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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3. 2022

어떻게 배워서 어떻게 세상에 쓸 것인가에 대한 총정리

군자의 출처(出處)에 대한 소결(小結)

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하며, 죽음으로써 지키면서도 도를 잘해야 한다.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부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이 장은 언뜻 보더라도 굉장히 치밀하고 딱딱 떨어지게 구성한 문장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형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문장의 내용들이 유기적으로 굉장히 기밀하게 서로 조응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자는 이 장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주석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다.


먼저 첫 번째, 마치 시의 구절처럼 댓구를 맞춘 앞의 16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하며, 죽음으로써 지키면서도 도를 잘해야 한다.’는 이 내용은 두 절로 댓구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는데, 각기 다른 4글자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독립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기 서로 유기적으로 조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자의 해설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篤은 독실하고 힘쓰는 것이다. 독실하지 믿지 않으면 학문을 좋아하지 못한다. 그러나 독실하게 믿기만 하고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믿는 바가 혹 正道가 아닐 수 있다. 죽음으로써 지키지 않으면 도를 잘하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으로써 지키기만 하고 도를 잘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쓸데없는 죽음이 될 뿐이다. 죽음으로써 지키는 것은 독실히 믿는 효과요, 도를 잘하는 것은 학문을 좋아한 공효(功效)이다.


주석에서 ‘篤’이라는 글자를 따로 유일하게 설명한 것은 이 한 글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원문의 해석에서 ‘독실하게 믿는다.’라고 되어 있는데 현대의 해설서들은 이 부분을 대개 자세하게 풀어 해석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본래의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그렇게 새기지 않기 때문이며, 공자 당시에도 저 말은 이 장까지의 <논어> 공부를 통해 중급 이상에 이른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저 의미가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까지 그저 초급 수준에서 글을 자신의 것으로 곱씹어 독해하지 못하고 그저 끌려다니며 수박 겉핥기식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니, 반성하고 좀 더 능동적인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독실하게 믿는다’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배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실천하려는 수양의 마음과 의지를 의미한다. 앞서 학이편의 6장에서 배웠던 ‘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집에 들어가면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윗사람에게 공경스러우며, 언행이 근엄하고 믿음성이 있으며, 널리 여러 사람을 사랑하고 인을 가까이한다.)’는 기본을 갖춤을 말한다.

이것은 기본임과 동시에 배워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적용되는 기본 자질을 의미한다. 이것이 ‘독실하다’라는 본연의 의미이다. 전혀 유관하다고 기대어 해석할 부분은 없지만 앞서 누차 그렇게 사용한 예가 있기 때문에 <논어>를 쭉 읽고 공부해온 자는 그것이 기본이 되는 언행이고 마음가짐임을 알 수 있다. 그 의미를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주자가 주석의 맨 앞에 독실하다는 의미를 다시 한번 환기시켜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서 학문을 좋아할 수는 없다고 주자는 단언한다. 그런데 이런 자질만 갖추고서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공부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행동지침이었던 것이 옳은 것이지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배우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뒷 문장에서는 ‘죽음으로써 지키면서도 도를 잘해야 한다.’라는 도(道)라는 단어를 양측에서 끌어다 사용하는 구조를 보인다.


죽음으로써 지켜야 할 것도 도이고 그저 죽음으로써 지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으로써 지킬 각오와 마음가짐이 아니고서는 도를 잘할 수 없다는 조건절의 구조를 갖추고 있어 앞서 기본기를 갖추지 못하고서 배우는 것을 좋아할 수 없다고 한 것과 똑같은 구조를 선보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절처럼 반대의 상황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주자는 설명한다. 즉, 죽음으로써 지키기만 하고 도를 잘하지 못한다면, 죽음으로써 지킬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이것으로 4가지 구절은 독립적으로도 의미를 갖지만 결국 유기적으로 서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면 완성을 이룰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앞절의 두 개와 뒷절의 두 개만 것이 아니라 앞뒷절이 다시 크로스 방식으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주석의 마지막 문장에서 주자는 강조한다.


