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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5. 2022

당신은 무엇을 위해 올바로 살고자 하는가?

선행은 고사하고 악행을 하며 가족 친지와 이익을 나누는 것들에게

子曰: “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泰伯(태백)은 지극한 덕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세 번 천하를 (굳이) 사양하였으나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할 수 없게 하였구나!”
泰伯(태백)

이 장을 시작하는 이름이라 편명이 되기도 한 泰伯(태백)에 대해서 먼저 누구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다. 泰伯(태백)은 주나라 문왕의 백부. 太白(태백)이라는 다른 한자로도 쓴다. 주나라의 조상인 태왕(太王), 즉,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태백(泰伯)·중옹(仲雍)·계력(季歷),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다.


태백은 장남이었기 때문에 주나라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공단보는 막내아들 계력(季歷)의 아들 창(昌: 나중의 文王(문왕))이 천하를 평정할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계력에게 왕위를 계승하여 그의 아들 창에게 이어지게 하고자 했다. 이것을 눈치챈 태백은 동생 중옹과 함께 남방으로 도망쳐 양보의 의사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왕위 쟁탈의 여지를 원천 봉쇄하여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고 나라의 안정을 꾀했다.


태백이 실제로 사양한 나라는 은나라의 제후국인 주나라였지만 나중에 무왕이 은나라를 타도하고 천자국인 주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통칭 천하를 사양했다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덕을 칭송할 수 없게 했다는 의미에 대해서 약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기도 하여 주자의 설명으로 대신하자면, 칭송할 수 없게 하였다 함은 ‘은미(隱微)하여 자취를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일반 백성들은 그가 어떤 일을 위에서 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행하였기 때문에 그런 훌륭한 선행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거나 그것을 알리지도 않아 칭송할 기회조차 만들지 않고서 그런 선행을 몸소 실천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를 들어보기로 하자.

 

泰伯의 덕으로, 商나라와 周나라의 교체 시기를 당하여 진실로 제후들의 조회를 받고 천하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침내 이것을 버리고 취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그 사양한 자취마저 없애버렸으니, 그 덕이 지극함이 어떠한가? 그 마음은 바로 백이와 숙제가 말을 (武王의) 말고삐를 잡고 상나라 정벌을 간하던 심정이나 일의 난처함은 그보다 더 심하였으니, 부자께서 탄식하고 찬미하심은 당연하다 하겠다. 泰伯이 대왕의 뜻에 따르지 않은 사실은 <春秋傳>에 보인다.

 

뒤에서 공부하게 될 18편인 '미자 편'의 8장에 보면, 공자가 7명의 은자(隱者)에 대해 평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장에서는 세상을 피해 숨어 지낸 사람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우중(虞仲), 이일(夷逸), 주장(朱張), 유하혜(柳下惠) 그리고 소련(少連)에 대해 공자가 평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한참 뒤에 공부하게 될 것이니 나중에 상술하기로 하고, 그 은자로 언급된 7명 중에서 ‘우중(虞仲)’이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해당 장에 공자는 그를 가장 마지막에 언급하면서, “숨어 살며 구애받지 않고 말했으나 몸은 맑음을 잃지 않았고 폐(廢)한 것이 권도(權道)에 맞았다.(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라는 극찬 아닌 극찬을 한다.

중옹(仲雍);우중(虞仲)

그 공자의 칭찬을 받은 은자의 대명사로 등장한 우중(虞仲)이라는 인물은 앞서 설명했던 주(周)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의 둘째 아들, 중옹(仲雍)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삼 형제 중 맏형이던 태백이 바로 아래 동생과 함께 막냇동생 계력에게 기회가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주나라를 떠나 멀리 형만(荊蠻)이 사는 강남(江南) 땅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를 잘라 스스로 왕이 될 수 없음을 표시한 후 스스로를 ‘구오(勾吳)’라 불렀다. 그렇게 이 두 형들의 희생으로 계력이 제후가 되고 그의 아들 창(姬昌)이 서백(西伯)이 되어 주대 천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도망하여 은거했던 형만 땅에서조차 훌륭한 인덕으로 왕으로 옹립된 태백(泰伯)은 아들이 없어 죽은 후 동생 중옹(仲雍)이 형의 왕위를 잇게 된다.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중옹이 죽은 뒤 아들 계간(季簡)이 뒤를 이었고 계간이 죽은 뒤 아들 숙달(叔達)이 뒤를 이었으며 숙달이 죽은 뒤 다시 아들 주장(周章)이 뒤를 이었다.

