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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2. 2022

공부를 출세의 도구로 삼는 순간 그것은 곧 독이 된다.

잘 먹고 잘 살려고 공부하는 거라며 자식을 가르치는 부모들에게.

子曰: “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 년을 배우고서도 녹봉에 뜻을 두지 않는 자를 쉽게 얻지 못하겠다.”

이 장은 한 글자로 인해 약간의 해석에 이론을 보이는 부분이 있다. 바로 ‘곡식 곡(穀)’자인데, 주자는 주석을 통해 ‘穀’을 녹봉이라 해석하고, 至 역시 ‘志’字가 되어야 한다고 새기면서 ‘학문을 오래 하고서도 녹봉을 구하지 않는 이러한 사람을 쉽게 얻지 못한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공안국(孔安國)은 곡(穀)을 결실의 의미로 새겨 선(善)이라고 보고 삼 년만 열심히 공부하더라도 좋은 결실에 도달하지 않는 자가 없다는 것으로 새겨, 사람들에게 배움을 권하기 위해 한 말로 새겼다.


공안국의 해석이 아주 황당할 정도는 아니나 매끄럽게 이해하기에는 약간의 논리적 무리가 따른다고 판단하여 주자의 해석을 따르기로 한다.


삼 년을 배웠다는 것은 일정 경지에 올랐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최소한 배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배워야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정도에 대한 기본기를 닦을 시간을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정작 공자의 문하에 들어오는 목적 자체가 공직을 얻기 위한 부와 명예를 목적한다고 매도하기는 조금 과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말이 더 무서운 회초리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공자의 문하에서 배우게 되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공직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길 정도는 아니지만, 삼 년이나 배워 기본을 닦고 배움의 길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윤곽을 알게 될 정도가 되면서 녹을 받는 공직을 얻겠다는 것으로 목표를 삼지 않는 자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한탄에 다름 아니다.

이 장의 가르침은 크게 보면,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배움이 무엇인지 알게 될 정도가 되고서 자신의 부족함을 더 채우고 수행하려는 노력보다는 어떻게 하면 벼슬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한 목표 설정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앞서 공부했던 것과 같이 공자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것은 배운 지식과 자신의 실천의식을 가지고 잘못된 세상을 바꾸는 것이지 사람들의 우위에 서는 것이 아니다.


결국 정치행위를 하는 것은 고위 공직자로 가는 것이니 결국 똑같은 얘기가 아닌가 하고 우문(愚問)을 던질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위정자에게 바른 정치를 하도록 조언을 하는 것이 목적인 것과 위정자에게 최대한 가까이 올라가 부와 명예를 움켜쥐겠다고 목표로 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결과적으로 같은 고위직 공직자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무엇을 목표로 삼고 움직이는가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돈이라는 수단이 모두에게 같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 돈으로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총을 사서 다른 사람을 협박하고 더 큰돈을 훔치는데 쓰는가 아니면 그 돈을 가난하고 못 먹고 못 입는 이들을 위해 기부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두 번째 방향은, 배우는 자들에게 실질적인 화두를 던지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삼 년정도 공부한 것으로 그런 어설픈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기본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함과 동시에,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정도의 아주 어설픈 단계임을 스스로 깨달으라는 것이다. 이러한 두 번째 의견을 뒷받침하듯이 양씨(楊時)가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자장(子張)의 어짊으로도 오히려 녹봉을 구하는 것을 물었으니, 하물며 그보다 못한 자에 있어서야! 그렇다면 3년을 배우고도 녹봉에 뜻을 두지 않는 자를 쉽게 얻지 못함이 마땅하다.”


