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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2. 2022

어떤 사람을 군자라 이를 수 있는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질문

曾子曰: “可以託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
증자가 말씀하였다. “육 척의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고, 百里(제후국)의 명을 부탁할 만하며, 大節에 임해서 (그 절개를) 빼앗을 수 없다면, 군자다운 사람인가? 군자다운 사람이다.”

이 장 역시 증자의 말이다. 이 장은 두 가지의 형태가 독특하다. 하나는 군자의 이상적인 형태를 구체적인 세 가지의 가설 형태로 설명하는 것과 마지막에 그런 사람이 군자인지를 되묻고 나서 당연히 그런 사람이 군자라고 강하게 못 박는 구조를 보여준다.


먼저 어떤 세 가지 경우를 들어 군자의 조건에 부합한다고 하였는지 대해 주자의 해설을 통해 의미를 파악해보기로 하자.

그 재주가 어린 임금을 보필하고 국정을 대행할 만하며, 그 절개가 죽고 사는 즈음에 이르러서도 빼앗을 수 없다면, 군자라고 이를 수 있다. 與는 의심하는 말이고, 也는 결단하는 말이니, 가설하여 문답하는 형식을 한 것은 반드시 그러함을 깊이 나타낸 것이다.

 

세 가지 중에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국정을 대행(代行)한다는 의미 때문에 묶은 것이다. 어린 군주를 보필하는 것과 제후국의 명을 부탁할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신하로서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신하들을 통제할 수 있는 군주가 아니라 판단력이 없는 아직 어린 군주가 서게 되면 당연히 경험이나 국정운영 능력을 더 갖춘 신하들의 영향력이 지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정작 어린 군주를 군주라고 부를 뿐 자신들의 멋대로 전횡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굳이 어린 군주라고 표현한 것은 표면상으로 누가 봐도 그럴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설한 것이다. 사실 노나라만 보더라도 군주와 상관없이 대부들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힘을 키워 군주를 능멸하는 참람된 행동을 자행한다며 이미 공자에게 신랄한 비난을 받은 바 있다.

하물며 멀쩡한 군주가 있어도 그럴 판에, 어린 군주라면 자신들의 멋대로 권력을 전횡하려는 자들이 춘추전국시대에는 수없이 등장한 바 있기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며 제대로 군주를 보필할 수 있는가를 첫 번째 군자의 덕목으로 제시한 것이다.

 

두 번째로 제후국을 맡긴다는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제후국을 맡기게 되면 넓은 국토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을만한 바탕을 제공해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후국이라 함은 결국 군주를 섬기되, 자신의 정치 철학을 가지고 작은 나라를 다스리는 작은 군주가 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절대적 충성을 보이는 충신이라면 자신에게 맡겨진 나라라고 여겨 군주에 대한 충성을 보임과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역량으로 제후국을 잘 다스리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대개 제후국을 다스리는 입장이 되게 되면 군사력을 키우고 자신이 나라의 군주가 되겠다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천하를 제패하겠다고 칼끝을 군주에게 향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국정운영을 맡길만한 충신이 군자라는 조건으로 제시되었다. 여기서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다. 이 장에서 증자가 말하고 있는 군자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군주는 빠진다. 당시의 기준이라면 진정한 위정자는 군주이다. 천하를 다스리고 신하들을 다스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이 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군자의 범위에서 군주는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하 된 자로서 정치를 하는 위정자에 한정 짓고 있다. 왜일까?

이것이 공자의 말씀이 아니고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을 더 깊게 찌르는 증자의 가르침임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증자

증자가 군주에 대해 열외의 특권(?)을 준 것은, 당시 시대상에 대한 비틀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주나라의 정통성도 그렇지만 공자의 원시 유학에서 군주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고 능력이 있고 출중한 군주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군주가 있지만 그것은 취사선택의 대상이 아님을 확실하게 선 긋고 있다.


증자는 공자의 가르침이 만든 경계선을 결코 넘지 않는다. 그렇지만 스승의 가르침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순둥이 스타일도 아니다. 세대가 변하고 가르침은 출중한 제자를 만나 보다 날카롭고 세련되기 발전 계승되기 마련이라는 점을 증자는 확실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래서 주자가 주석에서 앞의 국정 대행을 맡길만한 충신으로 두 가지를 묶어 해석하고 더 중요한 것으로 방점을 찍으며 세 번째를 강조한 것에 의미를 둔 것은 증자가 의도한 바를 명확하게 읽어낸 것이다.