 

이때 주나라에서는 창(昌)의 아들 발(發)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태백과 중옹(우중)의 후손을 찾다가 주장(周章)을 찾게 만나게 된다. 무왕은 주장을 오나라의 제후로 책봉을 하는 한편 주장의 동생을 주나라 도읍 북쪽에 있는 옛 하(夏) 나라 도읍지에 우(虞) 나라를 세우게 하고 제후로 책봉함으로써 그를 우중(虞仲)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역사에서는 태백의 동생 중옹(仲雍)을 ‘우중(虞仲)’이라고 불러 그것이 사실이라면 증조할아버지와 증손자를 모두 ‘우중(虞仲)’이라고 부르게 되는 혼란이 발생한다. 사마천의 기록에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고전을 공부하는 이들은 교통정리를 통해 통상 우중이라고 하면 증손자 우중이 아닌 태백의 동생이던 중옹을 진정한 우중이라고 보는 것이 정례화되었다.

 

오나라는 춘추 말기에 매우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기도 하지만 결국 기원전 473년에 월(越) 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태백과 우중이 문왕의 큰아버지 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사후에 소급되어 지어진 전설이 아니냐고 의구심을 가지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앞서 주자의 주석에서 언급하고 있는 『좌전(左傳)』에 보면 당시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좌전』 희공(僖公) 5년조에 보면 우(虞) 나라의 군주가 “진(晉) 나라가 우리 종실(宗室) 나라인데 과연 우리 우나라를 해칠 것인가? ”라고 묻자 신하였던 궁지기(宮之奇)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은 태왕(太王)의 아드님들이었지만 태백은 부왕의 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후사를 잇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괵중(虢仲)과 괵숙(虢叔)은 왕계(王季)님의 아드님들이시고 문왕의 형제로서 경사(卿士)까지 되어 그 공훈이 왕실에 남아 있고 그 문서가 맹부에 갈무리되어 있기도 합니다. 진나라는 그런 괵(虢) 나라도 멸망시키려 하는데 하물며 우리 같이 더 윗대에서 갈려 나온 우(虞) 나라에 대해 우애를 발휘하겠습니까?”

 

‘혈연관계로 볼 때 더 가까운 괵나라마저도 멸망시키려 하는 판국에 우리 같은 우나라를 같은 희씨(姬氏)라 하여 봐주겠느냐?’하는 설명 속에서 오나라의 혈연이 매우 자연스럽게 언급되고 있는데, 그 역사적 사실이 이미 상식으로 통용되던 이야기로 기원전 655년에 모두가 알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 기원전 488년에는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노나라의 외교관 자격으로 오(吳) 나라의 태재(太宰) 비(嚭)를 만나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다시 또 자연스럽게 이 역사적 사실이 공공연한 사실이었음이 언급된다. 옛날 오나라 중옹(仲雍) 임금도 예법에 맞지 않는 예복을 입었던 것도 모두 그에 따른 사정이 있었듯이 오늘 노나라의 계강자(季康子)가 예법에 맞지 않게 행동한 것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오나라 건국 초기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귀국 군주님의 조상이신 태백(太伯)께서는 주나라의 예복을 갖추고 계셨지만 그 아우이신 중옹(仲雍)께서 후사를 이어받으셔서는 머리카락을 자르지고 문신을 하셨으며 벗은 몸에 장식품을 걸치셨습니다. 그것이 어찌 예의에 맞았겠습니까? 그러나 다 사정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춘추시대 말기에도 일관되게 태백과 중옹의 이야기가 화제로 등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의 일화는 실제 사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굳이 다양한 문헌과 언급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이 장의 언급을 확인시켜주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이전에 언급했던 왜 중세의 공부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분리하지 않는지에 대한 예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현대에 오면서 불가피하게 학문의 세분화와 전문화를 위해 그리하였다고 하지만, 인문학은, 아니, 실제로는 과학이나 그 어떤 분야에서도 한 분야만을 아는 것으로는 다각적인 검토를 통한 행간을 읽고 깊이 있는 이해를 얻어내는 것은 물론 사소한 사실적 검증조차도 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이 장에서 고문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전설에 필적할만한 당시의 상식이던 은자의 대명사로 태백과 중옹을 보여준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장의 핵심은 자신이 선행을 하는 데 있어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알 수도 없어 제대로 칭송할 수 없을 지경으로 행하는 지극한 덕을 말하고 있다.


연말연시가 되면, 자기보다 못한 힘든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기 위해 갖은 007을 방불케 하는 방법으로 거액의 기부금만을 익명으로 보내는 기부천사가 뉴스를 수년째 장식하고 있다. 십시일반으로 천만 원 정도 모아 기부하면서 자신이 속해있는 부서장의 이름으로 광고하는 공무원들이나 후원받아서 라면이나 쌀을 기부하면서 고아원과 양로원에 가서 나중에 선거용으로 쓸 사진을 찍어오는 국회의원들과는 굉장히 차이가 있는 행위이기에 더욱 사회의 귀감(龜鑑)이 된다고 하여 기레기들의 연말 고정 미담 뉴스로 삼는 것이다.

