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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4. 2022

배우고 수양하는 것에도 체계적인 단계가 있다.

공자가 제시하는 義와 仁을 완성하는 3단계

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詩에 (착한 것을 좋아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흥기시키며, 禮에 서며, 樂에서 완성한다.”

이 장은 배움과 수양을 크게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가르침이다. 주자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세 부분에 대한 주석을 참고하며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興은 흥기하는 것이다. 詩는 性情에 근본 하여 邪도 있고 正도 있는데, 그 말한 것이 이미 알기 쉽고, 읊는 사이에 억양과 반복이 있어 사람을 감동시킴이 또 쉬우므로, 배우는 초기에 착함을 좋아하고 악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흥기하여 스스로 그치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이 시에서 얻게 된다.

 

먼저 ‘흥한다’라고 해석하는 부분을 오독하는 이들이 많아 그 부분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여기서 ‘흥기한다’라고 주석을 단 주자의 해석에서처럼 이 의미는 현대어의 흥이 넘치는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특히, 그 대상이 시를 목적어로 삼고 있기 때문에 원문에 내가 해석을 할 때 주자의 주석을 괄호 안에 넣어 부연 해석한 것이다. 즉, 사람의 본래 본성에 가지고 있는 좋은 것에 대한 것과 나쁜 것에 대한 것도 있는데, 시를 읽고 배우는 사이에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그 마음’은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언가를 배우고 익혀 인간이 아무런 의식을 하지 않던 상태에서 이성을 움직여 ‘문명’이라는 것을 갖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시는 인간이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그것에 자신의 감정을 담아 노래로 부르는 것이기에 배움의 과정을 반드시 포함한다. 일단 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기록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혼자서 그저 매번 다르게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기록을 보며 똑같이 부를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함은 당연히 배움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방점은 그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록하는가에 대한 것에 있다. 인간의 바른 성정, 즉 착한 것에 대해 좋다라는 감정을 부여하는 것 역시 학습과 교육을 통해 자리를 잡게 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욕망이라던가,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드는 등이 그러한 증거에 해당한다.

그다음 단계로 제시된 禮에 대해서는 주자가 어떻게 주석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禮는 공경하고 사양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節文과 度數의 상세함이 있어 사람의 피부의 모임과 힘줄과 뼈의 묶임을 견고하게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배우는 중간에 능히 卓然히 자립하여 사물에 흔들리고 빼앗김을 당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이 禮에서 얻는 것이다.

 

禮에서 ‘선다’라고 한 것은 ‘모든 질서가 바로 선다’는 ‘정립(定立)’을 의미한다. 조금 더 나아가면 바로 서서 흔들림이 없게 되는 경지까지를 의미한다. 禮라는 것 자체가 절차와 방식에 대한 규칙이고 그것이 사회화로 진행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기본적인 정신으로는 주자의 설명처럼, 공경하고 사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되, 그것을 형식화하게 되면서 규율에 맞게 조절되는 모습이 인체의 힘줄과 뼈의 조직이 견고해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주의해서 읽어야 할 부분은 바로 다음에 예를 배워가는 학습과 스스로의 수양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외물(外物)에 흔들리거나 본질을 빼앗기지 않는 마음이 얻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두 단계를 거쳐 마지막 단계인 樂을 통해 어떻게 완성되는 것인지 설명하는 해설을 살펴보자.

 

樂에는 5성과 12율이 있는데, 번갈아 선창하고 번갈아 화답하여 歌舞와 八音의 節度를 삼는다. 그리하여, 사람의 性情을 함양하여, 간사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내고, 찌꺼기를 말끔히 정화시킨다. 그러므로 배우는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義가 자세해지고, 仁이 완숙해짐에 이르러 자연히 도덕에 和順해지는 것은, 반드시 이 樂에서 얻게 되니, 이는 학문의 완성이다.

