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Feb 21. 2022

나를 버리고 오롯이 진실만을 볼 준비가 되었는가?

몰라도 묻지 않고 자기가 그린 그림이 진실이라 우기는 이들에게

曾子曰: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
증자(曾子)가 말씀하였다.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물으며, 학식이 많으면서 적은 이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가득해도 빈 것처럼 여기며, 자신에게 잘못을 범하여도 計校(따지지)하지 않는 것을, 옛적에 내 벗이 일찍이 이 일에 종사하였었다.”

이 장에서는 증자(曾子)가 자신이 기억하는 벗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이를 회상하며 그 인격의 훌륭함과 공부의 정도가 가장 뛰어났음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원문에서는 ‘벗’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주석에 보면 이 ‘벗(友)’을 馬氏가 ‘안연(顔淵)’이라 설명한 것을 두고 주자가 그 고증이 맞다고 인정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 먼저 명확하게 고증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증자(曾子)는 안연(顔淵)에게 ‘벗(友)’이라는 말을 쓸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나이만 보더라도 증자는 안연보다 16살이나 어렸다. 굳이 나이만 보지 않고 흔히 말하는 공자학당의 제자 서열만 보더라도 증자는 안연이 기억하기조차 어려운 새까만 후배였다.


안연이 요절하여 일찍 세상을 뜨기 전까지 공자에게 가장 총애받고 인정받던 수제자였을 때 증자는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단계였기에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벗(友)’보다는 ‘대사형(大師兄)’정도가 맞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후 역시 공자의 학통을 이을 정도의 수준으로 인정받은 증자가 유일하게 지명하면서 그 사람됨을 칭찬한 구체적인 내용이 한 장으로 기록될 정도로 안연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떤 점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묻고, 학식이 많으면서 적은 이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가득해도 빈 것처럼 여긴다’는 설명은 다분히 유학보다는 도가적이면서도 불가적인 사고방식을 연상하게 만든다. 상식적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는 행위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미 자신이 능함에도 불구하고 능하지 못한 이에게 왜 묻는가? 자신이 더 많이 아는데 왜 더 많이 알지 못한 이에게 묻는가? 앞의 이 두 문구는 실제적인 예이고 뒤의 두 문구는 그것에 대한 원론적인 부분을 풀어 설명해주고 있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가득해도 빈 것처럼 여긴다.’는 내용이 불가(佛家)의 가르침을 연상시킨 것은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과 맞닿아있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장은 그러한 이유로, 원시 유학에서는 불교사상은 물론이고 도가 사상에 대해서도 그다지 경계의식이나 터부 의식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는 장이기도 하다.


게다가 마지막 문장의 마무리를 ‘자신에게 잘못을 범하여도 計校(따지지)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내게 잘못을 했는데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와 도가를 동시에 떠올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대목임에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불선의 정점에 이른 논리가 통합적으로 구현되었다는 논리에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가에 대해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顔子의 마음은 오직 의리(義理)의 무궁(無窮)함만을 알고, 남과 나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능히 이와 같았던 것이다.

 

여기서 주자는 안연이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그가 지향했던 바를 살짝 보여준다. 내가 더 많이 알고 내가 학식이 더 높다는 것과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상대에게 묻는 것은 상대가 나보다 가방끈이 짧은지 혹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지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연에게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부분을 알려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고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상대가 나보다 못한 사람인지 나보다 부족한 사람인지 등의 상대적이고 사회적인 기준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앞서 공부하며 살펴보았던 호학(好學)의 경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는가에 대한 배우는 자들에게 권계 하는 의미 모두를 담고 있다.

 

그래서 사씨(謝氏)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유여함이 자신에게 있고 부족함이 남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며, 반드시 잘함이 자신에게 있고 잘못이 남에게 있다고 여기지 않아서, 무아(無我)의 경지에 가까운 자가 아니고는 능하지 못하다.”

 

상대적인 분별 의식이 없었다는 이 주석의 설명은 배우는 자들에게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우고 수양하는 데 있어 인간의 본성 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드는 착각이다. 나만 이해하고 나만 잘하고 나만 여유가 있어 결국 잘못되거나 못 알아듣거나 일이 풀리지 않는 것을 외재적인 것에서 찾기 시작하는 그 그릇된 본성을 버린 사람이 바로 안연이고 그 경지야말로 배우는 자들이 이르러야 할 지향점임을 설명한 것이다.

