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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5. 2022

어떻게 하면 원리를 몰라도 따르게 할 수 있는가?

민중을 개돼지로 둔갑시킬 수 있는 것은, 정치꾼만의 마술이다.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은 (도리에)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원리를)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랜만에 짧고 간결한 내용의 글자짜리 가르침이 나왔다. 이제 짧고 간결한 문장이 나오면 무서워할 줄 아는 수준은 되었는지 모르겠다. 맞다. 이 장의 가르침 역시 그렇게 쉽게 이해할만한 내용이 아니다. 특히나 다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이해의 폭이 깊고 넓어야만 그 안에 담긴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주자의 주석은 언제나처럼 아주 간명하고 명료하기 그지없다.

백성은 당연한 도리에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이치의 所以然을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원문에 내가 괄호를 통해 넣어 유연하게 해석한 것은 주자의 해설을 녹여 넣은 것이다. 공자의 본래 가르침이 워낙 목적어를 생략하거나 알아들을 사람들은 모두 알아들을 것이라며 생략하는 바람에 놓칠 수 있는 부분을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백성들에게 올바른 도리를 가지고 따르게 할 수는 있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원리까지 깨닫게 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이 장은 한 마디만 바꾸어도 뜻이 완전히 바뀔 수 있는 아주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방금 주석을 설명하면서 올바른 도리라 했는데, 공자의 원문에는 올바른 도리인지 올바르지 않은 도리인지는 고사하고 ‘도리’라는 언급조차 생략되어 있다. 그저 ‘백성을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라고 축약적으로 말하였다.


백성을 따르게 하는 것은 강압적으로도 따르게 할 수 있는 것이고 올바른 도리로 기꺼워하면서 따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공자는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다시 축약하여 말한다. 결국 위정자가 백성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따르게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왜 따라야 하는지 어떤 원리를 갖추고 있기에 따라야 하는지를 이해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조금 껄그럽기는 한데, 이게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기특하다며 대단하게 여기고 싶은가? 아직 풀이는 시작도 안 했다. 다시 꼼꼼히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결국 이 문장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을 요약하자면, 위정자가 어떤 정책을 실시함에 있어서 무지한 민중들로 하여금 그 정책을 왜 시행하는지 의도는 무엇인지 세부책들은 왜 만들었는지 그 이치를 일일이 다 알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의문투성이 지뢰가 여기저기 박혀 있다.


먼저 앞서 잠깐 언급했던 바와 같이 위정자가 백성들을 따르게 하는 데 있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이 빠져 있다. 또 그 원리에 대해 백성들을 알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따르게는 할 수 있는데 알게 만들 수 없다는 말을 왜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가 나와 있지 않다.


알게 만들 수 없어서 뭐가 어떻다는 것인지 상황에 대한 기술만 하고 그다음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에 대한 말 그대로 ‘지침’이 생략되어 있다.


배우는 자들이 헷갈려할 때 도움을 주는 정자(伊川)의 해설을 살펴보며 그 속뜻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들춰보기로 하자.


“聖人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은 사람에게 집집마다 깨우쳐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모두 알게 할 수는 없고, 다만 능히 따르게 할 뿐이다. 만일 ‘성인이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한다면, 이는 후세에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속임수를 쓰는 술책이니, 어찌 성인의 마음이라 하겠는가?”


오랜만에 정자의 해석이 깊이 들어갔다. 역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알게 할 수는 없다’라는 말에 천착하여 그것을 세심하게 풀어주는데, 일부러 안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방점을 찍어 역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르쳐주는 것을 천명으로 삼고 있는 성인조차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그 의도와 상관없이 모든 백성들이 그것을 듣고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극단적인 비유, 즉, ‘성인이 백성들에게 알지 못하게 하고자 했다’는 말을 끄집어낸 것은 아주 무시무시한 공자식 어퍼컷이다.


굳이 그 말도 안 되는 문장을 넣고 ‘성인’으로 시작하여 ‘성인’으로 주석을 끝내는 정자의 의도를 읽어냈다면 고급 수준에 달했다고 인정할 만하다.


