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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0. 2022

왜 공자는 갑자기 중도(中道)마저 포기하라 하는가?

부득이한 상황이란 도대체 어떤 경우를 의미하는가?

子曰: “奢則不孫, 儉則固, 與其不孫也, 寧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치하면 공손하지 못하고 검소하면 고루하니, 공손하지 못한 것보다는 차라리 고루한 것이 낫다.”

이 장은 뒤에서 공부하게 될 ‘선진(先進)편’ 15장에서 공부하게 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가르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극단의 비교이다. 뒤에서 공부할 때 다시 상술하게 되겠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은 배우고 수양하는 자가 갖춰야 할 중도(中道)의 경지를 이르는 아주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 그 말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은 이 장의 가르침에서는 양 극단을 설명하면서 ‘차라리’ 어느 한쪽이 낫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현대 해설서와 수많은 이 글을 언급하는 블로그의 글에 보면 이 장을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교로 이해하면서 안하무인 갑질하는 부자보다는 고루한 구두쇠 소리를 듣더라도 그것이 더 낫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 이 아침 <논어> 공부에 절반을 함께 왔다. 8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아침 <논어>를 읽으며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공자가 그렇게 쉽게 표면적인 의미로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해주는 친절하고 호락호락한 선생이던가?

달려있는 주석도 얼마 되지 않으니 주자의 주석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孫은 따르는 것이고 固는 비루한 것이다. 사치와 검소는 모두 中道를 잃었으나 사치의 해가 더 크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주자 역시 간략하게 두 가지 모두 양 극단이라 중도를 잃기는 했으나 그 폐해로 보면 사치가 더 크다고 설명한다. 앞서 해설서들에서 본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조씨(晁說之)가 배우는 자들에게 참고하라고 남긴 주석도 아주 짧고 간결하다.

“부득이하여 당시의 폐단을 구제하려고 하신 말씀이다.”

 

굳이 이 주석을 남긴 것은 앞서 설명했던 중도를 택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맞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가 당시의 폐단이 너무 심해서 부득이했음을 설명한 것이다. 더 이상 특별히 참고할만한 주석은 없다.

 

그렇다면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 보자.

실마리를 찾는 시작은, 역시 주석에서 출발한다. 도대체 당시의 어떤 폐단이 그렇게 심했길래 부득이하게 어느 한쪽이 더 낫다고 할 수밖에 없었는가부터 생각해보기로 하자.


먼저 앞서 설명했던 현대의 해설들이 놓친 가정 부분부터 바로 잡는다. 부자를 욕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잘못된 일반화의 오류이다. 


원문에서는 ‘사치하면’이라고 하였지, ‘돈이 많은 부자’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사치’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필요한 이상으로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하는 것을 ‘사치’라 이른다. 


공자의 방점은, 돈이나 물건에 있지 않고 ‘분수에 지나친 생활’에 찍혀 있다. 왜냐하면 사치를 하게 되면 공손하지 못하게 된다는 구조는, 돈을 함부로 쓰기 때문에 공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 이상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거들먹거림에서 오는 부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예컨대 평생 농사만 짓던 무지렁이 농부가 갑자기 땅이 개발지로 지정되면서 졸부가 되면 갑자기 쌓인 돈을 펑펑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돈을 함부로 쓴다고 해서 그가 공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기 돈을 자기가 쓰는데 게다가 돈이 많아서 펑펑 쓰는데 그것이 공손한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즉, 공손이라는 개념의 전제로 부자를 말하지 않고 사치를 말한 것은 자신의 분수를 제대로 알지 못한 자가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게 돈이든 물건이든 예의범절이든 참람된 행동을 취함을 지적한 것이다. 그에 상대적으로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검소하다는 것은 돈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검소할 수 없다.

‘검소(儉素)’의 사전적 의미는 ‘사치하지 않고 꾸밈없이 수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는데 사치하지 않을 수 있는가? 가난한 자는 사치할 수 없다. 그러니 검소라는 표현은 역시 가진 자에게 해당된 표현이다.

 

자아, 이것으로 일단 부자와 그렇지 못한 가난한 자, 어쩌구 언급한 글들에 대한 오독(誤讀)이 아주 기본적인 독해조차 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임을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여기까지는 국어사전을 찾아보며 한글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모두 이해할만한 기초적인 부분이다.

 

이제 중급 단계로 들어가 보자. 가진 자들에 대해서 두 가지 개념을 나눠 설명하였다. 한쪽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분수를 지나쳐서 공손함을 잃은 자. 또 한쪽은 너무 아끼고 절약하여 고루한 자. 전자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참람되이 그 선을 넘은 자들이 보이는 불손함을 지적한 것이다. 


