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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11. 2022

수년간의 개발 끝에 발명한 기술을 빼앗기고 쫓겨났지만

세기를 바꾼 발명으로 세계 흐름의 판도를 바꾸다.

181번째 대가의 이야기.


현재는 독일인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지만 1397년이나 1398년이 유력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인츠에서는 1400년 6월 24일을 구텐베르크의 생일이라며 대대적인 공식 발표를 하며 축하했지만,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서 정한 날짜는 아니다. 그의 이름이 요하네스인 것에 착안하여 세례자 요한의 축일인 6월 24일을 그의 탄생일로 임의로(?) 지정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하급 귀족 출신으로 조폐국의 관리로 일했으며 모친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한편 요하네스 부친의 이름은 헨네 겐스플라이쉬 주흐 라덴(Henne Gensfleisch zur Laden)으로 성(姓)이 ‘구텐베르크(Gutenberg)’가 아니라 ‘겐스플라이슈(Gensfleisch)’였는데, 요하네스가 30살 경에 구텐베르크라는 이름의 저택을 사들이면서 ‘구텐베르크’라는 성을 사용한 것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가 유럽 역사에 남긴 족적에 비해 당대에도 후대에도 이상할 정도로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까지도 이동식 금속활자 인쇄기를 고안한 업적 외에 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었는데, 판매용으로 제작된 인쇄물 외에는 직접 자신에 대해 남긴 문서나 자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행적은 재판기록이나 몇몇 문서에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내용에 의존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으며 그나마 이 한 줌의 자료마저도 대부분 최근에 발굴된 것이다.


가 태어났던 1400년대 초반 마인츠에서는 귀족들에게 대항한 농민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 가문이었던 구텐베르크 가족은 한때, 마인츠를 떠나 ‘엘트 빌러’라는 작은 마을로 도피하기도 했었다. 1419년경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끝까지 학업을 마쳤는지조차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불확실하다. 이후 그는, 부친이 사망하는 것을 계기로 마인츠에서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서 화폐주조와 야금업에 종사한다.

신성 로마 제국 출신의 세공업자이자 인쇄업자로 근대 활판 인쇄술이 가능한 인쇄기를 발명하여 유럽 문화사의 지평을 뒤바꿔놓은 우리에게는 구텐베르크로 알려진 본명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 (Johannes Gensfleisch)의 이야기이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기가 등장한 이후의 유럽 사회는 지식과 정보의 보급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대되었으며 덕분에 유럽 사회는 이전과 크게 변모하며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당시 마인츠에서는 기득권인 귀족들과 신흥 세력인 길드가 대립하고 있었다. 시는 부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연금 제도를 운영했는데, 그 실상은 폰지 사기였다. 이 폰지 방식의 연금은 고객층을 계속 넓혀나가야 유지될 수 있는 일종의 피라미드 사기 구조였기 때문에 고객층이 마인츠 시민으로 한정되어 있던 상황에서는 당연히 오래갈 수 없었고, 궁지에 몰린 시가 세금을 올리자 길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들을 기만한 시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이에 덩달아 분노한 귀족들이 도시 밖의 사유지로 이사를 가버리고 시는 결국 파산하고 만다. 구텐베르크도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진행되던 도중인 1429년 자신에게 지급되던 연금이 절반으로 줄어들어버리자 시를 떠나기로 결정하게 된다.


1434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소송을 통하여 마인츠 시 당국으로부터 못 받은 연금들을 다 받아냈고, 그렇게 마련한 목돈으로 사업을 하나 계획한다. 당시 독일 지역에는 7년마다 아헨 대성당에 찾아가 네 개의 성유물을 직접 구경하고 오는 순례 행사가 있었다. 특히 이 무렵에는 유물들을 구경할 때 작은 거울을 머리 위로 쳐들어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살’을 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거울에 깃든 빛살이 나중에 거울을 볼 때마다 복을 준다고 믿었던 것에서 유래한 관습이었다. 다음 순례 행사가 1439년에 있었고, 구텐베르크는 거울을 만들어 아헨으로 가는 길목의 순례자들에게 팔 생각이었다.


