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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10. 2022

선거란 선거는 모두 떨어져 바보라는 별명으로 불려도

결코 포기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마지막에 우뚝 서다.

180번째 대가의 이야기.


1946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3남 1녀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혼이고 이순례는 삼혼이었던 까닭에 이복누나와 이부누나가 각각 한 명씩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타이어 제조 관련 사업가였으나, 사기로 재산을 잃었고, 그가 태어났을 즈음은 가정에 경제적인 도움이 전혀 안 되어 어머니가 일을 하여 집안을 건사했다고 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의기소침해진 이후, 큰형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면서 그를 물심양면 지원하여 중학교 및 고등학교 입학에 도움을 주고 사법시험을 보겠다고 할 때도 용기를 북돋아주고 뒷바라지를 하여 큰형이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언급했다.


1953년, 진영대창 국민학교 입학을 시작으로 학창 시절이 시작되었는데, 1959년에 진영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돈이 없어 ‘외상’ 입학을 했다. 1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이승만 생일 기념 글짓기 대회가 열렸는데 도저히 쓸 수 없다며 '백지 동맹'을 주도하여 정학을 당했다. 2학년 때 부산에서 시험을 통해서 당시 부산일보의 사장 김지태가 만든 장학회인 부일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5급 공무원(지금의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큰형의 권유로 당시 부산에서 명문으로 알려졌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도 어려운 경제적 사정으로 공부만 하지 못하고 방황도 했는데, 지낼 숙소도 제대로 없었고, 졸업도 21살 즈음에야 뒤늦게 했다.


고등학교 졸업 즈음 농협 입사 시험을 쳤으나 떨어졌다. 한 달 반쯤 개인 회사를 다녔으나, 너무 적은 월급으로 생활이 도저히 되지 않아 퇴사하고 고시를 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집 근처의 산자락에 토담집을 만들어 공부했지만 시험에 필요한 책을 살 돈이 없어 울산에 가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이때 사고로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예비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병상에서 듣게 된다.


당시 고졸 출신이 사법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이라는 것을 합격해야 본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가 합격하자마자 사법시험 학력 제한이 없어졌다. 그 후 계속 고시에 매달렸다.


시험을 준비하는 중간에 34개월(2년 10개월)을 현역으로 12사단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최종 계급은 상등병이었는데, 병장이 아닌 이유는,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귀환한 병장이 많았기 때문이고 그가 분대장을 하지 않아서였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병장은 분대장에게만 주는 계급이었는데, 파병 문제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 특별 케이스로 병장 계급을 달아줬다.


전역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법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1973년 즈음, 약혼자가 결혼 적령기를 넘어 고시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영부인 권양숙 여사와 결혼하였고, 아이도 낳았다. 이때는 둘째 형 노건평이 세무 공무원으로 취직한 이후라 그나마 집안의 경제적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인권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김영삼에게 영입되어 1988년 국회의원이 되어 이른바 5공 청문회에서 전직 대통령, 재벌 회장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호통 질의하는 모습이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히며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명성을 떨치는 것으로 정치를 시작했던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별명 ‘바보’, 노무현(盧武鉉)의 이야기이다.


김영삼에게 영입되었지만,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김영삼과 결별하여 민주당계 정당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후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민주당 소속 후보가 당선되기 어려운 부산에 출마하여 낙선하는 그에게 지지자들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때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가 탄생하기도 했다.

1973년부터 사법시험을 보기 시작해 3번째인 1975년, 만 30세의 나이에 사법시험(17회)에 합격하였다. 당시 사법시험 합격자 중 안대희 전 대법관과 더불어 단 둘만이 고졸 출신이었다. 다만 안대희는 말이 고졸일 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중퇴 학력의 서울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노무현만을 당시의 유일한 고졸 법조인으로 기억하곤 한다. 7기 연수생으로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60명 중 47등으로 수료하였다.


당시 7기 연수생 출신 중 유명인으로는 안대희 전 대법관, 진영 국회의원 등이 있다. 그는 돈을 벌 수 있는 변호사를 희망했지만, 형과 어머니의 권유로 판사 임용을 신청한다. 이때는 성적순으로 판사 검사 변호사가 임용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1977년에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다. 고작 7개월간이긴 했지만 그의 판사 시절을 회상한 기록에 따르면 자신에게 맞지 않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

대전지방법원에서 7개월간의 판사 생활을 하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사임했다. 이는 1992년의 명예훼손과 관련되어 서울민사 지방법원 판결을 통해 사실임이 인정되었다. 당시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원고가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관되었으나, 7개월 만에 판사직을 사임한 주된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세 전문 변호사로, 소위 승률이 높은 변호사였다. 당시 상고 출신의 변호사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변호사들과는 달리 세법의 실질적인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개업 초기에는 형사사건을 조금 맡다가 이후 민사사건을 주로 맡으며, 등기업무를 취급하여 부산지역 사법서사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부산에 개업한 변호사가 거의 없던, 심지어 노무현까지 불과 3명이었다는 설까지 있던 시절에 법무사들의 밥줄인 등기업무를 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만의 밥그릇을 건드리는 것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당시 변호사들이 돌보지 않던 틈새시장을 직접 발로 뛰었던 것이다. 이 일화에 대해서는 영화 <변호인>에서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다.

