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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1. 2022

교만과 인색은 어떻게 한 범주에 드는 개념이 되는가?

삶을 어떻게 가꾸어나갈지에 대한 조언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주공(周公)과 같은 아름다운 재예(才藝)를 가지고 있더라도 가령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이 장에서 말하는 내용은 크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극단적인 예를 들기 위해 공자가 지향하는 도통의 정점에 있는 주공을 끌어와 그렇게 훌륭하고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고 하여 교만하고 인색한 것이 모든 것을 무너뜨릴 정도로 결정적인 결함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권계하는 내용이다.


이 문장을 쉽다고 생각하는 많은 해설서의 자칭 전문가라는 이들이 가장 많이 이 장을 해설하는 내용은 ‘겸손해야 한다’이다. 교만하지 말라고 하니 겸손을 떠올려 편하게 자기 식으로 이 장을 아주 범범한 내용으로 끌어내리고 마는 우를 범한다.


심지어 나름 현대적인 해설을 넣겠다고 하는 이들은 교만과 같은 비중으로 언급한 ‘인색’에 대해 겸손하면서도 사회에 기부를 하는 인성이 바른 기업가나 셀레브를 언급하며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너스레까지 붙이는 해설을 한다. 날 선 뉘앙스를 보고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들의 해석은 그저 껍데기만 핥고 정작 그 안에 있는 내실의 달콤한 맛은 보지도 못한 수준에 그쳐 있다.


자아, 다시 한번 원문의 뜻을 제대로 새겨보자. 현대적인 개념으로 보면. 교만과 인색은 같은 범주에서 언급되는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위화감을 느꼈다면 왜 공자가 이것을 같은 범주의 양 극단으로 설명했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연구하고 생각해내야만 한다. 전혀 다른 겸손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색하지 말고 베풀어야 한다는 엉뚱한 말을 한 문장에 섞었을 공자가 아니지 않은가? 왜 그렇게 노력도 하지 않고 쉽게 쉽게 날로 먹으려 드냔 말이다.


먼저 주자는 두 개념에 대해 기본적인 의미에 대해 주석을 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才美는 지능과 기예의 아름다움을 이른다. 驕는 자랑하는 것이고, 吝은 인색한 것이다.


이제까지 주자의 주석을 설명할 때 단순한 문자의 해석에 대한 것을 제외하여 소개하지 않았음에도 이번 장에서 그것을 소개하는 데에는 이 단순해 보이는 의미의 분석이 이 장의 숨겨진 행간을 읽어내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주공(周公)은 공자가 따르고자 지향하는 도통(道統)의 정점에 있는 위인이다. 때문에 굳이 그가 지능과 기예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고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 <논어>를 읽는 자가 주공(周公)이 누군지 모를까 봐 그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하면서 그러한 주공에 지능과 기예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는 표현을 했다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공자는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쓰는 일반 수준의 학자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인격적으로도 신분으로도 정점에 있는 주공을 가정하면서 굳이, ‘지능과 기예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라는 가정을 왜 했을까? 그 뒤에 바로 교만과 인색을 설명하고 있다. 맞다. 그 지능과 기예의 아름다움에 대해 기가 흘러넘쳐 자랑하는 것이 교만이고 그 반대가 인색이라는 설명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인색에 교만의 반대말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사고의 로드가 걸린다. 공자 당시에 교만과 인색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것인지 공자가 그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고증할 수 없지만, 최소한 두 개념이 정 반대의 개념으로 한 문장 내에서 극단적인 비교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다음의 해설을 보면 정자(伊川)도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교만하고 인색함이 불가함을 심히 말씀한 것이다. 주공과 같은 덕이 있으면 자연 교만하고 인색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공과 같은 재예가 있더라도 인색하다면, 또한 족히 볼 것이 없다.” 또 말씀하였다. “驕는 기운이 차 있는 것이요, 吝은 기운이 부족해 있는 것이다.”


