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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Feb 28. 2022

난(亂)은 어떤 경우에 일으키는가?

난(亂)을 일으키자고 바람 넣는 간악한 정치꾼들에게 고함.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하는 것도 난(亂)을 일으키고 사람으로서 仁하지 못한 것을 너무 심히 미워하는 것도 난(亂)을 일으킨다.”

이 장에서는 양극단의 예를 통해 난(亂)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난(亂)이라는 용어를 일단 여기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난(亂)은 이른바 무력봉기이다.


무력봉기는 힘으로 현재의 상황을 뒤집어엎겠다는 목숨을 건 쿠데타를 의미한다. 현재의 위정자를 전복하여 내가 그 위치에 오르겠다는 목적의식을 명확하게 하는 일종의 반역행위에 다름 아니다. 대개 정복 행위도 그렇지만 시대를 바꾸는 경우 어떤 식으로 포장하든 그것은 이전 왕조에 대한 쿠데타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쿠데타이자 역성혁명이고 성공했다고 해서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행위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반역행위이자 쿠데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부합해야만 한다.


한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백성들이 그 뜻을 함께 하는가 하는 민중의 지지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것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대의명분이다. 이 두 가지는 크게 보면 한 가지라 볼 수 있지만, 두 번째의 대의명분에 해당하는 것은 첫 번째의 사유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되 핵심적인 계기가 트리거 역할을 해줘야만 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부합하지 못한 것은 모두 반역행위이자 쿠데타로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공자가 이 가르침을 펼치던 시대는 워낙 시대가 혼란스러워 난(亂)이라는 것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난(亂)의 원인이 되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두 가지 사례가 전혀 현실과 무관하게 가정으로 나온 것이 아닌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개연성이 있는 지적임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간단해 보이지만 오독하거나 오해하기 딱 좋은 구조가 두 군데나 있으니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주석을 달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용맹을 좋아하고 분수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면 반드시 난을 일으키며, 인하지 못한 사람을 미워하여 용납할 곳이 없게 하면 반드시 난을 일으키니, 이 두 가지의 마음은 선악이 비록 다르나 난을 일으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원문에서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하는 것’에서 뒷 구절인 ‘가난을 싫어한다’는 의미가 첫 번째 오독의 함정인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주자는 먼저 그 의미를 풀어주고 있다.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누구나 싫어한다. 용맹하면서 가난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뒷절이 당연하다는 점에서 용맹한 사람이라면 모두 난(亂)을 일으킨다는 말로 오독하기 좋기 때문에 주자가 그 뜻을 상세히 풀어 ‘분수를 편안히 여기지 못하면’이라 해석하였다.


왜 가난한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 분수는 편안하게 여기지 못한다는 말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는가? 가난하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그렇고 자신이 가난하게 된 것이 나라님이나 정부의 문제라고 투덜거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자들은 어디에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양심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가 가난해진 것은 그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그가 더 많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래서 가난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된 것은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런데 다혈질에 나름 용맹하다는 자들은 자신의 부족함에서 그 원인을 찾고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난하게 된 이유를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그것이 나라님이고 정부이고 위정자들이라고 설정해야 그 울분을 풀 수 있고, 자신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리지 않게 되어 부양해야 하는 가족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말이 용맹이지 만용이 지나치면서도 자신의 주제와 분수를 겸허하게 인정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자들에게 권계 하는 말이다. 실제로 이 즈음에 자신의 야망을 위해 뭇 백성들을 부추겨 자신들의 힘으로 삼고자 할 때 선동했던 이들은 이러한 자들을 바람잡이로 삼아 자극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용하곤 했다.


뒷 문장은 조금 더 심도 있게 들어가는 내용이다. ‘사람으로서 仁하지 못한 것을 너무 심히 미워하는 것’이라고 원문에 되어 있는데, 그다음의 행간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들은 정작 난을 일으키게 되는 주체가 ‘仁하지 못한 것을 너무 심히 미워하는 사람’으로 오독하기가 쉬운 두 번째 함정을 가지고 있다.

서점에 깔린 <논어> 해설서의 절반 이상에서 이 부분에 대해, 마치 仁하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사람이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결국 난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해설하고 있는데 그런 잘못된 해설은 이 부분을 오독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 이들이 수천 년이 지나 대한민국에 버젓이 등장할 것을 우려했던 주자가 이 부분을 ‘仁하지 못한 사람을 미워하여 용납할 곳이 없게 하면’이라고 풀어주어 이 행간을 명확하게 확인해준다.