 

이 주석에서 핵심적으로 강조한 것은 바로 ‘무아(無我)의 경지’이다. 우리가 현대 용어에서 흔히 무아(無我)의 경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언가에 빠져들어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기본적인 용어의 의미로 ‘무아(無我)’란, ‘나(我)’라는 ‘주관적 의식’을 버린다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궁리(窮理), 즉 대자연의 이치(理)를 제대로 궁구(窮究)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나라는 의식 자체가 없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불선의 최고 경지에서는 모두가 강조하는 필수조건에 해당한다.

공부하는 일이 직업인 내 입장에서 보면, 흔히 말하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어떤 사건이나 어떤 문제에 대해 자문을 구할 때 대개 해당 전공의 대학교수를 찾아 인터뷰하고 묻는 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그 전공의 전문가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미디어에 등장에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 그 교수들은 그 분야 혹은 학계에서 전문가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B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A급 학자들은 기레기들의 인터뷰 요청이나 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쉽게 승낙하지 않는다. 방송을 통해 자신의 유명세를 키우거나 가지고 있는 실력에 비해 정치성이 강하거나 쇼맨쉽이 강한 이들이 주로 방송에 얼굴을 자주 내민다.


물론 방송에 나오는 모든 전문가를 표방하는 교수들을 디스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의 선택이고 그들과 보는 이들이 판단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현상을 지적하며 이 장의 예로 든 것은, 그들이 과연 자신의 의견을 내면서 유보적이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 혹은 예외에 대해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특성상 자신의 전공에 대해 자신의 앞에서 어쭙잖게 아는 척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꼴을 가만히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부터도 전공이 아닌 <논어>를 아침마다 강독하면서 수많은 현대 논어 해설서의 잘못된 해석들에 대해 비교 분석하면서 그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에 대해 성토를 하며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부분은 어떨까? 나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분야가 아닌, 예컨대 집을 짓는 이들에게는 집을 짓는 것에 대해 묻고,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보일러는 고치는 이들에게는 어떤 이유에서 고장 났는지 어떤 과정으로 고치는지를 묻는다. 내가 그들보다 가방끈이 더 길고 그들보다 아는 것이 많은 것과 내가 알고 싶은 그들의 전문분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너무도 간단한 사실에서 출발한 질문이고 태도이다.


물론 공부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도 제각기 성향이 달라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그저 문외한을 자처하고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도 제법 많다. 그렇다면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나왔을 때 그들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모르는 것이 나왔는데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 잘못인가? 처음 간 외국의 도심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다. 스마트폰도 없고 지도도 없다. 그런데 길을 물을 때, 지리학자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앉아 있나?


공자는 물론이고 안회(顔回)가 자신이 잘 모르는 부분과 맞닥뜨렸을 때, 스승인 공자만을 찾았을까? 스마트폰이 없어 녹색창에 검색할 수 없으니까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찾아 헤매었을까?

 

전에 공부하면서 몇 번 설명한 적이 있는데 <논어>에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밭 가는 노인이라던가 지나가던 촌부처럼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그들은 초야에 숨어 지내는 초고수 은자임을 언급했었다.

