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이는 가만히 다시 세찬이의 손을 잡고 조용히 언덕 뒤로 걸어 내려왔다. 할아버지 집의 안채로 다시 걸어오면서 고운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찬이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내려오면 아까 그 남자들이 할아버지의 공방을 얼마나 더 함부로 망칠까 싶은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고운이의 눈빛은 분명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할아버지가 왜 쓰러지셨는지, 저 남자들이 왜 지금 할아버지의 공방에서 저런 난리를 부리고 있는지 등등을 고운이는 다 알고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실례합니다.”
두 사람이 안채에 막 들어오려는데 두 남자가 집을 찾았다.
“누구시죠?”
막 나가려고 준비하던 세찬이의 엄마가 그들을 맞았다.
“저희는 문화재 관리청에서 나왔는데요.”
“네?”
엄마는 놀란 눈으로 그들을 다시 한번 보았다.
“아까 오셔서 아버님의 공방에 계신데요. 무슨 일로 또…?”
“예?”
이번에는 두 남자가 황당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아까라뇨? 저희 말고 다른 사람들이 또 왔었단 말입니까?”
“아니, 아까 문화재 관리청에서 나온 분들이 지금 공방에…”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세찬이 엄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 빨리 가봐!”
남자들도 놀란 표정으로 몇몇이 먼저 공방으로 달려 올라갔다.
“세상에! 그럼 그 사람들은 또 누구였다는 거죠?”
세찬이도 그제서야 앞에 왔던 남자들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엄마와 함께 공방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공방에서 사라진 후였다.
공방은 이미 완전히 난장판으로 할아버지의 탈들은 모두 없어진 후였고 문화재 관리청 사람들이나 엄마, 세찬이 모두가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뭔가 다시 생각났는지 세찬이가 공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안채에 서 있던 고운이가 생각나서였다. 다시 고운이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볼 셈이었다. 숨이 차서 달려오는 세찬이를 기다리기라고 한 듯 고운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찬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고운이는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헉헉! 어떻게 된 일인지…, 헉헉! 넌 알지?”
“숨넘어가겠다. 그런다고 대답이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닌데, 넌 너무 성급하고 생각이 없어.”
“헉헉! 알아? 몰라?”
고운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지금은 일일이 설명해줄 수 없어. 이따가 저녁때 공방에서 만나. 너한테 설명해 줄 사람을 데리고 갈게.”
세찬이는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면서도 왠지 고운이에게 계속 뒷덜미를 잡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나중에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았지만 고운이도 이 마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였다. 고운이는 몸이 아파 지난여름방학 이후에 이곳 외삼촌댁에 내려와 요양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세찬이가 여름방학이 끝나고 서울에 올라갈 때 내려왔기 때문에 이제까지 만날 수 없었던 거였다.
엄마가 할아버지 병원에 간 동안 세찬이는 집을 지키고 있기로 했다. 밥은 아줌마가 모두 준비를 해두었고 굳이 병원에 가서 지낼 수 없는 상황인데 모든 가족이 가 있을 필요는 없다는 엄마의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병원에 가기 전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엄마가 떠날 때까지 세찬이의 머릿속엔 온통 할아버지의 공방에 들었던 그 도둑들과 고운이의 알 수 없는 정체와 곧 듣게 될 설명에 대한 기대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왜 할아버지는 그렇게 되신 거지?’
당장이라도 고운이를 찾아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저녁에 나오겠다는 고운이의 말을 일단은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저녁을 혼자서 먹고서 아랫목에 가만히 누워있자니 할아버지의 체취가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것만 같아 더 마음이 아파 왔다.
‘할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삐리리리--
살짝 잠이 들어다 싶었는데 어디선가 기분 좋은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할아버지가 불어주시는 퉁소 소리도 들어봤지만 이 소리는 퉁소의 그것과는 다른 가벼우면서도 더 맑은 느낌을 주는 묘한 소리였다. 가만히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니 그 소리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밖은 이미 해가 저물고 초승달이 떠 있었다.
‘어디지?’
가만히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공방의 뒤편 목재 보관창고에 발길이 멎어 있었다. 공방의 바로 옆, 목재 보관창고는 할아버지가 탈을 만드는데 쓰는 나무들을 보관해두는 곳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나무와 공구들이 잔뜩 쌓여 있을 뿐이고 반대쪽에 있는 부뚜막의 불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빛도 없었고 목재라도 떨어지면 위험하다고 해서 자주 가는 곳은 아니었다.