이 내용은 앞서 공부했던 ‘위정(爲政)편’의 18장에서 자장(子張)이 스승 공자에게 봉록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을 물었던 내용을 언급한 것이다. 공자의 측근 제자로 수년간 공부를 했던 자장(子張)조차도 그런 질문을 스승에게 했었는데, 그보다 훨씬 아래 단계에 있는 고작 삼 년 정도 공부한 이들이 녹봉에 뜻을 두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삼 년을 공부하고서도 그런 헛된 망상을 꿈이라고 가질 수 있을 정도라면 그의 미래가 위험하기 그지없다는 강력한 경고가 이 장의 행간에는 녹아들어가 있다. 결국 이 가르침은 공부를 하는 이유 자체에 대해 배우는 자들에게 ‘탐욕이라는 본능을 절제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한 수양의 방편으로 하는 공부를 주객을 전도하여 출시의 도구로 사용하겠는가?’라는 무거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결국 이야기의 초점은 다시, ‘공부를 무엇을 위해 하는가?’라는 목적의식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본래 배움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익히기 위해 시작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배워서 알게 되는 것과 동시에 자신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게 된다. 즉 자신이 그간 몰랐던 부족한 부분들을 고치고 메우는 과정이 바로 배움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실천과 수양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공부 본연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것이고 오히려 공부 자체를 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더 악화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통해 이 장의 가르침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명확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공자가 누차 강조한 배움의 목적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공자는 역사를 먼저 강조하였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촘촘한 기록들을 고증을 통해 확인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무엇이 잘못되어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논한 성현들의 가르침을 공부하여 옛사람들의 지혜를 배워나가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사고를 넓히는 것이 그다음 과정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왜 위정자가 실정을 하는지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배워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기에도 삼 년은 당연히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배움의 과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실생활에 응용과 자신의 삶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몸에 배일 정도의 기간이어야 한다. 그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그 과정을 생략하거나 그 수양을 게을리한 자들이 결국 배운 것을 가지고 조금이나마 트인 안목과 알량한 재주로 위정자의 눈에 들어 출세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는 정작 자신을 찾았던 수많은 위정자들에게 발탁되지 못했다. 그것이 공자의 성향 탓이었는지는 공자가 실제로 벼슬자리를 얻거나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때에도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는 도량을 가진 위정자를 가차 없이 등지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천하를 유랑하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공부했던 바와 같이 공자의 많은 제자들이 공자의 문하에서 실력을 키웠다는 것을 인정받아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위정자들에게 발탁되었다. 그들 중에서는 공자에게 인정을 받은 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 중에서 누구를 가장 높이 평가했는지 알고 있다.

안연과 공자

요절하기는 했으나 위정자들에게 자신이 불려 가는 것이 목매어 있지 않으며 자신의 처지를 불편해하지 않았던 안회(顔回)가 그러하였다.

안회에 대해 공부할 때 설명했지만, 그를 허여하며 공자가 언급했던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가난함을 즐겨하거나 편안하게 여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불가피하게 가난해지더라도 그것을 불편하거나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그 이면에는 가난해지지 않고 더 부귀하게 되기 위함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삼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공자의 따끔한 지적이자 한탄이 이 장의 가르침은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에 어제 작성된 말처럼 적확하기 그지없이 폐부를 찌른다.

나라를 말아먹는데 일조하며 앞장섰던 자들은 모두가 경성제대 출신의 인물들이고, 특히 시대를 조금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집안이라고는 내세울 것도 없는 개천용들이 무수했다.


악착같이 공부해서 공부 하나만 잘하면 돈 많고 권력을 잡고 싶어 하는 처가에서 뒷돈을 대주며 개천 용을 씻기고 번듯하게 입혀 검찰 간부로 만들어주고 청와대까지 보내주고 여의도에 보내줘 배지를 달게 해 주었다.