앞서 신하로서 그를 믿을만하여 국정을 맡길 수 있되, ‘그의 절개가 죽고 사는 즈음에 이르러서도 빼앗을 수 없다면’ 이 마지막 조건을 보면서 세 가지 조건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점층으로 강조를 위한 큰 그림을 짜고 있다는 것을 감잡았다면 중급 이상으로 올라선 것이다. 그 행간이 안 보였다면 아직 공부가 덜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 신하 된 자로 조정에 속해 있고 나름의 위정자로서 정치행위를 하고 있는데, 어린 군주가 제대로 된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힘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단계의 유혹이다. 아주 쉽게 나라를 내 멋대로 전횡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군주가 확연하게 서 있기는 하되, 그에 대적하려면 대적할 수도 있는 제후국을 맡겨준 것이다.


그렇게 제후국을 맡겼음에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충성할 수 있으며 정치를 함에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 자라면 앞서 어린 군주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혹보다는 조금 더 어려운 단계를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마지막에 제시된 것은 돌발적인 상황이다. 어떤 상황이든 정치상황은 급변할 수 있다. 그것이 전쟁 때문일 수도 있고, 내란 때문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나라를 전복하고 자신이 권력을 잡을 기회라고 여겨질 수 있는 바로 그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원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그 상황에서 여전히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절개를 보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란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눈앞에 두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확인하는 묘한 형태의 문구를 증자는 사용하여 누구나 가져보았음직한 그 마음에 대못을 받는다.


‘이렇게 한다면 군자라 할 수 있는가?’라고 자문한 뒤, 어조사 ‘야(也)’로 끝내면서 당연히 이 세 가지 어려운 조건을 극복해낼 수 있는 절개를 가진 자는 군자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하게 확인해준다.

 

왜 이런 구조를 사용했는가? 자문(自問)이라고 했지만 그 질문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그 글을 읽고 비슷한 유혹에 빠질 경우 비슷한 생각을 했을 이들에게 가설을 통했지만 그런 사특한 마음을 품은 자는 결코 군자일 수 없다는 철퇴를 정수리부터 내려친 것에 다름 아니다. 당대의 현실이 그렇지 못했고, 어느 누구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에 대한 한탄이자 아주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래서 정자(程子)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절개와 지조가 이와 같으면 군자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 말하는 절개와 지조는 단순한 임금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군자라는 개념이 충성하는 신하라는 의미라는 가르침은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군자는 소인과 대비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보다 큰 개념을 지향하는 도덕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일정 경지에 오른 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증자의 이 장에서 말하는 군자는 구체적이고 한정적인 의미에서 제대로 된 위정자로서의 충신(忠臣)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절개와 지조는 어떤 때 쓰는 말이던가? 다른 임금을 섬기지 않고 배신하지 않는 것을 강조할 때 쓰는 말이 아니던가?

본래 군자가 갖는 의미와 조금 다르거나 엇나간 것이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이전의 언급들과 비교해볼 생각을 해야 정상인 것이다.

 

증자가 쭉 공부하면서 바라봤던 현실에서는, 자신이 권력을 잡겠다고 혁명을 일으키는 배신도 많았지만, 더 많았던 것은 옆에서 누군가 나라의 전복을 꾀하려고 할 때 그에 넘어가 힘을 합쳐 현재의 군주를 배신하는 가장 믿고 의지하고 가까웠던 신하들이었다.


대치하고 있던 다른 나라의 침략은 대비할 수도 있고,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늘 믿고 함께 상의하고 의지하던 신하가 등에 칼을 꽂는 행위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당하는 사람은 물론 그것을 전해 듣거나 역사책을 보는 사람들도 입맛이 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터지고 일어나는 상황에서 군자를 강조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 번째는 아주 당연한 논리로, 도둑이 많아지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질수록 치안을 강화하고 형벌을 더 강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당대의 현실이 군자답지 못한 자들이 많아지니 그것에 대해 경계하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수 있다.


