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Feb 11. 2022

늘 불안하고 걱정하며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군자의 삶을 지향하는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이들에게.

子曰: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평탄하여 여유가 있고, 소인은 늘 걱정스러워한다.”

이 장에서는 군자와 소인에 대한 비교가 나온다. 앞에서 군자와 소인에 대한 비교가 나왔을 때, 공부하면서 설명했지만, <논어>에서 군자와 소인의 극단적인 삶을 비교하는 것은 추구하는 바가 어떻게 극명하게 다른가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배우는 자들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곤 하였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군자와 소인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평상시에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에 대해 그 모습만 보더라도 군자와 소인을 구분할 수 있다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주자의 해설에 의하면 원문의 坦은 平坦(평탄)함으로, 거칠 것 없이 넓게 탁 열려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蕩蕩(탕탕)은 어떠한 걸림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坦蕩蕩은 外物에 의지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에 마음이 平靜(평정)하고 외모가 느긋함을 말한다. 자칫 전혀 어떠한 것에서도 걸려함이 없는 坦蕩蕩의 모습이 세상을 만만하게 여기는 오만함이라고 착각할까 싶어 약간의 설명을 부연한다.


앞서 공부했던 것처럼 군자의 태도가 坦蕩蕩할 수 있는 그 근본적인 뿌리는, 깊은 물속에 있는 듯하고, 얇은 얼음을 밟고 지나가는 듯한 늘 자신의 행실을 삼가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습관과 마음자세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한편, 소인에 대한 서명에서 長은 항상, 늘이란 의미이고, 戚戚(척척)은 근심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첩어(疊語)다. 부귀에 汲汲(급급)하고 가난에 戚戚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소인은 외물(外物)에 휘둘리고 命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늘 불안하다. 늘 경계하고 조심스럽게 삼가는 행동이 아니라 방약무인하고 행동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 해야 하고 어디까지 하면 안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마음이 평탄하고 늘 여유가 있는 군자와 뭔가 늘 걱정스러워하고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는 소인의 모습을 비교하여 설명한 것에 대해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아 그 부분을 생각하게 만드는 구조이다. 그래서 정자(伊川)가 그 둘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군자는 천리(天理)를 따르므로 항상 몸과 마음이 펴지고 태연하며, 소인은 외물에 사역을 당하므로 걱정과 근심이 많은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이 너무 뻔하다고 하여 주석이나 해설을 크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여러 해설서들의 기본적인 해석만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장은 그렇게 간단하게 표면적인 것만 이해하고 넘어갈 내용이 아니다. 특히, 다른 군자와 소인의 비교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실마리가 될만한 언급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반면, 이 장에서 왜 君子와 小人에게서 그런 차이가 발생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때는 생각할 거리가 당연히 더 많아지는 것이다.

 

이 장이 너무도 당연한 내용을 서술한 것뿐이라면, 왜 君子의 삶을 살라고 권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 장의 중심 기준을 이해하겠는가? 위의 주석에 따르자면 천리(天理)라는 기준에 맞춰 지내는 군자는 아무런 기준이 없어 외물에 사역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기준이 되는 것이 있어 그것을 지키고 살기만 하면 되다는 의미일까?

물론 아니다. 오히려 소인이 걱정하는 이유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돈이 없어서 걱정하고, 배우지 못해서 걱정하고, 집이 없어서 걱정하며, 너무 낡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사람들에게 쪽팔리고, 다들 멋진 옷에 명품으로 치장되어 있는데 내가 그렇지 못한 경우에 부끄럽고 그들 앞에서 나서는 것이 걱정되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삶인 셈이다.


그렇다면 소시민은 모두 소인이라는 말인가?

이 장에서는 君子와 小人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이며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발견하고 깨달으라는 것이 화두이다. 왜 똑같은 사람인데 君子는 자신이 하고 다니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쪽팔려하지 않고 당당하고 걱정이 없을까? 누구나 걱정하고 마음 졸이며 사는 것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군자의 삶이 좋긴 하지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장의 설명대로라면 누구나 君子로서의 삶을 살고 싶어 할 것이다.


