이었고, 표면적으로는 유대인 위주의 정신분석 운동에 비(非) 유대인인 융이 가담함으로써, 이 운동의 성격에 대한 오해가 줄어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융은 프로이트의 성(性)에 대한 이론에서 성(性)이 일종의 누미노제적인 실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나중에 둘이 갈라서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융은 도대체 프로이트가 '성적인 외상(外傷, trauma)이 모든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수긍할 수 없었다. 프로이트 역시 융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융과 프로이트의 결별은 융이 1912년 <리비도의 변형과 상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였다. 그의 이 논문에서 그 나름대로의 근친상간에 대한 사상과 리비도의 변형에 관해서 역설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융이 성적인 것들을 상징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파악했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그 두 사람의 결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융의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913년에 융은 오래 몸담았던 취리히 의과대학에서 사임했고,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시적인 고립에 빠져들었다.

 

프로이트와의 결별 이후 융은 내면의 불확실성 속에 사로잡혀 지내게 되었다. 이제는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룩해 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 융은 많은 꿈들과 비전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스스로 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 시절 돌멩이로 집 짓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 속에서 그는 인간 정신의 비밀을 알게 해 주고, 무의식이 가진 치유의 힘을 체험하게 되었다. 더욱더 이 놀이는 사람들의 정동(emotion) 뒤에 숨은 이미지의 의미를 깨달을 때 치유의 힘은 더욱더 활발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09년에 미국 여행 중의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프로이트,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클라크 대학의 총장인 G. 스탠리 홀, 그리고 융.

그는 꿈속에서 만나는 많은 인물들의 이미지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는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해독하려 애썼다. 그러다 그 이미지들이 다른 이미지들과 더불어 각각 그림자(ombre), 아니마(anima), 자기(Soi)의 원형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이미지들이 그저 꿈을 꾼다고 해서 언제나 나타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가 아닌 스스로 계시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융은 조금씩 인간 정신의 객관성의 영역, '영혼의 실제'에 관해서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융은 영지주의와 연금술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무의식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또 다른 인격의 목소리를 듣고, 만다라를 치료의 도구로 응용하기도 했다.


1916년 어느 날, 그는 그의 내적인 체험을 창조적으로 형상화시켜야 하겠다는 강력한 내면의 요청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는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개의 설교"를 썼으며, 만달라(mandala)를 최초로 그리게 되었다. 융은 만달라를 그려가면서 그의 인격의 전체성이 점차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만달라는 인격의 전체성을 나타내는 자기(Soi)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융은 처음에 무의식이 그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을 신뢰하고 있었다. 1918-1919년 사이에 그는 어둠에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것은 아니마가 가진 파괴적인 힘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이런 그의 무의식을 실현하게 되었다. 즉 개성화된 것이다.


융은 무의식의 요소들에 관해서 연구하면서 무의식에는 사람들의 정신 속에 있는 서로 대치적인 힘들을 통합시키려고 하는 조정 기능(fonction reulatrice)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결과 인간 정신에는 본래 전체성에 이르고자 하는 성향이 있으며, 이 성향은 인간 정신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통합시키는 요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과정에 융은 인간 정신의 중심에 있는 이 이미지가 만달라 상 속에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깊은 연구를 하게 되었다.


1922년에 융은 취리히 호수 인근의 볼링겐 마을에 땅을 구입하고, 수도나 전기 같은 편의시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소박한 별장을 지었다. 설계와 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33년간 증축을 거듭한 볼링겐 별장은 융의 사상적 발전과 업적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황금 꽃의 비밀(太乙金花宗旨)>

나아가 그는 동양학자 리하르트 빌헬름이 번역한 <황금 꽃의 비밀(太乙金花宗旨)>를 읽고 연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었다. 만달라가 인간 정신의 중심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면 연금술은 이 과정을 계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연금술을 연구하면서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실존적인 위기 상태에서 내면적으로 겪었던 체험들이 객관적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인간 정신의 실체성과 역동성, 그리고 영원한 신비를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또 여러 차례 아프리카와 인도를 여행하면서 유럽 이외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관심을 넓혔다.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프로이트를 비롯한 여러 정신의학자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학계에서 퇴출되고 망명을 떠나야 했다. 반면 융은 스위스 국적에 비(非)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며 활동을 펼쳤다. 이후 독일 학계가 노골적인 친(親) 나치 입장으로 선회하자, 그 일원이었던 융도 자연스레 나치 협력자, 또는 반(反) 유대주의자로 여겨졌다. 여기서 비롯된 비난은 지금까지도 융을 비난하는 빌미를 제공하곤 한다.