죽음으로써 지키는 것은 독실히 믿는 기본적이 마음자세에서 나온 결과이자 효과요, 도를 잘할 수 있는 것은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얻게 된 공효(功效)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치밀한 생각을 통해 그간의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치밀한 문장이 아니란 말인가?


그다음 두 번째로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라는 기존에 공부했던 출처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해서 살펴봐야 할 것은 위태로운 나라는 무엇을 의미하고 어지러운 나라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하는 것이다. 주자의 해설을 통해 그 의미를 파악해보기로 하자.


군자가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니, 그렇다면 위태한 나라에서 벼슬하는 자는 떠날 수 있는 의가 없다. 그러나 밖에 있을 경우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옳다. 어지러운 나라는 아직 위태롭지 않으나 형벌과 정치의 기강이 문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몸을 깨끗하게 하고 떠나는 것이다. 天下는 온 세상을 들어 말한 것이다. 도가 없으면 자기 몸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오직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죽음으로써 지키면서도 도를 잘하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먼저 앞절에서는 ‘나라’를 대상으로 뒷절에서는 ‘천하’를 대상으로 범주를 달리하였다. 위태로운 나라와 어지러운 나라는 굳이 망해가는 순서를 말하자면 위태로운 나라는 이제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인 것이고 어지러운 나라는 정치 상태의 기강이 문란해질 대로 문란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위태로운 나라에 대해 주자가 해설하면서 의리를 언급한 것은, 이미 그 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면 군자의 도리상 나라를 버리고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자가 위태로움을 보고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빠져나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나라의 상태를 확인하고서도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의 혼란을 틈타 한 자리하겠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부화뇌동(附和雷同)하던 자들의 행태를 에둘러 꼬집은 것이다. 군자라면 그 상태를 보고서 그 위기를 자신의 몸값을 높여 등용되는 기회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이미 그 안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자는 나라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자신이 직접 들어가 그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면, 굳이 그 복마전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위태로운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위기를 활용하는 것은 군자로서 해서는 안될 일이니 얼른 자신이 그들과 함께 진흙탕에서 뒹굴어서는 안 됨을 경계한 것이다.


이것을 나라가 아닌 온 천하로 확장하여 말한 것은, 결국 ‘도가 있으면과 없으면’의 가정(假定)이 갖는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언뜻 생각해보면 天下에 도가 있는데 군자가 굳이 나와서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또 마찬가지로 천하에 도가 없으면 나와서 그것을 바로잡을 생각을 해야지 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의 도는 천하가 다스려지는 도가 아니라 군자를 등용하여 쓸 수 있는 제대로 된 위정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상황을 의미한다. 즉, 세상이 혼탁하여 군주라고 아는 이들이 군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특한 것들만을 곁에 두어 세상이 혼탁해진 것이 도가 없는 세상인 것이다.


아무리 올바른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는 군자라 하더라도 군자를 등용하지 않고 어쩌다 등용하게 되더라도 그의 직언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삐뚤어진 군주라면 세상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세상에 나와 자신이 등용되길 바랄 수 없으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인,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부하고 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한 부분을 주자의 주석을 통해 살펴보자.


세상을 다스리는데 행할 만한 도가 없고, 세상이 어지러운데 지킬 만한 절개가 없으면, 보잘것없는 용렬한 사람이다. 선비가 될 수 없으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두 번째 부분을 설명했던 도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기준을 이해했으니 이 부분은 조금 접근이 쉬워졌다. 도가 있다는 것은 군자를 등용하고 제대로 정치를 하는 위정자가 있음이니 그런 사회에서 가난하고 천하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고 그 반대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부하고 귀해졌다는 것은 그 무리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니 부끄러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주자는 조금 더 심도 있는 심화학습이 되어있는 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고급 수준의 화두로 해설을 대신하였다.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고 해도 군자로서 펼칠 도가 있는 자가 아니라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의미가 없는 것이고 세상이 어지럽다고 나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은둔하여 지킬 자신의 절개가 수양을 통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세상에 도가 있던 없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뼈 때리는 비판에 다름 아니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그 깊은 의미의 이면을 읽고 한 발 더 나아가는 공부의 방식을 보여준 셈이다.


