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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3. 2022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어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살아 숨 쉬는 동안 당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주마.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증자가 말씀하였다.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군자는 仁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막중하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니 멀지 않은가?”

 

이 장까지가 3장부터 총 5장으로 이어진 증자가 말한 것으로 언급되는 가르침의 끝이다. <논어>에 왜 증자가 말한 내용의 가르침이 다른 대사형들의 언급을 제치고 5장이나 언급되는가를 의아해하는 학도가 있을 것이라 간략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논어>를 편집한 당시 인물들이 증자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록했던 많은 언급에 의존하여 적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주었던 증자의 언급이라고 기록한 것을 남기게 된 것이다.


몇 번 언급하기는 했지만, 증자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조술(祖述)하여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에게 계승한 전달자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증자의 언급이라고 된 부분이 증자의 독자적인 진술이 아닌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본받아 서술하여 밝혔다는 ‘조술(祖述)’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어제 공부했던 내용처럼 스승의 내용을 발전 계승시킨다는 의미는 자신의 것으로 바꾸거나 새로운 것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워낙 깊은 행간과 다각도로 복합적인 가르침을 던져주는 공자의 방식을 보다 확연하고 뚜렷하게 밝히는 이해의 심화과정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증자의 가르침이 증자의 것이고 정통이 아닌 것이라고 부정하거나 감히 <논어>에 그의 제자들이 직속 스승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편집 가감하여 참람된 짓을 하였다고 오해하거나 불쾌해하지 않아도 될 것임을 설명하고 넘어간다.

 

이 장에서는 ‘선비[士]’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원문에는 없는 ‘군자(君子)’라는 개념을 굳이 내가 두 번째 문장에 의역으로 집어넣은 것은 처음 언급했던 선비라는 개념은 계급이 아닌 배우는 자들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이후 두 번째 문단에서는 그 지향점을 명확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 넣은 것이다.


그렇게 이 장에서 강조하려는 개념은 바로 ‘책임’이라는 것이다. 배우는 자라면, 본래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 이유가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라고 문장을 연다. 책임이라는 것은 ‘무엇에 대한’ 지켜야 할 목표 대상이 명확하게 나와야 하는 개념임을 생각한다면 그 목적을 찾기 위한 독해로 다음 문장을 읽게 된다.

그렇게 나온 개념이 바로 ‘인(仁)’이다. 말하는 방식이 원래 구체적인 개념을 언급하지 않는 공자의 방식에서 구체적인 설명을 사이에 넣거나 강조하는 방식이 증자의 말하기 방식임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인(仁)’이라는 개념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공자의 설명을 통해 다양하게 공부한 바 있다.


여기서 굳이 선비[배우는 자]가 지향해야 할 바를 ‘인(仁)’에 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으나, 명확하게 염두하고 행간을 읽어내야 하는 의미는 ‘인(仁)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는다’는 화두이다. 마지막 강조의 방식으로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라는 설명을 넣음으로 해서, 살아 숨 쉬는 동안에는 그 노력을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경주해야 하는 것을 재차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이 장에 대해 주자는 어떤 해설을 붙이고 있는지 살펴보자.

 

넓은 도량이 아니면 중임(重任)을 감당하지 못하고, 굳센 의지가 아니면 먼 곳에 이를 수 없다.

 

첫 번째 문장인 선비[배우는 자]가 왜 넓은 도량을 가져야 하고 굳센 의지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뒷 문장과 호응하여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단순한 해설이 아닌 증자의 말하기 방식과 그 문법구조가 미리 철저하게 계산되어 상호 호응으로 완벽한 하나의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읽어내라는 실마리가 숨겨져 있는 해설 방식이기도 하다.


정작 핵심적인 이 장에서 의미하고 있는 仁의 의미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仁이란 사람 마음의 온전한 덕이니, 반드시 몸으로써 仁을 체행하여 힘써 행하고자 한다면 책임이 막중하다고 할 만하다. 한 숨이 아직 (끊이지 않고) 남아 있는 동안에는 이 뜻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멀다고 할 만하다.