 

마지막의 결론에서처럼 주자는 이 세 단계를 학문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자 樂이 학문의 최종단계라고 보았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樂은 앞에 말한 노래 즉, 시(詩)와는 같은 노래의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樂은 일단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樂은 음률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은 연주에도 그렇지만 여럿이서 합주를 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노래와 춤이 섞일 경우에도 앞서 형식이라고 구체화되었던 예(禮)를 통해 익숙해지는 학습의 과정을 거치고 정제되고 격식을 갖추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사람의 성정이 함양되고 정화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를 모두 고려하고 예로 정제된 것들을 조화롭게 맞추기 위해서는 부단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서로의 장점을 해치지 않으면서 가장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가를 연구하고 완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수준이 일정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의(義)가 세밀하며 정밀해지고 인(仁)이 그 깊이를 더하여 완숙해진다. 그 경지에 이르게 되면 결국 조화를 위해 하던 노력은 몸에 배이게 되고 부러 그것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어긋나는 일이 없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조금 심화한 버전으로 설명하자면 ‘義精’은 의리가 정밀해지는 것으로 知工夫에 속하고, ‘仁熟’은 인(仁)이 익숙해지는 것으로 行工夫에 속한다는 것이니 이제까지 우리가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배움과 수양의 과정을 樂에서 완성하게 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3단계의 과정은 <논어>의 다양한 부분에서 언급되고 강조되며 설명되고 있다. ‘계씨(季氏)편’의 13장에서 공자가 자신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詩)와 예(禮)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장면이 그러하고, ‘양화(陽貨)편’ 9장에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시를 배우지 않느냐고 다그치고 시로써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설명하고, 10장에서는 다시 한번 시를 배워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바로 같은 맥락에서 작동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堯曰)편’ 3장에서는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다는 것 또한 이 장의 내용과 일치하는 설명이다.

 

그래서 이 3단계의 과정에 대해 다산(茶山; 정약용)은, ‘시(詩)는 그 선한 마음을 감발 시키는 것, 예(禮)는 그 몸을 단속하는 것, 악(樂)은 그 뜻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고, “감발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고, 단속하기 때문에 몸을 세울 수 있고, 온화하고 전일하기 때문에 덕을 이룰 수 있다.”고 이 장을 풀이한 바 있다.

 

이 장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3단계의 가르침이 어떻게 배우는 아이들의 교재에서 구체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다.

 

<內則>를 상고해보면, ‘10세에 어린이의 거동을 배우고, 13세에 음악을 배우고 시를 외우며, 20세가 된 뒤에야 예를 배운다.’하였으니, 이 장의 세 가지는 <소학(小學)>에서 공부하는 차례가 아니고, 곧 <대학(大學)>에서 종신토록 행하여 얻는 바의 어렵고 쉬움과 먼저와 나중, 얕음과 깊음을 말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자(程子)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당대의 행태가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안타깝다면서 배우는 자들에게 권계를 삼으라고 다음과 같이 정리해준다.

 

“천하에 영재가 적지 않으나 다만 도를 배움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성취한 바가 있지 못한 것이다. 옛사람들은 古詩를 지금 사람들의 歌曲처럼 외워 마을의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익히 들어서 그 歌詞를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능히 선한 마음을 흥기할 수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늙은 스승과 오래 공부한 선비들이라도 오히려 古詩의 뜻을 깨닫지 못하니 하물며 배우는 자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는 시에 흥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灑掃應對부터 冠婚喪祭에 이르기까지 예가 있지 않음이 없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이 때문에 人倫이 밝지 못하고 집을 다스림에 법도가 없는 것이니, 이는 禮에 서지 못하는 것이다. 옛사람의 음악은, 소리는 귀를 기르고, 채색은 눈을 기르며, 노래와 읊는 것은 성정을 함양하고, 무도하는 것은 혈맥을 기르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모두 없어졌으니 이는 악에 완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옛날에 인재를 이루기는 쉬웠는데, 지금 인재를 이루기는 어려운 것이다.”

 

분명히 공자의 시대보다 세월이 흘러 훨씬 더 똑똑한 이들이 많아졌음에도 제대로 된 도를 배우고 익히지 못하기 때문에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는 설명으로 당시의 세태를 지적한다. 이어 세 분야의 가르침을 각기 나누어 古詩를 외워 어린아이들까지 그 의미를 몸에 배도록 하였는데 풍습이 바뀌어 배우는 이들조차 그렇게 하지 못함을 지적하여 시의 본연의 의미를 잃었다고 지적한다.