굳이 ‘적나라’라는 표현을 쓴 것은 당시 부산의 변호사나 사법서사라고 하던 이들이 ‘변호사가 격 떨어지게 이따위 일까지 하냐?’라며 비웃는 장면이 아주 잘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1981년, 우연히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으로 변론을 맡게 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김광일 변호사는 경상도를 대표하는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는데, 이 사건을 위해 그는 무료 변호인단을 구성한다.


하지만 담당 검사 최병국이 변호에 참가하면 공범으로 함께 기소해 변호사 자격을 정지시키겠다고 협박하자 변호인단에서 빠졌고, 자신을 대신해 노무현에게 변호인단 참여를 부탁한다. 당시 변호인단으로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 총 5명이었다. 이는 노무현이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이때 검사 측은 물론이고 압박을 가하던 상대측에서는 선배 변호사인 김광일의 권유로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라왔을 뿐 치기 어린 젊은 법조인의 사고 정도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자 중 한 명을 면회하는 과정에서 고문 흔적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특유의 정의감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서 재판에 사활을 걸기 시작한다.

재판에서도 변호인단 중 가장 서열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부림 사건 피해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거의 본인도 피고인인 것처럼 열성으로 나서서 변호했고, 고문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도 재판 초반에는 변호사가 저렇게 흥분해서 변론을 해도 되나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와 고마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부 피고인들이 완전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인권 변호사계의 스타로 데뷔하게 된다.


이후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법률 상담을 해주거나 무료 법률 상담소를 개설하여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 혹은 담배 몇 갑에 소송을 대리해주기도 한다. 각종 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집은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유명했던 표현 중 ‘아스팔트 민주주의’라는 말도 그가 처음 했던 말이다. 그는 연설을 하다가 전경의 최루탄을 맞고 기절하는 일까지 겪었지만 마이크를 놓지 않고 시종일관 꾸짖는 연설을 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검찰은 그를 구속하였고, 안기부(안기부는 국정원의 전신)는 변협에 압력을 넣어서 그의 변호사 면허를 강제 정지시키고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등 불법으로 수시로 감시를 했지만, 정작 그즈음에 그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실패하고 만다.


인권 변호사 활동을 주목한 김영삼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동구에 출마해 당시 실세였던 민주정의당 허삼수를 꺾고 당선된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노무현이 김영삼에게 어차피 선거에 나가는 거라면 가장 쎈놈과 붙게 해 달라 해서 허삼수와 붙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 위원회(5공 청문회) 위원으로 선정되었고, 5공 청문회 때 발의자로 등장해 증인으로 참석한 정주영을 상대로 질의에 앞서 한 말이 매우 유명해졌다. 정주영은 대한민국 최대 재벌인 현대그룹의 수장이자, 자타공인 대한민국 대표 기업가였다. 게다가 특유의 거침없는 성격으로 유명했기에 정치권에서도 결코 함부로 대하기도 힘든 인물이었는데, 그런 정 회장이 일개 초선 의원, 그것도 겨우 40대 초반의 정치 신인 앞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둘의 질의응답은 이후 전설로 남았다. 노무현이 질의 중에 다소 감정적인 “의회는 바지저고리에 불과하고요?”라고 물으니 “뭐 그런 것도 있죠.”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친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때 노무현은 이렇게 일갈했다.


“그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부에는 5년 동안에 34억 5,000만 원이라는 돈을 널름널름 갖다 주면서 내 공장에서 내 돈 벌어 주려고 일하다가 죽었던 이 노동자에 대해서 4,000만원을 주느냐, 8,000만 원을 주느냐를 가지고 그렇게 싸워야 합니까? 그것이 인도적입니까? 그것이 기업이 할 일입니까? 답변하십시오!”


전두환과의 청문회 이후 분을 참지 못하고 명패를 내던진 것도 유명하다. 이 청문회를 통해, 5공 시절 억눌려 지내던 국민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통쾌한 일갈로 유명해지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 유명세로 인해 시간이 흘러서 대통령 선거까지 도전할 수 있도록 평가를 받게 되는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당시 무명의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은 5공 비리 청문회를 비롯해 3당 합당을 야합이라 비판하며 거부하고 정치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던 김영삼의 곁을 떠나면서 더욱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당시 통일민주당의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았던 회의 석상을 박차고 나오며 외친 일갈은 다음과 같다.