앞서 내가 설명한 것에 대해 정자는 훨씬 명확하게 풀어서 배우는 자들이 참고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앞에서 오역하고 제멋대로 현대적인 헛소리까지 창작하여 껍데기만 잔뜩 핥아댔던 이들은 원문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의문에 대해 선배들의 주석조차도 제대로 읽고 탐구하지 않고 짧은 자신의 머리로 뭉개어 겁도 없이 그것을 적어 출판까지 한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가 상당히 지나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내가 매번 수많은 해설서의 오역을 지적하며 이렇게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단순히 그 알량한 지식으로 이름을 새겨 돈벌이를 하겠다고 책을 내는 그들을 비판하고 힐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글을 읽고 공부하는 그대들이 그저 버젓이 서점에 꽂혀 있는 그런 책들에 현혹되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조차 검증하고 연구하고 탐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권계 하고자 함이다. 배우는 사람이라면 늘 반면교사하여 자신은 그렇게 잘못하고 있지 않은지를 늘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자의 주석을 잘 보면, 굳이 한 문단으로 이어도 되는데, ‘또 말씀하였다(又曰)’라고 표기하고 뒤에 교만과 인색에 대해서 다시 의견을 풀어준다. 두 개념이 상반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기운’이라는 공통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기운이 차 있는 것이 교만이고 기운이 부족한 것이 인색이라는 것이다.

이 기운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고 행간을 읽을 필요가 있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이들을 위해 먼저 고민하고 답을 낸 주자가 마지막으로 정자의 설명을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풀어준다.


내가 생각하건대, 교만은 비록 기운이 차고 부족한 차이가 있으나, 그 형세는 항상 서로 연관된다. 교만은 인색함의 지엽이고, 인색은 교만함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천하 사람들에게 징험해보니, 교만하고서 인색하지 않은 자가 없고, 인색하고서 교만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주자의 깊이 있는 고민의 결과를 보게 되면 이제 다시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자신보다 더 높은 수준의 선배가 고민한 결과를 정리한 것을 보면서 쉽게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상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최소한 그가 했던 만큼의 고민을 해야 그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고,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는 신의 섭리인 것이다.


일단, 두 개념이 항상 서로 연관된다는 전제를 단언하면서 시작한다. 주자의 주석을 정리해보면 기운이 부족한 형태라고 설명한 인색함이 교만함의 근본이고 인색함이 뿌리가 되어 자라게 되면 그 지엽으로 기운이 넘치게 되면 교만이 된다는 구조로 설명한다. 정자의 상반된 개념의 설명은 보다 깊은 연관성으로 이어지는 이해를 하라고 하나의 나무로 설명한 것에 다름 아니다.


교만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이니 이제 왜 인색이 교만의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언급되는지에 대해 그간의 사유의 조각들을 맞춰보기로 하자. 본래 인색은 현대어에서 사용되는 것처럼 물질적인 인색으로 한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물질적으로 인색하다는 것은 현대에 사용되는 것처럼 이미 많이 가지고 있는 자가 자신이 가진 것을 없는 자들이나 부족한 자들에게 나눠주거나 베푸는 것을 하려 들지 않는 것을 말하는 개념이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七宗罪에도 교만과 인색이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글로 정리해놓고 보니 재물이라는 용어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예컨대 지식이나 도덕적 품성으로 환치시켜도 그 개념이 정신적인 인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정신적인 인색은 자연스럽게 교만으로 이어진다. 내가 지금 아무리 ‘자연스럽게’라는 표현을 써도 자연스럽게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앞서의 주석을 토대로 찬찬히 다시 설명해보기로 한다.


배우는 자가 지식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워 지식도 채우게 되고 그것을 통해 끊임없는 수양 과정을 통해 도덕적 품성을 키우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라고 공자는 평생을 가르쳤다. 그런데 그렇게 배우고 품성을 기른 자가 사특한 마음을 품게 되면, 자신만 알고 싶고 자신만 고양된 인격체로 도약하고 싶다는 과욕을 부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인 인색함이다.


배우고 익히는 이유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함께 고양되어 사회를 변화시키고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에 목표를 둔다. 하지만 자기가 배움과 수양의 과정을 통해 얻게 된 내면적 덕성이나 지식을 타인에게 일러주거나 전수할 생각을 하지 않고 혼자서 움켜쥐면서 문제는 발생한다.