이 장에서 君子가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고 당당하게 늘 몸을 펼치고 다니는 것을 대두시킨 것은 이 장을 읽는 어떤 사람이라도 걱정하고 안달복달하는 小人의 삶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당연한 인간의 심리를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걱정하고 안달복달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할 화두를 던지기 위해 모두가 원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君子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 장에서 君子와 小人의 가장 큰 근본적인 차이는, 그 결정과 판단의 기준이 나에게 있는가, 아니면 남에게 있는가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대단한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모두가 대단한 직업에 대단한 집안의 사람들이 사교적으로 모이는 파티이다. 당신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파티에 참석하려 하는가?


파티란 공식적으로 사교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업무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친분을 쌓고 관계와 네트워크를 마련하는 어찌 보면 비즈니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전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상당한 수준의 파티라고 하면 드레스 코드를 요구한다. 어떤 곳을 입고 갈지에 대해 당신은 분명히 고민할 것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멋진 옷을 입고 가려 준비를 할 것이다. 웬만해서는 이런 기회가 없으니 아마도 당신은 새로 명품 슈트를 맞춰 입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큰돈을 투자해서 옷을 장만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당신이 당신을 그렇게 꾸미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물어봐도 되겠는가? 너무도 당연하게 그래야 하는 것처럼 준비하고 자신에게 조금 무리가 될 정도로 명품 정장을 마련하면서까지 그렇게 차려입고 가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파티는 고사하고 아이의 학교에서 학부모들을 상담을 위해 부르거나 자녀들을 위한 자원봉사를 좀 해달라고 부르는데 명품으로 휘감고 선글라스 끼고 등장하는 철없는 아줌마를 보며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드는가?

 

가끔 저녁에 대치동을 지날 때면, 십수 년 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학원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차에서 기다리는 엄마, 아빠들을 보곤 한다. 새 아파트라고는 없는 그 낡은 아파트 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그 근처로 이사 와서 좁고 낡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을 자식들이 좋은 학군과 학원을 누르기 위해 감수해야 할 것이라며 지낸다.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이는가? 아니. 그들은 늘 여유롭고 당당하던가? 아니. 그들은 자식이 명문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늘 안절부절 못한다.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선생님이 있다거나 새로 팀을 만든다고 하면 그 안에 자기 자식을 넣지 못해서 또 안달을 한다. 왜 그렇게 사는가? 그들에게는 한 가지. 그렇게 살지 못하면 남보다 쳐지게 된다는 아주 강한 트라우마 같은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명품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사해보면,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가장 큰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누구나 한 번에 봐도 알만한 그 명품백을 어깨에 메고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자존감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며 아주 당당하게 자신이 그래서 명품을 사는 것이고 그 명품으로 인해 주목받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명품을 소비한다고 말한다.


특히나 그것을 향유할만한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한 젊은 층의 소비의식을 들여다보면, 같은 또래의 주변 사람들에게 기죽기 싫고 그들 사이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객관적인 판단을 명품이나 외제차로 확인받는다고 한다. 언젠가 자신이 그렇게 원하는 페라리를 사서 끌고 다니며 본업 이외에도 잠도 못 자가며 알바를 하면서 차 안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이의 딱한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를 대단하다고 인정해줄까? 아니. 딱하다고. 왜 그렇게 사느냐고 혀를 끌끌 차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여러 가지 예를 들어보았는데, 당신에게 뭔가 번쩍하고 이 장의 가르침이 보여주지 않았던 화두가 드러나기 시작했는가? 삶에 있어 무엇이 가장 큰 결정의 기준인가에 대한 문제로 君子와 小人을 구분한다는 것이 이 장의 화두이다. 명품이 아닌 비싸지 않은 옷을 입어도 그 사람 자체만으로 빛이 난다면 모두가 그의 삶을 존경하고 그가 하는 행동에 고개를 숙인다면 그는 君子이다.


명품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봐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바로 小人이다. 자신이 타고 다니는 차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자신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언제나 안달복달하며 보이는 것에 큰 비중을 두는 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 노력해야 할 겨를이 없다.