또, 예 역시 사소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모두 예가 있었던 옛날의 방식이 없어져버렸다는 지적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라는 것의 기본이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는데 그 기본을 잊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옛날의 음악이 모두 없어져버렸음을 한탄하고 있다.

정자(程子)는 결론적으로 옛것을 제대로 보존하고 그 의미를 살리지 못한 탓에 당대의 사람들이 옛사람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잃고 있어 과거보다 훨씬 더 발달한 당대에 인재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아, 정자(程子)의 시대에 이미 공자의 시대와 그 이전 강조하던 옛사람의 가르침을 벌써 잊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근본을 잃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가 되었고 당연히 배우는 자들이 이 3단계를 통해 완성을 이루지 못한다는 강한 반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수천 년이 지났으니 이제 그 흔적조차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하늘의 별이라고만 보며 신기해하던 그 옛날에서 우리가 사는 행성이 아닌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첨단의 시대이다. 수백 년은 물론이고 수천 년 전의 유적까지 모두 스캔하여 복원하고 그 당시의 없어져버린 도시까지 컴퓨터로 복원하는 첨단과학의 시대인데, 옛 노래를 알지 못하여 고증하지 못하고, 예의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것을 갖추지 못하는 것인가?


훨씬 더 많은 정보와 훨씬 더 많은 조화를 필요로 하여 컴퓨터를 사용하여 사람이 계산하지 못하는 것까지 맞춰나갈 수 있는 시대임에도 우리는 왜 과학만큼 사람이 깊어지지 못한 것일까? 의아하지 않은가?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인간은 정말로 진화하고 있는가?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원숙도는 정비례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반성의 목소리는 시대에 걸쳐 내내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문제로 제기된 바 있다. 그리고 과학의 발달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보다 깊이 있는 사고를 하게 만들어 우리의 삶을 정말로 깊이 있는 사고와 성찰이 있는 삶으로 만들어주는가에 대한 회의는 반비례하여 깊어져만 갔다.

 

시를 통해 선한 마음을 더 크게 불러일으키는 것은 과학의 기준으로 보면 효율적인 행동이 아니다. 맞다. 과학은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자기 방을 치우는 것에서부터 세상의 변화가 시작된다는 주장을 하는 조던 피터슨이 파란 눈을 한 미국인이라는 점은 그가 <논어>를 공부했는지 안 했는지를 따지기 전에 그의 주장이 이 장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것과 궤를 똑같이 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은 조던 피터슨 한 사람만의 주장이 아니다. 수많은 서구의 철학가와 사상가, 심지어 경제학자들까지도 이와 같은 쇄소응대(灑掃應對)가 예의 시작이고 사람됨을 갖추고 사회를 바꾸는 것이 시작점임을 깨달으라 외친다.

 

아침에 한 장씩 읽는 <논어> 공부를 하면서 처음 보는 브런치의 독자들이 조금 어렵게 느껴진다며 거리를 느끼는 이들이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한문이 먼저 등장하고 사용하지 않던 단어들이 보이며 익숙하지 않은 어려운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공부가 쉽고 편하며 재미있기만 하던가? 세상의 정말로 소중한 가치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부단한 노력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밖에 없다. 즐겁게 놀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부와 명예를 얻겠다고 다른 사람을 밀치면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삶을 고양시킬 수는 없다.


짧고 생각 없이 읽어 내려가는 글이 편하고 부담 없는 것,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그런 글들이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던가?


고전이 어려운 것은 다만 고전이라서가 아니다. 그것이 수많은 고뇌와 가다듬어지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 언어화되었기 때문이다. 소화하기 어려울 수 있고,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땀 흘리지 않고 만들어지는 근육이 없고, 공부하지 않고서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한 불편함과 후회도 결국 당신의 몫으로 돌아온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 아닌가? 그 후회와 한탄을 감수하기 싫다면 어찌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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