시류에 맞는 나름 참신한 사업 아이디어였지만 1438년 역병이 돌면서 이듬해에 열릴 예정이었던 행사는 연기되고 당연히 구텐베르크가 야심만만하게 준비했던 사업은 열어보지도 못하고 망해버렸다. 다만 이 거울 사업과 별도로 스트라스부르크로 이주한 이후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인쇄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는 전한다.

1439년 스트라스부르크 법원의 재판기록에서 구텐베르크가 출자자를 모아서 인쇄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이때 자신의 야금기술을 이용한 금속활자의 개발에 힘을 쏟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는 부친이 일하던 조폐국의 금화 제조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기법을 훗날 새로운 인쇄술에 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금 덩어리를 문양이 새겨진 펀치로 때리는 방법으로 동전을 만들어냈다. 구텐베르크는 동전을 만드는 방법을 응용하여 만든 주형에서 제작한 인쇄용 금속활자를 나무틀에 하나하나 심어서 조판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한 글자만 잘못되어도 판 전체를 갈아야 했던 기존의 목판인쇄와 달리 자유롭게 배치가 가능한 이동식 금속활자는 매우 신속하고 경제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구텐베르크는 그렇게 만든 활판을 인쇄기에 놓고 세게 압착해서 종이에 찍어냈다. 오늘날 ‘인쇄기’(press)를 가리키는 단어는 원래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만드는 ‘압착기’(press)를 가리켰다. 존 맨의 지적처럼 구텐베르크의 천재성은 완전히 새로운 물건의 발명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물건(압착기, 종이, 잉크)의 응용에서 드러난다. 결국 약간의 힌트만 있다면 누구나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구텐베르크는 한동안 자신의 연구를 철저한 비밀에 부쳤고, 어쩌면 오늘날 그에 관한 기록이 적은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역사학자들도 적지 않다. 

수백 년 넘게 수많은 개선을 통해 활판 인쇄의 전 과정이 확립된 현대에는 너무나도 간단하게만 여겨지는 갖가지 문제조차도 구텐베르크에게는 적잖은 장애물들이었다. 가령 그는 인쇄 과정에서 활자의 배열, 행간의 조절, 용지의 두께, 잉크의 농도 같은 사소한 문제조차도 일일이 따져보고 실험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구텐베르크가 새로운 인쇄술을 언제쯤 완성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엇갈리지만, 존 맨은 1440년경으로 보고 있다.


1440년대에 구텐베르크의 행적은 불확실하나 1440년대 중반 시집을 출판했다는 것으로 보아 인쇄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48년, 구텐베르크는 그의 누이가 죽으며 남긴 고향집을 상속받아 마인츠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이 개발한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바로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업이 유럽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구텐베르크는 자신이 발명한 인쇄기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항상 혼자서 인쇄기를 만들고 개량했으며 제작 기술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많지 않은 기록에 의하면 구텐베르크는 당시 인쇄기 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마인츠의 부유한 금세공사였던 요한 푸스트에게 돈을 빌렸다고 한다. 푸스트에게 돈을 빌리는 대신 구텐베르크는 푸스트와 일종의 동업 형태로 인쇄소를 차렸다. 그 관계를 증명이라도 하듯 푸스트의 양자인 페터 쇠퍼를 조수로 고용한다

