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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4. 2022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며 정사를 도모하는 자는 누구인가?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시비를 가릴 줄 아는 공부부터 해라.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아야 한다.”

이 장의 내용은 뒤에 배울 ‘헌문(憲問)편’ 27장에 중복하여 나온다. 여덟 자, 아주 명쾌하고 깔끔하다. 가르침 자체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정말 없나? 본문과 똑같은 식으로 깔끔하고 명쾌하고 묻자. 그 지위에 올라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그 정사를 할 수 있나? 그 정사를 맡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정사를 맡아야 할 직위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 직위에 오르지 않은 자는 당연히 그 정사를 맡고 행할 수 있는 권한도 없고 책임도 없다. 그렇다면 공자께서 하나마나한 소리를 가르침이라고 내놓았단 말인가?


이제 그 의문을 우리가 풀어야 한다. 심지어 이 장에 대해서 주자는 아무런 주석을 달고 있지 않다. 힌트도 없는 미궁인가? 미궁에 빠진 배우는 자들을 걱정해주던 정자(伊川)가 이 장에 대해 아주 간단한 해설을 하고 있지만,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 지위에 있지 않다는 것은 그 일을 맡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人君과 大夫가 물으면 대답하는 경우는 있는 것이다.”


정자의 이 주석은 공자의 제자를 자처한 입장에서 던진 변호이다. 어떤 나라의 위정자도 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자리를 내놓으며 고견을 묻지 않았지만 정치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던 공자의 입장을 변호한 말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원문의 가르침에 입각하면, 공자는 어떤 자리에도 오르지 못했으면서 여러 가지 위정자에 대한 쓴소리와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좋게 얘기하면 조언을 나쁘게 얘기하면 참견을 했던 가르침을 설파했던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위정자들이 공자를 찾아 물었기에 대답한 것뿐이라는 변호일 뿐이다.


잠시 잊고 있었을까 싶어 다시 환기하면, 우리는 지금 이 장이 너무도 당연한 소리를 했을 리 없을 공자의 본의를 찾아내야만 한다. 결국 정자의 주석도 공자에 대한 변호였을 뿐 본문에 대한 힌트는 어디에도 없다.


언제나 범인은 현장에 돌아온다. 원문 여덟 자를 꼼꼼하게 다시 한번 살펴보자.

이 문장의 앞부분은 조건절이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이 바로 그 필수 조건이다. 그렇게까지 조건을 달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가장 먼저 그런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기에 죽비를 날리는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이제까지의 흐름에서 먼저 해석해볼 수 있다. 즉,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서 그 정사를 도모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침을 가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그랬으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라는 비난을 고려했기 때문에 정자가 공자의 변호를 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는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어떤 형태이기에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자들이 그 정사를 감히 도모했단 말인가? 우리는 한국 헌정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을 받아 청와대에서 쫓겨 나와 감옥에 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 국민 모두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무런 직위도 없는 해괴한 여자 한 명이 대통령의 뒤에서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제는 모든 국민들이 알고 있는 ‘국정농단’이라는 해괴망측한 용어까지 일상적으로 퍼져나갔다. 물론 역사상 초유의 사태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태를 너무도 많이 봐왔다. 대통령의 아들이나 형제들이 아무런 직위도 없으면서 대통령인 자기 형제와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그런 행동들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공자의 시대에 그런 세력이 어디 있었느냐고 묻고 싶은가? 조선시대 속담에, ‘열 정승보다 한 명의 중전이 더 낫다.’라는 말이 있다. 정치에 감히 역할을 할 수 없을 내시들마저 권력을 잡고 암암리에 그 권력을 행사했던 것이 고대 중국의 모습이다.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측근에서부터 시작해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막후 실세들이 등장하는 것은 공자 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모여 이룬 사회와 국가에서는 언제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십상시

늘 일어났고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당연시되거나 괜찮다고 인정받거나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임을 공자는 이 가르침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한다.


과연 그것뿐일까? 공자의 다각도 때리기 방식을 고려하면 첫 번째 언급했던 국정농단 말고도 이 장의 경고는 고위 공직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자기 아내가 판사 출신 정치인인데 자신이 고위 판사직이라고 아내의 재판을 맡고 있는 후배 판사에게 전화를 하여 해당 사건에 대해 언급을 하며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가 이 장의 회초리를 맞아야 하는 두 번째 사안에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 경우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권력의 남용으로 이루어진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고위공직자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뒷돈을 받거나 자기 가족과 친지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자리에서 처리해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에 입김을 불어대는 것이 이 경우에 정확하게 해당한다.