즉, 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들에 대해 너무 가혹하게 몰아세우고 미워하여 빠져나갈 구멍도 없이 용납할 여지를 주지 않게 되면 그렇게 궁지에 몰린 사람이 바로 난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하고 仁을 실천하는 수행이 익숙한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다고 하여 그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하고 가르치고 마음을 움직이도록 해야 하는데, 무조건 자신의 기준에서 그들이 仁하지 못한 언행을 보인다고 가혹하게 비난하고 그들을 다그쳐버리게 되면 그들이 원한을 갖게 되고 짓눌리다 못해 반발심을 가져 난(亂)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자아, 내용에 대해서는 오독할 여지가 없이 명확하게 다 인지하였다. 그런데 뭔가 한 가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언제나 공자의 가르침을 비롯하여 성인의 말씀은 의도하는 것이 한 가지뿐이 아니며 한 가지 가르침에서 일면만 보아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공부한 바 있다. 이 말을 왜 한 것인가에 대해 먼저 가만히 생각해보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당시는 난(亂)을 일으키는 백성들은 너무도 많았던 시대였다. 난(亂)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상이다. 난(亂)이 일어난다는 것은 주자의 주석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선한 의도이든 악한 의도이든 두 가지 모두 있지만 결과적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백성들이자 민중들이다.


자신이 가난하게 살게 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외부에 돌려 사실을 왜곡하여 그것을 뒤집겠다고 목숨을 걸고 난(亂)을 일으키는 것은 배우자는 자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문장에서 당시 난(亂)을 일으키는데 주도를 한 이들이 결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들이 아님을 읽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 농부들은 자신이 일한 만큼 소득이 주어지는 노동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이 계속 가난한 것이 자신이 열심히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해졌다고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릴 정도의 사특함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원문에서는 용맹을 좋아한다는 표현으로 완곡하게 묘사했지만 결국은 만용을 부리는 자는 늘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다혈질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힘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난(亂)을 일으키는가?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고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것에 비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욕심과 자격지심을 가진 부하가 그 생각을 키우게 되면 그 불만들이 마치 기정사실인 양 스스로에게 인식되어 난(亂)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 문장은 배우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지, 그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에 이용당하는 백성들을 향해 하는 말이 아니다.


두 번째는 그 방향성을 훨씬 더 명징하게 드러낸다. 仁한 언행을 해야 하는 것은 배운 자가 지향해야 할 바이다. 그것을 지향하는 자는 당연히 그렇지 못한 즉 仁하지 못한 언행을 보이는 이에게 눈살을 찌푸리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당연히 위정자에 해당한다. 자신도 仁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그렇게 실천해야 하지만,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사람들을 仁으로 이끌어야만 하는 사명감을 가진 존재이다.

그런데 배우지 못한 사람을 포함하여 배우고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고 화가 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자는 그렇게 그들을 혼내고 미워하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仁하지 못한 언행을 보였을 때,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여 반성하여 바꿔나갈 수 있도록 일깨우고 가르쳐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지를 주고 용납하는 방식으로 교육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이 장에서 공자가 위정자들에게 던지는 현실적인 조언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仁을 행하도록 강조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해 강압적인 방식을 쓴 이들이 그러한 강경 방식에 반발하여 일어나지 않아도 될만한 난(亂)을 일으키게 한 경우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대선은 국가를 대표하고 아우르는 대통령을 뽑는 투표이지,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그룹들이 싸우는 전쟁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대선에 나온 자들이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

대선이 우리나라를,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을 뽑는 것이라면 누가 가장 우리를 잘 대변하고 우리와 우리나라에 이로운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뽑으면 되는 것인데,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념적으로 대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물론 선거를 현장에서 지지하고 지원하는 이들이 약간 감정적으로 과열되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상대와 날 선 대립을 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권리를 한 표로 행사하는 국민들에게 그런 전장에서 보이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해도 모자랄 정국을 정치를 하겠다는 것들이 일부러 뒤흔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정치를 하는 이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왜 우리는 대표하는 사람을 뽑는 선거에서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과 싸워야 한단 말인가?