 

가뜩이나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혼돈의 세상에서 올바른 이념을 지켜 홀로 우뚝하여 煩悶(번민)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성인(聖人)이다. 그렇게 되고자 노력을 하지만 일반 사람으로서 그런 경지에까지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그 결정을 내리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자신이 어떤 기준에 의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가는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名利에 집착해서 근심 걱정으로 삶을 허비하는 소인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다. 강남에 언감생심 집을 살 생각은 하지 못하더라도 낡고 좁은 아파트라도 아이를 위해서 지방에서 혹은 강북에서 비집고 들어가야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며 안달복달하는 부모들이 너무도 많다.


과연 그 부모들이 정말로 자식을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들이 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의 눈에 자신과 자기 자식이 어떻게 비춰질까만을 불안해하고 걱정할 뿐이다. 왜 굳이 그렇게 불편한 삶을 사는가? 결국 자신의 사람을 자신이 주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 혹은 외물이라고 위에서 표현한 외적인 것에 흔들리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일반인들이 호텔에서 결혼식을 많이 한다. 예식장 같은 곳에서 결혼하면 시골 장터에서 결혼하는 것 같아서 쪽팔린다는 이유란다. 호텔에서 결혼한다고 하면 청첩장에 장소가 찍히고 양측 부모도 그렇고 결혼하는 당사자들의 체면이 서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한다. 결혼식이 갖는 본래의 의미를 그 사람들은 배운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으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없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겉만 중시하는 자는 내실을 다질 겨를도 없을뿐더러 그런 노력을 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책을 출간하면서 책의 내용과 끊임없이 어색한 부분을 가다듬을 생각은 하지 않고, 양장판으로 할지, 그래도 이름을 들어보기만 해도 알만한 출판사인지를 먼저 따지는 정신 나간 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자신의 이름이 달려 나오는 저서인데, 그 내용이 얼마나 충실한지 혹여 잘못 표현한 부분이나 잘못 인용하여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원고를 검토하기보다 얼마나 멋진 표지를 사용하며 얼마나 있어 보이는 판형과 껍데기로 포장되는지를 따지는 자들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책을 출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갈 때,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가지, 내가 가는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광고하고 보여주려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NS를 보면 철딱서니 없는 젊은이들이 자신이 살지도 않는 집인데 멋진 집에서 자신의 집처럼 사진을 찍어 올리고, 외제차 안에서 엠블럼이 잘 보이게 사진을 찍어 올리고, 자신이 먹은 것인지도 모를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을 찍어 올린다.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으로 소인을 표현한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행동하고 나서도 자신의 마음이 만족을 느낀다면 그것은 탓하기만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자는 그들의 특징이 늘 불안해하고 걱정을 버리지 못한다고 했다. 왜인가? 기준이 자신의 안에 명확하게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법비들이나 정치꾼들을 보면 흔히 말하는 ‘가오(체면)’를 굉장히 중시 여긴다. 그들은 폼생폼사이다. 어떤 행사를 가더라도 자신들을 귀빈석에 모셔야 하고 인사말을 하더라도 자신들을 가장 먼저 소개해서 자신들의 체면을 세워주기를 원한다. 그들의 입에 버릇처럼 달린 말은 언제나 ‘이 정도는 해줘야~’이다. 누구를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래야 하는가?


이 장의 가르침처럼 군자가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고민이 없으며 언제나 마음이 여유가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이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능력을 갖추고 존경받을 인물이라면 굳이 귀빈석에 앉혀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추켜올려 주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그냥 가라앉는 게 맞다.

자신이 이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가, 늘 술자리에서 술 취한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패딱패딱 돌리며 불안해하는 시선을 본다. 그 불안한 모습은 굳이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가 아니어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명료하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하고 무엇을 감추고 무엇이 터질까 봐 그렇게 좌불안석의 시선으로 이 말 저말 되도 않는 소리를 내뱉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러한 소인에게 이 나라를 대표하라고 내 권리를 전달하는 행위는, 도저히 하지 못하겠다.

당신은 늘 고민 없이 당당한 군자의 삶을 원하는가? 늘 걱정거리로 불안해하는 소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왜 공자는 갑자기 중도(中道)마저 포기하라 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