물론 기부행위라는 선행을 확장시키기 위해 사회적 기부활동을 사람들에게 고무(鼓舞)시키기 위해 아너스클럽 등의 활동을 진작(振作)하는 이유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억이나 수백억의 기부행위가 사회적 흐름에 영향을 주게 하기 위함이고, 자신은 고작 몇 십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내고 부하들까지 월급에서 돈을 떼면서 십시일반 모은 부서의 돈을 부서장의 이름으로 공직 부서를 언급하며 홍보행위를 하는 것은 말 그대로 홍보로 전락하고 만다.


그나마 남을 돕지도 않으면서 자기 것만 챙기는 작자들보다 그래도 홍보든 뭐든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보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어디선가 후원받은 라면과 쌀포대를 쌓아놓고 사진만 찍고 선거활동의 일환으로 여기는 여의도 배지를 단 것들은 그 쌀과 라면이 어떻게 사용되며 그것이 1년 365일에 걸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확인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이외의 어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적극적인 행정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해야 할 행위는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지도 않은, 다른 곳에서 얻어온 라면박스와 쌀 포대를 쌓아놓고 그따위 행위를 할 게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더 큰 행위를 통해 그들을 도와야 하는데 그들은 그럴 생각조차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말이다.

 

국회의원들은 자신이 속한 위원회라는 것이 있다. 이른바 국회의원들이 국가 행정 전반을 모두 다룰 수 없기에 분야를 나누어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좀 더 면밀히 검토하고 살피라는 취지에 다름 아니다. 그 분야별로 국가기관부터 공공기관 공기업에서 이른바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피감기관들이 속해 있다.


피감기관이라는 것은 국회에서 그들을 감시해야 한다는 감사기관으로서의 의무를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감사원이 감사원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않고, 심지어 멀쩡히 감사원장으로 뽑아준 법비가 선량한 양심을 가진 인물인 것처럼 연기하다가 자신을 임명한 청와대에 손가락질을 하며 자신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겠다고 막장 드라마를 찍고 며느리들과 명절에 애국가를 부른다고 설치다가 정작 정치뽕이 가셔 아무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내 경선을 통해 인지하고는 찌그러져 버리는 촌극도 발생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던 그 자리에 다른 뚱보 법비가 서자, 그가 대통령이 되도록 지지하는 것을 거래로 하여 보궐선거에 공천을 받아 여의도 배지를 달겠다고 추잡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공기업이라는 것들이 펑펑 적자를 내면서도 자신들의 성과급 잔치를 현재까지도 하고 있다. 아파트를 짓고 분양해야 할 일을 해야 하라고 했더니 자기 마누라 아들 딸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불법적 형태로 분양을 받아 시세차익을 남기는 것은 이미 그 기업에 속한 간부들의 필수 항목으로 자리 잡았고, 그들은 다시 분양업체나 감리업체로 자리를 옮기며 사법고시를 패스할 정도의 머리와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배웠으니 자신들도 전관이라는 것을 하고, 외교부의 모피아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배웠으니 관련 기업에 재취업을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제2의 인생이 보장되는 신의 직장임을 찬양하라며 후안무치한 그 얼굴로 당당하게 이웃들에게 자랑하고 다닌다.

공기업이랍시고 해봐야 그들의 능력은 같은 시기 대기업에 들어간 동기들보다도 밑이었음에도 그들은 자신들은 대기업에 들어간 능력 있는 동기들처럼 50에 짤리지 않고 정년까지 버티고 정년이 지나도 제2의 전관으로 또 관련 기업 등에 선배들이 다져놓은 자리에 가서 일할 수 있으니 철밥그릇보다 훨씬 더 한 금 밥그릇이며 다이아몬드 밥그릇이라고 득의양양해한다.


그들은 말 그대로 사회지도층도 상류층도 아니다. 그런 그들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악행을 배웠으며 그 악행을 답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사회학은 말한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고.

 

이 장에서 공자가 지극한 덕이라고 칭송한 태백의 행위가 지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런 행위를 한 것조차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기에 그 덕은 역설적으로 지극해졌다. 본래 덕이 그래야 하는데,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사회지도층과 상류층을 욕하는 중산층 소시민이라는 것들조차 덕이 아닌 사익(私益)을 누군가에게 빼앗길까 싶어 몰래몰래 자기 가족과 친지들에게만 공유하며 키득거리고 나눈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폼페이가 되는 현실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은 나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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