초등학교에서 반장을 뽑는데 내가 지지하는 짝꿍을 추천하고 그 짝꿍이 반장이 되길 바라는 바람에 이 친구를 뽑으면 우리 반에 아무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 외에, 갑자기 다른 반장 후보를 지지하는 친구에게 ‘쟤를 뽑으면 무조건 안돼!’라고 말하는 초등학생은 없다. 그런데 초등학생만도 못한 짓을 지금 하라며 국민들의 갈등을 조장하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단 말이다. 그것이 과연 사람이 할 짓이던가?


이 장의 가르침은 결국 배우는 자가 자신의 수신(修身)을 어떻게 해야 할 것에서부터 위정자가 어떻게 국민을 인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아내고 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난(亂)이라는 것은 결국 민중의 봉기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사리에 대한 명확한 분별이 있는 대중이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느끼기에 정말로 못살겠다고 느끼는 부분이 심하다면 그것은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임에도 자신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거나 부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의 세를 불리기 위해 가장 만만하고 어리숙한 사람을 꼬드기게 된다. 그 꼬드김 중에서 나라를 흔들기 가장 좋은 것이 지금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에게 헛바람을 불어넣는 것이다.


국정농단의 이름으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사과하고 청와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후안무치한 대통령을 끌어내려달라고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가득 채웠던 것이 10년 전의 일이던가? 그런데 그렇게 억지 춘향 격으로 끌려내려 와 감옥까지 들어간 사람에게 개선의 여지를 주기 위해 형을 면제하고 감옥에서 끌어내 줬더니만 자기 아버지가 수많은 정치인들과 학생들을 군발로 탄압했던 것을 잊었던 것인지 자신이 정치탄압을 받아 그리 된 것이라면서 민주투사 행세를 하고 떠들고 다닌다.

그 당시 빨간당에서 자신의 정치 생명을 이어나가겠다고 대통령 탄핵에 동의했던 자들에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다고 잘못한 짓이었고 지금이라도 그 잘못을 인정하라며 빨갱이 색출하듯 죽창을 들고 설치는 날 선 문구들이 태극기 부대라는 요상한 단체에서 흘러나왔더랬다.


그들의 틈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미국 성조기를 흔들고 쌩쇼를 했던 것들이 지금 빨간당에서 배격당하고 있던가? 아니다. 그들은 엄연히 아직도 그 안에서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호시탐탐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사실 지금 국회가 거대 야당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지금의 파란당 국회의원들이 잘하고 훌륭해서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빨간당에 속해있던 것들이 그런 행태를 하고서도 후안무치한 행보를 계속하는 것이 눈꼴셨던 국민들이 그들에게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 자격이 없다고 내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반성도 하지 않고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가자며 민중을 선동하면서 부동산 건을 시작으로 해서 민중들이 가난하게 된 원인이 모두 정부에 있다면서 그쪽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정말로 국민을 바보로 아나?

하기사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반쯤 술 취한 아저씨 같은 넋 빠진 목소리로 빨간 넥타이를 비뚤게 매고 다니며 그 당의 당대표로 못할 짓을 그리도 많이 한 작자가 잠시 전선을 떠나 당시 10대의 어린 친구들이 그 만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점을 이용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있어 국민은 언제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뒤흔들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기는 하다.


그들은 연신 국론을 분열시키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에게 표를 달라며 그것이 진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 말이나 내던지며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나라가 당신을 가난하게 만든 것이고 지금 정권을 잡은 여당이 모두 잘못해서 지금 힘들어진 것이니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고.


말에 솔깃하고 감정에 욱해서 흔들리는 어리석은 국민들이 仁하지 못하다고 탓하고 비난하지만 말자. 오죽하면 그들의 감언이설에 그리 쉽게 흔들리겠는가 하는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일깨워주고 알려주도록 하자.


너무도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대선은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더 쌓겠다고 설치는 법비들의 바람몰이에 이용되는 이벤트가 아니다. 우리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나갈 5년간 우리나라를 대표할, 우리 대표를 뽑는 축제이자 내 의사가 그대로 반영되는 기분 좋은 일이다.

왜 내 권리를 행사하는데 그들의 같잖은 바람잡이가 되어 그들의 배를 채워줄 짓을 해줘야만 한단 말인가? 다시는 그들이 난(亂)을 꿈꾸지 못하도록 얼음물을 정수리에서부터 끼얹어줄 수 있는 깨어있는 국민이길 당신의 양심에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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