예컨대, 앞에서 공부했던 당시 노나라의 삼환이 자신들이 대부로서 왕이 누려야 할 예법을 참람되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부와 명예를 가지고 당시 실권자랍시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그들이 벌이는 행동들이 예에서 크게 벗어나 어긋남을 공자는 한탄하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노나라는 물론이고 당시 전국을 주유하며 보더라도 스스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참람된 행동을 하는 위정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극단의 예로 검소가 지나쳐(실제로 지나치다는 표현조차 사용하지 않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루해지는 것을 들었다. 굳이 앞의 사치하여 공손하지 못한 예에 비추어 설명하자면, 본래 자신이 누려야 할 예법 상의 격식조차도 재물을 아끼고 그저 수수한 것을 좋아하여 재물로 삼은 고기가 아까워 올리지 않거나 예복을 차려입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실제로 ‘고루(固陋)하다’라는 의미는 ‘낡은 관념이나 습관에 젖어 고집이 세고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한다. 검소한 것이 왜 이 개념과 연계되는지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치하지 않고 꾸밈없이 그대로 지내는 것을 지켜나가는 이는 고집이 세고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기준이 너무 확고하기 때문이다.

이 장의 원문에서 뒷 문장을 조금 자세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는 공손하지 못하게 된 이유와 고루하게 된 이유를 인과관계에 맞춰 가정형으로 언급했다면, 뒷 문장의 결정적 선언은 결과만 가지고 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사치와 검소를 비교하지 않고, 공손하지 않은 것보다 ‘차라리’(이 단어는 고문이나 현대문이나 ‘부득이’ 한 경우를 강조할 때 등장하는 용어이다.) 고루한 것이 낫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는 원인이 문제가 아님을 살짝 어법상의 변화를 주는 것으로 중급자 이상이 눈치채라며 일러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즉, 어차피 대상은 부족함이 없는 사치도 할 수 있고, 아낄 수도 있는 부자이고 위정자이다. 당시 사회는 아직까지 위정자가 아니면서 부자인 자가 생기는 사회의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 시대이기 때문에 지금의 졸부(猝富)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도 조금은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무리가 따르니 함부로 그렇게 가져다 붙여서는 안 된다.

자아, 그렇다면 이제 고급단계의 마무리만 남았다. 

왜 양 극단 중에서도 차라리 고루한 쪽이 낫다는 부득이한 결론으로 강조를 하였는가? 이미 초급에서 중급과정의 해설을 하며 모든 실마리는 제공되었다. 하긴, 원래 공자가 뭘 감춘 적은 없다. 늘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자가 부족하여 그 의미들을 모두 파악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자가 언제나 위정자를 비판하고 그들에게 죽비를 들었던 이유와 같다. 그들이 끼치는 영향력만큼이나 위해(危害)가 너무 커지는 것을 보면서 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화법을 사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치를 하며 공손하지 못한 위정자가 벌이는 폐해의 실상이 너무도 참담했던 것을 본 것이다. 검소하여 고루한 자는 그것이 배우는 자로서 지향해야 할 중도에는 못 미치지만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 위해를 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임을 들어 위험 화학물질이 가득한 통을 들고 있는 자로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것을 흘러넘치게 쏟아내고 다니는 자는 주변을 독으로 물들인다. 허나, 그것을 넘치지 못하게 가만히 들고 있는 자는 자신에게는 해로운 지언정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수천 년 전의 공자 시대나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위정자들의 규모는 일반 백성들의 수보다 지극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백성들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소수에 의해 세상은 움직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 말은 그들의 경거망동으로 인해 벌어지는 피해를 대중들이 짊어져야만 한다는 현실을 의미한다. 


공자가 우려하고 비판했던 것처럼 가장 기본적으로는 모범이 되고 백성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할 위정자들이 공손하지 못한 참람된 행동을 함으로써 주변에서 그 행동을 본 이들이 그렇게 행동해도 괜찮다고 여기에 만드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모럴해저드는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오늘날 자행되고 있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50억을 뒤탈 없이 자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받아내려던 법비들의 행위는, 그저 평범했던 회사원이 수십억을 횡령하고도 눈 깜짝하지 않게 만들어주고, 구청 7급 공무원이 백억이 넘는 돈을 횡령하여 게임머니처럼 주식으로 다 날리면서도 버젓이 사무실에 출근할 수 있는 대담함을 퍼져나가게 만들었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학을 공부하는 자들이 국가에서 의사를 더 많이 양성하고 의사가 더 필요한 곳에 배치하겠다고 하자, 아직 의사가 되지도 않은 의대생들까지 자기 밥그릇이 줄어든다며 당당하게 파업과 데모를 일삼고, 법을 어겨 유급이 되어야 함에도 예외를 인정해달라고 한다.