1450년경 그가 새로운 인쇄법으로 처음 인쇄한 책은 당시 라틴어 교재로 널리 쓰이던 <문법학(Ars Grammatica)>이었다. 얼마 후 마인츠에 있는 장크트야코프 수도원장이 구텐베르크에게 면죄부 2천 장의 인쇄를 주문한다. 당시 교회에서 발행하는 면죄부는 효력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유효기간처럼 일정 기한이 있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발행했으며, 교회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종이나 활자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면죄부는 인쇄 품질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만족했으며 이로 인해 교회에서 계속 주문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와 거래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구텐베르크는 독일, 아니 유럽 전역의 교회를 공략하기로 한다. 모든 교회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자 결코 끊이지 않는 수요를 가지고 있는 아이템인 성경을 인쇄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구텐베르크는 1452년부터 본격 성경 출판에 착수했으며 3년간의 노력 끝에 1455년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하는 최초의 라틴어(불가타)성서 혹은 <42행 성서>의 제작을 완성하게 된다. 이 성경은 2권, 총 127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0굴덴이라는 거액에 팔렸다. 

이 구텐베르크의 성경 초판은 180부가 인쇄됐는데, 매우 비싸긴 했지만 당시 필사로 제작된 성경이 100굴덴이 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인쇄 품질도 훌륭했기 때문에 꽤 인기가 있었다. 성서는 피지본과 종이본 두 가지로, 모두 180질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그중 48질이 남아 있지만 상태가 완벽한 것은 겨우 21질에 불과하다. 이 책의 가격은 가장 최근인 1987년에 경매에 나온 제1권 낱권(종이 본)이 무려 540만 달러였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사업은 불과 6년 만인 1454년에 동업자인 푸스트가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갑작스레 끝나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는 구텐베르크가 푸스트에게 경제적 손실을 끼쳤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구텐베르크의 인쇄 사업을 푸스트가 가로챈 셈이 되었다.


독일의 괴팅겐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455년 11월 6일 자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에 이 소송에 대한 기록 일부분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푸스트는 구텐베르크가 자신이 빌려준 돈 상당수를 다른 용도로 유용했으며 변제하려는 의지도 없어서 소송을 걸었다고 되어 있다.


이 소송은 1456년 결국 푸스트가 승소하면서 2번에 걸쳐 빌린 원금 1600 굴덴에 6% 복리이자를 합해서 합계 2,026 길더를 갚으라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구텐베르크는 이 거액을 갚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쇄장비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빼앗기는 신세가 됐다.

결국 구텐베르크는 인쇄기 한 대와 몇 가지 물건만 갖고 사업에서 손을 떼었고, 이후로는 푸스트와 그의 양자인 쇠퍼가 인쇄소를 운영했다. 새로운 인쇄술이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을 즈음, 구텐베르크는 본의 아니게 무대에서 내려가야 했다.


1457년, <42행 성서>에 버금가는 걸작 <마인츠 시편>이 나왔다. 그러나 사상 최초의 ‘판권지’에는 원래 제작자인 구텐베르크의 이름 대신 완성자인 푸스트와 쇠퍼의 이름만 있었다. 두 사람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구텐베르크는 깡그리 잊히다시피 했으며, 심지어 16세기에 가서는 구텐베르크가 어느 네덜란드인의 인쇄 기술을 훔쳐냈다는 말도 안 되는 악성루머까지 퍼지면서 그 루머가 한동안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기까지 하는 불명예를 져야만 했다.

