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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4. 2022

공자가 어떤 분이셨는지 내 너에게 알려줄까?

왜 공자에 대한 설명마저 비법서가 되는지에 대한 이유

子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
공자께서는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시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으시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셨다.

이 장은 스승 공자를 곁에서 모셨던 제자들이 그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과 모습을 축약적으로 표현한 글이다. 초상화를 그리거나 평전(評傳)을 쓰면 되지, 왜 하필 스승의 말씀을 담는 <논어>에 그에 대한 묘사를 굳이 ‘술이(述而)편’ 맨 마지막 장에 넣었을까? 그것이 다소 생뚱맞게 등장한 이 장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이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 뭐라고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사람의 덕성은 본래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나 타고난 기질은 편벽되지 않은 자가 드물다. 오직 성인은 전체가 혼연(완전히 보존됨)하고 음양(陰陽)의 덕이 합한다. 그러므로 중화(中和)의 기상이 용모에 나타나는 것이 이와 같다. 문인들이 익히 관찰하여 상세히 기록하였으니, 또한 그 마음씀이 치밀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혜가 성인을 알 만하고 덕행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이것을 기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자는 증자의 말씀이라고 하였으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반복하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먼저, 이 장을 기록한 이에 대한 언급이 있어 주목을 끈다. 스승 공자에 대해 이 정도 평가하듯 내면까지 두루 묘사해낼 수 있는 자는 성인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제자여야 하고 그만한 표현력을 갖춘 경지여야 한다고 하여, 증자(曾子)가 한 말일 것이라고 했던 정자의 설명에 무게를 싣는다.


충분히 논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이니 증자만한 사람이 썼다는 말에 신빙성이 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말을 누가 했는가가 아니라 이런 말을 할만한 경지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말이 갖는 의미를 파악해내는 것이다.

 

원문에서는 공자를, 온화하면서도 엄숙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고, 공손하면서도 편안하였다고 세 부분으로 나눠 극단적일 수 있는 양 개념을 모두 갖췄다고 설명하였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성인이라고 하여, 제자 된 입장에서 그저 찬양조로 당대 위정자들의 곁에 있던 자들이 했던 방식처럼 입에 발린 칭찬을 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글쓴이의 수준과 경지에 대해 감지하고 증자까지 언급한 주석이 미연에 방지한 바리케이트에 다름이다.

잊었을까 봐 다시 주지하자면 주석이라 할지라도 고문은 결코 쓸데없는 한 글자도 낭비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저 허튼소리로 저자에 대한 언급을 주석에 언급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세 분야에서 전혀 다르게 분석한 양극단의 개념을 두루 포용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경악하며 의문을 품는 것이 이 장을 이해한 중급자의 모습이다. 초심자처럼 아, 공자니까 당연히 그랬겠지, 정도의 끄덕임은 아무것도 들지 않아 너무 가벼운 머리가 딸랑거리는 마네키 네코의 손처럼 흔들거릴 뿐이라면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세 부분을 하나씩 나눠서 꼼꼼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와 두 번째 언급한 것은 요즘도 가끔 사용되는 언어 구조라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첫 번째,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였다는 것은, 경직되지 않은 최상위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긴장과 이완의 적절한 조화이다. 평상시에 늘 엄숙하기만 하다면 딱딱하고 긴장되어 이완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놓치게 된다는 진리를 의미함에 다름 아니다.

두 번째,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다는 것은, 양 극단이라기보다 마지노선을 넘지 않는 즉, 지나침이 없는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경지를 의미한다.


예컨대, 위엄이 있는 행동은 일부러 회초리를 들어 학생들을 다그치거나 꾸짖기만 하는 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말로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는 것을 갖추는 것은 단순히 강경 일변도의 무섭고 사납기만 사람보다 더 무게 있는 카리스마의 경지를 의미한다.

 

문제는 마지막 세 번째이다. 공손하면서도 편안하였다는 것은 일단 해석부터 필요하다. 공손하면 편안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손하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예의에 바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에 맞춰 예를 갖추다’라는 의미를 함축한 다소 격식을 차린 ‘예(禮)’를 의미한 말이다.


즉, 예의와 법도를 모두 갖추었지만 그것에서 벗어남이 없이 편안하기 그지없었다는 설명으로, 공자가 나이별로 자신의 경지를 이야기했을 때, 70세의 ‘마음에 따르는 바대로 행동하여도 법규에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從心所欲不踰矩)’는 설명의 예의(禮儀) 버전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응용한 오마쥬이다.

 

자아, 이것을 증자가 말한 것이라고까지 극찬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설명이 되었을 듯한데 정작 중요한 고급자의 행간 읽기는 아직 숨겨져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익숙한 서양식 교육에 비유하자면,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것은 붉은 듯하면서 푸른빛을 뗘야 한다는 식의 표현이 된다.