융이 나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아예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독일 학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칫 나치에 악용될 수 있는 빌미를 남겼다는 점만으로도 그를 나치 동조자로 모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예컨대, 나치의 세력이 정점이던 1939년에도 융은 프로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프로이트라는 이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정신사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라는 추모사를 발표할 정도로 신의를 지켰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국의 앨런 덜레스를 도와 OSS의 정보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융은 나치 수뇌부의 심리 상태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으며, 특히 히틀러에 대해서는 궁지에 몰릴 경우 자살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즉, 그는 그런 사상으로 인한 그들의 정치적 논의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설명이 오히려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입장에 대한 논란이 일자 융은 “내가 나치이거나 나치였다는 것은 악명 높은 거짓말이다”라고 단언했지만, 이후로도 그의 행적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은 그치지 않았다.  


1944년에 융은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입원 와중에 그는 임사체험을 경험했으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차라리 이 상태로 세상을 하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황홀감을 느꼈다고 한다. 1947년에는 두 번째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건강을 회복한 다음부터는 다시 활발한 연구에 돌입했다. 1948년에는 취리히에 C. G. 융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욜란데 야코비와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등으로 대표되는 융의 제자들이 활약하기 시작한 것도 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말년까지도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쳐, 기독교에 대한 분석으로 큰 논란을 일으킨 <아이온>(1951)과 <욥에게 보내는 답>(1952), UFO 현상을 집단 무의식의 발현으로 해석한 <현대의 신화>(1958), 융 사상의 입문서로 유명한 <인간과 상징>(1961) 등을 출간하였다. 82세 때인 1957년부터는 5년간 집필 및 구술을 통해 자서전을 집필한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이 유명한 말로 시작되는 자서전은 융의 생애와 이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신비 체험에 대한 증언을 담았고, 그의 사후인 1961년에야 간행되었다.

1955년에 취리히에서는 80세 생일을 맞이한 융을 위해 대대적인 축하 행사가 펼쳐졌다. 하지만 그 해 말에는 부인 엠마가 사망하면서, 융도 급속히 노쇠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6년이 지난 1961년, 칼 구스타프 융은 퀴스나흐트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그의 나이 86세였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졌다.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



오늘 융의 생애를 당신에게 소개하게 된 이유는, 프로이트도 그렇지만 융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어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과 그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오해들로 인해 그가, 그의 삶 전체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지 못한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한창 연구에 몰두할 때 융의 고백과도 같은 기록들을 볼 수 있었던 동료는 그를 '최고의 의사이자 걸어 다니는 종합적인 정신병자'라고 표현했었다. 오늘 굳이 이전의 다른 대가들과 달리 그의 방식을 패러디하여 그의 유년기서부터 정신과적인 원인 분석을 서술방식으로 채택한 것은 그에 대한 오마주이자 다른 사람의 생을 들여다보는 여러 가지 방식 중에서 이와 같은 치밀한 분석적인 방식도 있음을 살짝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의 동료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일반인들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이상하고 삐뚤어진 소년기에서부터 청소년기를 이상한 꿈이나 영적인 것들에 탐닉하며 지냈고, 학술적으로 정립되지 못했던 정신의학의 세계를 자신이 직접 들어가 개척하고 이론을 세워나가면서도 결코 범위에 한정을 두지 않고 모든 범주의 학문과 학설과 교류를 배우고 익히고 자신의 이론에 적용해나갔다.