이게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정자가 공자가 적지 않았던 보이지 않는 행간에서 길어 올린 뜻을 읽는 수순을 다시 역으로 밟아야 한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백성들이 따르게 할 ‘수는’ 있다고 했다. 이는 어떻게 따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올바른 도리인지 그렇지 않은 강압과 폭제에 의한 것인지를 넣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넣어야 하는 것은 위정자의 마음자세이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뜨끔해하는 이들이 자신의 마음으로 채워야 하는 문장을 던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장을 던질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무섭지 않은가? 그러니 이 문장이 어찌 호락호락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중요한 것은 뒷부분의 알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정자가 그 두 문장 사이에 살짝 넣어 배우는 자들에게 힌트를 주는 짧은 문장, ‘다만 능히 따르게 할 뿐이다.’이다. 이 해석에서도 눈깔자를 찍자면 ‘능히’에 있다.


백성들이 그 원리도 모르는 상태에서 따르게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 것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배웠던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그 빈칸을 채워 정리해보면, ‘위정자가 인의(仁義)에 부합하게 민중을 이끎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믿고 따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주석에서 ‘성인’이라는 말로 시작과 끝을 장식하여 뇌리에 남게 하였는지를 이해했는가?

성인이 아닌 자들이 보이는 행태에 대해 일갈하고 죽비를 내려치는 일을 이번에는 공자 대신 정자가 한 것뿐이다. ‘성인이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는 이 문장을 중간에 인용한 것은 성인이 아닌 잘못된 위정자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검은 속내를 알고 분개하는 백성들의 입과 귀를 가리고 그나마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백성들로 자꾸 만들려 하는 것에 대해 성인은 그따위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뜬금없는 강조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은 ‘백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이 장을 보며 백성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개돼지라고 여기는 자들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공자가 이 장에서 대놓고 설명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고급 수준에 이른 자들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이는 것. 백성들이 왜 위정자가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원리를 알지 못하는지에 대한 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우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당대는 물론이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다. 공자는 그 백성들의 본성을 파악해내고 있다. 정말로 먹고 살기 ‘바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타성이 되어 대를 거치며 굳어졌다는 사실을 아주 잘 읽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배웠답시고 그것을 알면서도 악용하는 자들이 위정자에 줄을 타고 매달려 붕당을 이루면서 벌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들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부분을 슬쩍 찌르는 구조까지 이 장은 보여주고 있다.


그 썩은 위정자들이 그런 행태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따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신나서 기꺼이 따르는가, 아니면 뭔가 마지못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두려워하며 따를 것인가에 대한 차이를 묻는다.


당연히 지향해야 할 바는 백성들이 원리를 알지 못하더라도 기꺼이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정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으면 된다. 즉, 이 장에서 백성에 대한 통찰은 결국 이상적인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상향을 제시한다.


법규정도 어렵고 문장도 어려운 설명의 어떤 정책이 나오고 새로운 법령이 나오고 따르라고 한다. 당연히 그 지침 자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데 그것의 취지나 의도를 알 리가 없다. 하지만 백성들이 웃으며 말한다.


“뭔지는 몰라도 우리 살기 좋아지라고 또 뭔가 만드셨나 보네.”


그것이 공자가 이 장의 뒤편에서 보여주는 위정자들이 만들어야 할 세상인 것이다. 그 절대적인 신뢰는 그저 감정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위정자가 걸어온 길과 그가 이제까지 백성들에게 보여준 정책들과 그 과정, 그리고 그 결과물이 말해주는 것이다.


수천 년이 지났다. 과연 달라졌는가? 영화 속의 대사이기는 하지만 ‘민중은 개돼지’라는 말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웬만한 사자성어보다 훨씬 더 유명한 명구가 되어버렸다. 민중의 정의와 그 성향은 민중을 규정하는 위정자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공자가 바라보았던 그 민중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공자 당시에는 오히려 온정 어린 시선이라도 있었다. 지금 위정자라고 하는 정치꾼들이 민중을 어떻게 보는가? 그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시켜줄 시기의 한시적 ‘유권자’라는 이름일 때와 챙겨야 할 지역구의 민원인일 때가 그들에게는 너무도 다르다.