그들이 부와 명예를 움켜쥐기 위해 했던 그 부정과 부조리들에 대해 그들이 과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시비(是非)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우직한 인물이었다면 그들은 그 욕심이 파국으로 치달아 자신이 일했던 후배들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고 결국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조직의 특성상 개망신은 당했으나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감옥에 들어갈 일이었음에도 시간을 끌고 대법원에 가서 같잖은 이유를 돈바른 종이에 파기환송심이라는 이름으로 받아 들어 빨간 줄은 공식적으로 안 가고 수면에 주둥이를 내밀고 숨만 뻐끔거리며 쉬고 있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과연 그게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그들은 안도하고 편안히 발 뻗고 잘까? 그렇게 온 국민이 그들이 한 짓에 대해 기억하고 얼굴을 알고 있는데 버젓이 고개를 쳐들고 그 얼굴로 마트에 껍데기만 있는 아내와 함께 장 보러 다닐 수 있을까? 자기 아이들이 졸업하는 학교를, 그 아이들이 커서 결혼하는 자리에 수많은 하객들이 그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지저분하고 추한 짓거리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 의문과 모멸감이 잔뜩 묻어있는 시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내하며 후안무치(厚顔無恥)로 일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예상컨대 그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상한 성관계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져버려 그 수치심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수한 사람들보다 그들은 훨씬 더 강하고 뻔뻔한 심장과 철판을 갖추고 있으니 자신이 벌거벗고 마이크를 들고 동물처럼 여자를 탐하는 동영상이 모두 퍼져버렸어도 딸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훈계를 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며, 아빠의 권력으로 니들이 외제차를 타고 어디를 가든 공무원들이 VIP 대접을 해주었고 군생활을 특급으로 빼주었으니 너희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당당하고 뻔뻔하기 그지없게 훈계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라를 기업처럼 여기고 자기 재산을 모두 나라에 환원한다는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더 큰돈을 빼돌려 놓겠다던 전직 기업인 대통령은 아직도 깜빵에 있다. 그는 마지막 끌려가는 그 시점에도 눈물을 흘리는 아들에게 그 정도의 일로 눈물을 보여선 안된다며 더 강해지라며 멋진(?)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참회의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강한 멘털로 깜빵에 계속 있어야 할 듯하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장사, 즉, 기업을 운영해도 기업윤리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며 욕을 먹고 비난을 받으며 법에 저촉되었다고 처벌을 받는 세상이다. 그런데 하물며 이 장에서 언급하는 것은 나라의 녹을 먹는 공직이다. 만약 그렇게 공부하고 나서 자기 장사를 하겠다고 했다면 공자는 이렇게까지 무거운 죽비를 내리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직은 말 그대로 사익을 취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는 사익을 취하지 않고 공직에서 시비를 가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공무원을 정말로 찾아보기 어렵다. 내가 평생 살아가면서 단 한 명도 그런 자를 보지 못한 것을 보면 정말로 찾기 어려운 것이 맞을 것이다.


고위 공직자는 워낙 대놓고 사익을 밝히고 그것을 부와 명예를 움켜쥐는 치트키로 생각하기 때문에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현장에서 업무를 맡아 진행해야 하는 담당자라고 하는 경찰의 경사, 경위를 시작으로, 검찰의 검사, 검찰 수사관, 계장을 거쳐 1심 단독심을 맡는 3,40대 판사, 지자체에서 흔히 말하는 콩고물이 상당히 많이 떨어진다는 건축 관련 담당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하나같이 공직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기에 부끄러울 정도의 사익 추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 물론 그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직을 수행한다고 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이권이 걸려있지 않은 그야말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경우에는 이른바 매너리즘에 빠져 원리원칙대로 한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얻을 것이 전혀 없거나 그것으로 자신의 목줄을 움켜쥔 사람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추하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최소한 그 자리를 얻기 위해 3년 이상 공부라는 것을 했다는 것이다.

최소한 대학시절부터라고 양해를 해주더라도 그들은 4년에 별도의 정밀타격을 위한 공부시간까지 4년+알파의 시간을 공부라는 것에 매달려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내가 대학시절부터라고 양해를 해준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사실 그들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자신이 공부를 하는 이유와 자신의 꿈을 부와 명예를 위한 것으로 설정한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그들이 글을 처음 배우고 그림을 처음 배울 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계속해서 ‘그들’이라 표현하고 ‘당신들’이라고 쓰지 않는 것은 당신이 이미 그들이 누굴 의미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 표현에 안도하면서 슬쩍 자신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며 잔머리를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닌 척하마음이 진정 편한가? 제대로 배운 자라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시비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살 떨리는 일인지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면 누가 공부하고 누가 수양하며 누가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겠는가?


당신은 입이 마르고 닳도록 구차하게 변명해댄다. 당신은 그런 위치에 있지 않고 당신 하나의 행동이 썩은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느냐고.

그렇다면 나도 다 차치하고 하나만 묻는다.


지금 당신이 하는 그 썩어빠진 변명과 당신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사회를 좀 먹고 있는 행동으로 당신의 자식에게 치명적인 불이익이 가해진다고 해도 계속 그리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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