소송에서 패한 이후 구텐베르크는 다시 자택에서 작은 규모로 책을 찍어내기 시작해서 1457년과 1460년에 라틴어 사전 카톨리콘(catholicon)을 출판했다. 1462년에는 나사우의 대주교 아돌프 2세가 마인츠를 점령했는데 이때 마인츠에서 쫓겨나 어린 시절에 잠시 살았던 마인츠 근처 도시인 엔트빌레로 이주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대주교 아돌프 2세는 마인츠에서 계속 인쇄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1465년에 구텐베르크에게 인쇄술을 발전시킨 공로로 연금을 하사하기도 한다. 그렇게 구텐베르크는 한동안 아돌프2세의 궁정에서도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재정적으로 파산한 이후의 구텐베르크에 대해서는 1468년에 70여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사실 외에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계속 어려움을 겪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는 짐작만 있었는데, 최근에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말년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텐베르크의 인쇄소를 넘겨받은 요한 푸스트는 자기 양자이자 구텐베르크 밑에서 일했던 인쇄공 페터 쇠퍼와 같이 인쇄소를 운영하였는데 푸스트가 흑사병으로 죽자 쉐퍼가 단독으로 운영하게 된다. 이후 쇠퍼 집안은 유럽 각지에 인쇄소를 차려서 크게 성공했다. 인쇄업이 각광을 받자 페터 쇠퍼 외에도 구텐베르크 밑에서 일했던 인쇄공들이 유럽 각지에 인쇄소를 차리면서 인쇄술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1999년 말,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타임지>는 지난 1천 년 동안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발명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를 선정했다. 구텐베르크는 ‘지난 1천 년간 10대 인물’중에서도 2위를 차지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인터넷의 발명이 인류의 문명을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으로 끌어올린 것은 그의 금속활자 발명에 준하는 것이라고 볼 정도로 파급력은 큰 것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이후 수백 년 가량 거의 그대로 활용될 정도로 실용적인 것이었다. 활판 인쇄술은 그의 견습공들에 의해 빠르게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1464년에 로마로 전파되었고 1500년까지 유럽 260개 도시에서 인쇄가 진행되었다. 1500년에 당시 성서를 비롯한 종교 서적, 그리스·로마의 고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보고서 등 50만 부 이상의 인쇄된 책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바깥으로 전해진 활판 인쇄술은 1539년 멕시코에서 처음 시작되어 1556년 인도, 1584년 페루, 1590년 일본, 1602년 필리핀, 1639년 미국, 1640년에 이란까지 전파되었다.


그의 금속 인쇄술이 그저 단순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서양의 문화사를 바꿨다는 것은 가장 먼저 당시 르네상스의 부흥기를 일으킨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들은 종교 암흑기 중세 이전의 자유롭던 고전 시대를 꿈꾸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제 ‘책’은 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식에서 소외되었던 대중을 위한 것이 되었다. 학문상의 활발한 토론도 활판 인쇄술의 도움으로 싹이 트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금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나아가 역사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구텐베르크 이전의 유럽에서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라는 말은 그야말로 진리였지만, 이 말은 당시까지 지식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아주 잘 보여준다. 중세까지 문자를 읽고 쓰며 책을 소지하는 이들은 귀족과 수도승 같은 소수 권력층이었으며, 지식에서 소외된 대중들은 하층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13세기 중반 중세 독일의 어느 수녀원. 수녀 한 명이 양피지에다 열심히 성서를 필사(筆寫)하였다. 구약성서 창세기로부터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수십 권에 달하는 성서 한 부를 한 사람이 모두 필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공을 들여야만 했다. 수도사나 수녀들이 이렇게 필사한 성경은 로마 가톨릭 교회 일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것을 불과 2백 년이 지난 1455년, 구텐베르크는 자신이 발명한 금속 활자를 이용하여 뒤바꿔놓은 것이다.


심지어 인쇄술의 발달 없이는 종교개혁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 역시 학계의 정설이다. 1517년,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은 활판 인쇄술에 힘입어 불과 2주 만에 전 유럽으로 파급되었다. 루터는 인쇄술을 가리켜 ‘복음 전파를 위해 신이 내리신 최대의 선물’이라고까지 극찬했다. 당시 인쇄술의 발달은 루터의 사상을 빠르게 지식인들에게 알릴 수 있었고 판화를 통해서 글을 모르는 농민들에게도 쉽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 성서 등 라틴어 성서의 인쇄에 이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를 비롯해서 각국의 언어로 성서가 금속 활자로 인쇄, 출판되어 대중에게 보급됨으로써 대중은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가 이야기한 것들이 성경과 동떨어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종교개혁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인쇄술에 의해 지식과 정보가 대량 복제되면서 대중들의 힘은 점점 커졌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해 쏟아져 나온 책과 여러 인쇄물을 접하며 이제 대중들은 지식이라는 권력을 지배층과 공유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시민혁명을 거쳐 근·현대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었다.