마지막으로 조씨(晁說之)가 이 장에 대한 정리를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한다.


“학문도 있고 지조도 있으면 去就의 의리가 깨끗하고, 出處의 분별이 명백한 뒤에야 군자의 온전한 덕이 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이 세 부분은 다시 하나의 보완 순환체계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과 시작이 없이 이어진다. 기본을 갖추고 그 기본을 독실히 하여 배우는 것을 통해 그것이 옳은 것인지 입증하고 실증하는 과정을 통해 실천하고 끊임없이 수양하되, 그렇게 해서 거취에 대한 의리를 명확하게 하고 자신의 출처(出處)를 결정하는 기준을 자기 스스로 설정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준비과정들은 실제 생활에서 적용되고 실제 생활에서 적용된 것은 학문을 통해 끊임없이 시비를 확인하고 검증하며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기준을 바로 잡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수양하여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맞춰 자신의 거취와 출처를 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지고 도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자연의 섭리에 맞춰 살아가고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악? 누가 누구를 근절한다구?

정말 가슴 아프게도 이 당연한 자연의 섭리와 공부를 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를 하는 정치인을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했던 이가 선거에 떨어져 미국이나 독일로 외유를 떠나고 다시 선거 때가 되면 기어들어오는 것만을 보아왔다.


어떤 정치인도 대통령 선거는 고사하고 국회의원조차 자신이 어떤 경우 나서야 하고 어떤 경우 나서지 않는지를 결정하는지 우리는 그들이 끊임없이 나서려고 하고 우위에 오르려고 하는 모습만을 보았지, 그때가 아니라며 물러서고 그만두고 초야에 묻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끌려내려 온 이들의 거취를 스스로 나설 때가 아니라고 구차한 변명을 대는 이들의 이야기 따위는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공천을 못 받았다고 무소속을 불사하겠다는 개싸움을 하는 이들이나 자신의 능력이나 나이나 이제까지 보였던 추한 꼴과 상관없이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선거가 있을 즈음에는 또 선거판을 기웃거리며 그 추악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표를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사회생활을 한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조직이라는 곳에서는 당연히 위계라는 것을 만들고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여러 가지 감투라는 것을 만든다. 그중에서도 내가 주목하는 것은 비상임 이사나 감사직을 본다.

대학 교수는 원칙적으로 학교에 보고만 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비상임이사를 맡을 수 있다. 당신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 대기업의 비상임이사들은 대개 법비들이나 회사의 이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교수들이 차지하곤 한다. 검사직을 하던 이들이 교수로 임용되는 것보다 판사직을 한 법비들이 교수직을 쉽게 차지하는 것도 비슷한 프로세스에서 생겨난 관례이다.


감사직 또한 별로 다르지 않다. 다른 매거진을 통해 몇 번 지적한 바 있지만, 우리는 감사원을 비롯해서 각 조직 내에 있는 감사기관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다못해 비리의 온상이 되어버린 공기업에도 자체 사내에 감사실이라는 곳이 있고, 경찰서에는 그 흔한 청문감사관실이라는 곳이 있다.


본래 감사라는 것은 특히 내부 감사라는 것은 자신들이 먼저 문제에 대해 인지하고 자정하여 외부의 감사를 통해 추잡한 꼴을 보이지 말라는 설립 취지가 명백히 있다. 그렇지만, 비근한 예로 서울경찰청의 감사계를 통해 수사과정에서 일어난 비리로 처벌받은 경찰은 최근 몇 년간 내가 조사한 바로는 한 건도 없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비리와 문제로 형사처벌받은 경찰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자신이 속한 조직의 비리조차 심지어 내부에서 고발한 내부 고발자까지 나온 사건에 대해서도 쉬쉬하고 감추는 이들이 어떻게 비리 사건과 부정한 부조리 사건을 제대로 조사할 수 있겠는가? 그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누가 믿겠는가?


그것이 지금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한 문구에 의거하여 분석한, 현재의 대한민국이 혼탁하기 그지없는 이유이다. 이대로 둘 것인가? 그것들의 세상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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