“이게 회의입니까?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


그렇게 그는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꼬마 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대변인과 부총재를 지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그의 정치 시련의 시작이었다. 초선 국회의원 임기 종료 후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동구에 재출마했으나 재선에 실패하면서 낙선하였고, 1995년, 제1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이 역시 낙선했다.


또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이종찬 등에 밀려 심지어 3위까지 밀리며 낙선했다. 이후 김원기, 김정길, 이부영, 박계동, 김부겸 등의 민주당 내 반(反) 이기택 성향 지구당위원장들과 함께 ‘국민통합 추진회의’(일명 ‘통추’)를 결성했으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추’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 여부를 놓고 분열되자 한나라당행을 선택한 이부영, 김부겸 등과 달리 쿠데타와 3당 합당의 원죄가 있는 당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며 새정치 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맡으며,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운다.

이후 이명박 당시 국회의원이 1998년 초,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려서 국회의원직을 자진 사임했고, 노무현은 그 해 7월의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원래는 서울 특별 시장직에 출마 선언을 한 상태였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고건 전 총리 영입 의견에 밀려 출마를 포기하고 대신 종로구에 공천된 것이다. 이때 역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던 동교동계 한광옥과 달리 노무현이 시장 후보 자리를 쿨하게 포기하자, DJ는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해야 한다’면서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지만, 보궐이라 반쪽인 2년만 보내고 난 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다시 부산에 출마한다. 부산은 전통적인 당시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다. 보좌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와 자녀들까지 전부 반대했다.


아내와 딸이 “종로에서 한 번만 더 해서 인지도를 높이고 부산에 내려가자”며 만류했지만 그의 고집은 확고했다. 참고로 출마한 선거구는 북구·강서구 을이었는데, 선거운동 초반에는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를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이변이 일어나나 싶기도 했지만, 결국 막판 한나라당 표심이 결집하며 허태열에게 밀려 35.2%의 득표율로 낙선한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도전을 계속 이어갔던 이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오히려 주목받는 낙선자가 되었고, 바로 이때부터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낙선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8월부터 해양수산부 장관을 8개월 동안 역임했다.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직원들과 같이 이메일로 대화를 하고 수평적 토론 문화를 새로이 정립했고, 다면평가를 비롯한 인사평가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공직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공무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탈권위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특유의 성격답게 장관에게 주어지는 특별 대접 같은 의전도 모두 없앴다. 장관 출근시간에 맞춰서 현관에 수위장과 비서진이 대기하고 있다가 관용차가 도착하면 수위장이 거수경례를 하고 차문을 열어주던 관행도 중단시켰다. 또한, 지방 출장에서 지역 공관장이 좋은 차를 빌려서 마중을 나오던 관행도 못 하게 했다.

2001년 12월, 16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경선 레이스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때 노무현은 행정 능력이 검증된 정치인은 아니었고, 당 내의 다른 대권주자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 지지율은 미미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과,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이인제의 당적 정체성을 공격하면서 이른바 노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역전승에 성공, 경선을 통과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유시민을 비롯해 훗날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비서관 및 실장으로 근무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당 대선후보가 되었을 당시 노무현은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새 시대가 찾아올 것 같기는 한데, 그때가 되면 자신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걸 들은 유시민은 새 시대의 첫 파도에 올라탄 거라서 자신이 거기까지 못 갈 수도 있지만 그 시대는 분명 온다 말했고, 노무현은 “새 시대가 오기만 한다면 내가 없어도 어때”라고 말했다고 한다.

본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맞붙게 되었다. 노무현 측은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회창 측은 부패 정권 심판, 정권교체 등의 공약을 내세워 치열한 접전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도 제기되었던 아들 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재차 인터넷에 퍼져나가자, 그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회창은 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초반 기선은 노무현이 앞서는 듯했지만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앞두고 나서 선거 악재가 터진 데다가 그 월드컵에 관심이 왕창 쏠리면서 투표율이 낮게 나왔고, 결국 제3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며 노무현은 큰 타격을 입으며 이회창이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이회창의 지지율이 높아졌다고 해도 당시 제3후보로 떠오르던 정몽준과 노무현을 완전히 압도할 기세는 아니었고, 이미 1987년 대선의 선례도 있었기 때문에 노무현 후보는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인기가 올라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하기로 했고,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다.


단일화 진행 후에는 이회창 후보를 여유 있게 앞섰지만 대선 전날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래서 노무현 후보가 손수 정몽준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분노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불러 모으는 효과를 낳았다는 분석이 있다.