가끔 목재 보관창고 앞에 있는 땅에 묻어둔 항아리에 넣어둔 수정과나 식혜를 할아버지가 가져다주시곤 했는데 겨울이면 그 위로 내린 눈을 손으로 치우고 살짝 얼어있는 얼음을 깨고 떠다 먹던 그 맛은 서울에서 사 먹는 캔음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맛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나이가 많이 드시고 난 후로는 그곳에 수정과나 식혜를 담가 두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더더군다나 발걸음 할 일이 없던 곳이었다.
삐리리리--
귀에 익은 듯한 음률을 연주하던 피리소리는 분명히 목재 보관창고의 앞에서 들려왔다. 뒤로 보이는 대나무 숲을 통해서도 그 소리를 분명히 바로 앞에서 들리는 듯했다.
“어? 소리가 끊겼다.”
세찬이는 소리에 이끌려 걸어오긴 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 소리가 끊겨버린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등이 오싹했다. 놀라 얼른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 누군가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다. 왜 자꾸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분명히 누군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꺄웃거리며 소리가 끊긴 자재고의 앞으로 걸어 들어가다가 뭔가가 발에 툭하고 걸렸다.
“아야!”
넘어질 뻔했던 곳을 바라보니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발로 그곳의 흙을 걷어내고 보니 땅에 묻어놓은 항아리 뚜껑이 눈에 얼어 옆으로 삐뚤어져 나와 있었다. 아까 발에 걸려 부딪혀서인지 뚜껑이 조금 삐뚤어져 있었다. 예전 생각이 나서 혹시 식혜나 수정과 항아리가 아닐까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할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뭔가가 있을까 싶어 뚜껑을 가만히 열어보았다. 온통 깜깜한 어둠에 묻혀 있는 항아리 속은 잘 보이지가 않았다.
‘저게 뭐지?’
확실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항아리 안에서 어슴푸레한 달빛을 받았는지 뭔가가 반짝거렸다. 큰 것은 아니었지만 항아리 안쪽에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손을 뻗어 잡아보려고 했지만 세찬이의 팔 길이보다는 항아리 안이 훨씬 깊었다.
‘생각보다 항아리가 깊네.’
몸을 잡게 해서 상반신을 항아리 안으로 깊숙이 넣어 항아리 안으로 손을 뻗치는데 몸의 중심을 잃으면서 몸이 항아리 안으로 쏠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순간, 작은 상자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어어…”
그때 누군가 뒤에서 세찬이를 잡아 끌어당겼다. 세찬이는 흙이 묻은 상자를 들고서 가까스로 항아리 안에 빠지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
“어휴! 고마워! 하마터면… 우왓!”
바로 뒤에서 자신을 잡아준 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세찬이는 다시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찬이의 앞에 옛날 옷 같은 것을 입고 있는 체구가 엄청나게 크고 체격이 다부져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아주 가볍게 들고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남자의 몸 전체에서는 불그스레한 기운이 금방이라고 불길을 일으킬 것만 같은 기운을 내뿜으며 온 몸에 붉은 조명을 쏘이는 듯한 인상이 들었다. 어두운 탓인지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건장한 몸하며 뿜어져 나오는 붉은색의 빛만으로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이 충분히 느껴졌다.
“누, 누구세요?”
들고 있던 세찬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 우락부락해 보이는 남자가 가만히 뒤로 물러섰다.
“이런 녀석이 어떻게 탈을 다룰 수 있다는 거지?”
낮에 만났던 우람이라는 아이였다. 우람이가 우락부락한 남자의 옆에서 걸어 나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할아버지가 그러셨어. 그걸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세찬이 뿐이라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운이가, 놀라서 상자를 안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세찬이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게 뭔지도 아직 모르는 거잖아!”
우람이가 다시 트집을 잡듯 물었다.
“이걸 찾아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이런 상자는 분명히 우리가 모두 찾았을 때는 눈에 띄지 않는 거였잖아? 안 그래?”