한마디로 음흉한 속내로 다른 사람의 것을 갖고 싶기는 하지만 내 것을 주고 싶지는 않은 마음의 상태가 이 장에서 말하는 인색함의 본모습이다. 그렇다면 또 이 인색함은 기운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면 기운이 넘치는 교만은 또 어떻게 ‘자연스럽게’ 반대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배워서 조금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며 베풀지 않은 이들은 상대를 깔보고 무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교만한 마음으로 이어진다. 다른 사람이 이르지 못한 경지에 자신만 이르게 되었으니 지나친 자신감과 자신이 위에 군림한다는 착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자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문단의 마지막에 세상 사람들에게 이 과정을 검증해보니. ‘교만하고서 인색하지 않은 자가 없고, 인색하고서 교만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라고 정의 내리게 된 것이다. 자신만 더 많이 알고 자신이 우위의 존재라고 착각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는 결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품성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거나 그 마음을 나누려 하지 않는 인색함을 보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것을 얻고 배우는 것에는 악착같으면서도 자신의 것을 공유하거나 모르는 이들을 일깨워주거나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일이 번거롭다고 여기는 자는 결국 목적이 교만하기 위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것을 주지 않음으로 해서 자신이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마음은 결국 교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왜 두 개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여러 단계의 고민과 사색을 통해 겨우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 가르침을 ‘겸손해야 한다’ 정도의 범범한 가르침으로 끌어내리고 인색하지 않고 기부를 많이 하라는 해설을 보고 기함이 차지 않겠는가 말이다.


인색의 개념은 조금 더 깊은 사유를 통해 들어가게 되면 선의를 베푸는 것에도 인색한 것을 포함한다. 선의를 베푸는 것에 인색하게 되면 그렇게 행동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이의 선행이나 선의를 보게 되면 그것을 따르고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훌륭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아 편협한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즉, 인색함을 기운이 부족함이라고 표현했던 정자의 의미대로 단순히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품이 좁아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자체가 오그라들어 쪼글쪼글해져 딱딱해지게 된다. 다시는 유연하게 펼쳐질 수 없는 상태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을 ‘완고해진다’라 하는 것이다. 그것에 물리적 시간이 맞물리게 되면 늙고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신만의 편견에 사로잡혀 완고해지게 되는 것이다.

전성기라고 할 시기에 멀쩡해 보이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늙은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 순간 망발을 하거나 이전 자신이 말한 사실까지도 뒤집고 바꿔가며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접하곤 한다. 그것이 죽을 때까지 우리가 공부하고 수양하고 스스로를 단련해야 하는 이유이다.


아무리 자신이 노력해서 정점에 올라 전성기라는 시절을 향유했다 하더라도 그 노력을 경주하지 않고 이제 늙고 어느 정도 수준이 올랐다고 착각하며 이전에 공부하고 가지고 있던 것으로 대강 뭉개고 장로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그 한순간에 그의 그저 늙고 완고한 퇴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던진 화두인 교만과 인색은 양극단의 비교가 아니라 결국 한 덩어리의 악순환임을 알아차리고 사유를 통해 설명한 정자와 주자에 이어진 논리를 보면서 당신이 깨달음이 왔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실례를 너무도 많이 주변에서 보아왔다. 이른바 자칭 지식인이라고 칭송받던 인물이거나 자수성가하여 잘 나가던 기업가라던가 한때를 풍미했던 정치인이라고 했던 이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이 그러했다. 그들은 정점을 지나 더 이상 자신의 부족을 더 채우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자신의 한참 밑의 후배나 새로운 의견을 점점 경청하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자신의 생각에 갇히고 옛날만을 생각하며 대접받기만을 원하며 스스로를 절벽으로 몰았고 나락으로 떨구었다.


그렇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언제나 변화의 여지가 있으며 새로운 목소리와 흐름으로부터 끊임없이 유연하게 흡수하고 사유하며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했다.


어떤가? 당신은 그렇지 아니한가? 이것은 칠순 팔순이 되어서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오십만 되어도 사오정이라며 내쫓는 것이 당연한 흐름인 듯 대기업은 강제적 퇴직나이를 계속 낮추고 있다. 더 이상 평생을 한 직장에 몸담았던 그 옛 세대의 문화는 어디에도 없다.


설사 철밥그릇이라고 하는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들어갔던 이들도 적당히 방계 기관으로 거취를 옮기는 방식으로 현역에서 끝까지 버티는 것이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나이와 상관없이 꼰데가 되어 라테 타령을 하는 이들이 오십육십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에게는 한도가 없을 정도로 너그럽기 그지없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기 그지없는 잣대를 들이대고 언제든 배우겠다는 유연한 사고를 갖추는 것은 공부하고 수양을 통해 단련하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하루아침에 그러겠다고 마음먹는다고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결국 당신의 삶의 노정이 당신이라는 결정체로 다른 이들에게 선보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교만과 인색의 전철을 밟고 있는 그곳에서 나오지 않을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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