결국 선거 결과 70.8%의 투표율로 노무현 후보가 48.9%를 얻으면서 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2.3%(57만여 표) 차이로 근소한 차이로 꺾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에서 최초의 영남 출신, 즉 지역주의를 타파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참여정부’라는 이름으로 정부를 출범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당 분당이란 초유의 사태 속에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뒤이은 17대 총선 결과 헌정 사상 최초로 개혁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한 상황이 연출되며 기대를 모았다.


한미 FTA를 강행 추진하였으며, 2007년 10월 2일 ~ 4일까지 북한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2차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2007년 12월 11일에는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서 서둘러 대처를 했으며, 대일 독트린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독도는 방문하지 못했다.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 중 가장 힘을 주었던 것은 바로 4대 개혁 입법으로, ‘국가보안법의 개정 또는 폐지, 사립학교법의 개정, 과거사진 상규 명법의 제정, 언론관계법 입법’이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이것을 ‘4대 악법’이라며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나섰다.(이걸 굳이 내가 왜 자세히 썼는지 법의 내용을 잘 보고 행간의 의미를 새기길 자란다. 무려 20년이 지난 지금 이것을 악착같이 막겠다는 이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말이다.)


2008년 2월 25일, 대통령 5년 임기를 마치고, 후임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뒤, 대통령으로서 모든 행보를 마친 뒤 대통령 자리에서 완전히 퇴임했다. 이후 KTX를 타고 퇴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서울이 아닌 고향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했는데, 퇴임 대통령이 고향으로 귀향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노무현은 공장폐수로 오염된 화포천을 살리기 위해 봉하마을 주민 및 지지자들과 함께 직접 하천에 나가 쓰레기를 주우며 정화를 위해 노력했고, 화포천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거나 불법 낚시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화포천 지킴이’를 신설하여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죽은 하천이라 불리던 화포천은 2009년 2월, 국토해양부로부터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완전히 탈바꿈하였으며, 멸종위기의 동·식물을 포함하여 600여 종의 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태학습의 장이 되었다. 훗날 노무현이 세상을 떠나고 수년 뒤 이 화포천에 국내에선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황새가 일본 도요요카 시에서 건너와 정착하여 큰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전직 대통령이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환경운동을 하며 주민, 관광객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외신에도 신선하게 비쳤는지 <뉴욕 타임스>에서는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낙향한 이후 인기를 끌며 새로운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장문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굉장히 오래 정치인으로, 국회의원으로 있었을 것이라 착각하지만 그가 국회의원으로 지냈던 시간은 10년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별 대단한 일도 하지 않은 썩어빠진 고인물같은 국회의원도 3선 이상을 한다. 3선이면 이미 10년이 훌쩍 넘는다. 그렇게 그는 온갖 선거란 선거는 다른 이들이 모두 안될 거라는 것만 챙겨가며 패가(敗家) 장군처럼 지고 또 졌다.


그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작 아버지 같았던 큰 형의 공을 자신의 공인 양 호가호위했던 작은 형의 비리에서부터 청백리에 추상같았던 그의 성격상 그가 모르게 이루어졌던 그의 가족들이 저지른 일들을 그가 이후에 알게 되면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정말로 찍어먹어 봐야 아는, 심지어 이전에 무지몽매한 군바리 딸이 대통령이 되면서 나라 꼴이 어떻게 산으로 가는지 경험을 하고서도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절반이나 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들에게 실망하여 너무너무 화가 났다.


나머지 절반의, 올바른 것을 올바르다고, 잘못된 것으로 회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이들을 위해 내가 같잖은 위로가 아닌 그들의 먹먹하고 허탈하며 속상한 그 마음을 어떻게 달래줄까 생각해보았다.


글을 통해 그 버러지 같은 것들이 좀 먹는 사회를, 국가를 바꿔보겠다고 바둥거렸던 시간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무기력해졌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들이 결국 그에게까지 가서 닿았다.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에 보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히어로를 생각한다.

그는 이미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그가 없어도 언젠가 우리는, 우리 국민들은 새 시대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 시대에 함께할 그는 없지만, 그리고 오늘 이 패배가 우리 모두에게 아픔이고 억울함이고 분노함일지라도 우리는 또 살아가야 하기에, 이겨내야만 한다.


그가 자신도 모르고 있던 그 수많은 진실을 알게 된 시점에 적은, 어쩌면 오늘의 우리들에게 남기고자 했던 당시 소회를 전하는 것으로, 오늘 속상해하고 있을 당신의 실패에,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인생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일 뿐...
진보의 실패는 더더욱 아니다.
내 인생의 좌절도 노무현의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와 진보를 추구하는 분들은 노무현을 버려야 한다.
나의 실패가 모두의 실패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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