세찬이는 고운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해서 고운이와 우람이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우람이가 자신에 대해서나 고운이가 말하고 있는 그 ‘뭔가’라는 것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만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우연이었어. 너도 봤잖아? 그저 우연히 발에 걸려 넘어진 것뿐이지, 알고서 찾은 게 아니라구.”
“야! 신우람!”
고운이의 까랑까랑한 높은 톤의 목소리가 우람이를 꾸짖었다. 우람이는 등을 돌려 공방 쪽을 바라보며 화가 난 듯한 고운이를 마주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고운이도 무서운 여자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다 알았으니까 그럼 확인해 보자구. 할아버지가 잘못 보신 게 아니라면 말이지…”
우람이가 공방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덩치가 커다란 남자도 조용히 우람이를 따라갔다.
“뭐 하고 있어? 얼른 너도 따라와. 세찬!”
심각한 얼굴로 고운이도 어느 사이에 공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어. 같이 가.”
손에 들려 있는 작은 함을 놓칠 새라 세찬이가 그 뒤를 따라나섰다.
공방에 들어서자 우람이의 뒤에 서 있는 남자의 붉은색이 어둠이나 달빛과는 관계없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이 원래의 얼굴이 아니라 탈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너무 오랫동안 탈을 봐온 자신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저 붉은색으로 둘러싸인 아저씨는 누구야?”
조심스럽게 고운이에게 묻는다는 것이 말소리가 조금 컸는지 그 남자가 세찬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보여? 우리 백정이의 오라가?”
정작 질문을 받은 고운이보다 우람이가 훨씬 놀란 목소리로 세찬이에게 물었다.
“백정이? 아! 그렇구나!”
그제서야 세찬이는 그 커다란 덩치의 남자의 얼굴이 왜 탈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지 깨달았다. 남자의 얼굴은 할아버지가 만드는 하회탈 중에 ‘백정 탈’이라고 설명을 들었던 탈의 생김새와 아주 흡사했다. 백정은 원래 음식으로 쓸 소나 돼지 따위를 죽이는 사람으로 고기를 파는 사람이었는데 소를 잡거나 돼지를 직접 죽이는 일을 하기 때문에 덩치도 크고 힘도 세고 해야 한다고 할아버지가 설명해주신 적이 있었다. 그 백정탈의 얼굴을 한 남자는 원래 탈의 얼굴처럼 다시 웃는 얼굴로 세찬이를 보고 있었다.
“그럼 안 보여? 바로 옆에 있는데? 백정 탈하고 비슷하게 생겨서 ‘백정이’라고 부르는 거야?”
세찬이의 질문에 우람이는 가슴에 달고 있던 백정 탈 모양의 펜던트를 보이며 말했다.
“맞아. 백정인 내가 다루는 하회탈의 영혼이야. 할아버지가 소개해준 내 친구지.”
아까보다는 우람이의 태도나 목소리가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친구?”
의아해하는 세찬이를 보고 있던 고운이가 나섰다.
“세찬아! 저 백정이는 우리처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보여. 다른 사람들, 특히 꿈을 믿지 않는 탁한 영혼을 가진 어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 영혼이 맑은, 선택된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거야. 그리고 지금 저 백정인 우람이가 가진 영혼의 힘으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우람이의 ‘친구’라고 부르는 거야.”
“풋!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저게, 아니 저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세찬이는 고운이의 설명을 듣다 말고는 황당한 헛웃음을 터뜨렸다.
“보이기만 할 뿐이지, 다룰 줄도 모르는 거 아니야?”
우람이가 다시 입술을 삐죽대며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렸다.
“우람이, 너 이제 좀 그만할 수 없겠니?”
다시 무서워진 고운이의 표정에 우람이가 입을 닫았다.
“세찬아! 지금 니가 듣기엔 모두 황당한 과학소설 같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우리한테는 시간이 별로 없어. 지금 저 백정은 우람이가 가지고 있는 백정탈을 통해서 우람이의 영혼으로 탄생한 거야. 우람이의 수호신 같은 거지. 물론 저 펜던트는 할아버지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거고…, 할아버지는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영혼의 색을 보신 후에 그에 맞는 탈을 깨울 수 있다는 것을 아셨던 거야. 그리고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신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이유?”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세찬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 너희 할아버지는 그냥 탈을 만드는 분이 아니셨어. 원래 우리 ‘탈’이라는 건 그냥 굿이나 탈춤 같은 놀이를 위한 게 아니었대. 언젠가 너도 할아버지한테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을 거야.”