불가능하다는 말보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가벼운 듯하되 묵직해야 한다.’는 말은 서양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것은 논리적 모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과학에서는 나오지 못하고 인문학에서만 나올 수 있는 있는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이제 동양철학과 인문학의 지식을 넘나들기 시작하고 크로스오버가 유행이 아닌 통섭(統攝)이 대세가 되어버린지 꽤 지나서인지 요즘 최근 첨단 과학은 ‘작고 가벼우면서도 절대 깨지지 않고 부러지지 않는’ 모순된 것 같은 개념의 물질들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현실화하고 있다.


해당 물질을 연구하고 개발해낸 과학자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동양철학적 사유를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200% 임을 굳이 만나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일론 발명으로 이어진 스타킹의 출시

공자의 경지를 찬미하거나 과장하여 지어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것도 이렇게 간략하고 축약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실력자의 솜씨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세 분야가 처음에는 완급의 조절을 양 극단의 범주까지 포용할 것으로 강조하고, 다시 그 양극단을 체크하되 본질을 잃어버리거나 호도될 수 있는 선을 넘어서지 않음을 강조하였으며, 마지막에는 그렇게 하여도 결국 선을 넘지 않는 경지에까지 올라 자연스럽게 몸에 밴 실생활에 적용이 되더라, 로 끝맺었다.


이렇게 순서대로 풀어주니 이해가 되는가?

맞다. 이것은 스승 공자의 묘사를 빙자하여 배우는 자들이 거쳐야 할 지향점이자 목표의 달성 수순을 보여주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즉, 이 단순해 보이는 스승에 대한 묘사는 성인을 목표로 공부하는 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인의 경지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결서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앞서 통섭(統攝)의 시대가 대세가 된 지 오래되었다고 하였지만, 첨단을 주도하는 시대와 국가들은 그러하지만, 그것은 상위 1%들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아직도 사회는 전문성을 지향하여 효율만 따질 뿐 그것을 운용해야 할 자들에 대한 인격수양에 대한 범주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공부만 잘하면 뭐하냐? 인간부터 돼야지?’라는 말로 오독할까 싶어 먼저 그 환상부터 깨주고 시작한다. 그런 말은, 능력이 없으면서 노력도 하지 않는 것들이 정작 정량화될 수 없는 인간성 뒤에 숨을 때 하는 같잖은 핑계이다. 인간으로서 자신에 대한 공부와 수양이 된 사람은 학문의 분야에 결코 소홀하지 않다.


그 말은 그저 천성이 원래 착한 사람이 게을러서 공부를 못 하거나 능력이 없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결국 인격도 공부를 하고 수양을 해서 다듬어나가고 엇나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다스려야만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엔 양극단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공부도 되지 않은 자가, 지금 이 장의 경지를 논할 것은 아니다. 이 장의 경지는, 그 극단까지 공부와 수양을 통해 이른 자들이 다음 단계인 성인의 지향점을 목표로 삼을 때,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는가를 축약적으로 순서대로 설명한 것이다.


본래 양면적 가치의 공존과 융합은 말이 쉽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본래 서양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모순이라고 하여 전제부터 오류로 취급하던 것들이었다. 대립적 가치의 양면을 포용하는 것은 공자 스스로도 공부와 수양을 통해 평생에 걸쳐 추구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왔던 원시 유학의 궁극적인 경지이다.


양극단의 포용과 조화를 이루어내는 과정을 겪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지평의 확대가 이루어진다. 그 끝까지 달려가 보지 않은 자는 어디가 끝인지 모른다. 절벽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확인되지 않은 선에서 거기가 끝이라고 멈출 수도 없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고 절벽을, 그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확인하게 되면 다시 반대편으로 달려 다른 극단을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 어떤 언행들이 그 선을 넘는 것인지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대개는 그 선을 넘는다는 유혹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대개 조절이 어렵다. 예컨대, 부와 명예에 대해 내가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끝없는 욕심을 부리다가 자멸하는 우를 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그것은 개인차가 심하기 때문에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와 내가 어느 정도까지 가지고 있게 되면 만족하고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조절해내기 너무도 힘든 것이다. 그렇다도 아예 욕심을 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거세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공자는 그 욕심을 쏟아야 할 대상과 방향을 보다 올바른 쪽에 맞춰준다.


정체진 법규가 있고, 예의 법도가 있는데,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그 법규와 예의법도에 넘지 않는 단계란 말로 설명하기만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10년을 하루같이 100년을 하루같이 매일매일 노력하고 공부하고 수양한 이에게 있어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을, 스승의 삶을 통해 측근의 제자들은 물론 지금 <논어>를 통해 스승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있는 배우는 자들이 이뤄내라고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장이 술이편의 대단원의 마지막에 종합적인 마무리로 실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대선이 막바지로 달리고 있음에도 초박빙이라며 연일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곤 한다.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말을 자꾸 연상하게 되는 한 가지 백데이터가 있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곤 한다. 지금 매일같이 술 취한 아저씨처럼 허수아비 역할을 하는 법비들이 박빙이라는 지지율을 받는 것은, 딱 하나의 이유이다.