이 경우 역시 우리는 최근에 우리 사회를 통해 너무도 많은 사례를 목도해왔다. 나라의 안보를 지키고 이름까지 바꿔가며 국가의 정보를 수호한다는 것들이 키보드 워리어가 되어 정치꾼들의 뒤를 닦고 여론을 조작하는 일을 했다. 문제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런 정치행위를 해도 공무원의 신분으로 그래서는 안되는데, 아예 그 기관의 장이 공식적인 명령으로 그 조직원들을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였던 하급 직원들까지도 형사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이 자기 양심의 목소리를 냈어야 한다는 것이다. 꼭 국정원의 공무원이 아니라 하더라도 회사에 속해있는 이들이라면 볼멘소리를 냈을 것이다. “위에서 시키는데 그것이 양심에 혹은 헌법에 저촉된다 한들 누가 감히 그것에 반항하며 양심적 내부 고발자가 되어 사실을 바로잡겠는가?”라며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들이 있다면 딱 한 마디만 한다.

“그 입 다물라!”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사회인의 모습이고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의 천운이라며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한다고, 생사여탈권이 조직에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한다면, 당신이 빨간 완장을 차고 죽창을 든 채 부모를 비판하라고 하면 따를 것인가? 어떻게 감히 당당하게 그런 말을 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당신이 그 따위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당신이 전혀 바뀌지 않고, 사회가 바뀌지 않고 그 부정과 부패를 벌이는 자들이 당당하게 그것을 명령이라며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국정원뿐인가? 검찰은 양날의 검이다. 검찰이 정치에 이용되는 순간, 그 사회와 국가의 청렴도는 걸레가 되어버리고 만다. 검사의 최종 목표가 권력을 휘두르는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들에게 통용되는 상식이 되어버린 지금 대한민국의 검찰은 더 이상 정의구현이 어쩌구 검사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된 수사기관이네 어쩌네를 말할 권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본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이지만 그들이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에 공권력을 남용하며 그것이 마치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인 양 사용하는 순간 범죄행위가 된다는 것을 법을 공부한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하여 그들이 형사처벌을 받는 일은 결코 없다. 한 여자 검사의 말처럼, 여자를 돈 주고 사는 행위에 대해 일제 단속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검사장을 필두로 검사들이 여자들이 나오는 룸살롱에 가서 술을 마시는 행위는 그야말로 그 조직이 얼마나 썩어 들어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이 장의 가르침에서 일갈하고 있는 것처럼 독립된 한 명 한 명의 수사기관인 그들이 서로에게 수갑을 채우고 법을 집행했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고위공직자라고는 했지만, 고위공직자를 시작으로 현장의 업무를 담당하는 하위 공직자들은 최근 들어 오히려 더 심각한 모럴해저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고위공직자들의 비위행위를 어깨너머로 배우고 그들의 비위행위에 대한 실무를 담당하다 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도 못할 것 없지 않냐는 식의 ‘하면 된다!’ 정신으로 횡령과 직무유기와 업무태만을 아주 자유자재로 벌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세 번째의 경우는 더 아래로 내려가, 일반인이자 소시민이라고 자처하는 당신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경우이다. 위의 두 경우를 말하면서 일반 소시민을 자처하는 이들은 분노하고 궐기했다. 그래서 직접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왔고, 뉴스를 보며 욕을 내뱉었고, 이름만 남은 여대 중 으뜸이라는 학교에서는 아이돌의 노래를 부르며 학교의 부정한 행위를 규탄하고 단체 행동을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광화문에서 촛불 사진을 찍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가 학대를 당해 죽었다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해시태그를 SNS에 달고 눈물을 흘리며, 흥분하여 그 아이가 죽기 전에 신고한 것을 묵인했던 경찰서 앞에 가서 궐기대회를 하며 목소리를 냈던 그들은 과연 결백했던가? 이 장의 가르침대로라면 그것을 바로잡고 잘못된 일을 한 사람들을 벌하고 그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직위에 앉아 있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 직위에 앉아 있지 않은 아이 엄마들이나 아저씨들이 함부로 그 자리에 있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하고 참견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발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일단 매일 아침 <논어>를 풀어 해설해주면서 이 사회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나부터도 그래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럴까? 아니다. 이 장의 가르침은 그런 단순한 말장난으로 덮기에는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다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번째의 경우로 해석되는 이 장의 심오한 의미는, 제대로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하거나 논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에 다름 아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정확한 정보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정보가 너무 넘쳐나서 그중에서 쓰레기가 아닌 가짜 정보를 걷어내는 것만도 너무도 힘겹다. 제대로 된 정보를 구분해내는 것은 이제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워지고 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 SNS에 앞뒤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비슷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어떤 사람을 매장시킬 정도로 매도하는 글을 올리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 글에 댓글을 달고 그를 비난한다.