고운이의 말을 듣고 보니 어느 여름밤인가 별이 쏟아질 듯한 하늘을 보면서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탈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세찬아! 탈이라는 건 말이다. 가면을 뜻하는 것뿐만 아니라 ‘탈 나다’의 말에서처럼 재앙이나 병을 뜻하기도 한단다. 왜 너도 음식을 잘못 먹어 배가 아플 때 '배탈'이 났다고 하고, 다친 곳이 덧나도 '탈 났다'라고 하지 않니? 또 무슨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탈 났다'라는 말을 지금도 쓰잖니? 할애비가 탈을 만드는 것은 그저 놀이를 위한 것이 아니란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그러니까 아주 옛날에는 이 탈이라는 것이, 재앙이나 병을 가져오는 악신이나 역신을 쫓으려고 할 때, 그보다 더 무섭고 힘이 있는 존재가 필요해서 그 존재를 대신할 것으로 사용한 것이란다. 그래서 그것을 닮은 이 탈을 쓰고 쫓아 버리는 거지.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탈이 무서워서 주변에 가까이 두기를 꺼려했단다. 너는 본 적이 없겠지만 장례식에서 쓰던 방상씨는 물론이고, 한 마을의 지킴이로 모셨던 탈들도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당집에 보관하곤 했단다. 그래서 할애비의 집은 마을에서 이렇게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거란다. 원시생활을 하던 때에도 탈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때는 수렵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사냥을 하기 위해서 동물한테 접근하기 위한 위장용 가면으로 쓰였었는데 그 이후로는 자신들이 죽였던 동물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주술력을 몸에 지니기 위한 주술적 목적에서 시작되어서 점점 의식용으로 발전된 거란다.”
“주술이요?”
“그래. 주술. 왜 있잖니? 요즘 말하는 마법이니 하는 것들과 같은 거지.”
“그럼 할아버지가 마법사예요?”
“허허허.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할애비는 이제 늙어서 마법사는 안되고, 마법사는 너처럼 착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들이 되어야겠지?”
할아버지의 얘기가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지금 고운이가 설명하고 있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할아버지가 그때 말한 것들이 그저 전설이나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도 같았다. 고운이의 설명은 계속됐다.
“원래 탈을 만들고 탈춤이나 탈놀이 같은 것이 끝나고 나면 어느 고장에서나 탈을 불태워 없앴는데 이건 놀이의 마무리여서 어느 곳에서나 꼭 그렇게 했다고 전해. 탈에는 갖가지 액살이 잘 붙는 법이라 태워서 그것들을 모두 날려 버려야 한다고들 믿었었거든. 그런데 어차피 할아버지가 만드셨던 탈들의 대부분은 탈춤이나 놀이 전승자들에게 건네 졌고, 나름대로 그 목적에 알맞게 사용되었으니까 상관없는데, 할아버지는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무언가를 지닌 탈을 만들고 싶어 하셨던 것 같애.”
“더 높은 수준의 무언가?”
“그래. 그게 지금 우람이가 다루고 있는 백정이 같은 존재가 된 거야. 너도 알겠지만 백정은 원래 동물을 죽이는 거라고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처형을 담당하는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에 힘이 세고 험악하기 그지없지. 물론 실제로 그 백정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탈을 쓴다는 건 탈을 써서 자기 얼굴을 가리는 것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걸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어. 탈을 씀으로써 본디의 얼굴과는 다른 인물이나 동물 또는 초자연적인 신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인격 내지는 신격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거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지금?”
세찬이는 도무지 공상과학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아 짜증이 났다.
“그게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그리고 지금 네 말대로라면 지금 저 백정이가 탈에서 나온 귀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거봐! 설명을 해서 될 녀석이 아니라고 내가 그랬잖아.”
우람이가 다시 세찬에게 핀잔을 주며 나섰다.
“그런 설명 굳이 듣고 싶지 않아. 너희들의 탈 소꿉장난에 장단을 맞출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말을 잘라내고 공방을 나서려는 찰나, 세찬이를 막아서며 고운이가 목에 매고 있던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