두 번째는, 보다 깊이 들어가 현실적으로 그런 마음을 먹는 이들이 왜 많은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이고 질문이다. 이 장의 마지막 독특한 질문과 확정 구조가, 증자의 의도가 이 두 번째에 더 무게를 두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 올라가 보지 않은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권력에 대한 마약 같은 그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에 대해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청한 당대 위정자들이라고 하는 신하들에게, 그리고 그 권력의 속에 들어가고 싶어 공부를 하고 있는 뭇 배우는 자들에게, 당신이 공부하는 목적이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지극히 현실적인 경계를 죽비를 들어 내리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별장의 정자 증축 문제로 지자체의 건축담당을 하는 젊은 실무자와 통화를 하다가 황당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거 다 맞는 말씀이고 옳은 말씀이에요. 그리고 답답해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저도 이 알량한 지자체 공무원 공부하면서 자질구레한 공무 때문에 지자체 공무원을 보면서 참 이해가 안 갔었어요. 왜 이렇게 답답하게 행정을 하는 건지... 그런데 제가 정작 이 안에 들어오고 나니까 그냥 저도 이 안의 부속품처럼 되는 느낌이에요. 그냥 이해하는 쪽이 되었다고 할까요? 행정이라는 게 그래요.”

 

나도 모르게 일갈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나름 변명이랍시고 넋두리 내놓듯 하는 그의 진솔함이 엿보였기에 그냥 그러지 말라고, 당장은 당신 한 사람이 바뀐다고 이 조직이 바뀔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해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거라고 당신부터 바뀌고 당신의 결제 라인이 바뀌고 그렇게 바뀌다 보면 하나씩 바뀌어나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물론 그는 머리로는 이해한 것 같았지만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더랬다.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소방관을 하던 이가 여의도 정치판에 들어가고, 바둑계에서 국수(國手)라는 대접을 받던 큰 어른이던 사람이 여의도 정치판에 들어갔으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가 그 공정한 정신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출사표를 던져 배지를 달았고, 386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며, 운동권이라고 지하조직에서 몰래 공부하고 가투에 나가 화염병을 던지며 독재에 투쟁하던 이들이 정치를 바꾸겠다고 정치판에 투신(投身)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이 정치판에 들어가 정말로 새로운 정치를 하고 우리나라의 썩은 물을 갈고 바꿔나갔던가?

 

자신은 공정하고 깨끗한 판사라며 법비들에게 불이익을 당했다며 배지를 단 판사 출신의 정치인들이 의정활동을 하며 이 나라는 깨끗한 세상으로 만들고 부정한 법비들에게 철퇴를 날렸던가? 의사 출신이라 이 나라의 병든 곳을 고치겠다고 나서 배지를 달아줬더니 그들은 기존 정치선배라고 하는 것들이 하는 짓을 고대로 배워서 안 좋은 짓부터 하고 다녔다.


지가 카지노 대부를 집어넣은 모래시계 검사라며 거들먹거리던 3류 검사는 자신이 그냥 변호사를 했다가는 자신이 집어넣은 양아치들에게 칼침을 맞을까 봐서 정치인이 되었다고 당당히 말하고는 정치에 목을 매고 또 메다가 이제는 이미지 세탁까지 하며 2,30대에게 친근한 정치가라며 후일을 도모하기까지 한다.

그들을 믿고 그들에게 새로운 정치를 해보라고 했던 국민을 배신하지 않은 자가 어디 한 명이라고 있었던가? 그들이 여의도에 들어가기만 하면 정치라는 마약에 취하기만 하면 왜 저리 정신을 못 차리고 그 밥의 그 나물이 되어 나온단 말인가? 그것이 절개를 꺾은 것이고 자신을 뽑아준 국민들을 배신한 행위가 아니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한 정치가의 면모는 그가 배지를 달거나 절대 권력을 잡았을 때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면 된다. 그저 자신이 잘 두는 바둑을 두며 자기 이익을 추구했던 자나 자기 잘 살겠다고 운동에 목숨 걸고 금메달 연금 받으려고 했던 사람이, 판사 짓 잘하다가 자신이 불이익을 당했다고 떠들며 나대는 자가 삐뚤어진 세상을 바꾸는데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고급 룸살롱에 가서 법비들과 조폭들에 섞여 술을 마셔본 이들은 안다. 그들이 술 마시고 노는 것을 보고 그들의 직업을 구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똑같이 지저분하고 너저분하게 논다. 그것이 그들의 참모습이라 그렇다.


매일같이 그렇게 생활하던 법비가 갑자기 자신이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정치를 새롭게 만들 거라고 말하는 술 취한 헛소리에 귀를 기울여 혹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지금 판이 마음에 안 든다고 판을 바꿔야 한다고 착각하며 그 술 취한 헛소리에 귀를 기울일 요량이라면 지금까지 당신이 그렇게 뽑아줬던 작자들이 무엇을 바꿨는지 곰곰이 잘 생각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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