이와 같은 일은 리 주변에서 수시로 터진다. SNS나 특정 커뮤니티, 혹은 그 무시무시하다는 맘 카페 등등에 뭔가 다툼이 될만한 사안에 대해 누군가 글을 올리면 사람들은 그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 글에 대해 당연히 전제가 되어야 하는 사실관계 검증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너무도 착하고 순진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의 말을 기본적으로 믿고 보는 것인지 그들은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 글에 같이 흥분하고 그들을 욕하곤 한다.


심지어 그 글이 사실이 아니거나 핵심이 되는 사실관계를 쏙 빼고 글쓴이가 자신의 입장만을 포장하여 가해자인 자신을 피해자로 코스프레했던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그것에 대해 수습하거나 그것에 동조했던 자신의 무식한 경거망동에 대해 전혀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그 상황에 대해 그 짧고 논리적 맥락이 허술하기 그지없는 글을 읽고서 같이 흥분하고 극단적인 욕설이 담긴 댓글까지 달아주며 동조한다. 그들은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 그대로 자신들을 국정농단에 흥분하는 그저 정의를 바라는 소시민이라는 가면으로 포장하고 모니터 뒤에 숨어 키보드를 두들긴다.

왜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가?

이 장의 내용은 공자가 이 말씀을 하셨을 수천 년 전의 중국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이 양심의 숨구멍을 쑤셔댄다. 그들은 그것을 책임져야만 하는 자리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책임은 방기한 채 아무렇지도 않게 익명성으로 위장하고서는 사이버 칼을 빼어 들고 망나니 춤을 추며 걸쭉하니 공중에 술을 뿜어댄다.


기본적인 원인이 아무리 제대로 된 글을 읽거나 쓰지 않는 문해력의 심각한 부족에서 오는 오독이고 오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는 너무 심하다. 그들의 그러한 성향 때문에,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영화 속의 언론사 주필이 말했던 것처럼 속여서 선동하기 쉽고 그렇게 기만당했다는 사실조차도 빨리 잊어버리는 ‘개돼지’ 취급을 받는 것이다.


말도 못 하는 아이가 죽었다며 흥분해서 달려간 경찰서 안에는 그들의 남편과 그들의 오빠와 남동생이 대강 신고를 받고 조사대상들이 적당히 찔러주는 금품과 향응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대접을 받고 범죄가 되는 일을 덮는다. 경찰이 수사 종결권을 갖게 된 것은 검찰이 그간 그 역할을 하며 너무 부정한 짓거리를 많이 하고 권력이 분산되지 못했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그것을 가져간 경찰은 1년이 채 넘기도 어렵게 검찰이 했던 그 짓거리를 그대로 학습하여 행하고 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바닷속에 잠겨 들어가는 배를 보며 자기만 살겠다고 팬티바람에 뛰어나온 선장이나 바다의 경찰이라는 권력을 으스대던 그 많은 실무자들이 나눈 무선과 전화통화를 들어보라. 그들이 당신의 아들이고 조카이며 당신의 남동생이고 당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이 당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느냔 말이다.


내가 쓴 <누가 이 사회를 좀 먹고 있는가>라는 매거진에, 한국의 대표적인 공기업이라는 한전의 말 같지도 않은 행위에 대해 언급한 사건이 있다.


https://brunch.co.kr/@ahura/589


브런치의 작가랍시고 아이들의 아빠랍시고 그 회사에 다닌다고 작가 소개에 당당히 지부까지 언급한 이에게 그 공기업에 다니는 사람 입장에서, 사회에 참여적이고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며 글을 계속 발행하는 당신의 입장에서 당신 회사의 부조리한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었다. 그는 내내 회피하고 도망 다니다가 자신은 그 사건의 담당자도 아니고 그것을 해결할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아 안타깝지만 도울 방법이 없다며 자신이 그런 일을 보게 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에 발린 답글로 응대해왔다.


어디서 개가 짖는 소리를 내는가? 이 장의 가르침은 지금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같잖은 핑계로 면피할 때 쓰라고 일러주는 만병통치 문구가 아니다.


뭔가 할 겨를이 없다고 핑계 대는 자들이 겨를이 생겨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그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하는 자는 그 자리에 앉게 되더라도 잘못을 바로잡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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