정권교체에 대한 갈망. 그런데 정권교체라는 말이 현재의 판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정치학을 전공한 이들은 안다. 아니, 현장 정치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중급 이상의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현재 여당 후보는 흔히 말하는 여당의 적통 후계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난 TV토론에서 야당의 고개만 까닥거리는 뚱보가 그렇게 물은 것이다.

“후보님은 지금 정부의 계승자이자 후보자이신 거죠?”


얼마나 급했으면 그런 식으로 우격다짐을 얻어내고 싶었으며, TV를 보는 현혹되기 쉬운 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싶었길래 그런 촌스러운 대사까지 읊어댔을까?

아무도 '정치보복'이라 묻지 않았다.

그런데, 빨간당의 입장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들은 나라를 기업으로 보면 청와대에 들어가 나라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극대화시키려는 비즈니스맨 출신 대통령과 그 뒤를 이은 군바리의 딸이 정권을 잡았을 때, 분명히 둘은 친목을 도모하는 사이가 아니었으나 같은 계통의 한통속이라는 이유로 서로의 부정에 대해 눈감고 적당히 넘어가는 시늉을 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기 전 빨간당의 경선에서 이명박과 박근혜가 서로를 비난하며 부적절한 후보라고 물어뜯을 때, 다스와 최순실의 언급은 이미 나왔었다. 즉, 당신들은 그 모든 내용을 봤음에도 이명박과 박근혜를 뽑아 나라를 퇴보시키고 애먼 아이들을 물에 수장하고 모른 척 지나갔으며, 자기 재산을 다 기부했다면서 딴 주머니를 차는 추잡한 짓에 공범이 되어준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뚱보 법비의 뒤에서 원고를 작성해주는 그 무리들이 그런 질문을 던지게 했던 것이다. 같은 당이라고 하여 다 같은 게 아니다. 이미 현 대통령과 경선 과정을 통해 한번 자웅을 겨뤘던 현 후보는 당시에도 그저 경험을 위해 대강 싸우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난 경선 때와 비교해보면 그는 다시 진화했다.

이 장의 가르침에서 배웠던 것처럼 계속 공부하고 수양하고 경험을 통해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진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후보로 확정되고 나서 가장 먼저 보였던 행보는 당과의 거리두기였다. 자신은 여당의 후보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여당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하였다.


뉴스에서는 크게 보도되지 않았지만 이전 정부의 장차관을 했던 OB들과 만나 지지를 받아내고 그들에게 자신의 색을 분명히 밝혔다.


이전 정부의 장차관이라 함은, 현 정부 이전 10여 년의 빨간당이 여당이던 시절의 장차관을 포함한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빨간당이 하는 현 여당의 이들로 그저 연결되는 정권이 아님을 의미한다.


정권교체의 갈망이라는 국민들의 불만은, 단순히 여당에 대한 불만이 아니며,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야당에 대한 지지나 기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 정치꾼들의 기만과 꼴사나운 짓거리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즉, 정권을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꿔달라는 의미가 아닌 썩은 것들을 모두 도려내고 새로운 판을 짜줬으면 한다는 갈망에 다름 아니다.


정권교체의 대상은 여당뿐 아닌 빨간당에서 자기가 차기 총리나 장관 혹은 서울시장 등으로 정치 생명을 다시 연명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꿈을 꾸는 그것들에게 포함되는 것이다. 구태의연한 그 썩어 문드러진 것들에 대한 척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 하겠다는 것인지만 판단하면 된다.


당신은 왼쪽으로 갈 것인가?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그가 말하더라, 자기는 올바른 쪽으로 가겠다고.


이래도 어려워서 박빙을 이뤄야만 한다면,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이 너무 힘들어진다.



이것으로 드디어 <논어> 20편 중에서 7편인 술이편까지 공부를 끝냈습니다. 6월에 공부를 시작하였으니 공부한 지 어느 사이에 해를 넘기고 9개월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직 절반도 오지 않았으니 갈 길이 멀다고 여길 학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말과 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한 장씩 공부한다는 것이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기 그지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 끼니를 챙겨 먹고 영양을 챙겨 움직이는 것처럼 항상 깨어있는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한 장 정도의 공부로 스스로를 다지지 않는다면 분명히 게으른 마음과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거나 심지어 어떻게든 악행을 합리화하려는 사특한 마음이 일어날지 모를 일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악한 마음들은 자생력과 전염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바이러스보다 높은 치사율로 당신의 선한 마음을 죽이고 더 자라지 못하게 할 것이라 공부하고 늘 나의 마음을 다잡는 겁니다.


그 마음으로 내일부터는 ‘태백(泰伯) 편’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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