 

왜 넓은 도량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이 막중하다고 했는지, 어째서 굳센 의지를 가져야만 하는지에 대한 증자의 앞뒤 호응을 맞춘 문장에 다시 짝을 맞춰 대응하는 방식으로 주석을 달았다. 공자의 뜻을 풀이할 때 그 의미를 풀었던 것과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고급에 가까운 고문 독해능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주자는 이미 증자의 말하기 방식이 공자의 가르침에 주석을 달아 배우는 자들이 조금 더 이해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것을 읽어냈고, 그것을 해설하는 자신 역시 증자의 논리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온전히 이해했음을 자신이 주석을 작성하는 문장 구조와 해설 방식을 통해 보여준 것에 다름 아니다.

먼저 공자가 가르침을 주었던 仁에 대한 개념을 확고하게 정리하고 나서, 배움을 통해 익히고 그것을 끊임없이 현실에 적용하고 실천하기 위한 노력과 수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누구를 위한 책임이고 무엇을 위한 책임인지에 대한 우문현답(愚問賢答)인 셈인데, 배우고 익히고 수양하는 그 모든 것은 결국 실천하고 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자체가 책임의식에 해당한다는 이해이고 설명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과 배움과 가르침의 자세를 살아있는 동안 내내 유지해야 하는 것은, 언제든 사심(私心)에 의한 유혹이 빈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길이 멀다고 한 것인데, 어렵다는 의미를 포함하여 살아 있는 내내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이니 결코 짧은 시간의 일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살아가는 내내 그 유혹을 떨쳐버리고 실생활에서 배움과 수양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매 순간 찾아드는 사리사욕의 유혹에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굳센 의지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것이 평생에 걸쳐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지켜나가려면 나이를 먹어 의지가 흐려지고 판단력이 약해지더라도 지켜내야 하니 당연히 의지를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닌 설명인 것이다.

 

그래서 정자(伊川)는 이 설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너그럽기만 하고 굳세지 못하면 기준[規矩]이 없어 서기 어렵고, 굳세기만 하고 너그럽지 못하면 좁고 비루하여 (仁에) 처할 수가 없다.” 또 말씀하였다. “너그럽고 굳센 뒤에야 능히 무거운 책임을 감내하고 먼 곳에 이를 수 있다.”

 

정자는 앞서의 도량이 넓은 것과 의지가 굳센 것을 두 가지 상반된 방식으로 보아 두 가지가 모두 고르게 겸해져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는 새로운 시각을 또 보여준다. 공자의 다각도적인 설명에 주자가 보여준 설명과는 또 다른 설명하지 않은 공자식 가르침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을 또다시 설명으로 풀어낸 것이다.

도량이 넓다는 것을 막중한 책임을 이겨내고 실행해야 할 부분만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너그럽다’는 본연의 의미로 해석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이다. 인생이라는 긴 노정에 자신을 다스려나가기 위해서는 막중한 책임감만으로는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되면 극단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는 식의 공자식 논법을 응용하여 두 가지의 개념을 설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의 개념이 모두 조화롭게 이룬 자만이 무거운 책임을 감내하고 살아가는 그 긴 시간 동안 仁을 이뤄낼 수 있다고 다시 한번 환기시켜준 것이다.

 

아!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자신이 곱씹어 언급되지 않았을 仁을 끄집어내어 왜 그것이 필요한가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두 문장으로 나누어 상호 호응을 맞춘 증자나, 그것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똑같은 문장의 호응 방식에 맞춰 조금 더 심화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풀어준 주자나, 공자의 본래 가르치는 방식을 응용하여 그대로 그 형태를 복원해 위에서 언급한 두 사람이 미처 말하지 않았던 방식에 대해 본래 스승의 가르침이 복합 다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이러한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구현하며 설명한 정자나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선배들이란 말인가?

