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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17. 2022

몸이 다친 것만 보이고 양심이 엉망인 것은 안 보이는가

이 장이 몸 다치지 않게 하는 효도에 대한 내용이라고만 읽는 바보들에게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曾子께서 병이 위중하자,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였다. “(이불을 걷고) 나의 발과 손을 보아라. <詩經>에 이르기를 ‘전전하고 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하였으니, 이제야 나는 (이 몸을 훼상시킬까 하는 근심에서) 면한 것을 알겠구나, 소자(제자)들아!”

이 장은 ‘몸, 머리털,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니라.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귀에 익은 유명한 명구를 언급했던 주인공 증자의 일화를 보여주고 있다. 위 명구는 증자가 저술한 <효경(孝經)>에 나오는 어구로, 유학에서 효도의 실천강령처럼 인식되면서 <사자소학(四字小學)>에도 실리면서 한자 공부를 시작한 어린 아이들에서부터 마음에 새겨야 할 효의 기본으로 강조된 내용에 다름 아니다.


증자(曾子)는 앞서도 한번 설명했지만, 공자의 도(道)를 계승한 제자로,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에게 전해져 유교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동양 5성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주석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증자가 평소에 ‘신체는 부모에게 받았으니, 감히 훼상할 수 없다.’하였다. 그러므로 이때에 제자들로 하여금 이불을 걷고 자신의 손과 발을 보게 한 것이다. 詩는 <小旻篇>이다. 戰戰은 두려워하는 것이고 兢兢은 경계하고 삼가는 것이다. 못에 임한 듯이 한다 함은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얼음을 밟는 듯이 한다 함은 빠질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曾子는 온전히 보전한 것을 문인들에게 보여주고, 그 보전하는 어려움이 이와 같아서 장차 죽음에 이른 뒤에야 훼상함을 면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말씀한 것이다. 小子는 문인이다. 말을 마치고 다시 (문인들을) 부른 것은 반복하고 간곡히 당부하는 뜻을 극진히 하신 것이니, 그 경계함이 깊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제자들을 불러 자신의 몸 어디 한 구석 상한 곳이 없는지 손발을 꼼꼼하게 살피라고 한 것은 자신의 몸이 귀중해서가 아니다. 정작 자신이 죽음을 맞이함에 있어 자신이 진정한 효를 끝까지 완수하였는가에 대한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자(伊川)는 이 장의 핵심을 군자와 소인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군자의 죽음을 終이라 하고, 소인의 죽음을 일러 死라 한다. 군자는 몸을 보존하고 죽는 것을 자신의 일을 마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曾子께서 몸을 온전히 보전하고 돌아감으로써 면함을 삼은 것이다.”

 

이른바 ‘생(生)을 마치다’라는 어원이 된 ‘終’에 대한 의미에 대해 깊이 새겨주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생을 끝낸다는 것이 아니라, ‘몸을 보존하고 죽어 자신의 일을 온전히 마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전성된 것임을 배우는 자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라는 뜻이다. 그래서 소인의 죽음을 그저 죽는다고 하는 것과 구분된다는 설명이다.

 

윤 씨(尹氏)는 배우는 자들이 혹여 또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할 부분이 있을까 우려하여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달아준다.

 

“부모가 이 몸을 온전히 낳아 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히 보전하고 돌아가야 한다. 증자께서 임종 시에 이불을 걷고 손과 발을 보여주심은 이 때문이었다. 도에 터득함이 있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부연설명이라 하여 똑같은 설명을 반복한 것뿐이라면 굳이 주자가 이 주석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을 깨달으라 이 주석을 담았을까? 맞다. 가장 마지막 문장. 이것이 조금 더 생각하고 그 행간을 읽으라고 다음 단계를 나아갈 자들을 위해 열어둔 문이다. 

효에 대해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를 상하지 않았는지 하는 행동이 단순히 몸을 다치게 하는 것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님을 생각하는 고급 수준에 올라간 이들에게 일러줌이 바로 마지막 문장이다.


마지막 문장의 도가 도대체 뭘까? 고급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중급 언저리의 눈치가 빠른 자들이 의문을 품는 것을 우려하였는지 범씨(范氏)가 그 도에 대해 생각의 실마리를 다음과 같이 제공한다.