국회 선진화법에 의해 분명한 범법을 저지른 판사 출신의 남편을 가진 판사 출신의 국회의원은 아직도 버젓이 법의 심판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녀와 함께 가투도 한번 나가보지 못하고 빨간 당의 두건을 쓰고 국회에서 어쭙잖은 가투 흉내를 냈던 자들은 법비들은 가만히 숨죽이며 이 사안들이 개돼지들에게 잊히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한번 여의도에 입성하겠다며 버젓이 목소리를 높이고 다니고 있다.

 

이 장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행간은 위정자들의 행태가 더 이상 봐주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만이 아니다. 결정적인 ‘부득이함’은 그들에게 물들어버린 개돼지들이 그들의 흉내를 내는 지경까지 온 말세에 공자가 도저히 이대로라면 미래가 없다고 절박한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가 막힌 일들을 보면서 이 장이 과연 수천 년 전에 쓰인 것인지 어제 공자가 한국에 들러서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다가 어이가 없어서 한 말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어떻게 이렇게 골고루 빈틈없이 썩어 들어갈 수가 있단 말인가? 누군가는 경종을 울려야 하고, 누군가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그들을 멈춰 세워야만 한다.


청와대에 민정수석으로 있던 자의 아들이 회사에 자기 아버지가 청와대 민정수석임을 드러냈다는 것에 대해 빨간당은 입에 게거품을 물며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자신의 남편이 현직 판사이고 자신도 판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몇 선이나 지냈다는 아줌마는 자신의 딸이 장애가 있다는 것까지 선거활동에 활용하면서 그 딸이 대학입시 면접장에서 자기 엄마가 판사 출신 국회의원임을 당당히 외친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했었다. 


심지어 그 대학에서 그녀의 딸이 입학할 수 있었던 그 특례제도는 그녀가 입학할 때 단 한 번만 그녀를 위해서 생겼다가 사라져 버렸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그녀만을 위한 입학제도로 활용되었다. 이미 당시 입시에 면접관으로 들어갔던 교수들이 증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법비들과 정치인으로 스크럼을 짠 공손함을 모르는 자들은 애저녁에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탐욕의 침을 질질 흘리며 방송에 그 후안무치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어찌 그녀 하나뿐이겠는가? 그녀의 뒤에서 어떻게 자리 자리보전할 수 없을까 싶어 목소리를 높이던 자부터 카우보이 보자를 쓰고 광화문의 광신도들 앞에서 생쇼를 했던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 중에서 어느 한 명이라도 도저히 부끄러워 이제 다신 대중 앞에 얼굴을 내놓지 못하겠다며 칩거한 자가 있더냐?

 

아까도 말했지만, 이미 그 심각한 바이러스는 오미크론보다 빠른 전염력을 가지고 그들의 썩은 양심을 벗어나 온 사회에 퍼져버렸다. 사회를 지키는 지팡이가 되겠다고 경찰이 되는 이들은 없다. 


그저 철밥그릇에 권력도 간혹 가다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경찰을 직업적으로 하는 이들은 유사시에 자기가 살겠다고 평상시 키운 체력을 도망치는데 쓰고 있고, 돈 없고 힘없는 자들에게는, ‘법이 그래요, 나는 법대로 집행하는 것뿐이에요.’라며 두꺼운 탈을 쓰고 기소하고 양형기준에 맞춰 자기 인사고과에 행여 흠집이 갈 새라 실형을 선고하는 법비들이, 같은 법비 선배들이 하나도 아니고 몇 명이서 수십억씩 자식들을 통해 돈을 받아먹었어도 어떤 식으로든 빼준다. 


심지어 자기 돈 하나도 없이 비상장 주식을 받아먹고 그것으로 잭팟이 터져도 아무런 대가성이 없이 친구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알아서 챙겨준 것이니 뇌물이 아니라며 면제부를 부여해주고서도 판사님 소리를 들으며 거들먹거리고 다닌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언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법원 담당을 하는 그 수많은 법원 출입 기자들 중에서 대장동 사태를 법조비리라고 규정하고 취재하는 기레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기레기들을 A.I로 대체해야할 심각성 비교

당신의 친구, 아들, 형님, 동생, 언니, 그리고 당신까지 그들이 모두 다양하게 곰팡이의 형태로 포진되어 사회를 좀먹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이것이 부득이 한 상황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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