 

배우는 자라면 이 모습을 보며 공부하는 이로서 경탄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스승 공자가 본래 말씀하셨을 가르침만이 생략되어 있는 이 장의 가르침은, 결국 이어지는 세 사람의 언급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확장되는 형태만으로도 스승의 가르침이 담긴 원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스승의 가르침이 담긴 원문을 보고 그것을 이어나간 대선배들의 설명과 길잡이를 통해 거슬러 올라가 스승의 원대한 가르침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것이 고문(古文)이 가지고 있는 힘이고 세월에 누적된 저력이며 감히 단시간에 따라잡을 수 없는 내공인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책임’은 지고 있음은 의무적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책임은 누군가에 의해 명령처럼 지워지는 경우가 많다. 국민으로서의 책임이 그러하고,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켜야만 하는 책임이 그러하고, 조직에서 어떤 업무를 맡은 책임자로서의 책임을 맡아야만 하는 것이 그러하다. 가족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가장의 책임이 생기는 것이고, 남편이 생기면 남편에게 아내로서 해야만 하는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무거운 책임은 다른 사람의 명령이나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지워지는 짐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벗어버리기 힘들 뿐,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결정하고 확정한 책임은 그 무게부터가 다르다. 이 장에서 말하는 책임이란 바로 그 후자에 해당하는, 입에 올리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옷깃을 바로 하고 자세를 바로잡게 만드는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최근 몇 차례의 공부를 통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에 대해 다각도의 많은 접근과 생각을 풀어본 바 있다. 그런데 왜 사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이르게 되면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이 존재를 누르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목적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짐을 느낀다. 그들은 그저 살기 위해 산다. 살기 위해 먹는 것처럼 생존을 위한 생존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그저 똑같은 일상을 산다. 물론 그것보다 더 최악이 있다. 자신의 사익을 위해, 부와 명예를 위해, 다른 사람의 위에 올라서기 위한 것을 목표로 삼고 악착같이 사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이 이전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삶과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기 위해 사는 것은 언뜻 아등바등 노력하는 모습이 비슷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개념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사회심리학적으로 분석하더라도 행복은 분명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아무것도 없던 것에서 무언가가 한 가지를 얻게 되면 행복감을 느끼는데, 내가 하나를 얻은 행복감에서 옆에 있는 사람이 두 개를 얻은 것을 보는 순간 그 행복감은 질시와 허망함으로 바뀐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정신 승리를 강조하고 절대적인 행복감은 자신이 만드는 거라며 하나를 가졌을 때 행복했던 마음을 기억하라고 백날 떠들어봐야 그의 행복감은 다시 찾을 수 없다. 그에게 두 개를 더 줘서 3개를 갖게 할 때에서야 그는 두 개를 가진 이를 보며 행복감을 되찾는다.

 

반대의 경우도 아주 흔하다. 차 사고가 나서 다리를 잃은 사람은 너무너무 슬프고 좌절할 것이지만, 자신과 사고가 나서 그 자리에서 즉사한 사람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의 감정을 갖고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사람의 감정은 아주 간사하기 그지없어서 분명히 자신과 함께 사고를 맞은 사람이 현장에서 즉사한 것을 보고서 내가 다리를 잃었지만 죽지 않은 것을 감사했는데, 재활치료를 받고 다리가 멀쩡한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 감사했던 마음을 다시 잊고 자신의 장애에 짜증내고 슬퍼지며 좌절하게 된다. 그 차이 역시 상대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다.

 

왜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상대적 행복론으로 뛰어넘었느냐고 묻고 싶은가? 다른 누군가에게 억지로 혹은 의무감에 지워진 책임이 아닌, 내가 스스로 약속하고 짊어진 책임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함부로 벗어 내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구분하여 이해하라고 설명하고자 함이다.

다른 사람에게 받는 한 개의 물건이나 사고는 내 의지와 상관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정말로 비싼 가구점에서 파는 예술적인 의자와 내 아이와 고생하며 목공을 배워 만든 서툴고 비뚤어진 듯 하지만 웃고 울면서 만든 의자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격이나 가치는 후자가 훨씬 더 못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사용하거나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전자에 못지않은, 아니 전자보다 훨씬 나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의자로 소중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과 같다. 후자의 의자를 가진 사람은 전자의 의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 때문에 행복감이 떨어지지도, 짜증 나지도 않는다.


이 장에서 말하는 책임은, 내가 마지못해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람의 목표로 내가 정하고 내가 평생에 걸쳐 완성시켜야만 하는 나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기로 결정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어떤 환경도 아닌 내 의지에 의해 내가 그러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과연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답에 대한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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