유권자일 때는 그들에게 민중은 불특정 다수이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어떻게 해서든 잘 보여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그들이 유권자의 알량한 한 표를 얻어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들은 유권자들이 가지고 있는 민원사항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권자의 힘겨움이 자신의 힘겨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지속하고 그것을 위해 손에 움켜쥔 권력을 민원인들을 위해 쓸 마음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장에 숨겨져 있는 위정자의 시선에 의해 민중의 성향이 결정될 수 있다는 화두를 더욱 명징하게 떠오르게 만든다. 어떤 이에게는 민중을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보지만, 어떤 이는 몽둥이의 휘둘림에 움찔하여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존재 또는 이끌어주지 않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 존재로 본다.


정치가들이나 지식인들이 전자의 관점을 견지할 때 작게는 민주주의의 길이 열리고 사회는 발전하게 된다. 반면에 후자의 관점으로 민중을 여기고 다루는 순간, 전제주의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사회는 퇴보하고 활기를 잃게 된다. 그 차이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위정자의 정치행위가 갖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공부해온 공자의 가르침이 그러했듯이 ‘제대로 된’ 위정자는 당연히 세상을 바르게 하기 위해 정치를 한다.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치의 본연의 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 권력을 잡고 그것을 놓지 않기 위해 백성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입을 틀어막는 일들을 한 자들을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스포츠와 영화산업을 그것으로 삼았고, 있지도 않은 가상의 금강산댐이라는 것을 만들어 평화의 댐으로 우리의 삶을 보존해야 한다며 북풍을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사용하였다. 그것을 눈치챈 배운 민중이 드러나려고 하면 튀어나온 못을 박듯이 잡아다가 고문했고 압박해왔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부하에게 총을 맞아 죽거나 순서대로 손을 잡고 감옥에 들어갔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개돼지로 보던 국민들에게 눈총을 받으며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과 자식들까지 어딜 가나 존경의 시선은 고사하고 수군거림을 온몸으로 받아야만 했다.


물론 그렇게 부를 챙기고 명예의 정점까지 올랐으니 그들은 그것이 당연한 티켓 정도라고 여기고 개돼지들의 시선에, 그 손가락질에 아랑곳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이 태어나서 고작 한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인생을 부정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하며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도둑놈 소리를 듣고 나쁜 놈 소리를 들으며 죽어가는 것은 생각만으로 딱하지 않은가?


백성들에 의해 선발되는 대선으로 왕이 선발되지 않던 공자의 시대에도 백성들의 민의는 중요했다. 하물며 지금은 민중들의 뜻을 대신하는 민주주의의 꽃 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우리를 대신해준 국회의원을 뽑는다. 왕이 아닌 관계로 그들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저마다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정치인은 본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기가 직업란에 정치인이라고 쓰고 싶어도 선거에 떨어진 낭인은 직업란에 정치인이라고 쓸 수 없는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미디어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 4차 혁명의 시대에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너무도 적나라하게 모두 드러나 있다. 오히려 너무도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와 그의 이제까지의 인생을 재조합하여 재구성하는 것을 아무것도 몰랐던 제삼자가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국민을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커밍아웃?

다른 직업도 다른 사람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일이 필요하겠으나 정치만큼 다른 사람과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직업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까지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회를 변혁하겠다고 살아온 사람이 국민들의 표를 많이 얻어 대통령이 된 일은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죄를 만들어 씌우는 그림을 짜 맞추는 일을 평생 해온 사람이 대통령으로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일은 없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는 시대라고는 한다. 그런데 검사가, 법비가 사람들에게 두려운 직업일지언정 존경받는, 정의를 구현하고 억울한 사람을 구해주는 직업이라고 하는 이를 나는 이제까지 한평생 살면서 어디에서도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내가 이제까지 만나왔던 검사들 중에서 자신의 양심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는 사명감에 정의를 구현하는 이를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하였다.


분명히 내가 보지 못하는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자신의 일을 하느라 나와 아직 만날 연이 닿지 않았을 뿐이라 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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