 

“신체도 오히려 훼손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행실을 훼손하여 어버이를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장의 내용을 그저 고리타분한 유학의 겉치레 정도로 이해한 무지한 자들에게 날리는,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훅 펀치, 되시겠다. 대개 이 글을 시작하며 일러준 <사자소학>이나 <효경>에 언급된 구절을 말하면, 구태의연한 고리짝 유학의 가르침이라며 자기 몸을 다치지 않고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효도라고 강조한 증자의 말을 무시하는 이들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그것을 오해하며 단발령에 대해 거부의사를 보이며 강렬한 저항을 표시할 때 말했던 근거자료 정도로 이해를 하는 초급단계의 수준밖에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 장은 아주 중요하다. 이 장을 이해하게 되면 이제 더 이상 그런 바보 같은 단세포적인 생각으로 고문을 읽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범 씨가 마지막에 고급 수준의 배우는 자들은 이미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아 초급 단계에서 신체만을 언급하던 뭇 무지렁이들에게 진실의 실마리를 살짝 보여주었다.

증자가 신체를 언급한 것은 신체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초급이나 중급 단계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읽어내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이 내용은 단순히 내 신체에 대한 부분을 손상시키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렇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고급에 들어갈 수준에 이르러서 말이다.

 

당신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하고 그저 신체에 대한 강조만 머리에 담고 있었다면 당신은 당신의 사유가 더 진전하지 못하고 왜 당신이 철학적 사유나 배우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는가에 대한 이유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고 그 책에 있는 내용조차 제대로 담지 못하는 자는 책의 행간에서 제시하는 혹은 그 책에서 읽은 내용과 가르침을 담고 자신의 생각으로 다시 곱씹어 나만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서 말하는 비판적인 책 읽기가 그 비슷한 흉내에 해당한다. 단순히 책에 대해 트집 잡거나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위해 잘못된 부분을 찾는 것이 비판적인 것이 아니다. 그 책의 내용의 의도나 행간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지를 저자의 의도대로 질질 끌려가며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맞게 가는 것인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지적 사유를 통해 검증해나가며 읽는 것을 말한다. 즉, 더 깊은 행간까지 모두 길어내어 내 것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그 기본의 아주 좋은 예가 바로 이 장이란 말이다.

다시 원문의 내용으로 돌아와 보자. 왜 이 내용이 단순히 신체가 아닌지가 한꺼번에 깨달음으로 도달하였는가? 생각보다 조금 깊고 어려운 내용일 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다는 성선설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 본성이 되는 선함을 되찾아 가고 그것을 길러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은 것이, 본성으로서의 착함은 내가 알고 있는, 내 수양으로 인해 길러진 것이 아니다. 


때문에 본성이 선한 것을 사실이나 그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고 그것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 어떤 깨달음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익혀 그것을 유지하도록 수양해나가는 것이 바로 성인의 경지로 가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길을 가다가 아이가 버스에 치일뻔할 경우 내가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그 아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착한 본성이 맞지만, 그저 무의식 중에 벌어진 그 선한 본능은 평상시 노약자를 도와야 한다던가 소중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늘 노력해야 한다던가 하는 배움과 학습과 수양의 지속적인 단련으로 몸에 배이게 하는 것이다. 예(禮)가 그러하고 인(仁)이 그러하며 의(義)가 그러하다. 물론 그 모든 과정에서 지(知)가 그렇게 되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부모님이 주신 눈에 보이는 육신도 손상되지 않을까 바르게 보존하려고 그렇게 바르르 떨 정도라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에 해당하는 내게 주신 본성, 선함과 그 올바름에 대해서는 말해서 뭐하겠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왜 증자는,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뒤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언행에 대해 그렇게 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 될 것이지 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투덜거릴 모자란 초심자가 있을 법하다. 그리고 왜 주자는 자신의 주석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투덜거릴 만도 하다. 그런 투덜거림이 이해가 간다면 당신은 평생 초심자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당신이 고급은 고사하고 중급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증자는 이미 자신의 입을 통해 몇 번이나 강하게 강조하였고, 주자 역시 이미 자신의 주석에 증자의 설명을 다시 한번 반복하여 설명함으로써 고급독자들은 이해하라고 열어주었다. 무슨 뜻이냐구? 원문에 증자가 말한 내용을 다시 찬찬히 곱씹어 읽어보라. 당신이 모르는 내용이 있지 않았나? 


맞다. 당신이 이름만 대강 들어보고 찾아보지도 않은, 그 <시경(詩經)>의 내용이 바로 구체적인 적시이다. 그렇게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했던 이유가 내 몸이 다칠까 봐서였을 것 같은가? 