19살이나 많았던 프로이트와의 서신 교환으로 시작된 우정도 나중에 생각의 차이로 결별했을지언정 그가 프로이트에 대해 남긴 다음의 평가만으로도 그가 어떤 식으로 공부했고 학술적인 교류를 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없었더라면, 나는 (심리학 분야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겪었던 부모의 심각한 가정 불화라던가 자신의 기벽에 가까운 성격이라던가 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것을 학술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그 분야를 공부하는 것을 결심하는 일은 만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이야 정신의학 분야가 의학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고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분야라서 지원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가 의사로 지원할 즈음에는 엄밀하게 말해 그것은 의학분야에 속하는지조차 의구심이 들 정도의 수준으로 체계나 이론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전에 자신이 평생에 걸쳐 풀고 싶어 했던 문제를 풀기 위해 그 분야를 택했고, 누구나 미개하다며 들여다보지 않던 동양의 사상에까지 관심을 보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공부하고 자신의 연구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갔고 수정해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대 최고의 프로이트를 답습하고 그에게 묻어가는 행보가 아닌 자신이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학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다며 결별을 선언했고, 버젓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던 대학교수 자리를 과감하게 사직하고 자신의 연구를 좀 더 발전시키겠다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는 자신이 걸어 나가야 할 확고한 의사이자, 학자로서의 길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자신이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감정을 키워나간 것이 아니라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에 있는지를 찾았고, 현대인에게 있어 종교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그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다.


융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갖게 해 주고, 우주 안에서 그의 위치를 발견하게 해 주는 사상 체계와 확신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상징체계로서의 종교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삶이란 본래 초월적인 토대 위에 서있는 것이다'라고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라고 그는 역설했다.

그러나 현대에게 와서 종교는 이런 역할을 하지 못했고, 너무 피상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믿음 체계가 사람들에게 아무런 확신도, 헌신에의 동기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고백해 왔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가 존재 의의를 잃게 되었다는 점을 그는 논리적으로 밝혀나갔다. 그러므로 종교는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종교 상징들을 현대 세계에 맞도록 재해석해야 한다고 융은 말했다.


당신이라면 당신이 겪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당신의 현실과 결부시켜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평생을 쓸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결핍과 문제라고 일반인들이 치부하는 것들에 대해 당당히 풀어나가야 할 문제라며 마주할 수 있었겠는가?


세상을 살다 보면,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누구에게나 크던 작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르다. 대부분은 그 문제를 해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안고서 함께 공존하는 쪽을 택하곤 한다.

 

그러지 마라. 문제라면 게다가 그것이 아픔을 동반하거나 잘못된 것이라 고쳐야 할 것이라는 빨간불이 사이렌과 같이 당신의 내면에서 울리고 있다면 그것에 당당히 마주하고 직시하여 고쳐라. 어차피 평생을 살아가야 하고 그것이 스스로 사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고쳐나갈 준비를 하고 원인 분석을 하라. 혼자서 잘 못할 것 같으면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해서라도 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나가라.

계속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니까, 내가 골똘히 생각만 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니까, 그런 나약하고 비겁하며 안일한 생각으로 문제를 회피하지 마라.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당신의 문제이다. 문제의 원인부터 차근히 분석하고 풀어나가고 끊임없이 그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집요하게 매달려라. 융의 80년이 넘는 인생에서 보았던 것처럼 결국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삶이다.


당신의 삶을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살아내겠는가?

당신이 힘들고 아프고 누구에 이런 이야기를 하겠느냐며 한숨을 내쉬고 싶어 하는 마음, 잘 안다.


그런 당신을 아무 말 없이 꼬옥 안아주며 터져 나오는 당신의 울음소리에, "괜찮아. 다 풀릴 때까지 울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어?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울어. 그리고 다시 채워나가자."라고 말해 줄 사랑이 당신에게는 분명히 있다. 도저히 못 찾아도 없다면 내게 와라. 부족한 나라도 당신에게 미력하나마 힘이 될 수 있다면 내 그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마.


당신이 태어난 것이 신이 의도한 심오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당신이 살아가는 의미에도 당연히 신의 섭리는 함께 한다. 당신만 그것을 모르고 당신의 삶을 가벼이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의 하나뿐인 삶을 내가 응원하고 지지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월급도 못 받고, 두 번이나 자살시도에, 우울증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