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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6. 2022

예가 모든 행함에 있어 기준이 되는 이유

기준이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자들에게

子曰: “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葸,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고, 삼가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스럽되 예가 없으면 혼란하고, 강직하되 예가 없으면 너무 급하다.”

이 장을 한 덩어리가 아니라 두 문장으로 나눠 제시한 것은 주석에서 오 씨(吳氏)가 두 번째 나눈 君子로 시작하는 문장을 별도의 한 장으로 보아 曾子의 말이라고 구분 지었고, 그것을 주자가 상고한 끝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정리를 끝냈기 때문이다.


자세히 읽어보면 선배 학자들의 구분 작업처럼 앞의 문장은 공자가 말씀하신 내용으로 뒤에 증자가 이야기한 것이라고 고증된 뒷 문장의 내용과 연결되는 내용이 아님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앞의 공자의 말씀을 살펴보자.


상당히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문장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보여준다. 하나는 어떤 다양한 행동을 하던 일관된 기준이라는 것이 없으면 그 행동이 부질없어진다는 점을 일깨워 일이관지(一以貫之)할 수 있는 기준이 바로 서있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또 다른 하나는 그 기준으로 대놓고 ‘예(禮)’라는 것을 제시한다. ‘예(禮)’를 그저 단순한 예의범절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고리타분한 개념으로 받아들이던 무식한 이들에게는 ‘예(禮)’라는 것이 어떻게 행동 기준의 범위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외연의 확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라고 문을 열어주고 있다.

공손한 것은 좋다. 하지만, 어떻게 공손할지 어디까지 공손할지 누구에게 공손할지 등등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까지 해야 공손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혼란스러워지게 된다. 그 혼란스럽다 함은 결국 자기 몸과 정신이 피곤해지는 것이다. 효율성도 떨어지지만 진심이 전달되지 않으면서 피곤하기는 더 가중되니 수고롭다는 표현만으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정도로 무거워진다.


‘삼가다(愼)’의 개념은 삼가는 것도 그렇고 신중을 기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 어떤 경우에 그래야 하는지 어떤 경우에 그러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판단의 기준과 범위의 기준이 없으면 당연히 모든 것을 삼갈 수밖에 없게 되고 그것은 당연히 두려워하는 것이 삼가는 것이 아님이 되어 버린다.


용맹스러운 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디까지 용맹을 드러내야 그것이 용맹이 되는지, 지나치게 되는 순간 용맹이 아닌 겁 없는 자로 자신의 능력치가 얼마인지를 가늠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저 난폭해지는 것이니 용맹이 아닌 것으로 뒤바뀌어버리게 된다.


강직하다는 것도 어디까지가 강직인지 기준을 두고 그것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에 턱없이 부족해도 문제가 될 것이며 그것을 넘어서면 위태로워지게 된다. 자신이 강직하기만 하다고 해서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너무 강직하기만 하면 그저 부러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네 가지의 기준을 정리하며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을 붙였다.

 

예가 없으면 節文이 없으니 그러므로 이 네 가지 폐단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節文’은 이른바 컨트롤을 의미한다. 어떤 개념을 설명할 때 그 개념에 대한 의미와 필요성을 설명함에 있어 가장 극단적인 설명법은 그것이 없을 때 일어나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에게 공기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상황을 설명하거나 인간에게 마실 물이 없을 때 벌어지는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거나 그대로 드라마처럼 보여주는 것만큼 이해를 빠르게 돕는 사례는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고리타분하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아 그리 필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 ‘예(禮)’는 공기나 물보다 인간의 삶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고 배우자는 자들이 성인이 되기 위한 과정에 이르기 전에 기본적인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갖추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네 가지 개념을 통제하는 개념으로서 설명해주고 있다.


그래서 장자(張子)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사람의 도리에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을 알면 공손해도 수고롭지 않고, 삼가해도 두렵지 않고, 용맹스러워도 난리를 일으키지 않고, 곧지만 급하지 않아, 백성이 교화되고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

 

이 주석에서는 ‘예(禮)’를 그대로 풀어 설명하지 않고 ‘일의 선후를 아는 것’이라는 말로 바꾸어 설명한다. 이것이 앞서 말했던 ‘예(禮)’가 가는 의미의 외연 확장에 다름 아니다. ‘예(禮)’는 행동을 조절하고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을 먼저 해야 하고 어떤 것을 나중에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칫 기준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호도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한 이중 보호장치로 풀어서 설명해주는 해설 방식인데, 예의범절이 가장 중요하다면 겉치레나 형식에만 중요시하거나 체면 따위만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의 곡학아세로 전락해버린 유교(儒敎)로 오인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자가 이 장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예(禮)’의 본질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최우선으로 두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를 정하는 것이다. 체면이나 겉치레가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혹은 예의가 있네 없네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준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질정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판단하는 기준으로 먼저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본래 공자가 생각하고 있는 예의 본질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개념이 담긴 중요한 장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뒤에 이어져 있는 증자가 한 말이라고 했던 문장을 보자. 앞 문장과 한 덩어리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장으로 붙어 있는 글의 내용이니 살펴보기로 한다.


“君子篤於親, 則民興於仁; 故舊不遺, 則民不偸.”
“군자가 친척에게 후하게 하면 백성들이 仁에 흥기하고,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의 인심이 각박해지지 않는다.”