정작 구텐베르크의 꿈은 중세의 전례(典禮)에 관한 필사본들을 그 색깔이나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전연 손상하지 않고 기술적으로 재생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스트가 그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기자 그의 꿈은 완전히 깨졌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기술의 향유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이기적인 사업가에게 자기 인쇄공장을 빼앗기고 우울한 12년간을 보내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얼마나 가슴 아프고 속상했을까? 자신이 그렇게 어렵게 만든 기술을 그 사업가의 아들을 조수로 들여, 그때까지 감추고 공개하지 않았던 모든 기술을 전수하고 보여준 뒤, 자신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알몸으로 쫓겨난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은 그에게만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기저기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당신이 믿고 있던 사람에게 당신이 그렇게 공들이고 그렇게 어렵게 모았던 지식을, 돈을, 마음을 빼앗기고 오히려 이상한 루머로 누명까지 쓰고 당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그의 획기적인 발명이 세상을 바꿨다고는 하지만, 그에게 아무런 영광조차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렇게 억울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에게 있어 그 발명이 무슨 소용이며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겠는가? 아무리 세기를 바꿀만한 발명이라고 하더라도 그 발명가가 그 영광을 받을 수 없다면, 그리고 불우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바뀌고 나서 위인으로 받아들여진다한들 그의 살아있을 당시의 억울함과 분함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억울하게 죽고 나면 당신에게 금으로 된 동상을 지어준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이 살아 있는 시간에 행복을 누려야만 한다. 그러려면 당신의 마음이 편해야만 한다.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발명하며 그것을 꿈꾸는 동안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을 것이라 감히 추측해본다. 정작 그렇게 발명이 완성하고 성경이 나오고 나서 돈이 들어오고 나자 그에게는 불행이 닥쳤다. 


물론 그가 타고난 사업가이지 못했고 그만큼 치밀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악한 사업가에게 당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구텐베르크의 탓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정하고 사기를 치겠다는 놈들에게 당해낼 자는 없다. 당시 법정자료들을 검토해보면서도 결국 그것을 바로잡아주지 법을 다루는 이들이 당시의 있는 자들에게 돈을 받아먹고 그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오늘날에도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들이니 새삼스럽지도 않다. 기술도 머리도 없는 자가 어디서 약간의 돈을 끌어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가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다. 구텐베르크는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이 해내고자 했던 인쇄술에는 뛰어난 머리를 갖추었지만 자신을 이용하고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사업을 한다고 하면 마치 그런 일이 통과제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오늘 구텐베르크의 삶을 당신에게 돋보기를 대고 보여주면서 그와 유사한 일을 당했거나 그런 일로 억울하고 속상해서 해서는 안될 생각까지 해본 이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다시 일어나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왜 피가 거꾸로 솟지 않겠는가? 왜 미쳐 돌아가지 않겠는가?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어 모든 것을 잊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들 정도의 분노가 어찌 온몸을 휘감아 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그들이 천벌을 받아 흑사병으로 죽어버리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그들의 앞에 더 우뚝 서보여야만 한다. 그래서 하늘이 살아 있다고, 결코 정의는 죽지 않는다고, 당신의 노력은 결코 그런 한 번의 같잖은 사기행위에 의지를 꺾지 않는다고 보여줄 의무가 있단 말이다.


당신의 삶이 그들의 음해와 음모에 사그라들어 시궁창에 던져질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기에 나는 당신이 하늘에게 천벌을 내릴 기회를 박탈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에게는 아직 지금까지 보다 더 길고 더 훌륭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자질이 있고, 다른 모두가 그 음해와 루머로 당신을 길거리로 몰더라도 당신과 하늘과 그리고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그 억울함을, 말도 안 되는 음해를 이겨내고 분연히 일어나 그들이 천벌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한치의 흔들림 없이 우뚝 서 있기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일어나라! 그것들에게 결코 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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