그들은 때로는 공자보다 더 신랄한 세태 풍자를 던지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이들이 제대로 보지 못한 부분을 후려치는 역할로 등장하곤 한다. 공자는 그들에게 스스럼없이 세태에 대한 의견을 묻곤 한다. 그들이 고수라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공자가 그런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로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 매사를 묻는 사람과 매번 공부하고 배워 자신이 모르는 것이 아니더라도 조심스러워하고 계속 확인하고 묻는 것은 그것을 묻는 기본자세에서부터 다르다. 자신의 전문 분야라 할지라도 예외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하는 이와 거침없이 자신 이외에는 이 분야에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며 나대는 자의 태도는 180도 다를 수밖에 없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사람은 조심스러워진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면 그것이 원칙이고 철칙인 것 같지만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알게 되면서 예외라는 것을 발견하고 다른 특이한 사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아는 사람은 함부로 단정적인 말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지식도 그러할진대, 시비를 가리는 문제에 있어 자신이 사안의 진상을 온전히 모두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자신이 신이나 재판관이 된 것처럼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일도양단하여 어떤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배운 자라면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에도 한번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지만, ‘검찰의 의무’라는 것은 형사소송법에 의거하여 죄를 지은 자를 기소하여 법원에서 그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죄가 있다면 그 죄로 얼마의 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법원의 재판관이 따져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기소되어 법원에 가서 유무죄를 다투는 것이지 기소가 유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경화로 점점 망해가고 있는 이웃나라 일본의 예를 보면, 형사사건으로 기소된 사건이 무죄로 나올 확률이 무려 0.1%이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형사사건으로 기소가 되면 형사법원에서는 무죄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유죄를 확정하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검찰에서는 그만큼 기소에 신중을 기해서 하기 때문이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검찰의 의무는 대한민국 검찰에서 하는 것처럼 무조건 기소해서 유죄를 만들어야만 된다는 것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법원에 가기 전에 경찰에서 수사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검찰에서 좀 더 면밀하게 전문가의 입장에서 검증하는 절차를 필요로 하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1월부터 경찰은 검찰에게서 수사 종결권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벌써 1년이 넘게 지나갔다. 무슨 변화가 있나? 없다. 아니, 폐해만 더 많아졌다. 검찰의 수사지휘권에 상하관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어 검사의 지휘 없이는 수사를 멋대로 종결할 수 없었던 경찰에서 그간 보고 배웠던 검찰 흉내내기 놀이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 검사가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칼자루를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 하나였다.

 

“검사가 수사하면 없던 죄도 죄로 만들 수 있고, 검사가 수사하지 않겠다고 하면 있던 죄도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 뭣 같지도 않은 논리가 현실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뇌물을 받았다고 실형을 사는 전 국정원장은 형을 살고 있는데, 줄을 더 잘 골라잡았던 전 국세청장은 유일하게 무죄를 받고 나왔다. 같은 사실관계에서 돈을 준 사람은 사실관계가 입증되어 유죄로 인정되어 형을 살고 있는데, 돈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부인한 것을 인정받아 무죄로 풀려나는 코미디를 찍었다.

3심제로 되어 있는 대법원에서는 그 블랙 코미디가 언론에 퍼질 것 같자, 구차하게 ‘(무죄가 나온 재판은) 검찰에서 수사도 대강하고 공판도 대강해서 그랬나 보지.’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놓았다. 그것이 대한민국 법비들의 콘체른이 하는 짓이다. 검찰 혼자만 덮어주겠다는 것으로는 구조적으로 부족하다.


법원의 법비들이 그 코미디에 장단을 맞추고 빼주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기적적으로 신의 계시를 받듯 빠져나오는 경우는 결코 없다.

 

왜 이 장의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또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자신이나 자기편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법비들에 대해 죽비를 드느냐고 무슨 연관성이 있느냐고 의아해하며 오독할 가능성이 높은 학도들에게 다시 정리해준다.


이 장은 단순히 진리를 궁구하는 것에 그친 가르침이 아니다. 지극히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진리와 학문의 관계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더 복잡하고 감춰진 행간이 많은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사실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주관으로 혹은 자기 편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조작하는 이들에게 철퇴를 던지는 일갈에 다름 아니다.

자세한 사정도 알지 못한 채, 누군가 툭 던진 SNS 글 하나 보고 멀쩡한 사람을 잡는 것이 요즘 단무지들의 트렌드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이 밝혀져도 사죄하거나 그것을 바로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실적을 위해 가난하고 돈 없는 이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겁박하여 범인을 만들고, 그런 단무지 쓰레기 짭새들이 특진을 하는 과정을 보고서 검사라는 자가 제대로 들여다보고 바로잡지 않아 수십 년을 감옥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온 이들에게 그렇게 특진하고 한 세월을 누린 쓰레기 경찰이나 그 건으로 승진하고 전관을 누리는 현재 변호사라는 놈들은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우리는 현직에서 있었던 일을 밖에 나와서 입에 담지 않습니다.’라고 후안무치한 멘트를 날린다.


알아도 묻어버리면서, 진실을 궁구 하려던 안연까지는 아니더라도 멀쩡한 선량한 이를 공격하는 법비나 생각 없이 댓글을 툭툭 달고 아니면 말고식의 당신과 무엇이 크게 다르단 말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말하는 것만 봐도 그 훌륭한 사람됨이 드러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