 

이 내용은 실제로 위에서 살펴본 내용과 연결되지 않지만,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맞추기 위한 ‘예(禮)’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심각한 오해의 여지를 만들 수 있는 문장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떻게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180도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단 ‘군자(君子)’는 배우는 자들이 지향점으로 삼는 그 군자가 아닌, 위정자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위정자가 자기 친척에게 후하게 하고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는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자기 사람들만 챙기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글을 제대로 새기면 그런 오해는 생기지 않는다. 뒤의 문구들이 결과 구절로 분리되어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맥으로 묶이면 그런 오해는 생기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자기 친척에게‘만’이 아니고, ‘자기 친척에게 후하게 하는 위정자가 백성들에게도 후하지 않을 리가 없다.’로 해석하게 되면 만인에게 후하고 자신만을 챙기지 않으니 당연히 백성들이 仁에 흥기하게 된다.


이 문장의 키포인트는 ‘친척’이다. 현대인의 감각에서 친척은 ‘인친척’으로 이해되어 자기 식구를 챙긴다로 이해가 되지만, 증자의 시대에 있어 ‘친척’은 친족이 아닌 배척하고 숙청하는 대상들이 되어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 제거해야 할 1순위로 삼았기 때문이 이런 문장이 나온 것이다.


또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 역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친구를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숙청하고 공을 세웠으니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하다고 하여 토사구팽(兎死狗烹)되는 현실이 팽배했던 시대였기에 자신을 도와준 친구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도 그것을 자연스레 본받게 되어 신의가 돈독한 사회를 만든다는 설명인 것이다.


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떤 착오로 인해서인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어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나눠 설명하였지만, 결국 이 장의 가르침을 종합해보면 내 생각과 내 행동의 기준을 예로 확실하고 확고하게 잡고 있어야 번거로운 일도 벌어지지 않고 더 힘들지도 않으며 실수할 여지도 훨씬 더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기준이 ‘예(禮)’일까?

‘예(禮)’의 본질은 인간의 행동을 절제하고 욕망을 조절하며 관계를 조화시켜주는 것이다. 특히 예의범절이나 겉치레 형식을 의미하는 작은 의미보다 외연을 확장하여 본래의 그러한 형식을 마련하게 되는 근거가 되는 이치를 뜻하게 된다. 즉, 형식화된 예의범절의 형태가 아니라 왜 그러한 예의범절이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이자 이치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잘 모를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잘 아는 이에게 묻고 확인하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 모르는지 잘 아는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보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식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없을 때 어느 군가에 묻지 않고 물을 수도 없는 것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던 ‘예(禮)’가 기준이 될 수 있는 것도 절대적인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불우이웃 성금을 내는데, 100만 원이 어마어마하게 큰돈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작은 돈이 부자도 있기 마련이다. 임금에게 인사하는 법과 친구에게 인사하는 법이 다른 것도 ‘예(禮)’에서 그 경우와 대상에 따라 조절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책에서 배우거나 누군가가 기준을 세운 것을 단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예(禮)’도 그러할진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장에서 제시했던 ‘恭, 愼, 勇, 直’ 이 훌륭한 덕목들 마저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그 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네 가지 훌륭한 덕목뿐만이 아니다. 세상 모든 이치들에 있어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고 그 역치와 실무율의 수치가 다른데 그것을 어떻게 한 가지로 못 박아 무조건 따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 보여주지 않았지만 고급 수준이 되면 그다음을 읽고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내가 그 기준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숙제가 보이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수천수만의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내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예(禮)’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실제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 혼자 연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역시 변화하는데 하물며 상대도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언행 하나하나에 더더욱 신중하고 삼가되 내 언행의 본질에 대해 신경 써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행동하고 나 스스로 만족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상대가 그렇게 느껴야 한다. 그것이 앞서 공부했던 ‘서(恕)’의 개념이다. 그런데 내가 나의 마음에 진심을 다해 노력하여 다 끄집어내지 않으면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충(忠)’이다.

물론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 설명은 끝나지 않지만 그렇게 되면 유학의 전체 개념에 대한 유기적 관계와 그 다각적 상호보완적인 완성형을 설명해야만 하니 오늘은 한 개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서로 유기적이면서도 상호보완형의 입체적 구조로 개념들이 위치하며 그중에서 ‘예(禮)’가 왜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이해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밥을 먹어도 배가 부르기 전에 수저를 놓는 사람이 있고, 배가 불러 도저히 못 먹을 때까지 수저를 못 놓는 사람이 있다. 물론 전자가 후자보다 경험칙에 의거하여 상대적으로 조절을 더 잘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느 정도 먹으면 배가 고픈지 그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감안하고 감각에 집중해야 하며, 소화기관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저도로 조절을 해줘야만 한다. 가장 기본적인 밥 먹는 것도 조절하지 못해 365일 다이어트 약과 운동 등등을 장사에 활용하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런데 능력도 안 되는 넘치는 욕망과 이글거리는 욕심만으로 세상을 질주하는 위험한 이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만의 위험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지 늘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물론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자신들의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을 채울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의 몸이 불이 붙어 죽을지 모르는 불나방처럼 타들어가고 만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당신의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당신의 몸을 원료로 지옥 같은 불길에 화하는 것인가?

 

대개 욕망에 눈이 먼 존재들은 곁에서 아무리 그것이 위험하고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하여도 멈춰야 할 선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러한 공부를 한 적도 없고, 그 욕망을 절제하며 조절하는 훈련과 수양을 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날씬하고 보기 좋은 몸을 위해서도 다이어트를 하고 궁극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고 운동을 하고 먹을 것을 조절하는 것이 트렌드가 아닌 기본상식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은 가장 중요한 당신의 삶이 지향해야 할 바를 위해 노력함에 있어 가장 위험한 것들에 다가서지 말아야 할 기준을 공부하고 세우는 마음 공부과 자기 수양에는 어찌 그리도 무심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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