아니다. 이전 공부에서도 이 <시경(詩經)>의 내용을 몇 번이나 언급하면서 말했다. 이것은 자신의 평소 언행이 혹시라도 실수가 있을까 자신의 언행이 인생 여정에 있어 혹여라도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성인의 수준에서조차 조심스러워하는 그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당신이 직접 찾아보고 당신이 직접 써보고 당신이 직접 해석해보지 않았기에 당신은 그저 지나가버리고 말았고, 당신의 뇌리에 가슴에는 이 <시경(詩經)>의 문구가 전달하는 본연의 의미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자들에게 구구절절이 증자와 주자는 더 설명할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모두 말해줬음에도 왜 설명해주지 않는 자들을 일일이 또 설명해주는 것은 제대로 된 스승이 보일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줄 때 다른 경전을 가지고 와서 인용을 하는 경우, 초급자는 ‘아! 그 어려운 경전을 예로 들어주시는구나. 어차피 내용을 언급하셨으니 그 내용선에서 이해하면 되는 건가?’라며 그것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중급자들의 경우에는 과연 그 경전에서 언급된 것이 어떤 내용인지를 한 번 찾아본다. 


하지만 그 경전의 내용을 찾아본다고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그 경전에서의 의미를 찾아보고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게 된다. 그래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고급에 오르게 되면 일단 그 경전의 언급을 모르지는 않지만 찾아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왜 스승님이 그 경전을 그 가르침을 주면서 인용하였는지 적확한 의도와 행간을 찾는다. 인용을 했는데, 그 인용을 찾아 그 인용을 왜 했는지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하고서 상대의 의중을 파악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것은 상대가 나와 대화를 하다가 나에게 이해를 돕기 위한 쉬운 예를 준 것이 아니라 나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가르침이란 말이다.

 

한자를 읽을 수 없어 이 시리즈를 언감생심 아침마다 읽지 못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요 며칠 한국 시간으로 매일 7시에 글을 올리던 것을 조금 시간을 늦춰 오늘처럼 올려보는 시도를 하고 있다. 물론 나는 새벽에 읽어나 그날의 장을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며칠 늘 올리던 시간에 발행하지 않으셔서 출근 전에 읽으면 딱 좋았는데 그 타이밍을 깨실까?라고 생각하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인들은 마흔 언저리에 다가갈수록 고전 유전자와 트로트 유전자가 급격한 발작 수준으로 왕성해진다. 여성도 예외는 아니겠으나 남성의 경우가 통상 훨씬 더 심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밑천도 없이 그 유전자의 이끌림에 찾게 되는 것이라고는 고작 제대로 번역되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번역서나 해설서 찌그러기와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이다.

 

당신의 개인 취향에 대해 뭐라 탓할 생각도 탓하고 싶지도 않다. 허나,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대강 그저 그렇게 몇 장 접었다고 말던가 혹은 아침마다 누군가가 한자를 못 읽어도 그저 쭈욱 읽어 내려가면 그뿐이라는 그 안일하고 허접한 마음자세로 접할 생각이라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마음에 담지 않을 글이라면 작가 놀이를 하며 허접한 자기 일상을 적으며 서로 댓글 적고 키득거리는 그 수준에서 위정자들에게 개돼지 소리를 들으며 지내라.

 

행간은 고사하고 문면에 드러난 내용조차도 읽지 못하는 문해력 떨어지는 이들이 검찰에서 경찰에서 관공서에서 일을 한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자각도 없다. 자신들이 제법 똑똑하고 책도 좀 읽고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위에 있다는 착각을 갖고 산다. 

스스로를 돌아보라. 

그것을 검증하는데 고전만한 것이 없다. 수천 년 전에 쓰여진 고전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모르는 내용을 찾아보고 탐구하고 공부할 생각이 없으면서 안일하게 초록창을 대강 찾아서 그 얄팍하고 알량한 지식을 호주머니에 챙길 요량이라면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진화는 고사하고 자기 발전조차 얻을 수 없다. 


아예 공부하지 않고 책도 읽지 않는 사람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자신이 책을 좀 읽고 공부도 한다고 낙서 따위 하면서 필사라고 착각하고, 독서라고 착각하면서 눈으로 그저 활자만을 담는 자가 자신이 계속해서 노력한다고 자신을 속이고, 속이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장은 효에 대한 단순한 내용이 아니다.

당신이 하는 언행이 과연 처음 부모님이, 하늘이 주신 것을 보존하고 노력하고 진화시키고 있는지 당신의 다 굳어버려 돌이 된 양심에게 물어봐라.

최소한 당신의 양심이 알고 하늘이 알고 내가 안다.

정신 차려라. 그렇게 살라고 당신에게 주어진 생이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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